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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5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테니스 정윤성, 남자프로테니스 챌린저 복식 우승
한국 남자 테니스 기대주 정윤성(의정부시청)이 올해 첫 남자프로테니스(ATP) 챌린저 대회 복식 정상에 올랐다.
복식 세계 랭킹 160위인 정윤성은 인도 벵갈루루에서 열린 ATP 벵갈루루오픈 챌린저 대회(총상금 13만 달러) 복식 결승에서 대만의 쉬위시우(복식 랭킹 187위)와 우승을 합작했다. 아니루드 찬드라세카르(복식 171위)-비제이 프라샨트(복식 222위·이상 인도)를 세트 스코어 2 대 1(3-6 7-6<9-7> 11-9)로 눌렀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해 가톨릭 236년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교구 미사 중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지역 사회로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16개 모든 교구가 미사를 중단했다. 한국 천주교회 236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따르면 전국 16개 교구 중 14개 교구가 미사 중단 조처를 한 데 이어 이날 제주와 원주교구가 미사 중단에 동참했다.
2020년 이집트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 사망(91세)
2019년 빙상 스타 이영하 세상 떠남(63세)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 한국 종합 7위(금 5 은 8 동 4),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동계 올림픽 대회로 2018년 2월 9일부터 2월 25일까지 강원도 평창과 강릉, 정선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93개국에서 2,925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역대 최대규모로 치러진 대회로 동계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 수가 100개를 넘어섰다. 노르웨이가 금메달 14개, 은메달 14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1위를 차지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5개 종목에 146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4개를 획득, 종합 7위에 올랐다. 특히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쇼트트랙은 물론 스피드스케이팅과 스켈레톤, 봅슬레이, 컬링, 스노보드 등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여 동계 스포츠의 고른 발전을 이룬 대회로 평가된다.
2015년 세종시 편의점 괴한 총기난사 사건
2015년 2월25일 오전 세종시 장군면 금암리 한 편의점과 그 옆 가정집에서 경기 수원에 사는 강모(50·무직)씨가 전 동거녀 김모(49)씨의 가족 등 3명에게 엽총을 쏴, 김씨의 아버지(74)와 오빠(50), 김씨의 동거남 송모(52)씨가 숨졌다. 범행 직후 편의점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강은 범행 현장에서 4㎞ 정도 떨어진 금강변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세종경찰서에 따르면, 강씨는 이날 오전 8시 10분쯤 이 편의점 인근 상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 상가 옆 건물엔 전 동거녀 김씨의 집이 있었다. 강씨는 상가 건물 근처에서 출근하려고 승용차 운전석에 타고 있던 김씨 오빠의 머리에 엽총을 쐈다. 이어 김씨 집으로 가 아침 식사 중이던 김씨의 아버지에게도 총을 쐈다. 그 직후 바로 옆 편의점으로 이동해 김씨와 사실혼 관계인 송씨를 향해 총을 쐈다. 이후 준비한 시너를 편의점에 뿌려 불을 지른 뒤 타고온 싼타모 차량을 타고 달아났다. 강씨가 쏜 총에 맞은 세 명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모두 숨졌다. 강씨의 범행은 김씨의 조카가 112에 신고해 알려졌다.
달아난 강씨는 오전 10시 5분쯤 이 편의점에서 4㎞ 정도 떨어진 도남삼거리 인근의 금강변 갈대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머리에는 총상이 있었다. 시신 옆에는 엽총 1정이 있었고, 다른 엽총 1정은 차 안에 있었다. 경찰은 “강씨가 실탄 37발 중 5발을 쐈고 나머지는 회수됐다”며 "강씨가 엽총으로 자살한 것 같다"고 말했다.
2013년 제18대박근혜 대통령 취임
2010년 헌법재판소, 사형제 '합헌' 결론
2010년 2월 25일 헌법재판소는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70대 어부 오모씨가 낸 사형제도에 대한 위헌심판 사건에서 합헌(合憲) 결정을 내렸다.
이날 선고에서는 재판관 9명 가운데 이강국 헌재소장 등 5명이 합헌 의견을, 조대현 재판관 등 4명이 위헌 의견을 내면서, 5대 4로 합헌 결론이 나왔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헌법이 보장한 생명권은 기본권 중의 기본권으로서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면서도 “우리헌법은 110조에서 사형제도를 인정하고 있으며, 특정인간의 생명권 역시 타인의 생명권 보호나 중대한 공익을 위해 제한하는 것은 헌법의 테두리안에서 허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헌재는 또 “사형제도가 극악한 범죄에 대한 예방과 정의의 실현, 재발 방지 등을 목적으로 하는 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사형은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기 때문에 헌법 위반이며, 가석방이 없는 종신형 등 대체입법을 통해서도 형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헌재는 13년여 전인 1996년 11월에도 사형제도의 위헌여부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사형제도는 극악한 범죄 예방 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요악(必要惡)’이며, 사회·문화적 여건이 성숙하기 전까지는 폐지할 수 없다는 이른바 ‘시기상조론’을 폈었다.
한국에선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30일 23명이 처형된 이후 단 한건의 사형집행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현재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59명의 사형수가 수감돼 있다.
세계적으로 사형제도가 완전 폐지된 나라는 프랑스·독일 등 92개국이며, 미국·일본 등 78개국이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10년이상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 36개국 가운데 하나다.
2009년 터키 여객기 불시착 60여명 사상
2009년 2월 25일 오전 10시 45분쯤(현지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국제공항 인근 들판에 터키항공 소속 보잉 737 여객기가 불시착, 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항공기는 터키의 이스탄불을 떠나 스키폴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던 중 활주로 인근 들판과 충돌해 기체가 동강났다.
터키 정부는 사고 직후 승객 137명 중 9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했다고 말했다. 사고 원인은 즉각 확인되지 않았지만 테러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이명박 제17대 대통령에 취임
이명박 대통령은 25일 오전 11시 국회의사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임기 5년의 제17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대통령 취임식은 국내·외 귀빈과 일반국민 등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선서, 군악대 의장대 시연, 예포 발사, 취임사, 축하연주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취임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2개의 대형 태극기와 취임식 엠블럼으로 뒤덮여 있었다. 취임식에 초청받은 국민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오전 7시부터 속속 입장했다. 이날 참석한 5만여명의 국민들은 이 대통령이 취임 연설을 하는 도중 박수를 38차례 보냈다.
청와대 경호팀은 이날 새벽부터 검색대 100여 개를 설치해 비표를 일일이 확인하며 삼엄한 경비 활동을 펼쳤다. 국회 앞 마당에는 대형 LED 스크린 3대가 설치돼 연단에서 떨어진 참석자들도 취임식 장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날 단상에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싶다는 꿈을 담은 편지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내 초청된 초등학생 이담현양, 신기술 특허로 받은 특허료 200억원 이상을 기부하기로 한 송명근 건국대 의대 교수, 서해교전 이희완 대위, 스포츠 스타 박태환·김연아씨 등 국민대표 50여 명이 자리했다. 개그맨 김제동·김학도씨와 KBS 아나운서 최원정씨는 취임식 전에 열린 사전 행사 사회를 맡았으며, 가수 김장훈씨가 ‘우리 기쁜날’을 부르기도 했다.
오전 10시55분쯤 이 대통령 부부가 국회 정문 앞에 도착했다. 이 대통령은 정장 차림에 연두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김윤옥 여사는 한복 차림이었다. 이 대통령 부부는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국회 정문에서 의사당 앞까지 청사초롱을 든 남녀 어린이들의 안내를 받아 걸어 들어왔다.
오전 11시 의원회관과 국회도서관 옥상에서 울려 퍼진 팡파르와 함께 새 대통령의 취임식이 시작됐다. 개식 선언에 이어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한덕수 국무총리의 식사, 이 대통령의 취임선서 순으로 이어졌다. 이어 이 대통령이 취임 연설을 할 때는 간간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 때문에 당초 25분으로 예정했던 연설 시간도 36분으로 11분이 길어졌다.
취임식이 끝나자 이 대통령 부부는 연단에서 내려가 고향으로 떠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를 승용차까지 배웅했다.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환한 표정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서 취임식 연설 때 당초 원고에 없이 “특히 지난 5년간 수고한 노 대통령에게 박수로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박수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승용차가 출발한 뒤 중앙통로를 통해 국회 정문까지 행진했다.
2007년 ‘피고 유관순’ 1심 재판 기록 공개
‘피고 유관순, 징역 5년.’ 1919년 3월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의 1심 재판 형량을 기록한 자료가 2007년 2월 25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천안지역 향토사학자 임명순씨가 국가기록원에서 찾아 공개한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는 일제가 충남 천안의 병천·동면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의 체포 사유와 재판 결과를 간략히 정리한 문서다.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는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일제의 재판절차는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제도로 운영됐으며, 유관순 열사 관련 자료는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만 남아 있었다. 유 열사는 고등법원 항소는 포기했다.
유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의 정상적이지 못한 재판판결에 대한 불복으로 판결 즉시 복심법원에 상소했다. 이에 대해 이정은 수석연구원은 “유관순 열사는 1심 재판에서 의자를 집어던지며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강력히 주장해 가중 처벌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번에 발굴된 ‘형사사건부’는 유 열사가 치열하게 법정투쟁을 벌였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유 열사의 일대기를 수정·보완할 귀중한 문서”라고 말했다.
2006년 이규태 조선일보사 전 고문 별세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를 22년 11개월간 연재해온 이규태(李圭泰.73)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2006년 2월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조선일보에 ‘명월관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의 ‘이규태 코너’를 썼다. 이는 한국 언론 사상 최장기 연재기사 집필 기록이다.
이 전 고문은 1933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전주사범과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조선일보 기자(수습 2기)로 입사해서 2004년 8월 31일 퇴임했지만 주 2~3회 ‘이규태 코너’를 계속 집필했다. 이 전 고문은 ‘한국인의 의식 구조’ 등 12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한국신문상, 서울시문화상, 연세언론인상,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2003년 청와대 경제수석실 35년 만에 폐지
한국의 ‘경제권력 1번지’로 군림하던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2003년 2월 25일 0시를 기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청와대 조직 개편에 따라 정책기획수석실로 통합돼 독립적인 조직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 후 경제수석비서관 대신 경제보좌관(차관급)이라는 직제가 새로 생겨 인원과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창설한 경제수석실의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의 연속이었다. 역대 경제수석들은 대부분 차관급이었지만,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특성상 경제부총리보다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곤 했다. 5∼6공 때는 경제수석을 가리켜 ‘부통령’이란 말까지 나온 적도 있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그동안 대통령과 경제부처를 연결하며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경제수석을 지냈던 한이헌씨는 “박정희 대통령 때는 경제수석들이 국가 프로젝트를 직접 맡는 등 경제성장을 주도했다”면서 “문민정부부터는 경제수석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파워가 막강했던 탓에 경제수석들의 진퇴도 뚜렷했다. 장관으로 승진하는 등 영전 케이스도 많았지만 스캔들과 실정(失政)의 책임을 지고 중도하차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1968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김학렬 경제1수석, 정소영 경제2수석을 각각 임명하면서 처음 탄생했다. 이날의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폐지로 역대 경제수석은 35년간 27명으로 그 막을 내렸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제16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
2003년 2월 25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오른손을 든 채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되는 선서를 했다. 이로써 제 16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이른바 운동권 가요로 불리던 `상록수`가 식장에 울려 퍼졌다.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가 기타를 직접 치며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방송광고로 만들어 국민들의 감성에 호소하기도 했다. 지구를 상징하는 둥근 형태로 만들어진 중앙단상 옆 왼쪽과 오른쪽 측면 `귀빈석`은 과거와 달리 50여명의 국민대표의 차지가 됐다. 왼쪽 귀빈석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첸치천(錢其琛) 중국 부총리 등도 앉았고 노 대통령 내외가 앉은 중앙 단상에는 전직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등이 자리했다. 재계에서는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 등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평화와 번영과 도약의 시대로`라는 제목의 취임사에서 "새정부는 개혁과 통합을 바탕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나갈 것"이라면서 "이러한 목표로 가기 위해 저는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 대화와 타협, 분권과 자율을 국정운영의 좌표로 삼고자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한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거듭 강조한 뒤 한· 미동맹에 근거한 점진적· 긍정적 발전관계 의사를 시사했다.
노 대통령은 대북정책과 관련된 `한반도 평화·번영정책`의 원칙으로 `대화를 통한 해결` `상호신뢰 우선 및 호혜주의` `남북 당사자 원칙에 기초해 원활한 국제협력 구축` `대내외적 투명성 고양 및 국민참여 확대` `초당적 협력`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끝으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면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하고 원칙을 바로세워 신뢰사회를 만들자"고 말했다.
2003년 르몽드 紙 `안티 르몽드` 출판정지 신청
1999년 미국의 핵화학자 시보그 사망 -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들 분리로 노벨화학상 수상
1998년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에 취임
1997년 한국-칠레, 과학협력협정 체결
1995년 북한 정치관료 오진우 사망
1994년 북한과 미국, 핵사찰을 골자로 한 뉴욕회담 타결, 팀스피리트훈련 중단 합의
1993년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
1993년 황인성 제25대 국무총리 임명 가결
1993년 청와대앞길과 인왕산이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과 동시개방
1991년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
1990년 니카라과 대통령선거에서 차모르 여사 당선
소모사 일족에 의한 독재정권이 타도된지 11년이 지난 1990년 2월 25일 나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정권 2번째의 선거를 실시했다. 결과는 산디니스타의 지도자 오르테가가 41%를 획득한 반면 14개의 당으로 구성된 전국야당연합(UNO)의 후보 차모르가 55%의 지지를 획득해 중미 처음으로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산디니스타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긴 했지만 행정운영의 미숙과 마르크스주의의 고집, 게다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정부세력(콘트라)과의 제한적 전투와 경제피폐 등이 원인이 되어 이번 선거에서 패배했다.
예상과 달리 오르테가는 선거패배를 인정했다. 1978년에 암살된 개혁파 신문사주의 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차모르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오르테가를 추방하라는 미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르테가의 동생을 국방장관으로 기용해 국민화합정책을 전개했다.
1988년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에 취임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또 이날 전문과 본문 130조, 부칙 6조로 된 새 헌법이 발효됐다.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민주당의 김영삼, 평민당의 김대중, 공화당의 김종필 후보 등 이른바 `1노 3김`간의 대결 끝에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총유효투표의 36.6%에 해당하는 8백28만여 표를 획득, 차점자인 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약 1백90여 만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8년 이현재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8년 제6공화국 출범
1986년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 하와이로 망명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1986년 2월 25일 밤 측근들과 함께 미국의 클라크공군기지를 출발,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로써 20여 년에 걸친 ‘마르코스 왕국’은 붕괴됐다. 마르코스는 국내의 대규모 반정부운동과 공산게릴라, 미국무성의 압력 등으로 지난 2월 7일 17년 만에 본격적인 대통령선거를 실시한 바 있다.
상대후보는 1983년 공항에서 피살된 베그니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였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항의와 엔리레 국방장관과 라모스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부의 항명, 오전에 있었던 아키노의 대통령 취임 등으로 마르코스는 필리핀을 떠나야 했다.
마르코스의 망명과 아키노 정권 탄생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대통령관저 부근에 모여 ‘피플 파워’에 의한 독재자 타도에 환호했다.
1986년 코라손 아키노 여사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
1986년 2월 25일. 필리핀 국민이 20여년에 걸친 독재정권으로부터 빼앗겼던 자유와 권리를 되찾았다. 혼란이 계속되고 있던 필리핀에서 이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임시정부를 수립, 대통령으로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마르코스 필리핀 전 대통령은 이날 밤 부인 이멜다 여사 등 가족 ㆍ측근들과 함께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로써 20여 년간에 걸친 ‘마르코스 왕조’가 붕괴됐다. 마르코스의 망명과 아키노 정권탄생을 접한 시민들은 대통령궁주변에 모여 ‘피플 파워’에 의한 독재자타도에 열광했다.
아키노 여사는 1983년 3월 필리핀 마닐라공항에서 마르코스 전 독재정권의 흉탄에 쓰러진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부인으로 1972년 남편 아키노가 마르코스에 의해 투옥되자 8년간 옥바라지를 했는데, 이 시기에 남편과 야당지도자들간의 교량역할을 하면서 정치를 배웠다. 그러던 3년전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정치가로 변신해 반(反)마르코스 대열에 가담하게 된다. 1985년 야당의 단일 대통령후보로 추대되어 반마르코스열풍을 일으키며 이듬해 2월 대통령선거에 도전하지만, 마르코스의 조작에 의해 부정부패로 물든 선거에서 패배한다. 이후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 일부 군부세력과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이날 필리핀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경제난 등 계속적인 소요를 통제하지 못해 결국, 1992년 5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라모스에게 패배한 후 대통령직을 인계했다
1984년 한국 테니스선수단 8명, 데이비스컵 예선참전위해 사상 첫 중국입국
1984년 서산 물막이 공사 성공
1984년 정치활동 피규제자 202명 해제(2차 해금)
1983년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사망
1983년 정치활동 피규제자 250명 해제(1차 해금)
1983년 북한 이웅평 상위, MIG19기 몰고 귀순
1983년 2월25일 북한 이웅평 상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했다
오전 10시30분 평남 개천 비행장을 이륙한 뒤 편대에서 이탈, 시속 920km의 전 속력 으로 남하 했다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를 100m 아래로 낮췄다
해주 인근 상공에서 휴전선을 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분, 자유를 향한 목숨 건 도박 이였다
그가 몰고 온 비행기는 남한에서 실체를 보지 못한 북한의 주력기였다
그의 귀순은 군 당국이 북한 공군의 실태를 파악하고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데 크게 도움 되었다
그는 귀순 후 1년간 남한사회 적응 과정을 거친 뒤 공군 소령으로 임관됐다
귀순 이듬해에는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연애 결혼에 성공,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1996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나 이듬해 간경화로 쓰러졌고 2002년 5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48세로 숨졌다
1982년 한국, 남북한 고위대표회담 제의
1981년 대통령선거인단, 제12대 대통령에 전두환 선출
1980년 수리남 쿠데타, 민족군사평의회가 전권장악
1975년 김성곤씨 사망
1975년 서울대 종합화계획 확정발표
1965년 공해방지법 발효
1964년 무하마드 알리, 세계헤비급 챔피언 획득
1964년 2월 25일 도전자 케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챔피언 리스톤을 7회 TKO승으로 이겨 세계헤비급챔피언에 올랐다. 클레이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프로 전향후 19전 무패, 16KO승의 성적으로 처음 도전해 세계헤비급 왕좌에 올랐다.
46명의 스포츠 기자중에 클레이가 거인 리스톤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3명 만이 경기를 관전했다. 전 챔피언 패터슨을 2번이나 1라운드에서 KO승을 한 리스톤에 압도적인 인기가 몰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리스톤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고 허풍을 떠는 22세의 신예 클레이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클레이는 세계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해 이름도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9차방어 성공 후 1967년 "나는 베트콩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며 월남전 참전 징집을 거부, 선수자격이 박탈되고 챔피언 벨트도 빼앗겼다.
1971년 링 복귀후 조 프레이저에게 타이틀을 도전, 실패했으나, 1974년 10월 프로복싱 최고의 펀처 조지 포먼을 KO로 잡고 재탈환에 성공. 1978년 2월 미국의 레온 스핑크스에 판정패한 후, 그해 9월에 스핑크스로부터 타이틀을 되찾아 3번째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1964년 미국 제트여객기 뉴올리언즈호수에 추락 58명 사망
1963년 김종필씨 돌연 외유 출발
1961년 공민권 제한 자동케이스 명단발표 혁신계좌파 민주자주통일중앙협의회 구성
1958년 주한미군 장병의 한국소년 린치사건 발생
1958년 미국, 통일아랍공화국 승인
1956년 흐루시초프, 제20차 소련 공산당대회서 스탈린 비판 연설
제20차 소련 공산당대회 마지막날인 1956년 2월 25일 늦은 밤, 흐루시초프가 비밀보고서를 들고 연단에 섰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어렵사리 당 제1서기에 올라 그동안 소련을 짓눌러온 악법들을 개폐(改廢)했던 흐루시초프였던지라 당 간부들은 스탈린의 노선 중 일부가 수정될 것으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보고서 제목 ‘개인숭배와 그 모든 결과에 대하여’. 먼저 스탈린의 권력욕과 포악한 성격을 경계한 레닌의 ‘유서’가 읽혀지자 대회장 곳곳이 술렁거렸지만 흐루시초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4시간이나 이제까지 신격화된 스탈린을 조목조목 예를 들어가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1937년 제17차 당대회 때 선출된 당중앙위원 139명 중 98명이 총살됐다는 비밀도 공개됐다. 보수파는 경악했지만 이미 흐루시초프 사람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인정해야 했다.
입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스탈린 격하 발언이 6월에 미국무성을 통해 발표되자 그동안 스탈린을 무오류의 지도자로 인식해왔던 각 국의 공산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동구권의 충격이 커 폴란드에서 정변(1956년 6월)이 일어났고 헝가리에서는 반소봉기(1956년 10월)가 폭발했다. 소련에서도 약 800만명의 정치범이 풀려났고 스탈린의 사체도 레닌묘로부터 철거됐다. 훗날 고르바초프는 흐루시초프를 ‘역사의 과오를 대면하고 이해했던 최초의 사람’이라며 이 사건을 ‘권위주의 체제에 첫 타격을 가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했다.
1954년 프랑스 건축가 페레 사망
1954년 캐시미르국회, 인도에의 통합을 가결
1948년 체코 공산정부 수립
1942년 독립운동가 송병조 선생 사망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신암 송병조 선생이 1942년 2월 25일 사망했다. 1877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한 선생은 한학을 배우다 30대 중반에 서북지역 독립운동 본거지인 평양신학교에 입학, 민족의 독립의지를 키웠다.
이어 1914년 목사가 되어 향리인 용천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1921년 안창호 선생의 주선으로 임시정부에 참여,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과 의장을 지냈다. 또 한국독립당을 결성,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애국단체를 규합해 1940년 광복군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선생은 1941년 중경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재선출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42년 신병으로 서거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7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41년 영국 삽화가 존 테니얼 사망
1913년 미국 누진소득세 채택
1910년 청(淸), 티베트에 무력 진주, 달라이 라마 13세 인도로 망명
1905년 임진강 철교 개통
1901년 카네기철강, J.P.모건에게 매각
1901년 2월 25일,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금융왕'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카네기 철강을 매각했다. 이 매각 협상으로 세계 최고 자선사업가와 세계 최대 재벌이 탄생했다.
카네기철강의 매각 전에는 미국의 철강업계가 주요 8개사를 중심으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모건은 금융과 철도 등에서 쌓은 부를 기반으로 서서히 철강 쪽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당시 모건은 소규모의 철강회사를 갖고 있긴 했지만 철강업계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철강시장의 미래를 누구보다 밝게 본 모건은 철강업 전체의 합동을 꿈꾸고 있었다. 그 첫걸음이 카네기 철강이었다. 카네기는 기업합병보다는 경쟁을 통한 성장을 중요시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회는 곧 찾아왔다. 카네기철강이 자금난을 겪게 된 것이다. 1900년 12월 모건은 카네기에게 협상의 손길을 내밀었다. 의사를 타진한 모건은 마침내 카네기의 쉽지 않은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직접 카네기를 방문하며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비공식으로 진행된 협상은 15분만에 타결됐으며 매입 대금은 4억 9,200만 달러였다.
카네기는 회사를 매각한 대금으로 자선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모건은 록펠러로부터 철광석 회사를 7,500만 달러에 매입하는 등 철강 관련 기업들을 합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3월, 당시 미국 철강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초대형 철강회사 'US 스틸(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회사)'이 설립됐다. 자본금 14만 달러의 세계 최초 빌리온 달러 회사였다. 이는 당시 전 세계 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었다. 주당 38달러에 공모한 주식은 곧 55달러로 치솟을 정도였고 창립 첫해에만 9,000만 달러의 순이익을 냈다. 2-세기 새로운 철강왕의 탄생이었다.
1899년 세계 최초의 통신사인 로이터 통신사의 창설자 로이터 사망
1897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던 조선 고종, 1년 만에 덕수궁으로 귀환
1866년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브로체 출생
1841년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 출생
1713년 프로이센의 초대 왕(1701~13 ) 프리드리히1세 사망
1400년 이방원이 1차왕자의난을 통하고 2차 왕자의 난을 정리한후 왕세자가 된날.
이방원은 고려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자 할때 많은 공을 세우게 되었으나 아직 왕권이 약한 나라에서 이방원은 공신에서 제외되었고 친형제중에 아무도 세자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도전일파에서는 이방원을 끝없이 견제하며 정치적으로 탄압하게 되자 이방원은 1차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색을 처리하고 세자인 막내등을 살해하고 둘째형을 세자로 세운다. 이렇게 해서 왕이된 정조는 병약하여. 결국은 이방원이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이때 넷째형이 다시 2차왕자의난을 일으킨다. 2차왕자의 왕을 이방원이 정리하고 결국에는 세자가 된 날이 바로 1400년 2월 25일이다.
그리고 이방원은 후에 형인 정조로부터 왕위를 계승하여 태종이 된다.
육룡이 나르샤를 떠나서 실제 기록되어있는 이방원은 고려말 선죽교에서 정몽주을 살해하기도 하지만 훗날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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