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변성현이라는 분이 연출한 ‘킹메이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참모였던 엄창록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영화화한 작품인데 혼탁한 세상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한 인물 ‘김운범’의 역할로 설경구라는 배우가 연기하고 그의 옆에서 탁월한 전략가로 대통령을 만들어가는 인물인 ‘서창균’으로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열연을 펼친 영화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통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김운범’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며 대중적인 인지도로 어딜가든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입니다. 반면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가치관보다는 일단 권력을 잡고 승자가 되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며 선거의 승자가 되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지만 항상 음지에 있고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항상 상부상조하며 하나되어서 권력을 만들어낼 것같은 이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가치관의 차이로 갈라지게 됩니다. 정치세계속의 빛과 그림자의 본질을 잘 드러내면서 대한민국의 정치, 아니 더 나아가 전 세계 권력자들속에 숨겨진 권력과 정치의 야욕에 대해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줍니다. 최근 20대 대선정국속에서 지역유세를 돌아다니며 온갖 공약을 쏟아내는 후보들을 보면서 이 영화속의 인물이 대중 앞에서 온갖 공약을 통해 호소하는 정치인과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둠 속에서 온갖 책략을 꾸미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이것이 정치이구나’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만드는 정치영화입니다. 현실에서 권력을 잡고 권력을 유지하며 벌어지는 암투와 그로 인해 국가의 혼란함과 무력충돌의 상황들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 대선 유세상황과 함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을 보면서 “정말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 권력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의 악독한 모습을 볼 때 참 인간이 무섭다”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따라가며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적 성공을 추구할 때 진정한 인간의 삶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지 못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인간의 참 인생목적을 가르쳐주시고 진정한 의미의 인간 승리, 인간 성공에 대해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진정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십니까? 세상적 성공을 원하며 현세적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가십니까? 참 인간으로서의 성공을 기대하며 영원한 성공, 인간의 참 가치로서의 성공을 원하며 살아가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참다운 인생성공, 인생의 의미속에서 참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예수님의 성공 첫째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권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7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제자들이 가지는 마음속의 욕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뭘 해주실 것인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이 구하는 것을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시는 지’ 묻자 방금 읽은 구절의 요구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여러 속담중에 본질보다 현상, 목적보다 사욕에 중심을 두는 것을 뜻하는 속담으로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는 뜻인데 요즘 지역단체에서 일어나는 각종 비리를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지방공무원이 해야할 일은 신경쓰지 않고 사업을 벌이며 자신에게 떨어질 이익을 챙기는 일이 많이 벌어지다보니 어떤 신문에서는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속담을 많이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본질적인 일보다는 자신들에게 떨어질 이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지금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우리의 속담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 이 세상의 것에 대한 탐욕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힘이 될만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 명예, 학벌, 지식등으로 우리의 힘을 과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의 인간가치관인 듯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욕심은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낚시꾼이 이상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물고기는 금빛을 띠고 있었는데 물고기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물고기가 낚시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드릴께요.” 낚시꾼은 물고기의 말이 믿겨지지 않았지만 인간의 말을 하는 사실마저도 신기했던터라 물고기의 애원을 들어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조건을 하나 더 제시했습니다. “그럼 소원을 세 가지가 아닌 다섯 가지를 들어준다면 살려주마.” 낚시꾼이 이렇게 말하자 물고기는 서글퍼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소원밖에 들어줄 수 없어요.” 그러자 낚시꾼은 채근하며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럼 네 가지를 들어준다면 살려줄께.” 물밖에 나온 지 꽤 오래된 물고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소원이 세 가지 밖에는….” 갑자기 말을 멈춘 물고기에게 낚시꾼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좋다. 세 가지 소원만 들어다오.” 하지만, 낚시꾼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에 물고기는 이미 생명이 다한 뒤였습니다. 세상의 욕망은 이렇게 더 큰 것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가지고 있는 것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더 가지려는 욕망입니다. 탐심은 헬라어로 ‘플레오넥시아’인데 이 단어의 내포되어진 의미는 “더 움켜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프랭클린은 “배부른 것이 모든 악의 어머니”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의 성공에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권력을 얻고 예수님을 통해 재산을 소유하고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위에 군림하며 남들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결국 신앙은 현실속에서 내 힘을 키워나가는 도구로 만들어놓고 있진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주님을 따라갈 때 세상의 욕망으로 인해 잘못된 길을 걷지 않고 주님을 제대로 따르면서 얻게 되는 평안과 은혜의 채우심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예수님의 성공 둘째로, 예수님의 고난과 세상의 고난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마가복음 10장 39,40절입니다.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때에 자신들에게 권력 한 자리씩 달라고 부탁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자리를 요구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그들도 감당할 수 있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에 대해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당할 고난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자신들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38절과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그들의 머릿속에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 속담중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처럼 어려움을 겪은 후에 찾아올 영광을 생각하며 그런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고통을 감뇌하고 고난을 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과 고난은 전적으로 자신의 미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고진감내’의 사상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어려움이 다한 후에 영광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열매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겪으면서 참아내는 이유가 어쩌면 내게 찾아올 영광을 기대하는 기대감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당하는 고난을 자신들도 당하게 된다고 할 때 이 고난후에 자신들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예수님의 고난을 자신들도 겪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여러분, 우리가 생각해야할 고난에 대한 생각은 이런 세상적인 고난관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결코 예수님의 유익을 위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결과가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좋은 결과가 있든 있지 않든 주님의 고난은 다른 생명을 얻기 위한 고난인 것을 깨닫고 그 고난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초대교회때 성도들은 로마황제들의 무시무시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믿음의 생활을 했습니다. 네로황제가 자신이 좋은 시를 짓기 위한 자신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질렀습니다. 6일동안 이어진 그 불로 인해 로마시의 반이 넘는 면적이 타버리고 수많은 로마시민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저지른 이 악독한 일의 처벌대상을 기독교인으로 정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워 핍박하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화형을 처할 뿐 아니라 원형경기장의 사자울타리에 집어넣어 사자들과 싸우게 만들었으나 결투무기도 주지 않아 아무런 무기가 없는 그들은 사자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네로는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라며 빈정거리며 사자앞에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며 즐겼습니다. 그러나 네로황제는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을 보면서 오히려 무서움을 가진 사람은 네로황제였다고 합니다. 왜냐면 사자앞에서 공포에 질려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운 모습으로 찬양하며 기쁜 얼굴을 하며 죽어가는 모습으로 인해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자 밥이 되는 공포의 순간에서도 저토록 밝게 웃을 수 있는가? 도대체 저들이 믿는 종교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종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리면서 네로황제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결국 네로황제는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로 그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 황제 이후로 9명이나 되는 악한 로마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지속적으로 찔러죽이고 화형을 시켰으며 온갖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며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6번째 황제인 맥시무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은 집단으로 50명여명 이상 한 곳에 산 채로 묻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지독하게 기독교인들을 핍박을 한 악명 높은 황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7번째 데리우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은 말살시키기 위하여 가장 강도 높은 상상초월의 방법으로 소름끼치는 고통을 가했습니다. 심지어 독사와 전갈이 가득한 가죽부대에 기독교인을 넣어 바닷물에 던져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고난과 핍박을 당한 기독교라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 당연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환란과 핍박을 받을수록 강해지고 놀라울 정도로 활성화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이 배가될수록 더욱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더 의지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십니까? 혹 이런 일을 통해 내가 뭔가 얻어지고 내가 성공할 밑거름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참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의도라면 결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하는 신앙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영광이나 이익이 생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이라면 나도 걸어가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떤 보상을 바라고 고난을 받으면 결국에는 내 자신을 위한 삶일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며 주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와 저 천국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신앙의 고난가운데서도 승리하시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예수님의 성공 셋째로, 세상은 높은 자리가 성공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겸손하게 도와주며 섬기며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마가복음 10장 43,44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높아지는 결과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내가 높아지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고 낮아지며 종처럼 남을 위해 섬겨주어야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앞부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혀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것에 완벽한 답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제일 마지막 절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영국의 왕 죠지 6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쓸 때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현재와 지난 생애에서 얼마나 남에게 봉사하였느냐 얼마나 헌신하였느냐를 보면 된다.”
미국의 여자 배우 중에 시대를 초월하며 이름을 알린 유명 여배우로 오드리 햅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외모도 탁월하고 연기도 탁월해서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였습니다. 그 소녀는 굶주리고 가난한 고아 소녀였습니다. 길거리에서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발견하여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 후 불쌍한 그 소녀는 국제연합아동보호 기금인 유니세프가 제공하는 빵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나중에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를 자기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자기를 살린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일생 유니세프와 함께 일하며 수많은 굶주린 아이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오드리 햅번은 늘 이런 말했습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하여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 그 여인은 늘 굶주린 어린아이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배우로서도 이름이 났지만 인격으로도 탁월한 성품의 소유자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늘 섬기니까 어느 곳에 가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조직의 두목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군림하는 지도자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풀어주고 나눠주며 섬기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섬기러 오셨습니까?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섬기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짐의 상징물로 이 땅에 오셨고 진정 낮아지는 것이 승리이신 것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1,12절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은 낮아지는 것을 모릅니다. 세상은 겸손하여 승리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림하고 높아지는 것이 승리인 줄 압니다. 어떻게든 타인을 무너뜨리고 굴복시켜야 성공한 줄 압니다. 약한 자를 굴복시키고 강하게 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섬김과 사랑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힘과 권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자가 아니라 평화와 섬김과 사랑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래적 사명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일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친 스승으로 일본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분이 있습니다. 20세기 초중기에 살았던 분이신데 메이지 학원과 고배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톤에서 신학과 생물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빈민촌에 가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전도와 사회사업, 농민 운동에 헌신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시한부인생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친지들과 함께 교회를 찾아 인생의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갔습니다. 그날 밤 그는 몹시 번민했습니다. 이왕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죽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남자답게 목숨을 끊어야하는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밤새도록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 고민하며 몸부림을 치며 밤을 지새우다 다음날 결론을 얻고 살림도구를 챙겨 조그만 수레에 싣고 빈민촌을 찾아갔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라면 목숨을 끊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대로 죽는 날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고 받들어 주기 위하여 오신 분이었기에 섬길 자를 찾아갔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 섬길 곳을 찾아 그들을 섬기며 예수님의 섬김을 닮은 인생을 살자라고 생각했고 나머지 인생을 섬김의 삶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시한부 생명의 언도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렸던 그 분이 나이가 70이 넘게 사셨고 죽는 날까지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다니며 그가 함께 살았던 빈민촌 사람들의 집집마다 청소해주고 어린이를 돌봐주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대선정국을 보면서 참 안타깝습니다. 모두 으뜸, 즉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데 어느 누구하나 섬기려는 사람, 낮아져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진정한 승리, 진정한 성공은 섬김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말이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의 성공과 예수님의 성공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섬김과 낮아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세상의 성공”은 ‘얼마나 출세하고 권력을 가지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재산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사느냐’로 판가름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섬겨주며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들을 해도 그 일을 통해 사회가 아름다워지고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런 섬김이야말로 “정말 성공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내 몸이 힘들과 내 마음이 힘들고 내 삶에 고난이 있어도 그 일을 통해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성공한 인생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낮아지심과 섬김을 본받고 진정한 인생성공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세상에서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권력을 쫓아가며 세상적 욕망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은 돈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벌어 내가 소유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의 세상은 권력와 재산을 위해 모든 시간속에서 부던히 열심히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의 삶속에 “돈이 있으면 다 될 것 같고” “권력이 있으면 다 될 것 같고” 세상에서 힘이 될만한 “명예와 지식, 학벌, 인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맞습니다. 이런 것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을 “수단으로 삼아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제자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수단이 되었고 자신이 차지할 자리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잘못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차지할 자리가 목적이었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은 수단이 되니 자신을 위한 삶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과 명예와 지식과 학벌과 인맥이 수단이 되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여러 조건들이 수단이 되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수단이 되어서 권력과 명예, 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과 명예와 부를 수단으로 삼아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며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성공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다운 신앙자세로 주님을 따라가며 섬길 때 우리의 신앙으로 세상에서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의 성공자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