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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태권도 근현대사 20편 - 지도관 전상섭 4편(마지막 회)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조선연무관 권법부의 모체 “지도관”
조선연무관은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강도관(講道館) 조선지부였다. 종로 수송동에 있던 강도관은 광복 이후 이경석, 최영호 강낙원 등이 소공동으로 이전했다.
1943년 일본에서 귀국해 서울 경산중학교와 경성전기학교 체육교사로 지내던 전상섭은 이경석의 허락을 받아 조선연무관 권법부를 설치했다고 전한다.(서성원 2007, 허인욱 2008) 창설 당시 조선 연무관 당수부로 개설(1946. 3. 2)로 표기 되어 있지만, 그 후 권법부로 많은 기사에 실린 점을 보면 당수부에서 권법부로 개칭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2010 허인욱)
일본에 유학을 가기전 전상섭은 이미 상당한 무술을 배웠음에도 일제 강점기에 도장을 개관하려면 명칭을 당수도로 사용했던 것은 어쩔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 자를 보면, 1회 모서(冒暑, 더위극복) 수련과 제1회 심사 등 관원 친목 야외수련회가 거행되었다고 자세히 전한다.
당수 15명의 수련자가 승급을 하였다
중급 배영기, 전일섭(동생), 엄기윤, 김복남, 서광준, 정진봉, 이종우(국기원 부원장)
초급 유명제, 곽상?, 박종윤, 이경봉, 장기돈, 김광수, 홍창길, 이훈영
(동아일보 1946.07.23.)
특히 1949년 조선연무관 권법부 윤쾌병(한무관 창설자)이 전임사범으로 영입한다.(서성원, 2007) 하지만, 현대 태권도의 원류 오대관 형성과 사적 의의에 관한 연구(김영선, 2018)에서 윤쾌병이 온 시기는 1950년 3월 쯤으로 표기되어 있어 설득력이 더 있어보인다. 이는 좀더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는 니혼(日本)대학에서 병리학을 전공한 학자로 한국에서 서울대 수의과교수와 건국대 축산대학장 대한수의사회 회장, 그리고 가장 유명한 한국야쿠르트 초대사장을 역임했다.(대한수의사회 홈페이지)
토오야마 간켄(遠山寬賢)의 수도관(修道館)에서 카라테를 전수받고 토오쿄오에 한무관(韓武館)을 세워 관장으로 활동하다 전상섭의 영입으로 조선연무관 권법부에 부임한 그는 당시 가라테 7단이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조력자가 있는데 그는 제일 조선인 청년단장까지 지낸 조영주라는 가라테 실력자. 당시 50대의 노신사였으며, 한국 전쟁 전까지 전상섭과 조선연무관 권법부를 이끌었다고.(서성원 2007)
조선연무관 권법부 일부 회원들이 북한군에 부역한 까닭에 정치적으로 곤란해지고 전상섭이 한국전쟁이후 국군포로가 되어 자연스럽게 조선연무관도 해체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이 또한 더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종우는 당시 함께 동문수학하던 이교윤(한무관)과 갈등으로 서울 종로구 창신동 강문고등학교 공터에 24인용 텐트를 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서성원 2016). 한국체육관으로 장소를 옮길때 당시 종합 체육관이었던 한국체육관의 부관장인 이상묵의 배려로 조선연무관은 명칭을 공수도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허인욱 2007)
장소를 옮길때 당시 종합 체육관이었던 한국체육관의 부관장인 이상묵의 배려로 조선연무관은 명칭을 공수도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허인욱 2007)
1년 만에 200명 이상의 수련생들이 들어왔지만 이종우와 이교윤은 이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다.
조선연무관을 윤쾌병에 넘기자는 이종우의 제안을 이교윤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체육관의 부관장 이상묵이 중재를 했지만, 이를 이교윤이 거부하였고 이상묵은 휴관을 요구하였고 이후 지도관과 한무관으로 나누어졌다.
이종우는 윤쾌병을 지도관 1대관장으로 영입하고 조선연무관의 계승하는 지도관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이 시기를 두고 논란이 많지만 1954년 12월 24일 재개관이라는 동아일보 기사있고 이때 이종우와 이병로가 주축이 되었고, 이교윤이 이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지도관 출발시점이 여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허인욱 2007)
지도관의 세력은 전북 전주를 중시으로 그 관세를 넓혀 나갔다. 전일섭(전산섭의 동생)은 지관을 1947년 전북 군산에 개관했고 6.25를 거친후 1955년 전주에 전북체육관을 개관 군산, 이리(익산), 남원 등 전북 지역의 많은 곳을 지관으로 넗혀 나갔다.
특히 지도관은 겨루기 중심으로 수련을 하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태권도가 가라테와 다른 기술체계로 발전한 것은 지도관의 수련방식에서도 알 수가 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가라테는 형 위주의 수련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대한태권도협회 창립일은 1961년 9월19일로 전일본가라테연맹(JFK)의 1964년 10월1일(JF 전일본가라테연맹 홈페이지) 보다 3년이나 빠르다.
전일본 가라테연맹 홈페이지(JFK)
이것은 우리 태권도가 가라테의 형태가 아닌 다른 무술로 발전하고 있어다는 것을 기술적으로 증명한다.
지도관의 이런 수련체계는 이후 1960년대 태권도의 통합 과정에서 우리의 태권도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도관 관장은 1대 윤쾌병(윤희병), 2대 이종우, 3대 배영기, 4대 이종우, 5대 이승완, 6대 안학선으로 이어지고 훌륭한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태권도 관으로 아직도 태권도계에서 많은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가라테는 일본의 고유 무술이 아니다. 일본 역시 류쿠왕국(현 오끼나와)이 일본으로 편입되기전 사용되었던 왕국무술을 이토츠 야츠히네와 후나고시, 토야마 간켄, 미야기 초춘등의 무술가들에 의해 전승되고 학교체육으로 다시 탄생되어 지금의 가라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당수도는 일본의 무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아닌 외국의 무술들을 통털어 사용되었던 당시의 용어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1894)을 시작으로 제국주의 국가건설을 내세웠던 일본은 중국과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에 당수는 중국과 유사하다는 많은 무술가들의 여론에 후나고시 기친이 공수도로 개칭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의 태권도는 가라테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에 어쩔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까지 읽어주신 독자분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다음번 연재는 더 공부하고 연구하여 시대별 태권도 근현대사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