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3일
제나라 주유기
제남의 아침
모닝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짐을 챙기고 이층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방으로 올라와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봤다. 아침 해가 시가지에 금빛 햇살을 드리우고 저층 아파트 사이에 하늘을 찌르는 높이의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그 뒤로 호수와 숲이 있는 시민공원이 있다. 도로에는 버스, 승용차들이 열 지어 간다. 길 건너편에는 임치구인민의원 건물이 우람하다.
가방을 들고 방문을 나오며 장식으로 걸린 액자의 붓글씨를 다시 한 번 읽기를 시도하였다. 해서, 행서, 초서의 서체를 섞어서 쓴 예술적인 글씨가 달필이다. 내용은 송렴(宋濂)의 시, ‘호상(湖上)’이다.
湖上 호수 가에서
爲愛西湖好 서호(西湖)의 좋은 풍광 아끼어서
一步一長吟 한 걸음에 한 번 길게 시를 읊조린다.
黄鶯見人至 꾀꼬리가 사람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飛起度湖陰 날아올라 호수 남쪽으로 건너 가버리네.
생동감 넘치는 글씨는 단순하고 흡족한 획으로 호감을 주고, 시는 꾀꼬리 우는 호숫가의 봄날 풍경을 내 마음의 도화지에 그린다. 서예의 시각적인 미감과 시가 묘사하는 풍경이 내 마음 속에서 어울려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인류사에서 인문학 문명의 역사가 가장 일찍부터 발달한 중국에는 나의 눈이 닿는 곳마다 무궁무진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사진을 촬영하였다가 집에 와서 찾아보니, 시 원문에는 1구의 ‘서호(西湖)’가 ‘호광(湖光)’으로, 4구의 ‘음(陰)’이 ‘양(陽)’으로 되어 있다. 의미는 큰 차이가 없지만, 명 건국 초에 활동한 학자였던 그가 항주의 유서깊고 아름다운 서호의 풍경 속에서 노닐며 지은 시이다. 서호는 중국돈 1위안에도 등장하는 명승지이다.
송렴(1310~1381)은 오래(吳萊)의 제자이며 원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해 용문산(龍門山)에서 도사가 되어 숨어 살았다. 명 태조 주원장의 태자를 어릴 때부터 가르친 관료였다. 10족의 873명이 죽임을 당하여도 조카의 황제 자리를 찬탈한 영락제의 즉위 조서 작성을 거부한 방효유(方孝儒)의 스승이다. 손자가 호유용(胡惟庸)의 당파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서 태자와 황후의 구명 요청으로 목숨을 건지고 전 가족이 무주로 귀양 가는 도중에 기주(夔州)에서 병사했다. 명의 대표적인 개국공신으로 명나라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태사공(太史公)으로 불렸으며 <<원사(元史)>>의 편찬 책임자였다. <열강루기(閱江樓記)>, <<송학사문집(宋學士文集)>> 등이 있다.
호텔 로비에는 엄청난 크기의 꽃돌, 옥돌, 수정, 규화목화석 등의 수석들, 불두 등이 진열되어 있다. 수석에 조예가 깊은 유명준 샘이 사람들에게 수석을 설명해 주었다. 로비의 기념품 가게에는 그림과 골동품들이 가득하다. 춘추전국시대에 오랫동안 제나라의 수도였던 땅이다. 시대별로 문화층이 켜켜이 쌓여 있는 지역이다.
제나라 시대의 구름, 쌍조, 쌍마 문양의 와당, 위진남북조 시대의 백색 도기병과 붉은 칠을 한 토기, 청동기시대의 돌도끼, 청동거울, 회색 토기, 신석기시대 룽산문화의 흑도 솥, 도용, 황산 가을 풍경을 담은 대형 그림, 담배 피는 인민복 차림의 마오쩌똥이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까지 나의 눈을 즐겁게 한다. 골동품들이 진품이라면, 이렇게 팔아도 되는지가 의문이었고, 또 믿고 사고 싶지만, 공항에서 압수당할 것이라서, 사진기에 담아오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 여행 초장에 물건을 구입하였다가는 여행 내내 짐이 되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이곳은 땅만 파면 유물이 출토되기에 1미터 이상 파는 공사를 하면 무조건 당국에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곳의 농부들이 경작하다가 유물들을 많이 발견한다고 한다.
강태공묘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내린 곳은 길가에 있는 강태공 사당이었다. 붉은 기와를 이층으로 올리고 4개의 기둥이 일렬로 바치고 있으며 아름다운 단청을 입힌 목조 가옥 형태의 패방에는 '天齊至尊'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안쪽의 화강암 석조 패방에는 ‘丘穆公祀’라는 녹색 글씨가 미방(楣枋-上引枋)에, 좌우의 기둥에는 ‘祖由渭水源流遠, 宗始營丘世澤長’이라는 대련이 새겨져 있다.
사당은 최근에 건립하였다. 사당의 가운데에는 제 땅을 봉토로 받고 제후로 봉해진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 상이 모셔져 있다. 눈썹과 수염과 머리카락이 온통 백발이다. 여상은 70이 넘은 나이에 위수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사냥 나온 주 문왕에게 발탁된다. 문왕, 서백창이 그의 조부 고공단보가 나라를 일으킬 인물로 기다리던 분이라 하여 태공망이라 하였다. 문왕을 이어 무왕이 은의 주왕을 정벌할 때 군사를 이끌었다. 주나라가 천하를 장악하자 제일 먼저 강태공을 영구 땅의 제후로 봉하였다. 영구가 곧 우리가 와 있는 이곳 임치에 있는 제나라의 궁궐이 있던 지역이다.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 옆에는 2대 제후 정공과 관중을 등용하여 춘추시대의 패자로 부상시킨 16대 제후 환공의 상이 모셔져 있다. 사당의 벽에는 강태공의 일생과 제나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가 있다. 강태공은 대략 100세에 죽었다.
사당을 돌아 나와 뒤쪽으로 가니, ‘周師齊祖’라고 쓴 돌로된 패방이 있고, 그 안에 신라의 왕릉을 닮은 커다란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武成王姜太公衣冠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세워져 있다. 강태공은 사후에 문왕의 곁에 무덤을 썼지만 위치가 전해오지 않는다. 제나라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여 그의 의관을 묻은 무덤을 이렇게 만들었다.
무덤 둘레에는 화강암 호석과 난간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 아래쪽에는 측백나무가 돌아가며 심어져 있고, 봉분 위쪽으로는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다. 중국의 풍습으로는 무덤의 초목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무덤 뒤로 돌아가니 강태공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들이 시조를 기리는 비석들이 서 있다. 중국의 여씨, 구씨, 최씨, 고씨, 한국의 강씨 종친회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다. 진주강씨종친회 회장이 세운 비석의 뒷면에는 한글로 비문을 새겼다. 무덤을 돌아 나오니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못가에 정자가 있다. 강태공의 낚시를 떠오르게 하는 정원 조성이다.
관중묘
버스를 타고 치박 외곽에 있는 관중기념관으로 갔다. 입구에 손에 문서를 들고 있는 재상 관중의 큰 석상이 세워져 있다. 관중의 생애와 일생을 보여주는 전시관 출입문에는 ‘관포지교’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수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기 관중을 모친이 포대기에 싸서 안고 있는 모습, 시장에서 질그릇 장사를 하여 벌은 돈을 노모를 모셔야 하는 가난한 사정을 알고 관중에게 항상 많이 주는 포숙아의 모습, 옥에 갇힌 관중을 구명하고 환공의 재상이 되어 국정을 맡는 모습, 환공이 천하의 패자가 되어 제후들과 여러 차례 회맹하고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一匡天下) 모두 관중의 지모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재상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밀랍 인형 전시물이 관중의 생애를 잘 표현하였다.
‘생아자 부모, 지아자포숙아야’라고 하는 관중의 말이 눈에 띈다. 관중이란 인물이 있기까지는 친구를 마음 깊이 신뢰하고 이해하는 포숙아의 우정이 있었다. 관중이 경영하여 살기 좋은 나라가 된 제나라의 도읍 모습을 재현한 소품들, 전국시대의 화살촉도 보인다.
“一年之計莫如樹穀, 十年之計莫如樹木, 百年之計莫如樹人(일 년 계획은 곡식 농사를 짓는 것 만한 없고, 십 년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 만한 것이 없고, 백 년 계획은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만 한 것이 없다.)”,
“倉廩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곳간이 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하면 영욕을 안다.)”,
“地不堅非吾地 民不牧非吾民(땅이 방어가 견고하지 않으면 내 땅이 아니고, 백성이 다스리지 않으면 내 백성이 아니다.)”,
“海不讓水故能成其大, 山不讓石古能成其高(바다는 물을 마다하지 않는 까닭에 능히 그 큼을 이루고, 산은 돌을 마다하지 않는 까닭에 그 높음을 능히 이룬다.)”,
“禮義廉恥迺國之四維 四維不張迺國滅亡(예절과 정의와 청렴과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곧 나라를 지탱하는 네 밧줄이다. 네 밧줄이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는 곧 망한다.)”
전시되어 있는 <<관자>>의 명언들 중에는 내가 중학교 시절 한문 시간에 배운 익숙한 구절도 있다. 한 결 같이 국가 경영의 지략과 경륜을 보여준다. 관중이 얼마나 비상한 두뇌를 소유하고, 안목이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비범한 사람이었기에 포숙아도 젊은 시절부터 관중과 절친한 벗이 되었을 것이다.
맹자 어머니가 시장 곁에서 장사놀이를 하는 어린 맹자를 데리고 서당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고 하지만, 가난한 집의 청년이었던 관중은 포숙아와 같이 시장바닥에서 돈을 벌어 노모를 봉양하였다. 관중은 도덕과 정치와 문화도 중시하지만, 물질적인 풍요를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리더쉽을 발휘하여 제나라를 춘추시대의 패자로 만들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사방에서 중국을 견제하여야 할 만큼 경제와 외교에서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오늘 중국의 지도자들이 <<관자>>에서 부국강병과 경세치용의 지혜를 배우고, 관중기념관을 이렇게 잘 정비해 놓은 까닭을 알겠다.
전시관에서 나와 계단을 올라가니 엄청난 규모의 사당이 있다. 사당 뒤쪽으로 다시 언덕을 올라가니 커다란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의 묘비에는 ‘齊相管夷吾之墓’ 라고 새겼다. 이오는 이름이고 중은 자이다. 이곳에도 무덤에는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다.
젊은 여성 안내원의 설명을 가이드의 통역으로 들었다. 무덤 왼쪽 위에 수령이 2백년이 되었다고 하는 측백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겨 붉은 천을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둘레에는 보호 철망이 둘러져 있다. 무덤 담장에는 유리병 조각들을 꽂아 놓았다. 무덤 뒤로는 주원장인가 누군가 소를 잡아먹었다고 하는 야산이다. 고조선과 동시대 인물의 무덤이 이렇게 보존되어 전해오는 것에 중국역사의 유구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무덤 앞에 서서 앞쪽의 벌판을 굽어보니 제수, 강물 너머로 임치시의 건물들이 부옇게 낀 미세먼지 속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여행 오기 전에 다시 한 번 훑어보았던 김용옥 교수의 <<맹자, 사람의 길>>에 묘사된 내용이 생각난다.
제나라의 도성 임치(臨淄)의 성벽이 20킬로미터에 이르고, 인구가 70만이 넘는 번성한 도시였다. <<전국책>>에는 소진(蘇秦)이 제 선왕에게 조 나라를 위한 합종책을 강구하며 임치의 번성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임치는 너무도 부유하고 내실이 있습니다. 성내 사람들은 음악이나 놀이로 삶을 향유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요. 취황(吹竽, 생황을 붐), 고슬(鼓瑟, 25현금을 탐), 격축(擊筑, 13현의 箏을 탐), 탄금(彈琴, 거문고를 탐), 투계(鬪鷄, 닭싸움), 육박(六博, 윷놀이), 주견(走犬, 개 달리기 경기), 답국(踏踘, 공차기) 등의 놀이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히고, 옷깃이 이어져 휘장 친 것 같으며, 땀을 뿌리면 비 오는 것 같았다. 집은 화목하고 부유하며, 뜻이 고매하여 대왕의 현명하심과 제나라의 강성함을 합치면 천하에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습니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의 궁성 서남문인 직문 아래에는 직하학궁(稷下學宮)이 있었다. <<사기>> <전경중완세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나라의 선왕이 문학유사들을 좋아하여 추연, 순우곤, 전병, 접여, 신도, 환연 같은 무리들 76명 모두에게 집을 하사하여 상대부로 삼고,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토론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직하에는 학자들이 다시 많아져서, 그 수가 수백 명에서 천 명을 넘어섰다.”
직하에 모인 학사들이 제위왕 때 시작하여 제선왕 때 천여 명에 이르렀고, 제민왕 때는 만여 명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전국시대의 모든 학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중국문명의 모든 학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직하학파의 초대 총장이 순우곤이고 마지막 총장이 순자였다.
<<관자>>는 직하학파에 모인 학자들이 만든 ‘관중기념논문집’ 같은 성격의 책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제목은 <<관자>>의 첫 편인이 <목민>에서 취하였듯이, 전국시대의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물질적인 토대에 바탕 하는 국가 경영의 이론이 제시된 책이 <<관자>>라는 것이다. 공자가 30대의 젊은 시절에 제나라에서 공부하였듯이, 맹자도 38세 전후에 직하를 방문하여 머물며 직하학사들과 만나고 엄청난 사상적 자극과 계발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강태공과 관중의 사당과 무덤을 보며, 불자인 나에게 사찰과 불상이 눈에 띄었다. 강태공 사당 안에 절이 있어서 쪽문으로 출입을 할 수가 있고 불구들을 팔기도 하였다. 관중 사당에는 향로 옆에 작은 약사여래 석상이 놓여 있고, 울타리를 경계로 웅장한 대웅보전 건물이 서 있는 사찰이 있다. 사당에 제사를 올리는 일을 사찰이 겸하여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나라도 왕실과 양반가의 원찰이 있었고, 조선초기까지만 하여도 제사를 절에서 지냈다.
고차박물관
다시 버스가 선 곳은 제수 강가의 고차박물관이다. 고대의 수십 대의 전차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화상석이 벽에 길게 붙어 있다.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4필의 말이 끄는 사방에 창문이 나 있고 지금의 승용차를 닮은 고급 청동마차와 두 사람이 타며 덮개만 있는 개방형의 날렵한 수레가 복원되어 있다. 커다란 바퀴에는 30개의 바퀴살이 굴대에 꽂혀 있다.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발굴된 상태 그대로 유적을 보호한 채로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두 마리의 말이 화석이 되다시피 한 커다란 바퀴달린 수레 앞에 앙상한 뼈만 드러낸 채 누워 있다. 바퀴살은 적어도 서른다섯 개는 넘어 보인다. 이런 마차가 수십 대가 두 줄로 길게 있다.
그 중에는 턱뼈에 가지런히 박혀있는 이빨 사이에 푸른 녹이 쓴 청동 재갈이 끼워져 있는 것도 흙더미 속에서 노출된 것도 있고, 말과 함께 순장된 마부의 해골도 적나라하다. 너무나도 생생하여 지금도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바퀴가 굴러갈 것만 같다. 이천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늘도 재갈을 물린 채 죽어 있는 말의 해골, 주인의 말과 함께 순장된 사람의 두개골은 나에게 비애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유적은 춘추전국시대 500여 년 동안 전쟁으로 밤낮을 지새우며 국가의 존망이 걸린 부국강병을 위하여 제후들과 민중들과 제자백가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내어야 했던가를 천둥치는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역사책이다.
공자가 이런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천하를 주유하며 주나라 시서예악 문물의 담지자로 자부하며 천하의 제후와 백성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추구하였던 까닭을 알 것만 같다.
만승지국(萬乘之國), 제나라 사람들도 저승길은 피할 수 없었던 가보다. 이것이 생명 가진 존재들이 겪어야 하는 숙명인가! 붓다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 왕위도 버리고, 사랑하는 처자와 부모의 곁을 떠나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출가수행자의 길로 가야만 했던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어, 박물관 유적지 위에는 고속도로가 있어서 자동차 달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다. 위엔 현대의 차가 달리고 아래엔 고대의 차 무덤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의 동력은 수레인가보다.
박물관 입구의 석조 패방의 상인방에는 ‘萬乘一覽’, ‘車萃’, ‘馬魂’ 글씨가 청색으로, 좌우의 문기둥에는 ‘輸運三代鼎五覇盛業, 輻集九州馬七雄精英(수레는 하은주 삼대의 보배 솥(국가의 상징물)과 춘추 오패의 위업을 실어 날랐고, 굴대에는 아홉 주(중국 땅)의 말과 전국 칠웅의 인물을 모았다.)’ 대련이 새겨져 있다.
또 정원에는 도연명의 시, <음주>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사람 사는 곳에 초가를 지었지만, 마차 소리 시끄러움 없다.)’
버스에 타고 출발하며 지적인 호기심이 왕성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박단장님이 가이드에게 한자 ‘車’ 자를 ‘차’, ‘거’ 2가지로 발음하는데, 그 차이를 물었다.
배움의 지름길은 묻는데 있음은 물론이다. 차는 주로 전쟁에 쓰이는 수레, 전차를, 거는 주로 생활에 이용하는 수레를 가리킨다는 가이드의 답을 전하며, 단장님은 차와 거의 차이점을 이렇게 결론 내고 싶은데, 이의가 없음을 확인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두보의 그 유명한 시, <병거행(兵車行)>을 떠올리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한무제는 곽거병(霍去病)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하고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고, ‘연나라는 작아도 만승병거(萬乘兵車)의 나라’라는 표현이 <<사기>>에 나오지 않는가! 하지만, 자전거와 자전차 둘 다 맞지만, 전거는 아니고 전차만 옳다. 어법은 말을 쓰는 대중의 관습에 따라서 변해갈 뿐인가!
제경공 순마갱
제수, 강을 건너서 간 곳은 교외의 시골마을 정거장(停車場) 공터에 차(車)가 섰다. 임치동주묘순마갱이다. 유적 그대로를 유리판으로 덮어서 전시관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공룡화석 같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의 시체가 두 줄로 30미터 정도 나열되어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말을 순장한 무덤 둘레는 동서 70미터, 남북 75미터, 전체 둘레 길이 215터이며, 그 중 묘실 왼쪽 아래의 3분의 1을 발굴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순장된 말은 모두 600필로 추산된다. 춘추시대 말기, 제25대 제나라 군주인 경공(景公)의 묘로 고증한다. 경공은 안영(晏嬰)의 보좌로 정권이 안정되어 58년 동안(서기전 547-490) 재위하였다.
<<사기>> <제태공세가>에는 그가 궁전의 수축을 즐겼고, 사냥개와 말을 모아 길렀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고, 조세와 형벌을 무겁게 하였다. 안영이 백성의 고통과 원망이 수천수만을 헤아리기에 장차 큰 재앙을 불러올 혜성인 불성의 출현을 기도로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라고 충간(忠諫) 하는 내용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백색 화강암으로 커다란 패방을 새로 세웠다. 그 옆에는 그 일에 기부금을 낸 마을 사람들의 이름들을 석수장이가 전기 드릴로 새기고 있다. 대부분 왕씨들이다. 왕씨 동성촌락인 하허두(河墟頭) 마을은 종족이 화합하여 살아가는 공동체이고 체면과 명분을 중시하는 문화가 살아 있어 보인다.
길 건너편의 밀밭에는 움집 형태의 비닐하우스가 여러 동 있다. 겨울에도 연료를 때지 않고도 채소를 재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농민들도 여러 번 와서 견학하고 갔다고 한다. 지평선이 보이는 끝없이 너른 들판에는 밀이 자라는 이랑과 고랑이 길게 뻗어 있고, 밭 가장자리에는 마을이 있다. 어느 시대의 유물들인지는 몰라도 밭두둑에는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제남의 점심
버스는 제수를 건너서 임치 시내를 지나서 서남쪽의 제남으로 향하였다. 신석기시대 룽산 흑도문화 유적이 있는 길게 뻗은 룽산 옆의 도로를 달린다. 길가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포플러 가로수들이 열지어 심어져 있고, 가로수 사이로 공동묘지도 보인다. 대형 광고판이 서 있고, 룽산 밑에는 연기가 올라오는 공장 굴뚝도 있다.
이 지역은 강수량이 부족하여 주로 밀농사를 짓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지하철은 건설은 불가능하고 고가도로를 놓는다고 한다. 제남 시가지에 들어가니 10차선 도로에 차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 자동차의 상표도 눈에 띈다.
제남에서 산둥지방 사람들이 모여 체육대회를 여는 스타디움도 보이고, 가이드가 근무하는 여행사가 입주한 빌딩도 있다. 제남시청 광장도 아주 넓게 조성되어 있다. 제남은 산동성의 성도라고 한다. 중심가에는 월요일이라 문을 닫은 산동박물관도 보인다.
길가에 차를 대고 차가 다니는 도로를 횡단하여 이층식당으로 올라갔다. 짜고 기름기 많으며 밀가루 위주의 푸짐한 식단이지만 내 입에 맞는 음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메밀 막국수를 닮은 거무티티한 색의 국수를 한 젓가락 먹어보지만, 별맛은 없다.
이해생 선생님은 감기 기운이 있어서 강한 향을 쓰는 음식 냄새에 속이 메스꺼워 점심을 들지 못하신다. 따뜻한 자스민 차를 마시며 옆에 앉은 분이 내놓는 김으로 쌀밥을 한 공기 퍼서 겨우 점심을 먹었다.
여행 오기 전에 익힌 중국어 한 마디를 처음으로 썼다. “짜이 나아르 처어소?” 종업원이 웃으며 친절히 안내해 준다.
식당 입구에 걸린 내가 좋아하는 붉은 연꽃 그림을 감상하고 아래층에 내려오니 편의점 입구에 춘절 선물 상품들이 쌓여 있다. 선물상자 가운데에는 하얀 줄기만 길이가 1미터는 되어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파, 녹색 무, 대추가 있다. 가이드가 오면서 키가 3미터가 되는 파, 주먹 크기의 생강, 굵은 대추가 이 지역 특산물이라고 한 것이 과장이 아니었다.
대명호
점심 먹고 간 곳은 대명호이다. 날씨가 차가워서 움츠러지고 호수의 연꽃이 말라서 연밥만 앙상하였다. 황제가 와서 쉬어간 섬에 붉은 칠을 한 기와집이 있고, 호수 가운데에 유람선이 지나간다. 호수 둘레는 얼마가 되는지 가늠하기도 힘들만큼 길다. 지하수가 고여서 이루어진 호수라고 한다. 가까이에 있는 맑은 물에 손을 담그니 그리 차가지가 않았다. 도시 한 가운데에 시민들의 좋은 휴식지가 되는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것이 부러웠다.
흑호천
명품 백화점이 있고 전기 버스가 다니는 복잡한 시가지를 지나서 예정되지 않은 명소로 가이드가 안내한다. 누각 꼭대기에 붉은 별이 꽂혀있는 제남인민해방각 옆의 길가에 버스가 멈췄다. 길가에 유람선 배가 떠 있고 다리가 놓아져 있는 운하가 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니 물가의 석벽 아래에서 엄청난 수량의 새맑은 샘물이 콸콸 쏟아져 나온다.
흑호천(黑虎泉), 백석천(白石泉)이라고 한다. 시민들이 플라스틱 통을 두레박으로 만들어서 물을 긷고 통에도 물을 담는다. 샘물이 넘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하천의 좌우 물가에 석벽을 쌓고, 정자를 짓고, 다리를 놓고, 버드나무를 심으며, 기암괴석으로 정원을 꾸며 놓았다. 안내판 그림을 보니 흑호천에서 유람선을 타고 대명호를 돌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나도 물조리개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물을 마셨다. 달고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맛이 좋다. 우리나라처럼 맑은 물이 바위와 돌 틈으로 흘러내리는 산이 교외에 있지 않고, 비가 적게 내리지만 지하수가 이렇게 풍부하게 솟아나는 물가 공원이 있는, 가이드가 사는 이 도시가 참 좋아 보였다. 제남시에는 72개의 크고 작은 샘이 솟아나기에 천성(泉城)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가이드 왕 사장님도 집에 있으면 자신이 음식을 준비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남자들이 재료를 사와 집에서 요리를 한다고 한다. 방청소는 하지만 부엌일은 거의 하지 않는 나는 직장 일에다, 빨래하고 요리하고 아이 키우고, 크고 작은 살림을 도맡아 하는 우리나라 여자 분들을 생각하니, 가이드 옆에서 같이 걷던 여선생님들께 나도 모르게 허리 숙여 절하며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차가 다시 출발하기 전에 나는 길가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갔다. 화장실 옆 공터에 여러 명의 남녀 노인들이 짝을 지어 서로 이발을 하고 있다. 간판에는 ‘理髮 烫发 培訓’이라고 쓰여 있다. 무료로 이발이나 파마를 해 주면서 이발과 파마 기술을 실습하는 곳인 듯하였다. ‘意外的戀愛時光’이라는 제목의 길거리 영화 광고 포스터에 청순한 남녀 배우의 모습도 눈에 띈다.
태안 가는 길
버스는 출발하여 시가지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왕사장은 계속 오늘 중국의 현실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길가에는 황제가 다녀간 공원이 있고 그 주변에는 일제가 중국인 오천명을 광장에서 학살한 일을 기억하는 탑이 있다, 녹색 그룹이 제주도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저기 보이는 건물이 성당이다, 교회에서 낙태를 하지 못하게 하여 국가의 산아제한정책에 위배되어 로마교황청과 중국이 사이가 좋지 않다, 중국에서 젊은 나이에 아이를 낳으려면 국가로부터 임신허가증부터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등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한국의 고교생들이 중국에 수학여행 와서 그릇에 담긴 중국 음식을 싹싹 비운 일, 학생들이 유흥가에 갔다는 잘못된 뉴스 보도로 곤욕을 치렀던 사건, 산동에는 '孔孟' 유적을 비롯하여 학생들이 수학여행 오기에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속에서 이어졌다. 왕 사장의 성격은 호탕하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언변을 구사하고, 두뇌는 총명하였다. 관광업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적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 듯 버스는 태산이 있는 태안시 부근에 왔다. 버스 기사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진주 가게에 들러서 가려는데 어떻겠느냐며 양해를 구했다.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양식 진주라도, 짝퉁 진주 목걸이라도 선물로 사 가지고 가야하는데 말이다. 가게에 가니 양식 진주를 왕사장님이 직접 칼을 들고 쪼개어서 진주를 찾아낸다. 퀴즈를 내어 맞춘 사람에게 찾아낸 진주알을 선물로 주며 선심을 사고 지갑을 연다.
넓은 매장에는 밝은 조명 아래에 아주 비싼 황금빛 진주부터 싸구려 목걸이까지 가득 전시되어 있다.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하는 목걸이를 에누리도 않고 쌌다. 호기심에 더 좋은 물건의 가격을 물으니 한국에서 유학하였다는 청년이 현관까지 따라오며 가격 흥정을 하였다.
도착한 곳은 태산국제반점이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어 종일 노느라고 쌓인 피로를 풀었다. 공자님도 오르신 태산 아래서 중국의 이틀 째 밤을 묵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