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종선의 대성자 신수스님
선종 5조 홍인스님 제자로 수행 6년만에 동산법문 계승 ‘관심론’서 표방하는 스님 선법은 좌선섭심(坐禪攝心) 대통선사(大通禪師)
신수(神秀, 606∼706)스님은 선종 제5조 홍인스님의 제자이자 중국 북종선(北宗禪)을 대표하는 선사이다. 스님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변주위씨(州尉氏; 河南省 尉氏縣)가 본향이다. 스님은 신장이 8척이고, 눈썹이 길고 귀가 커서 귀인의 면모를 갖춘 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유학 및 노장(老莊)의 전적 등을 읽어 전통적인 학예에도 상당한 교양을 갖추신 분이었다.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세속세계에 뜻이 없어 13세에 출가했다. 출가 후 교학공부에 매진하여 삼장(三藏)의 경론(經論)과 사분율의(四分律儀)에 통달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실참(實參)을 위해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스님은 도를 찾아서 유명한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나이 46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황매현의 쌍봉산 홍인 선사를 참문하게 되었다.
홍인스님은 한눈에 그가 법기(法器) 임을 알고 성심껏 지도하였다. 스님은 홍인스님 문하에서 수행한 지 6년 만에, 스승으로부터, “동산(東山)의 법이 모두 신수에게 있다.” 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불도의 깊은 경지를 증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인스님이, 석존이 가섭을 인가한 고사를 의용하면서, 스님에게 명하기를 발을 씻고 자기와 병좌(竝坐)토록 하였다. 스승의 이 말씀을 들은 스님은 울면서 물러나 멀리 몸을 숨기고, 이후 십수 년간 흰옷을 입고 벽관과 지관의 수행을 계속하다가, 70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승록(僧錄)에 이름을 올리고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의 주지를 맡았다. 대족(大足) 원년(701) 스님은 95세의 고령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초청을 받아 입경(入京)한다.
스님이 종려나무로 엮은 가마를 타고 입궐하자, 측천무후가 스님의 뒤를 따라 전상(殿上)에 오르고 정례(頂禮)하여 우러러 받들고 물었다. “누구의 종지를 전해 받았습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기주(州)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이어 받았습니다.”
무후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경전에 의거합니까?”
스님이 다시 대답했다.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거합니다.”
이 말을 들은 무후가 말했다. “만약 수도를 논한다면 동산법문을 능가할 것이 없다.”
스님의 입내설법(入內說法)이 있은 이후, 스님이 도신. 홍인스님의 동산법문을 계승한 것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님의 선법을 알 수 있는 기본자료는〈관심론(觀心論)〉이다. 〈관심론〉에서는 청정한 불성을 자각하여 지혜로서 염심(染心)을 제거하는 해탈에의 실천구조를 정(淨). 염(染) 이심(二心)의 논리를 응용하여 설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스님은 마음의 작용을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이라는 두 종류의 차별심으로 본다. 스님에 의하면 정심이란 무루(無漏). 진여(眞如)의 마음이며, 염심이란 유루(有漏).무명(無明)의 마음이다. 이때 정심은 항상 선인(善因)을 원하고, 염심은 항상 악업(惡業)을 생각하고 있다. 이때 진여를 자각하여 염심이 없으면 바로 성인이 되지만, 무명에 훈습되면 삼계(三界)에 침륜(沈淪)하게 되어 범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추어 각관(覺觀)하여 항상 밝게 되면 자연히 우리는 삼취정계(三聚淨戒)인 보살의 자비로 승화하게 된다. 결국〈관심론〉에서 표방하는 스님의 선법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오로지 마음을 쉬고 전력으로 섭심(攝心)이라는 ‘좌선섭심(坐禪攝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신수 스님의 선사상을 전하는 자료들은 모두 남종선(南宗禪) 사람들에 의해서 요약되고 발췌되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둔황 자료의 출토와 더불어 북종선 관계의 선문헌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스님의 선법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신수 스님의 선사상이 도신. 홍인의 동산법문을 계승하면서, 그 바탕 위에 당시 국제도시였던 당의 수도 장안(長安)의 화려한 교학불교를 종합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덕진/ 창원전문대 교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