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옥 빌헴 프리드리히 히걸 - 철학적 학문들의 엔치클로페디 강요 : 제1부 논리의 학 4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 Wissenschaft der Logik)
비판철학에서 사유는 주관적이라고, 그것의 최종적인 극복될 수 없는 규정은 추상적 보편성, 형식적 동일성이라는 식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사유는 자기 안에서 구체적인 보편성으로서의 진리에 대립된다.
이성이라고 하는 사유의 이러한 최고의 규정에서는 범주들이 고찰되지 않는다.
대립된 입장은 사유를 오직 특수자만의 활동으로서 파악하는 것이자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를 마찬가지로 진리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특수자의 활동으로서 사유는 오직 범주들만을 자기의 산물과 내용으로 지닌다.
지성이 견지하는 바의 이 범주들은 제한된 규정들, 즉 조건 지어진 것, 의존적인 것, 매개된 것의 형식들이다.
그것들로 제한된 사유에 대해서는 무한한 것, 참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유는 (신의 현존재에 대한 증명들에 반해) 그와 같은 것으로의 이행을 이룰 수 없다.
이 사유 규정들은 또한 개념이라고도 불린다.
그런 한에서 대상을 개념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을 조건 지어진 것과 매개된 것의 형식에서 파악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뜻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대상이 참된 것, 무한한 것, 무조건적인 것인 한에서는 그것을 조건 지어진 것과 매개된 것으로 전환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참된 것을 사유하면서 파악하는 대신에 그것을 오히려 참되지 않은 것으로 전도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신과 참된 것에 대해 오직 직접적일 뿐인 앎을 주장하는 입장이 제시하는 유일한 단순한 논박이다.
일찍이 신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이른바 인간 정념적인 표상들이 유한하고 따라서 무한한 것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제거되었으며, 그에 의해 신은 이미 괄목할 만하게 공허한 본질이 되었다.
그러나 사유 규정들은 일반적으로 아직은 인간 정념적인 것에 포괄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유는 - 추사유에 의해 비로소 진리에 도달한다는, 위에서 언급된 모든 시대의 선입견에 따라 - 절대자의 표상들에서 유한성을 벗겨버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결국은 사유 규정들 일반도 인간 정념화로 그리고 사유는 단지 유한화할 뿐인 활동으로 설명되었다.
스피노자에 관한 서한들에 붙인 부록에서 야코비는 그가 어쨌든 스피노자의 철학 자신으로부터 길어 올려 인식 일반에 대한 싸움을 위해 적용한 이 논박을 가장 명확하게 개진했다.
이 논박에 의해 인식은 다만 유한한 것의 인식으로서만, 즉 그 안에서는 조건인 각각의 모든 것 그 자신이 다시 조건 지어진 것일 뿐인 바의 조건 지어진 것에서 조건 지어진 것으로 나아가는 계열들에 의한, - 요컨대 조건 지어진 조건들에 의한 사유하는 전진으로서만 파악된다.
이에 따르면 설명한다는 것과 개념 파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다른 것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서 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모든 내용은 다만 특수하고 의존적이며 유한한 것일 뿐이다.
무한한 것, 참된 것, 신은 인식이 그에 한정된 그러한 연관의 기제 바깥에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은 칸트 철학이 범주들의 유한성을 주로 그것들의 주관성이라는 형식적 규정에만 정립
한 가운데 이 논박에서는 범주들이 그 규정성에 따라 언명되고 범주 그 자체가 유한한 것으로 인
식된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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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비는 특히 자연에 관계되는 학문들이 자연의 힘들과 법칙들의 인식에서 거둔 빛나는 성과를 염두에 두었다.
물론 무한한 것은 이러한 유한한 것의 지반에서는 내재적으로 발견될 수 없다.
그것은 랄랑드가 하늘 전체를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지반에서 최종적 결과로서 생겨난 것은 외면적인 유한한 것의 무규정적 집합으로서의 보편적인 것, 즉 물질이었다.
그리고 야코비는 정당하게도 매개들에서 한갓되이 전진하는 도정에서 다른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진리는 정신에 대해 존재하며, 마찬가지로 오로지 이성만이 바로 그에 의해 인간이 존립하는 것이고, 이성이란 신에 대한 앎이라는 것이 주장된다.
그러나 매개된 앎은 다만 유한한 내용에만 한정되어 있어야 하는 까닭에, 이성은 직접지, 신앙이다.
앎, 신앙, 사유, 직관은 이 입장에서 출현하는 범주들인데, 그것들은 잘 알려진 것으로서 전제된다는 점에서 너무나 자주 단순한 심리학적 표상들과 구별들에 따라 자의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것들의 본성과 개념인 것, 즉 유일하게 관건이 되는 바의 것은 탐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앎은 아주 일상적으로 신앙에 대립되어 생각되는 데 반해, 동시에 신앙은 직접지로서 규정되며, 이리하여 곧바로 또한 앎으로도 인정된다.
또한 사람들이 믿는 것이 의식 속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사람들이 최소한 그에 대해 안다는 것도 분명 경험적 사실로서 발견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믿는 것이 무언가 확실한 것으로서 의식 속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사유가 직접지와 신앙에, 특히 직관에 대립된다.
직관이 지적인 것으로서 규정된다면, 이것은 만약 사람들이 신이 대상인 여기에서 지적인 것을 가령 공상적 표상들이나 심상들로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사유하는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다.
이러한 철학함의 언어에서는 신앙[믿음]이 또한 감성적 현재의 보통의 사물들과 관련해서도 말해지는 일이 벌어진다.
야코비가 말하길, 우리는 우리가 육체를 갖는다고 믿으며, 우리는 감성적 사물들의 실존을 믿는다.
하지만 참된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신앙에 관해 말할 때, 즉 신이 직접지와 직관에서 계시되어 주어져 있다는 것에 관해 말할 때, 이것은 감성적 사물들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보편적인 내용이며, 다만 사유하는 정신에 대한 대상들일 뿐이다.
또한 경험적 자아나 특수한 인격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에서의 자아로서의 개별성, 인격이, 특히 신의 인격이 의식 앞에 있다는 점에서도, 순수한,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서 보편적인 인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은 사상이며 오직 사유에만 속한다.
더 나아가 순수한 직관은 순수한 사유인 바의 것과 전적으로 같은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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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신앙은 우선은 우리가 일상적 의식에서 이 말들과 결합하는 일정한 표상들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사유와는 물론 서로 다르며, 이 구별은 대체로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신앙과 직관도 좀 더 고차적인 의미에서, 즉 신에 대한 신앙으로서, 신에 대한 지적 직관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바, 다시 말하면 바로 직관 및 신앙과 사유의 구별을 이루는 것이 사상되어야 한다.
이러한 좀 더 고차적인 영역으로 옮겨진 신앙과 직관이 어떻게 여전히 사유와 서로 다른 것인지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러한 공허해진 구별들을 가지고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하고 주장했다고, 그리고 주장된 것과 똑같은 규정들을 논박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앙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종교적 신앙을 상기시키고 이 신앙을 포함하거나 심지어는 쉽사리 바로 그것인 것으로 보이는 특별한 장점을 지니는바, 그리하여 믿음이 깊은 이 철학함은 본질적으로 경건하고 그리스도교 적이고 경건한 것같이 보이며, 이러한 경건함에 근거하여 그만큼 더 자부심과 권위를 지니고서 자기의 임의적인 단언들을 행할 자유를 자기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겉보기로부터 말들의 단순한 같음에 의해 슬며시 끼어들 수 있는 것에 속지 말고 구별을 분명히 견지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안에 교회의 권위를 포함한다.
그러나 저 철학하는 입장의 신앙은 오히려 자신의 주관적 계시의 권위일 뿐이다.
더 나아가 전자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객관적이고 자기 안에서 풍부한 내용, 교설과 인식의 체계이다.
그러나 후자의 신앙의 내용은 자기 안에서 아주 무규정적인바, 그것은 저 내용도 물론 허용하긴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달라이라마, 황소, 원숭이 등등이 신이라고 하는 신앙도 자기 안에 포함하며, 그 자체로 자기를 신 일반, 최고의 본질에 한정한다.
(주 : 여기서 헤겔은 야코비의 신앙을 계몽의 진리로 환원한다.
정신현상학의 '계몽의 진리’를 참조.
여기서 계몽은 자기의식으로서 대상을 부정하는 정신이긴 하지만, 내용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다.
또한 종교가 지니는 적극적인 내용 자신을 자기 측에 경험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은 채 결국 세계의 현실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행동할 뿐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내용으로서는 자기의 이해를 기준으로 세계 전체를 파악하게 된다.
이처럼 헤겔은 계몽의 운동이 현실 세계에 대한 자기의식의 능동적인 비판적 활동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근대 주체주의의 필연적인 운동으로서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야코비는 자신의 철학적 신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 『스피노자의 학설에 대하여』와 『데이비드 홈』에서 언급하고 있다.)
저 철학적이어야 하는 의미에서의 신앙 자신은 직접지라는 무미건조한 추상물, 즉 전적으로 형식적인 규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바, 그러한 형식적 규정이 믿음이 깊은 심정 및 그에 내재하는 성스러운 정신[성령]의 측면에 따라서나 내용이 풍부한 교설의 측면에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신적 충만함과 혼동되거나 그러한 충만함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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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여기서 신앙과 직접지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전에 영감, 심정의 계시, 본성적으로 인간 안에 심어진 내용, 더 나아가 특히 양식, 코먼 센스, 상식[공통 감각]이라고도 불려온 것과 전적으로 같은 것이다.
이 모든 형식은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내용이 의식 속에서 발견되고 하나의 사실이 의식 속에 존재하는 바의 그 직접성을 원리로 삼는다.
이 직접지가 아는 것은 우리의 표상 속에 있는 무한한 것, 영원한 것, 신이 또한 존재한다는 것, 의식 속에서 이 표상과 직접적이고 분리될 수 없게 그 표상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결합해 있다는 것이다.
철학에는 직접지의 이러한 명제들에 반대하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겨날 수 없다.
오히려 철학은 심지어 철학의 보편적인 내용 전체를 표현하는 이러한 자기의 오랜 명제들이, 물론 그러한 비철학적인 방식으로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마찬가지로 시대의 일반적 선입견으로 된 것을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놀라울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람들이 철학에 이 명제들이,- 즉 참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 정신에 내재한다든가, 정신에 대해 진리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명제들이 대립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형식적 측면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요컨대 신의 사상에는 그의 존재가, 사상이 우선적으로 지니는 주관성에는 객관성이 직접적이고 분리될 수 없게 결합해 있다는 명제이다.
아니, 직접지의 철학은 그 추상에서 오로지 신의 사상과 뿐만 아니라 또한 직관에서 나의 신체 및 외면적 사물들의 표상과도 그것들의 실존 규정이 마찬가지로 분리될 수 없게 결합해 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만약 철학이 그러한 통일을 증명하려고, 다시 말하면 사상이나 주관성 자신의 본성에 존재나 객관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러한 증명들의 정황이 어떻든지 간에 철학은 어느 경우에든 자기의 명제들이 또한 의식의 사실들이기도 하며, 그리하여 경험과 일치한다는 것이 주장되고 제시된다는 것에 전적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직접지의 주장과 철학 간의 구별은 오로지 직접지가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 또는 오로지 그것이 철학함에 맞선다는 점으로 귀착될 뿐이다.
그러나 또한 근대 철학의 관심 전체가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저 명제,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도 그 창시자에 의해 곧바로 직접성의 방식으로 언명되었다.
저 명제를 추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추론의 본성에 관해 가령 추론에서 ‘그러므로'가 출현한다는 것 이외에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함에 틀림이 없다.
중명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한 중명사는 분명 ‘그러므로'라는 말보다 더 본질적으로 추론에 속한다.
그러나 그 명칭을 정당화하기 위해 데카르트에게서의 저 결합을 직접 추론이라 부르고자 한다면, 이 불필요한 형식은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구별된 규정들의 결합 이외에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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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면 직접지의 명제가 표현하는 우리의 표상들과 존재의 결합은 더 많지도 더 적지도 않게 추론이다.
1826년에 출간된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호토 씨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나는 인용들을 끌어오고자 하는데, 그 인용들에서는 데카르트 자신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추론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 구절들은 「두 번째 반박에 대한 답변』[『성찰』]과 『방법서설』 제4부 및 『서간집』 제1권이다.
전자의 구절로부터 좀 더 자세한 표현을 인용하고자 한다.
데카르트는 우선 우리가 사유하는 본질이라는 것이어떠한 삼단논법으로부터도 추론되지 않는 모종의 근본 개념이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군가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거나 실존한다"라고 말할 때, 그는 실존을 사유로부터 삼단논법에 의해 끌어낸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추론에 무엇이 속하는지 아는 까닭에 저 명제에서 추론에 의한 도출이 행해져야 한다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전제가 속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생각하는 것은 모두 존재하거나 실존한다'.
그러나 이 후자의 명제는 오히려 저 최초의 명제로부터 비로소 도출되는 그러한 명제일 것이다.
사유하는 자로서의 나와 존재의 분리 불가능성 명제에 관한 데카르트의 표현들, 즉 의식의 단순한 직관 속에 이 연관이 포함되어 제시된다는 것, 이 연관은 단적으로 최초의 것, 원리, 가장 확실하고 가장 명중적인 것이고, 그리하여 어떠한 회의주의도 이것을 용인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표상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설득력 있고 명백한바, 이 직접적인 결합에 관한 야코비와 다른 이들의 근대적 명제들이란 그저 불필요한 반복들로 여겨질 수 있을 뿐이다.
이 입장은 매개된 삶에 대해 그것이 고립되어 취해지면 진리에 대해 불충분하다는 것을 제시한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입장의 특유성은 직접지가 오로지 고립되어 취해져서만, 즉 매개를 배제해서만 진리를 내용으로 가진다는 데 존립한다.
그러한 배제들 자신에서는 곧바로 형이상학적 지성에로의, 즉 형이상학적 지성의 이것 - 아니면 -
저것에로의, 따라서 실제로는 그 자신이 유한한 것, 다시 말하면 일면적 규정들을 견지하는 데 기반하면서도 잘못되게도 저 견해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외면적 매개 관계로의 퇴락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입장이 알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전개하지 않은 채 놓아두고자 한다.
배타적인 직접지는 다만 하나의 사실로서 주장될 뿐이며, 여기 서론에서 그것은 이러한 외면적 반성에 따라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자체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직접성과 매개의 대립이라는 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저 입장은 사태의 본성, 다시 말하면 개념을 고찰하기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고찰은 매개와 심지어는 인식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참다운 고찰, 즉 논리적인 것의 고찰은 그 자리를 학문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해야 한다.
논리학의 두 번째 부분 전체, 즉 본질론은 직접성과 매개의 본질적인 자기 정립하는 통일에 대한 논구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직접지가 사실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에 계속 머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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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더불어 고찰은 경험의 영역으로, 심리학적 현상으로 나아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복잡하고 고도로 매개된 고찰의 결과라는 것이 아주 잘 알려진 진리들이 그러한 인식에 친숙하게 된 사람에게는 직접적으로 그의 의식 속에 나타난 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평범한 경험에 속한다는 점이다.
수학자는 하나의 학문에서 교육받은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해답들을 직접적으로 현재적으로 지닌다.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직 다양한 추사유와 오랜 삶의 경험에서 생겨났을 뿐인 일군의 보편적 관점들과 원칙들을 자기의 앎에서 직접적으로 현재적으로 지닌다.
우리가 어떤 한 종류의 앎과 또한 예술 및 기술적 솜씨에서 도달한 능숙함은 바로 그러한 지식과 활동 양식들을 일이 생겨날 때 직접적으로 자기의 의식 가운데, 아니 심지어는 외부로 향하는 활동과 자기의 사지 가운데 지닌다는 데 존립한다.
이 모든 경우에서의 직접성은 그것의 매개를 배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둘은 직접지가 심지어 매개된 삶의 산물과 결과이기까지 한 방식으로 결합해 있다.
직접적 실존과 그것의 매개와의 결합도 마찬가지로 진부한 통찰이다.
씨앗과 부모는 산출된 것인 아이들 등등과 관련해서는 직접적인 시원적 실존이다.
그러나 씨앗과 부모는, 아무리 실존하는 것으로서의 그들이 일반적으로 직접적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산출된 것이며, 아이들 등등은 그들의 실존의 매개에도 불구하고 이제 직접적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베를린에 있다는 것, 이러한 나의 직접적 현재는 이곳을 향해 이루어진 여행 등등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그러나 신, 법적인 것, 인륜적인 것에 대한 직접지에 관한 한 - 그리고 여기에는 또한 본능, 심어졌거나 생득적인 관념들, 상식과 자연적 이성 등등의 그 밖의 규정들도 속한다 - 이러한 근원성에 어떤 형식이 주어지든지 간에, 그 속에 포함된 것이 의식되기 위해서는(또한 플라톤의 상기를 위해서도)본질적으로 교육, 즉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험이다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비록 그것이 성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적인 교육이라는 더 나아간 의무까지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와 인륜은 그것들이 아무리 신앙이나 직접지라 할지라도, 단적으로 발전, 교육, 도야라고 불리는 매개를 통해 조건 지어져 있는 것이다.
생득 관념들의 주장에서와 그에 대한 반대에서도 여기서 고찰된 것과 유사한 배타적인 규정들의 대립, 요컨대 그렇게 표현될 수 있듯이 일정한 보편적 규정들의 영혼과의 본질적인 직접적 결합과 외면적 방식으로 생겨나고 주어진 대상들과 표상들에 의해 매개된 다른 결합과의 대립이 지배적이었다.
생득 관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관념들을 가져야만 할 것인바, 예를 들어 모순율이 다른 그와 같은 것들과 더불어 생득 관념으로 헤아려졌던 만큼, 그 모순율을 모든 사람이 그들의 의식 속에 지니고 그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라는 경험적 반박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서는 생득적인 것으로서 생각된 규정들이 그렇다고 해서 또한 알려진 것의 관
념과 표상의 형식으로 이미 존재하기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닌 한에서 하나의 오해가 돌려질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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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직접지에 대해서는 이 반박이 전적으로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직접지는 분명히 자기의 규정들이 의식 속에 있는 한에서 그것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직접지의 입장이 가령 특별히 종교적 신앙에 대해 발전과 그리스도교적이거나 종교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한다면 신앙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를 다시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야말 로 하나의 임의적인 것이며, 또는 교육의 필요성이 시인됨으로써 바로 매개의 본질성이 언명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몰사상성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우리가 이데아들[이념들]을 상기한다고 말해질 때, 이것은 이데아들이 그 자체에서 인간 속에 존재하지 (소피스트 들이 주장했듯이) 무언가 인간에게 낯선 것으로서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이렇듯 인식을 상기로서 파악하는 것에 의해 인간 속에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의 발전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발전은 다름 아닌 매개이다.
데카르트와 스코틀랜드 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생득 관념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우선은 다만 그 자체에서와 소질의 방식으로 인간 속에 현존하는 것으로서 여겨질 수 있을 뿐이다.
앞에서 제시된 경험들에서는 직접지와 결합된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증거로 끌어댄다.
이 결합이 가령 우선은 단지 외면적이고 경험적인 연관으로서만 받아들여진다면, 그 연관은 경험적 고찰 자신에 대해 본질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입증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만약 경험에 따라 이 직접지가 그 자체 자신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이 신과 신적인 것에 관한 앎인 한에서, 그러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감성적인 것, 유한한 것 및 자연적 심정의 직접적 욕망과 경향들을 넘어선 고양으로서 기술된다
이 고양은 신과 신적인 것에 대한 신앙으로 이행하여 그 신앙에서 끝나며, 그리하여 이 신앙은 직접지이자 직접적인 참으로 여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의 저 발걸음을 자기의 전제와 조건으로 지닌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유한한 존재에서 출발하는 이른바 신의 현존재에 대한 증명들은, 비록 저 증명들의 통상적 형식에서는 완전하고 올바르게 표현되어 있진 않을지라도, 이러한 고양을 표현하고 있으며, 인위적 반성이 창안해 낸 것들이 아니라 정신의 고유하고도 필연적인 매개들이다.
앞에서 묘사된 주관적 이념으로부터 존재로의 이행은 직접지의 입장에 대해 주요 관심사를 이루고 본질적으로 근원적이고 몰매개적인 연관으로서 주장되는 바의 것이다.
경험적으로 보이는 결합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 취해 보면, 바로 이 핵심은 그 자신 속에서 매개를 보여주며, 게다가 참답게 존재하는 대로의 그 규정에서는 외면적인 것과의 매개나 외면적인 것에 의한 매개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를 완결하는 것으로서의 매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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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입장의 주장은 요컨대 단순히 주관적일 뿐인 사상으로서의 이념도 단순히 그 자체로의 존재도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 자체로일 뿐인 존재, 이념의 것이 아닌 존재는 세계의 감성적인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직접적으로 주장되는 것은 이념은 오직 존재를 매개로 해서만, 역으로 존재는 오직 이념을 매개로 해서만 참된 것이라는 것이다.
직접지의 명제는 정당하게도 무규정적인 공허한 직접성, 추상적 존재 또는 그 자체로의 순수한 통일이 아니라 이념과 존재의 통일을 원한다.
그러나 구별된 규정들의 통일이 단순히 순수하게 직접적인, 다시 말하면 전적으로 무규정적이고 공허한 통일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규정들 가운데 하나가 오직 다른 규정에 의해 매개되어서만 진리를 갖는다.
또는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면, 각각의 모든 규정은 오직 다른 규정에 의해서만 진리와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 정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몰사상성이다.
이리하여 매개의 규정이 저 직접성 자신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지성이 직접지의 고유한 원칙에 따라서 그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제기해서는 안 되는 사실로서 제시되어 있다.
직접성과 매개의 규정들 각각을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그것들에서 구별의 무언가 확고한 것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일상적인 추상적 지성일 뿐이다.
그래서 그러한 지성은 그것들을 합일하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산출한다.
이는 앞에서 제시되었듯이 사실 속에 현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변적 개념에서는 사라지는 어려움이다
이 입장의 일면성은 그 기초에 대해 이루어지는 논의에 따라 그 주요 특징들이 명백히 되어야 할 규정들과 귀결을 가져온다.
첫째로, 내용의 본성이 아니라 의식의 사실이 진리의 기준으로서 세워지기 때문에, 주관적인 앎과 내가 나의 의식에서 일정한 내용을 발견한다는 단언이 참된 것으로서 내세워지는 것의 기초이다.
거기서는 내가 나의 의식에서 발견하는 것이 모든 이의 의식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높여지고, 의식 자신의 본성으로 내세워진다.
이전에 이른바 신의 현존재에 대한 증명들 가운데 하나로 이미 키케로도 그에 호소하고 있는 만민의 일치가 제시되었다.
(주 : 여기서 가장 명백한 텍스트는 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 1. 43과 2. 12이다.
그러나 일치의 원리는 좀 더 일반적인 것이자 더 오래된 것이다.
키케로는 1권에서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가르침도 없이 신들에 관한 어떠한 선개념도 지니지 않는 민족과 종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에피쿠로스는 프로레시스, 즉 정신 속에서 미리 파악된 종류의 정보라고 부른다.
그리고 2권에서는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제시한다.
'주된 쟁점에 대해서는 모든 민족의 모든 이가 동의한다.
왜냐하면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생득적이며, 정신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케로의 화자들은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그렇게 보이는 바로 그것이다’(Ehics, 5. 1173a1)를 ‘이성화’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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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의 일치는 중요한 권위이며, 하나의 내용이 모든 이의 의식에서 발견된다는 것으로부터 그 내용이 의식 자신의 본성 속에 놓여 있고 의식에게 필연적이라는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이러한 보편적 일치라는 범주에는 가장 도야되지 않은 인간의 감수성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없는 본질적인 의식, 즉 개별자의 의식이란 동시에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이라고 하는 의식이 놓여 있었다.
만약 이 의식의 본성 자신이 탐구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하면 이 의식의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이 분리되고 그 힘겨운 추사유의 작업을 통해 오로지 의식의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보편 적인 것만이 찾아내질 수 없다면, 오직 하나의 내용에 대한 모든 이의 일치만이 그 내용이 의식 자신의 본성에 속한다는 존경할 만한 선입견을 근거 지을 수 있다.
물론 보편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서 알고자 하는 사유의 욕구에 대해 만민의 일치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또한 사실의 저 보편성이 만족할 만한 증명일 것이라는 가정 내부에서도 그것은 신에 대한 신앙이 발견되지 않는 개인들과 민족들이 존재한다는 경험으로 인해 이 신앙에 대한 증명으로서는 포기되었다.
(헤겔의 주 : 경험에서 무신론과 신에 대한 신앙이 많게든지 적게든지 확산해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관건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신 일반의 규정으로 만족하는가 아니면 신에 대한 좀 더 규정된 인식이 요구되는가 하는 것이다.
최소한 중국과 인도 등등의 우상에 대해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물신들에 대해서도, 또한 그리스의 신들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그러한 우상들이 신이라는 것이 시인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믿는 자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에 반해 특수한 개체 속에 유가 놓여 있듯이 우상들에 대한 그러한 신앙에도 그 자체에서 신 일반에 대한 신앙이 놓여 있다는 고찰이 이루어진다면, 우상 숭배도 단지 우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신앙으로 여겨진다.
역으로 아테네인들은 제우스 등등을 단지 구름 등등으로 간주하고 가령 오직 신 일반만을 주장한 시인들과 철학자들을 무신론자로서 취급했다
[옮긴이- 일신론을 주장한 시인은 오직 크세노파 네스와 파르메니데스뿐이었다.
비록 크세노파네스가 확실히 '도시의 신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들을 '무신론자'로서 다루지 않았다.
헤겔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분명히 철학자들이다.
그리고 시인들이 언급되는 까닭은 소크라테스를 구름이 제우스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주장한 이로 묘사한 이가 아리스토파네스였기 때문이다.
불가지론자였던 프로타고라스와 일신론자였던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부쳐지기 전에 ‘불경'으로 고발되었다.
어쨌든 이 '그리스' 논증은 헤겔 자신의 것이겠지만, 앞의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논의와 72절의 논증은 흄의 『종교의 자연사』에 빚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관건이 되는 것은 그 자체에서 하나의 대상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가 아니라 그 가운데 무엇이 의식에 대해 드러나 있는지이다.
이러한 규정의 혼동이 타당화된다면, 인간의 각각의 모든 감성적 직관이, 즉 가장 조야한 감성적 직관마저도 종교일 것이다.
왜냐하면 물론 그 자체에서 그러한 각각의 모든 직관, 각각의 모든 정신적인 것 안에는 발전되고 순화되면 종교로 높여지는 원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능력이 있는 것(저 그 자체에서의 것은 능력과 가능성을 표현한다)과 종교를 가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가령 근래에 다시 탐험 여행가들은 모든 종교를 부인하고 심지어는 아프리카의 마술사들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는 무언가 종교와 같은 것까지도 부인한 (에스키모) 종족을 발견했다.
전혀 다른 측면에서 최근에 보낸 안식년의 처듬 몇 달을 로마에서 지낸 한 영국인은 자기의 여행기에서 오날날의 로마인들에 대해 일반 민중은 광신적이지만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모두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어쨌든 근래에 무신론이라는 비난이 드물어진 것은 분명 주로 종교의 내실과 종교에 대한 요구가 최소한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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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나의 의식 속에서 하나의 내용을 그 진리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발견하며, 따라서 이 확신은 특수한 주체로서의 나에게가 아니라 정신 자신의 본성에 속한다는 단순한 단언을 해야 하는 것보다 더 간단하고 더 편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직접지가 진리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둘째로, 모든 미신과 우상 숭배도 진리로 설명된다는 점과 의지의 가장 불법적이고 가장 비인륜적인 내용도 정당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도인에게는 이른바 매개된 앎으로부터, 즉 이치 추론들과 추론들로부터 암소와 원숭이 또는 브라만과 라마가 신으로서 여겨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자연적 욕망과 경향은 자연히 자기의 관심들을 의식 속에 정립하며, 비도덕적인 목적들은 의식 속에서 전적으로 직접적으로 발견된다.
선하거나 악한 성격은 관심들과 목적들에서 알려지고 게다가 너무도 직접적으로 알려지는 의지의 규정된 존재를 표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에 대한 직접지는 단지 신이 있다는 것으로만 나아갈 뿐, 신이 무엇인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인식일 것이고 매개된 앎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교의 대상으로서의 신은 분명히 신 일반으로, 즉 무규정적인 초감성적인 것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종교는 그 내용에서 최소한으로 축소되어 있다.
만약 단지 신이 존재한다는 신앙이 여전히 유지되거나 심지어 그러한 신앙이 성립할 정도로만 작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면, 우리는 다만 종교적 앎의 너무도 빈곤한 것을 하나의 획득으로 여기게끔 하고, 그 교회에서 오래전에 아테네에 존재했던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으로 되돌아오는 데에 이른 이 시대의 빈곤함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직접성이라는 형식의 일반적 본성이 짧게 진술되어야 한다.
요컨대 이 형식 자신이 일면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내용 자신도 일면적으로 만들며, 따라서 유한하게 만드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에 그 형식은 추상의 일면성을 부여하며, 그리하여 신은 몰규정적인 본질이 된다.
그러나 신은 오직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를 자기와 매개하는 자로서 알려지는 한에서만 정신이라 불릴 수 있다.
오직 그렇게 해서만 신은 구체적이고 살아 있으며 정신이다.
바로 그에 따라 정신으로서의 신에 관한 앎은 자기 안에 매개를 포함한다.
특수한 것에 직접성의 형식은 있다.
자기에게 관계한다는 규정을 부여한다.
그러나 특수한 것은 바로 자기 바깥의 다른 것(타자)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이다.
저 형식에 의해 유한한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
전적으로 추상적인 것으로서의 직접성의 형식이 각각의 모든 내용에 대해 무관심하고 바로 그에 따라 각각의 모든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에, 그것은 우상 숭배적이고 비도덕적인 내용을 대립된 내용과 마찬가지로 승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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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내용에 대해 그것이 자립적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고 하는 그러한 통찰만이 내용을 그것의 유한성과 비진리로 격하시킨다.
그러한 통찰은 내용이 자기에게서 매개를 지니는 까닭에 매개를 포함하는 앎이다.
하나의 내용이 참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내용이 다른 것과 매개되지 않고 유한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기를 자기 자신과 매개함으로써 매개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인 한에서일 뿐이다.
스스로 유한한 앎, 즉 형이상학과 계몽의 지성 동일성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저 지성 자신이 직접적으로 다시 이 직접성, 다시 말하면 추상적인 자기에-대한-관계, 추상적 동일성을 진리의 원리와 기준으로 삼는다.
추상적 사유(반성하는 형이상학의 형식)와 추상적 직관(직접지의 형식)은 하나의 같은 것이다.
직접성의 형식이 매개의 형식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견지됨으로써 그것은 일면적이며, 이 일면성은 오직 이 형식으로만 환원되는 모든 내용에 전달된다.
직접성은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자기에-대한-관계이며, 그리하여 동시에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 보편성이다.
그 경우 만약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오직 직접성의 형식에서만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단지 추상적으로 보편적인 것일 뿐이며, 신은 이 입장으로부터는 단적으로 몰규정적인 본질이라는 의미를 얻는다.
그 경우 정신으로서의 신에 대해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의식과 자기의식으로서 어느 경우에든 자기를 자기 자신과 타자로부터 구별함이고 따라서 곧바로 매개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사유에 주어지는 이 세 번째 태도에 대한 판정은 이 입장이 직접적으로 그 자신 안에서 진술하고 승인하는 방식으로만 수행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직접지, 즉 타자와의 것이든 아니면 그 자신 안에서 자기와의 것이든 매개를 지니지 않는 앎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짓된 것으로서 제시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유가 오직 타자에 의해 매개된 - 유한하고 조건 지어진 - 규정들에서만 전진한다는 것과 그와 마찬가지로 매개에서 이 매개 자신이 지양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상의 비진리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일면적 직접성에서도 일면적 매개에서도 전진하지 않는 그러한 인식의 사실의 예가 논리학 자신과 철학 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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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과 관련하여 위에서 순진무구한 형이상학이라고 불렸던 것과 직접지의 원리를 고찰하면, 그 비교로부터 밝혀지는 것은 직접지의 원리 가 이 형이상학이 근래에 데카르트 철학으로서 받아들인 저 시원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이다.
양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되고 있다.
1.사유와 사유하는 자의 존재의 단순한 분리 불가능성, -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에서 나의 존재, 실재성, 실존이 내게 직접적으로 계시되어 있다는 것(데카르트는 동시에 자신이 사유에서 의식 일반 그 자체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철학의 원리」에서 명확히 설명한다)과,
(주 : 그 부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사유'가 의미하는 것.
사유라는 용어에 의해 나는 우리가 의식하는 한에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의식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따라서 사유는 여기서 단지 이해, 의지, 상상뿐만 아니라 또한 감각적 의식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는 보고 있다, 또는 나는 걷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이것을 육체적 활동들로서의 봄이나 걷기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취한다면, 결론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확실하지 않은 까닭은 종종 자는 동안에 일어나듯이 내가 나는 보고 있다거나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눈은 닫혀 있고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들은 내가 육체를 전혀 갖고 있을지라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봄'과 '걷기'를 봄이나 걷기에 대한 현실적 감각이나 의식에 적용되는 것으로 취한다면, 결론은 아주 확실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보고 있다거나 걷고 있다는 감각이나 사유를 지니는 유일한 것인 정신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분리 불가능성이 단적으로 최초의(매개되거나 증명된 것이 아닌) 가장 확실한 인식이라는 것과 전적으로 똑같다.
2.신의 표상과 신의 실존의 분리 불가능성도 마찬가지이며, 그리하여 이 실존은 신의 표상 자신 안에 포함되어 있고, 저 표상은 단적으로 실존의 규정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실존은 필연적이고 영원한 실존이다.
3.외적 사물들의 실존에 대한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의식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감성적 의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러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인식들 가운데 가장 사소한 것이다.
유일하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외면적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직접지란 기만과 오류이
며, 감성적인 것 그 자체에는 아무런 진리도 없고, 이러한 외면적 사물들의 존재는 오히려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존재, 가상이라는 것, 외면적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그것들의 개념과 본질로 부터 분리될 수 있는 실존만을 지닌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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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입장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1.데카르트 철학은 이러한 증명되지 않고 증명될 수 없는 것으로 가정된 전제들로부터 그 이상의 더욱 전개된 인식으로 전진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의 학문들이 솟아나게 했다.
그에 반해 근대의 입장은 유한한 매개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인식이란 단지 유한한 것만을 인식하고 아무런 진리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으며, 신에 관한 의식에 대해서는 저 신앙에, 더욱이 전적으로 추상적인 신앙에 머무를 것을 요구한다.
2.근대의 입장은 여기서 한편으로는 데카르트에 의해 도입된 통상적인 학문적 인식의 방법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채 그로부터 생겨난 경험적이고 유한한 것의 학문들을 전적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입장은 이 방법을 포기하는 것과 더불어, 이제 그것이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 내실에 따라 무한한 것에 관한 앎을 위한 모든 방법을 포기한다.
그런 까닭에 이 입장은 상상과 단언의 난폭한 자의, 도덕적 자부심과 감각의 오만함 또는 가장 강력하게 철학과 철학적 학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무절제한 제멋대로의 생각과 이치 추론에 자신을 내맡긴다.
철학은 요컨대 단순한 단언이나 상상을, 또한 이치 추론의 임의적이고 오락가락하는 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내용이나 앎의 자립적인 직접성과 그에 반해 그것과 통합할 수 없는 마찬가지로 자립적인 매개와의 대립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것이 단순한 전제와 임의적인 단언인 까닭에 제쳐놓아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표상에서 취해졌든 사유에서 취해졌든 다른 모든 전제나 선입견도 그것들이 학문에 들어설 때는 포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학문, 바로 그것에서는 그와 같은 모든 규정이 비로소 탐구되고, 그 규정들과 그것들의 대립들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모든 형식을 관통하여 수행된 부정적 학문으로서의 회의주의는 거기서 그러한 전제들의 허무함이 밝혀질 서론으로서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즐겁지 않은 도정일 뿐 아니라 또한 곧바로 언급되게 되듯이 변증법적인 것 자신이 긍정적 학문의 본질적인 계기인 까닭에 불필요한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밖에 회의주의는 또한 유한한 형식들을 단지 경험적으로나 비학문적으로만 발견해야 하고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완수된 회의주의에 대한 요구는 학문에 모든 것에 대한 의심, 다시 말하면 모든 것에서의 완전한 무전제성이 선행해야 한다는 요구와 같다.
이 요구는 본래 순수하게 사유하고자 하는 결단 속에서 모든 것을 사상하고 자기의 순수한 추상, 사유의 단순성을 파악하는 자유에 의해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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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인 것은 형식에 따라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추상적 또는 지성적 측면, 변증법적 또는 부정적-이성적 측면, 사변적 또는 긍정적-이성적 측면.
이 세 가지 측면은 논리의 세 부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모든 논리적-실재적인 것의, 다시 말하면 각각의 모든 개념 또는 각각의 모든 참된 것 일반의 계기들이다.
이 계기들 모두가 첫 번째 계기, 즉 지성적 계기하에 정립됨으로써 따로따로 분리되어 놓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그 진리에서 고찰되지 않는다.
여기서 논리적인 것의 규정들에 대해 이루어진 진술 및 구분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다만 선취되어 있고 역사학적일 뿐이다.
지성으로서의 사유는 고정된 규정성과 다른 규정성에 대한 그것의 구별성에 그대로 머문다.
그러한 제한된 추상적인 것이 지성에게는 그 자체로 존립하고 존재하는 것으로서 여겨진다.
사유 일반 또는 좀 더 자세하게는 개념 파악에 대해 말할 때, 거기서는 자주 단순히 지성의 활동만이 염두에 두어지곤 한다.
그러나 실로 사유는 우선은 지성적 사유이지만, 그것은 거기에 계속 머물지 않으며, 개념은 단순한 지성 규정이 아니다.
지성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그 내용에 보편성의 형식을 나눠주는 것에 존립하며, 게다가 지성에 의해 정립된 보편적인 것은 추상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추상적으로 보편적인 것 그 자체는 특수한 것에 대립하여 견지됨으로써 동시에 그 자신도 다시 특수한 것으로서 규정된다.
지성이 자기의 대상들에 대해 분리하고 사상하면서 관계한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그것은 그 자체로서 철저히 구체적인 것과 관계하고 거기에 계속 머무르는 직접적인 직관과 감각의 반대이다.
지성과 감각의 이 대립에 관계되는 것이 바로 사유 일반에 대해 행해지곤 하고 결국 사유란 경직되고 일면적이며 자기의 결론에서 타락하고 파괴적인 결과들로 이어진다는 것으로 귀착되는 그토록 자주 반복되는 저 비난들이다.
그러한 비난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그 내용에 따라 정당한 한에서, 우선은 그 비난들이 사유 일반이나 좀 더 자세하게는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다만 지성적 사유에 해당할 뿐이라고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간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단순히 지성적일 뿐인 사유에 대해서도 그것의 권리와 공로가 승인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 권리와 공로는 일반적으로 이론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적 영역에서도 지성이 없이는 어떠한 확고함과 규정성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점에 존립한다.
여기서 우선 인식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인식은 현존하는 대상들을 그것들의 규정된 구별들에서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시작되며, 그래서 예를 들어 자연의 고찰에서는 소재, 힘, 유 등등이 구별되고 이러한 그것들의 고립에서 그 자체로 고정된다.
사유는 여기서 지성으로서 행동하며, 그것의 원리는 동일성, 자기에 대한 단순한 관계이다.
그 경우 이 동일성은 또한 인식에서 우선은 하나의 규정으로부터 다른 규정에로의 전진을 조건 짓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특히 수학에서는 크기[양]가 다른 모든 규정을 제거하고서 그것에서 전진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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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 기하학에서는 도형들에서 동일적인 것이 주목됨으로써 도형들이 서로 비교된다.
인식의 다른 영역들에서도, 가령 예를 들어 법학에서도 우선은 동일성에서 전진이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하나의 규정에서 다른 규정으로 추론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론은 동일성의 원리에 따른 전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론적인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것에서도 지성은 없을 수 없다.
행위에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속하며, 성격적인 인간은 지성적인 인간인바, 그는 그러한 인간으로서 일정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를 확고하게 추구한다.
무언가 위대한 것을 의욕하는 자는, 괴테가 말하듯이, 자신을 제한할 줄 알아야만 한다.
그에 반해 모든 것을 의욕하는 자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세계에는 수많은 흥미로운 것들이 존재한다.
스페인의 시, 화학, 정치, 음악, 이 모든 것은 아주 흥미로우며, 그것들에 대해 관심을 지니는 자를 나쁘다고 여길 수 없다.
그러나 일정한 상황 속에 놓인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일정한 것을 붙잡아야만 하지 자기의 힘을 여러 방면으로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모든 직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지성을 가지고서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판사는 법률을 견지하고 그에 따라 자기의 판결을 내려야 하며, 이런저런 것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어떤 변명도 인정하지 않으며 좌고우면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지성은 교양의 본질적인 계기이다.
교양이 있는 인간은 모호하고 무규정적인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을 그 확고한 규정성에서 파악한다.
그에 반해 교양이 없는 인간은 불확실한 채로 이리저리 동요하며, 그러한 사람에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시키거나 그가 문제가 되는 일정한 요점을 흔들림 없이 파악하게 하는 데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종종 많은 수고가 들어간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전의 논의에 따르면 논리적인 것 일반은 단순히 주관적인 활동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적으로 보편적이고 따라서 동시에 객관적인 것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가운데, 이 점은 또한 지성, 즉 논리적인 것의 이러한 최초의 형식에도 적용된다.
이에 따르면 지성은, 신의 선함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유한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존립한다고 하는 것이 이해되는 한에서, 바로 그 신의 선함이라 불리는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를 들어 자연에서 동물뿐만 아니라 또한 식물의 다양한 종들과 유들이 자기를
유지하고 번성하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에서 신의 선함을 인식한다.
나아가 인간, 즉 개인들과 전체 민족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그들도 똑같이 그들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을 한편으로는 (예를 들어 그 땅의 기후, 상태, 산물 등등과 같이)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서 발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질, 재능 등등으로서 소유한다.
그런데 그러한 방식으로 파악하면, 일반적으로 지성은 대상적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며, 대상 속에서 지성의 원리가 자신의 권리에 도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의 완전성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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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를 들어 국가는 만약 그 국가에서 아직 신분과 직업들의 규정된 구별화에 도달해 있지
못하다면, 그리고 개념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이고 통치적인 기능들이 아직 같은 방식으로 특
수한 기관들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불완전한데, 그것은 이 점이 예를 들어 감각, 운동, 소화 등등의 서로 다른 기능들을 지닌 발전된 동물 유기체에서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일상적인 표상에 따르면 지성에게서 가장 멀리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활동 영역과 분야들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없어서는 안 되는바, 이 결여가 사실인 그 정도로 그러한 것은 결함으로서 여겨져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특히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에 적용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예술에서는 개념에 따라 서로 다른 미의 형식들이 또한 이러한 그 형식들의 구별에서 견지되어 표현된다는 점에서 지성이 모습을 나타낸다.
똑같은 것이 더 나아가 개별적인 예술작품들에도 적용된다.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성격이 그 순수성과 규정성에서 관철되고, 그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서로 다른 목적과 관심들이 명확하고 결정적으로 서술되는 것은 희곡 작품의 미와 완성에 속한다.
다음으로 종교적 영역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내용과 파악의 그 밖의 상이성을 도외시한다면)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가 북유럽 신화에 대해 지니는 장점은 본질적으로 전자에서는 개별적 신 형상들이 조형적 규정성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반해, 후자에서는 그것들이 흐릿한 무규정성의 안개 속에서 서로 뒤섞인다는 점에 존립한다.
마지막으로 철학 역시 지성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거의 특별히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철학함에는 무엇보다도 우선 각각의 모든 사상이 그 완전한 정확성에서 파악되어야지 모호하고 무규정적인 것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속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또한 지성은 너무 멀리 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되곤 하는데, 거기에는 지성적인 것이란 당연히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하며, 좀 더 자세하게는 지성적인 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 대립물로 전화하는 종류의 것이라고 하는 올바른 것이 놓여 있다.
추상들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은 청년의 방식인 데 반해, 삶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추상적인 이것-아니면-저것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을 붙잡는다.
변증법적 계기는 그러한 유한한 규정들의 고유한 자기 지양이자 그것들의 대립된 규정들로의 이행이다.
1.변증법적인 것은, 지성에 의해 그 자체로 분리되어 받아들여지면, 특히 학문적 개념들로 제시되면 회의주의를 이룬다.
회의주의는 변증법적인 것의 결과로서 단순한 부정을 포함한다.
2.변증법은 보통 자의에 의해 일정한 개념들에서의 혼란과 그 개념들에서 모순의 단순한 가상을 산출하는 외적인 기예로서 여겨지며, 그리하여 이 규정들이 아니라 이 가상이 허무한 것이고, 그에 반해 지성적인 것은 오히려 참된 것이다.
종종 변증법은 또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이치 추론의 주관적인 변덕의 체계 그 이상이 아니기도 한데, 거기에는 내실이 없고 그 불모성은 그러한 이치 추론을 산출하는 그러한 명민함으로 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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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특유한 규정성에서의 변증법은 오히려 지성 규정들과 사물들 및 유한한 것 일반의 고유한 참다운 본성이다.
반성은 우선은 고립된 규정성을 넘어감이자 그 규정성의 관계시킴인바, 그에 의해 이 규정성은 관계 속에 정립되는데, 그야 어쨌든 그것은 그 고립된 타당성에서 유지된다.
그에 반해 변증법은 다음과 같은 내재적 넘어감인바, 거기서는 지성 규정들의 일면성과 제한성이 바로 그것이 그것인 바의 것으로서, 요컨대 그 규정들의 부정으로서 나타난다.
모든 유한한 것은 이러한 것, 즉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변증법적인 것은 학문적 전진의 운동하는 영혼을 이루며, 오로지 그에 의해서만 내재적 연관과 필연성이 학문의 내용으로 들어가는 원리이고, 아울러 변증법적인 것에는 일반적으로 유한한 것 너머로의 외면적이지 않은 참다운 고양이 놓여 있다.
변증법적인 것을 적절히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은 지극한 중요성을 지닌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현실에서의 모든 운동과 모든 생명 및 모든 활동의 원리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인 것은 또한 참으로 학문적인 모든 인식의 영혼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서 공존하라
[자신의 삶을 살고 타인의 삶을 살게 하라]leben und leben lasen
따라서 하나가 타당하고 또한 다른 것도 타당하다는 격언에 따르면 추상적 지성 규정들에 머물지 않는 것은 단적인 공정성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하자면 유한한 것은 단순히 외부로부터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지양되고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의 반대로 이행한다.
가령 사람들은 예를 들어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서는 그 죽음을 단지 외적인 상황들에서만 그 근거를 지니는 어떤 것으로서 바라보는데, 그러한 고찰 방식에 따르면 살아 있다는 것과 또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의 두 가지 특수한 특성이다.
그러나 참다운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 즉 삶 그 자체가 죽음의 씨앗을 자기 안에 담지하며, 일반적으로 유한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와 모순됨으로써 자기를 지양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변증법은 단순한 궤변법과 흔동되어서는 안 된다.
궤변법의 본질은 바로 일면적이고 추상적인 규정들을 그 고립에서 그 자체로 타당하게 만드는 데 존립하는바, 그러한 행위는 그때그때의 개인과 그의 특수한 상황의 이해관계를 수반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행동과 관련해서는 내가 실존한다는 것과 내가 실존을 위한 수단을 가진다는 것이 본질적 계기이다.
그러나 그 경우 내가 이 측면, 즉 나의 복지라는 이 원리를 그 자체로 끄집어내고서는 그로부터 나는 도둑질해도 좋다거나 나의 조국을 배반해도 좋다는 결론을 끌어낸다면, 그것은 궤변이다.
그 마찬가지로 나의 행동에서 나의 주관적 자유는 내가 행하는 것에 있어 내가 나의 통찰과 확신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인 원리이다.
그러나 내가 오로지 이 원리로부터만 이치 추론한다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궤변이며, 그와 더불어 인륜의 모든 원칙이 무너질 것이다.
변증법은 그러한 행위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바로 사물들을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고찰하는 데로 귀착하는바, 그러한 고찰에서는 더 나아가 일면적인 지성 규정들의 유한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야 어쨌든 변증법은 철학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인들 가운데서 플라톤이 변증법의 창시자로 불리는데, 실로 그렇게 불리는 것이 정당한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 변증법이 처음으로 자유로운 학문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형식으로 출현하는 한에서다.
소크라테스에게서 변증법적인 것은 그의 철학함의 일반적 성격과 일치하여 아직은 지배적으로 주관적인 형태, 요컨대 아이러니의 형태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변증법을 일단은 일상적 의식 일반에게로, 그러고 나서는 특히 소피스트들에게로 향하게 했다.
그 경우 그는 자신의 대화들에서 이야기의 주제가 된 사태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취하곤 했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온갖 종류의 물음을 던졌고, 그리하여 그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그들에게 처음에는 올바른 것으로서 나타났던 것의 대립물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소피스트들이 자기들을 교사라고 불렀을 때, 소크라테스는 일련의 물음에 의해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가 모든 배움이 단순히 상기일 뿐이라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플라톤은 그의 엄밀한 학문적 대화편들에서 변증법적인 취급을 통해 일반적으로 모든 고정된 지성 규정들의 유한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예를 들어 『파르메니데스」에서 하나로부터 여럿을 도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여럿이 다만 자기를 하나로서 규정하는 것일 뿐인지를 보여준다
그러한 위대한 방식으로 플라톤은 변증법을 취급했다.
근래에 변증법을 다시 상기시키고 그것이 새롭게 존엄을 지니도록 하되, 더욱이 이미 논의한 이른바 이성의 이율배반들을 관철함으로써 그렇게 한 이는 누구보다도 칸트였다.
이율배반들에서는 결코 근거들에서의 단순한 우왕좌왕이나 한갓 주관적일 뿐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모든 추상적 지성 규정이 어떻게 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을 제공하는 대로만 취해지게 되면, 직접적으로 그 대립물로 전화하는 것인지를 제시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지성이 아무리 변증법에 대해 반대하곤 한다고 할지라도, 변증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단순히 철학적 의식에 대해서만 현존하는 것으로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여기서 다루어지는 바로 그것은 또한 이미 그 밖의 모든 의식과 일반적 경험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증법적인 것의 예로서 고찰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유한한 것이 확고하고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고 무상한 것이며, 이러한 것이 유한한 것의 변증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바, 이러한 변증법에 의해 그 자체에서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의 유한한 것은 또한 직접적으로 자기인 바의 것 너머로 추동되어 자기의 대립물로 전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에서 지성이 신의 선함에 관한 표상에 포함된 바로 그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이야기되었다면, 이제부터는 변증법에 대해 똑같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의 원리가 신의 권능(위력)에 관한 표상에 상응한다고 주의해둘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사물(다시 말하면 모든 유한한 것 그 자체)이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와 더불어 우리는 아무리 확실하고 확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지라도 그 어떤 것도 그 앞에서 존립할 수 없는 보편적인 저항 불가능한 위력으로서의 변증법에 대한 직관을 지닌다.
물론 그 경우 이 규정을 가지고서 신적 본질의 깊이, 신의 개념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그러나 분명 그 규정은 모든 종교적 의식에서 본질적 계기를 형성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 변증법은 또한 자연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모든 특수한 영역과 형태들에서도 자기를 관철한다.
예를 들어 천체의 운동에서 그렇다.
하나의 행성은 지금 이 장소에 있지만, 그 자체에서 또한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이기도 하며, 스스로 운동함으로써 이러한 자기의 타자 존재를 실존하게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원소들도 자기를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입증하며, 기상학적 과정은 그것들이 지닌 변증법의 현상이다.
똑같은 원리 바로 그것이 그 밖의 모든 자연 과정의 기초를 형성하며, 그에 의해 동시에 자연은 자기 자신 너머로 추동된다.
정신적 세계에서 그리고 좀 더 자세하게는 법적인 것과 인륜적인 것의 영역에서 변증법의 출현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여기서는 다만 일반적 경험에 따르자면 하나의 상태나 하나의 행위의 극단적인 것이 어떻게 그것의 대립물로 전화되곤 하는가 하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뿐인데, 그 경우 그러한 변증법은 또한 다면적으로 격언들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부정의’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언명된 것은 추상적 정의[법]가 그 극단으로 치달으면 부정의(불법)로 전화한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에서는 무정부의 극단과 전제 정치의 극단이 상호적으로 서로를 초래하곤 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려진 저 격언들, 즉 교만은 불행을 가져온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등등에서 인륜적인 것의 영역에서 개별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변증법에 대한 의식을 발견한다.
또한 감각, 즉 육체적 감각뿐만 아니라 정신적 감각도 자기의 변증법을 지닌다.
아픔의 극단과 기쁨의 극단이 어떻게 서로 이행하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기쁨으로 채워진 심정은 눈물 속에서 가벼워지며, 가장 내밀한 비애는 상황에 따라 웃음을 통해 고지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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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는 단순히 회의론으로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
회의주의는 오히려 자기의 사태, 다시 말하면 모든 유한한 것의 허무함을 단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오직 의심할 뿐인 자는 여전히 자기의 의심이 풀릴 수 있을 것이며, 자기가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동요하는 이런저런 규정된 것이 확고하고 참다운 것으로서 나타나게 되리라는 희망 속에 서 있다
그에 반해 본래적인 회의주의는 지성의 모든 고정된 것에 대한 완전한 절망이며, 그로부터 나타나는 신념은 부동심과 자기 내 평정의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특히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에게서 서술된 것으로 발견하고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교조적 체계에 대한 보완으로서 후기 로마 시대에 형성된 바의 고원한 고대 회의주의이다.
이 고원한 고대 회의주의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저 근대 회의주의, 즉 한편으로는 비판철학에 선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비판철학으로부터 출현한 회의주의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후자는 다만 초감성적인 것의 진리와 확실성을 부인하고 그에 반해 감성적인 것과 직접적 감각에 현존하는 것을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으로서 묘사하는 데만 존립한다.
그야 어쨌든 회의주의가 오늘날에도 자주 모든 긍정적[적극적] 지식 일반이나 따라서 또한 그에
있어 긍정적 인식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의 철학의 저항하기 어려운 적으로서 여겨진다면, 그에 반해 주의해야 할 것은 회의주의를 두려워해야 하고 그에 맞설 수 없는 것은 실제로는 다만 유한하고 추상적으로 지성적인 사유일 뿐인 데 반해, 철학은 회의주의를 자기 내의 하나의 계기로서, 요컨대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포함한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 경우 철학은 회의주의에서 그러한 것처럼 변증법의 한갓 부정적인 결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회의주의는 자기의 결과를 단순한 부정으로서, 다시 말하면 추상적 부정으로서 견지한다는 점에서 그 결과를 오인한다.
변증법이 자기의 결과로 부정적인 것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부정적인 것은 바로 결과로서 동시에 긍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것은 그것이 그로부터 결과하는 바로 그것을 지양된 것으로서 자기 안에 포함하며 바로 그것 없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논리적인 것의 세 번째 형식, 요컨대 사변적인 것 또는 긍정적-이성적인 것의 근본 규정이다.
사변적인 것 또는 긍정적-이성적인 것은 대립 속에 있는 규정들의 통일, 즉 규정들의 해소와 그것들의 이행에 포함된 긍정적인 것을 파악한다.
1.변증법은 긍정적인 결과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규정된 내용을 지니기 때문이거나 그 결과가 참으로는 공허한 추상적 무가 아니라 일정한 규정들의 부정이기 때문인바, 그 규정들은 바로 그 결과가 직접적 무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인 까닭에 결과 속에 포함되어 있다.
2.따라서 이 이성적인 것은 비록 사유된 것이자 또한 추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통일이 아니라 구별된 규정들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철학은 단순한 추상들이나 형식적 사상들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으며, 오로지 구체적 사상들과만 관계한다.
3.사변적 논리학에는 단순한 지성-논리학이 포함되어 있으며, 후자는 전자로부터 곧바로 만들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변적 논리학으로부터 변증법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것은 통상적인 논리학, 즉 그 유한성에서 무언가 무한한 것으로서 여겨지는 함께 모아놓은 여러 사상 규정들에 관한 역사학적 이야기인 바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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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인 것은 그 내용에 따라서는 단지 철학의 소유물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교양과 정신적 발전의 어떤 단계에 처해 있든지 간에 그 모든 인간에 대해 현존한다고 말해야만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예로부터 정당하게도 이성적 본질로서 불려왔다.
이성적인 것에 관해 아는 경험적으로 일반적인 방식은 우선은 선입견과 전제의 방식이며, 이성적
인 것의 성격은, 앞의 논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무조건적이고 그리하여 자기의 규정성을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는 그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그가 신에 관해 이 신을 단적으로 자기 자신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아는 한에서, 무엇보다도 우선 이성적인 것에 관해 안다.
더 나아가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조국과 그 법률들에 관한 시민의 앎도, 그에게 이것들이 무조건적인 것인 동시에 자기의 개별적인 의지를 지니고서 스스로 그에 복종해야 하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여겨지는 한에서 이성적인 것에 관한 앎이며, 같은 의미에서 아이의 앎과 의욕마저도 이미 그 아이가 자기 부모의 의지를 알고 그것을 의욕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사변적인 것 일반은, 그것이 사유되는 한에서, 이성적인 것(좀 더 정확하게는 긍정적-이성적인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변이라는 표현은 매우 모호한 동시에 부차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곤 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결혼의 모험이나 상업 투기에 대해 말하는데, 그 경우 거기서 대강 이해되는 것은 다만 한편으로는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변[모험• 투기]의 내용을 형성하는 바로 그것은 우선은 단지 주관적인 것일 뿐이지만, 그러한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현되거나 객관성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사변과 관련한 이러한 보통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념에 관해 주의해두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 적용되는데, 거기에는 더 나아가 또 다른 주의가 연결된다.
그것은 이미 좀 더 교양이 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변에 대해 분명히 한갓 주관적인 것의 의미에서 이야기된다고 하는 것, 요컨대 자연적이거나 정신적인 상태와 관계들에 대한 일정한 견해가 물론 단순히 사변적으로만 받아들여지면 아주 아름답고 올바를 수 있지만, 경험은 그것과 일치하지 않으며, 현실에서는 그와 같은 것이 허용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양식으로 이야기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 경우 그에 반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변적인 것이란 그것의 참된 의미에 따라서는 잠정적으로도 결정적 으로도 한갓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히 지성이 그에 머무르는 저 대립들을(따라서 또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대립도) 지양된 것으로서 자기 안에 포함하며, 바로 그리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체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총체성으로서 입증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사변적 내용은 또한 일면적인 명제 속에서 언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것이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통일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물론 올바르지만, 여기서는 오직 통일만이 언명되고 이것에 강세가 놓이는 한에서 일면적인 데 반해, 실제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은 동일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구별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변적인 것의 의미에 관해 여기서 좀 더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사변적인 것이 이전에 특히 종교적 의식 및 그것의 내용과 관련하여 신비적인 것으로서 표현되곤 했던 바로 그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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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비적인 것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나 불가해한 것과 같은 의미로서 여겨지며, 그 경우 이러한 불가사의한 것과 불가해한 것은 그 밖의 교양과 감수 방식의 상이성에 따라 한편에 의해서는 본래적이고 참다운 것으로서, 그러나 다른 한편에 의해서는 미신과 기만에 속하는 것으로서 여겨진다.
이에 관해 우선 주의해야 하는 것은 신비적인 것이 물론 불가사의한 것이지만 오직 지성에 대해서만 그러하며, 게다가 단순히 추상적 동일성이 지성의 원리지만 (사변적인 것과 같은 의미의 것으로서의) 신비적인 것은 지성에게 오직 그 분리와 대립에서만 참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은 규정들의 구체적 통일이라고 하는 바로 그 까닭에 그러하다는 점이다.
그 경우 신비적인 것을 참다운 것으로서 인정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단적으로 불가사 의한 것이라는 데서 끝맺고 만다면, 그리함으로써 그들 편에서 언명되는 것은 다만 사유가 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동일성 정립의 의미만을 지닌다는 것과 바로 그런 까닭에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유를 포기하거나, 또한 그렇게 말해지기도 하곤 하듯이, 이성을 붙잡아 두어야만 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추상적으로 지성적인 사유는 확고하고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끊임없는 지양으로서 그리고 자기의 대립물로의 전환으로서 입증되며, 그에 반해 이성적인 것 그 자체는 바로 대립된 것들을 관념적인 계기로서 자기 안에 포함한다.
그리하여 모든 이성적인 것은 동시에 신비적인 것으로서도 표현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말하는 것은 다만 이성적인 것이 지성을 넘어간다고 하는 것일 뿐, 결코 이성적인 것 일반이 사유에 접근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것으로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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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은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존재론(존재에 관한 학설) Die Lehre von dem Sein.
2.본질론(본질에 관한 학설) Die Lehre von dem Wesen.
3.개념과 이념론(개념과 이념에 관한 학설) Die Lehre von dem Begriffe und der Idee.
요컨대,
1.사상의 직접성, - 즉 개념 자체[그 자체에서의 개념]에서의
2.사상의 반성과 매개, - 즉 개념의 대자존재와 가상에서의,
3.사상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있음과 사상의 발전된 자기 곁에 있음 - 즉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인 개념에서의 사상에 관한 학설들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제시된 논리학의 구분은 사유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 전체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선취로서 여겨져야 하며, 그에 대한 정당화나 증명은 사유 자신의 완수된 논구로부터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에서 증명한다는 것은 대상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의해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가 바로 그것인 바의 것으로 되는지를 제시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급된 사상 또는 논리적 이념의 세 개의 주요 단계가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개념이 비로소 참된 것이자 좀 더 자세하게는 존재와 본질의 진리이며, 그 양자는 고립되어 그 자체로 견지되면, 그리하여 동시에 참되지 않은 것으로서 여겨져야 하는바, 존재는 그것이 겨우 직접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에, 그리고 본질은 그것이 겨우 매개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우선 만약 사정이 그러하다면 왜 곧바로 참된 것에서가 아니라 참되지 않은 것에서 시작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바지하는 것은 진리란 바로 자기를 그러한 진리로서 확증해야 하는바, 여
기서, 즉 논리적인 것 내부에서 그 확증은 개념이 자기를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자신과 매개된 것으로서,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동시에 참으로 직접적인 것으로서 입증하는 것에 존립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논리적 이념의 세 개의 단계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양식에서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형태에서 나타난다.
즉, 진리인 바의 신은 오직 우리가 동시에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즉 신과 구별되는 자연과 유한한 정신을 참되지 않은 것으로서 인정하는 한에서만 이러한 그의 진리에서, 다시 말하면 절대정신으로서 우리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