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9일 오늘의 역사
2012년 북-미 세 차례 고위회담 끝에 2.29 합의,
합의내용=북한측은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유예, 우라늄농축프로그램 포함 영변의 핵활동 중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등을, 미국 측은 24만 톤의 영양지원 약속
2004년 천재시인 이상의 전 부인이자 천재화가 김환기의 부인이었던 수필가 김향안씨 별세
2004년2월29일 뉴욕 자택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수필가 김향안(金鄕岸·본명 변동림) 여사는 한국 근대 예술계의 뮤즈였다.
그는 천재 시인 이상(李箱·1910~1937)의 유일한 아내였으며, 한국 그림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힌 수화 김환기(1913~1974) 화백의 평생을 지킨 아내이자 컬렉터였고 ‘김환기 미술’의 완성자였다.
김 여사는 아들 김화영 환기미술관 이사장 내외 등 가족과 지인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3일 뉴욕 근교 웨스트체스터의 공동묘지에 있는 김환기 화백 묘역 옆에 묻혔다.
지난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한 뒤 1997년 별관 겸 기념관인 ‘수향산방’을 세우면서 “수화 선생은 늘 ‘사람은 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라고 되뇌었는데 이 수향산방이야말로 우리 부부의 50년 된 보금자리이자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그는 꿈을 꾸듯 수화의 곁으로, 둘만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훌훌 떠났다.
김 여사는 천재 시인의 젊은 아내였고, 천재 화가의 반려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목받는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천재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천사였을 뿐만 아니라 수필가와 미술 비평가로서 독자적인 예술의 길을 추구했던 여성이었다.
경기고녀(현 경기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온 김 여사는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1936년 이상을 만났을 때, 신예 수필가로 문단에 입문한 상태였다.
이상의 요절로 1년 만에 결혼 생활을 끝낸 김 여사는 수필을 계속 썼고, 수화 김환기와는 1944년 결혼했다. 그러나 김 여사는 1956년 “10년 시집살이를 하다 보니 글 쓰고 책 읽는 저만의 일이 하고 싶어졌다”며 프랑스 파리로 홀로 떠나 미술 평론 공부를 시작했다.
김 여사의 유학은 1년 뒤 김환기 화백으로 하여금 홍익대 미대 교수직을 버리고 파행을 결단토록 했다. 김 여사는 김 화백이 파리 화단에서 주목받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 자신의 글을 계속 썼다.
김 여사는 수필집 ‘파리’ ‘카페와 참종이’ ‘우리끼리의 얘기’ 등을 통해 파리에서의 이국 체험을 통한 내면 성찰, 예술을 매개로 한 김환기 화백과의 사랑 등등을 간결한 문체로 그려냈다.
김 여사는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1992년 환기미술관을 건립할 당시, 김 화백의 작품을 형상화한 타피스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겠다고 결심, 프랑스의 전통 타피스리 제작소인 고블랭에서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설계와 내부 장식 등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과 설전을 벌이면서까지 취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부암동 환기미술관은 마루 한쪽 한쪽까지 환기 그림의 느낌과 결을 맞춘 것으로 유명하다.
김 여사는 일생의 짧은 부분을 나누었던 이상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 언급하기를 생전에 꺼렸다. 다만 이상에 대해 “천재는 미완성이다. 사람들은 더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그는 두 번째로 만나 영원한 동반자로 삼은 천재 수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수화의 예술에 대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며 “그에게 자연은 곧 인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996년 전자주민카드 시범 발급
1998년부터 17세 이상 국민에게 발급될 ‘전자주민카드’가 29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주민 1천여명에게 처음으로 시범 발급됐다.
이와 함께 과천 정부 제2청사, 과천시청, 중앙동사무소, 과천경찰서 등 정부 기관과 5개 병원, 3개 약국 등에 전자카드 판독을 위한 단말기가 설치돼 오는 3월 1일 부터 6월 말까지 4개월간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내무부는 이날 장관, 통산부 등 관계부처 간부와 시민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범 제작된 전자주민카드를 선보이는 한편 무인 발급기로 주민등록 등·초본 및 인감증명서를 발급하고 휴대용 단말기를 이용해 운전면허를 확인, 범칙금 통고서를 발급하는 등 시연회를 가졌다.
내무부는 과천 중앙동에 이어 내년에 한두곳을 추가로 지정, 전자주민카드를 시범운영할 계획이다.
이날 선보인 전자주민카드는 신용카드 크기의 플라스틱 카드 형태로 앞면에 소지자의 사진과 함께 손톱만한 크기의 IC(집적회로)를 내장한 모습이었다.
이 IC에는 소지자의 주민등록 등·초본, 운전면허, 의료보험, 인감, 지문, 국민연금 등 7개 분야 20여개 사항이 입력돼 있다.
김우석 내무부 장관은 이날 “전자주민카드의 분실에 대비,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해 개인별 비밀번호를 부여하거나 지문을 이용, 개인정보 열람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하고 “관련 법령 및 제도의 개선과 시범운영을 통해 주민카드 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내무부는 전자주민카드 사업을 위해 올해 4백78억원 등 오는 98년까지 2천7백35억원을 투입키로 하고 우선 내년까지 17세 이상 국민의 사진, 인감, 지문의 화상 데이터베이스와 함께 주민등록, 운전면허 등에 관한 종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4천 5백여개 기관과 온라인 연결망을 갖춘 ‘전자주민카드 발급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
1996년 일제 강요에 의한 홍난파, 전영택 등의 친필 전향서 발견
작곡가 홍난파(본명 홍영후), 소설가 전영택 등 일제시대 한국 유명인사들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작성한 친필 사상전향서가 대량으로 발견됐다. 짧게는 3쪽에서 길게는 20쪽에 달하는 이 전향서들은 일제의 군국주의가 극에 달했던 1937년 작성된 것으로 지난해 본지가 단독으로 발굴, 시리즈로 연재했던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조선총독부 비밀문서’ 정리과정에서 드러났다.
이들의 전향서가 수록돼 있는 경종경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14868호에는 이외에도 목사 이묘묵, 유형기, 교육가 김여제를 비롯, 오현준, 이명혁, 차상달 등 당시 저명인사들의 친필 전향서가 포함돼 있다.
이 전향서와 함께 “이들을 고용했던 기관장들이 사상을 문제삼아이들을 해고시키고 난 뒤… 전향시키며 쓴 것” 이라는 내용의 기록도 함께 발견돼 일제가 이들의 사상 전향을 위해 집요한 탄압을 가한 사실을보여주고 있다.
홍난파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 이라는 제목의 전향서에서 “사회와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보호하려는 제국의 정책을 거부하는 것은 민족 전체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 이라며 “이는 동아시아의 평화까지 위협하는 것” 이라고 적었다.
또 소설가 전영택의 전향서를 보면 “불초 본인은 깨달은 바 있어 그릇된 민족적 편견을 청산하고 편협된 정치적 관념을 품지않을 것을 맹세한다” 며 “대세와 시국에 비춰 제국의 신민으로서 충실하게 지내겠다” 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는 또 “조선이 제국에 병합됨으로써 조선인민은 도탄에서 구제됐다” 며 “이제 (조선)인민은 행복한 광명을 향해 달리고 있다” 고 표현했다. 이 기록에는 이밖에 작곡가 현제명 등도 전향서를 작성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기록을 공개한 전 아세아문제연구소장 교수는 “이들 전향서는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인사들의 전향 사실을 공개, 식민정치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 밝혔다.
1996년 페루의 포셋 항공(Faucett Airlines) 플라이트 251편이 안데스 산맥에 충돌, 123 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
1984년 트뤼도 캐나다 수상, 사임 발표
지난 15년동안 캐나다의 정부수반이자 자유당의 총수로서 일해왔던 트뤼도 수상이 1984년 2월 29일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누군가가 이 일을 떠맡을 적절한 시간이 왔다”고 말했다. 그 특유의 화려한 스타일이 정치 중재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에 가끔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왔던 트뤼도는 1968년에 당시 레스터 피어슨의 후임으로 수상에 올랐다.
그는 1979년도에 마찬가지로 진보적 보수파이던 피어슨에 패배하고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났으나 같은 해 조 클라크 정부가 붕괴되자 재출마해서 당선됐다. 트뤼도는 1970년에 중공을 승인함으로서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 입문 3년 만인 48세에 총리가 된 트뤼도는 카리스마와 유연한 정책으로 격변의 캐나다 현대사를 요리한 정치인이었다.
트뤼도는 몬트리올대 헌법학 교수를 거쳐 1965년 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진출했다. 2년 후 법무장관이 돼 낙태와 동성애 규제 완화법을 만들었다. 재임 중 업적으로 프랑스어를 영어와 함께 공용화하고 헌법을 개정해 인권헌장을 명문화한 것이 꼽힌다. 2000년 9월 28일 파킨스씨병과 전립선암을 앓다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1980년 서울지하철 3,4호선 일제히 착공
1980년 정부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 단행
1980년 2월 29일 최규하 대통령이 오전 10시를 기해 윤보선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 함석헌옹과 지학순 주교를 포함한 긴급조치 위반자 6백 87명을 복권시켰다.
복권 대상에서 반공법 등 공안범죄위반자와 일반 파렴치범죄자는 원칙적으로 제외되나, 이날은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자이지만 형량이 가볍고 신분이 교수와 학생이라는 점을 참작해 특별사면과 함께 특별복권시켰다. 복권자들의 신분은 학생이 3백 73명으로 가장 많았고, 김대중 등 정치인 22명, 함석헌옹 등 종교인 42명,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등 기타 2백 17명이었다. 이들은 복권조치에 따라 이때까지 형선고의 효력으로 정지됐던 선거권ㆍ피선거권ㆍ공직임용자격 등 각종 공민권을 회복하게 됐다.
이날 복권조치는 정부수립 후 다섯번째의 일반복권과 세번째의 특별복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향후 민주화 활동에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날 복권조치에 대해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이날을 계기로 이 땅에 다시는 인권탄압과 보복정치가 발붙일 수 없도록 민주정치를 굳건한 기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6년 현대자동차 포니1호 첫 출고
1976년 여자탁구, 서독오픈 개인단식전서 중국 꺾고 우승
1964년 영국 이글항공기 오스트리아산중에 추락 83명 사망
1964년 신성일 주연 ‘맨발의 청춘’ 공전의 히트
한국 영화사에서 주연을 가장 많이 한 배우는 두말할 것 없이 신성일(1937~)과 김지미(1940~)이다. 좀처럼 깨지지 않을 대기록의 주인공 김지미는 1957년 10월에 개봉된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80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신성일은 1960년 데뷔한 이래 그가 출연한 530여 편의 영화 중 50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신성일은 당대의 잘나가는 여배우 118명과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성기 때는 한 해 65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었고 하루에 8편의 영화를 찍었던 적도 있었다.
신성일의 데뷔작은 1960년 1월 28일에 개봉한 ‘로맨스 빠빠’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제작을 하고 김진규와 최은희, 허장강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다.
무명의 신성일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는 1962년 11월 9일에 개봉한 ‘아낌없이 주련다’(감독 유현목)였다. 연상의 여인과 젊은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기 전까지 신성일은 그저 잘생긴 신인배우에 불과했다.
이후 ‘가정교사’(1963), ‘청춘교실’(1963) 등에 출연하던 신성일이 전성기를 맞은 것은 1964년이었다. 그해 2월 29일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한 ‘맨발의 청춘’(감독 김기덕)이 그 시작이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한 이 영화 후 신성일은 1960년대 부동의 청춘스타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는 단 18일 동안만 찍었는데도 연일 매진 기록을 세워 서울에서만 21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당시 서울 인구 350만 명에 상영관도 단 한 곳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광복 이후 한국 영화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사건’이었다.
1960년 모로코에 대지진
1952년 한국, 중국 항공협정 체결
1928년 스위스의 무대장치가 아돌프 아피아 사망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은 숲의 잎사귀가 아니라 마음속에 보이는 숲이다.”(아돌프 아피아의 ‘음악과 연출’(1899)에서).
극적 사건의 재현에만 머물렀던 자연주의 무대 이론에 반기를 들며 ‘조명’ 등을 이용한 무대 기술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스위스 무대장치가 아돌프 아피아가 1928년 2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서양 연극계는 그전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연극의 다양한 분야들을 골고루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피아역시 그러했다. 그는 빛과 어둠 모두를 연출에 있어 중요한 표현의 수단으로 취급해 표현주의적 ‘조명’ 기술의 시도를 꾀했다. 그는 19세기에 유행하던 평면적이고 회화적인 무대장치를 과감히 배격하고, 조명의 광선과 그림자의 효과를 중시한 입체적·조소적인 무대공간을 창조했다.
특히, 1830년대부터 가스등(燈)을 이용하게 되면서 무대조명은 일대전환을 맞이하게 됐는데, 아피아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푸트라이트(footlights)를 발명해 배우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했다. 그에 이르러 오페라 무대는 이제 지휘자가 아닌 연출가에 의해 주도되는 ‘연출가의 시대’ 를 맞이하게 됐다. 그의 주요저서로는 ‘바그너극의 연출에 대하여’(1895)와 ‘음악과 연출’(1899) 등이 있다.
1912년 발칸동맹 결성
1892년 베링해 어업에 관해 미국, 영국 중재협정 성립
1885년 광혜원 설립
1866년 천주교 신자 남종삼 체포
1792년 롯시니 영국 작곡가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