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관련 설화
임진왜란 관련 설화를 올려 봅니다. 임란과 관계 없는 것도 많아서 관련 있는 부분은 색갈 처리를 하였으니 참고 바랍니다. 설화는 이야기로 가볍게 볼수도 있으나, 오히려 근거를 가진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 역사여행과 관련하여, 여수에 관한 내용도 많으니 참고 하셔요. 아울러, 김덕령에 대한 내용은 보완.정리하여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임진왜란관련 설화 사명당 설화 : 인물 설화의 하나.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한 유정에 관한 설화.사명당에 관한 설화는 여러 가지로 그의 출가 동인을 말하는 후처응징설화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활동한 이야기들로 나눌 수 있다. 사명당은 속성이 임이었고 전처 소생의 아들과 후처 소생의 아들이 있었다. 전처의 아들이 장가간 첫날밤에 어느 자객에 의해 목이 잘려지자 신부는 누명을 벗고자 남복을 하고 집을 떠나서 범인 색출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범인이 바로 시집의 계보의 사주를 받은 하인임을 밝혀내고 이를 시아버지에게 알린다. 시아버지는 벽장에 숨겨둔 항아리 속에서 아들의 머리를 찾아내고 후처와 그의 아들을 모두 묶어 집과 함께 불태워버린 뒤 재산을 노복에게 흩어주고 집을 떠난다. 이 설화 <사명당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전주·안동·밀양 등 여러 지역에서 십여 편이 채록되었다. 임진왜란시에 사명당의 활약상을 담은 설화는 주로 <임진록>에 집결되어있는데 구전설화로도 채록된 것이 많다. 사명당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①왜왕이 왜국의 시를 병풍에 적어 지나는 길에 진열해 놓고 자국의 문물이 번성함을 자랑하자 이를 모두 암송해서 모작이라 했다는 것이다. ②왜왕은 사명당을 큰 무쇠막에 넣고 숯불을 피워 무쇠막을 달구어 데어죽게 하였으나 사명당은 ‘빙(氷)’자를 천장에 써붙이고 도술을 부려 왜왕이 방문을 열었을 때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③왜왕은 무쇠말을 벌겋게 달구어 놓고 이것을 타보라고 사명당에게 요구하자 사명당이 비를 오게 해서 무쇠말을 식히고 비가 계속 쏟아져 왜국을 물에 잠기게 해서 왜왕의 항복을 받고 매년 인피 삼백장과 부랄 서말씩을 조공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설화는 모두 임진왜란시에 형성된 왜적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과 민족적 긍지를 반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④밀양군 무안면에 있는 사명당영당비가 있는데 이 비는 국가의 큰 일이 날 때마다 몇 말씩의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헌에 기록된 사명대사의 설화로는 <지봉유설>?<청야만집>등에 수록된 가등청정과의 일화가 있다. 사명당이 왜장 청정의 진영을 들어갈 때 수리에 걸쳐 기치 창검이 열립되어 있었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가등청정은 사명당에서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명당은 그대의 머리가 오직 보물이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너의 머리에 천금만호의 상이 걸려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⑤사명당이 꽂아 놓은 지팡이라는 수목설화가 있다.사명당은 지팡이를 꽂아 놓고 사라지며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있다고 했는데 아직도 그 나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사명당 설화는 구국도술설화로써 민족의 사랑을 받고 널리 전승되고 있다. (자료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율곡 설화 :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이이(李珥)에 관한 설화. 율곡의 탄생담, 임진왜란을 예언한 방화정이야기, 퇴계와 대좌한 이야기 등이 전한다. 율곡의 탄생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율곡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청룡·황룡이 얼크러져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대길할 태몽이라고 여겨 강릉으로 부인을 만나러 내려오던 중이었다. 대관령 마루에 있는 주막에서 주막집 여자가 율곡 아버지의 기상을 보고 유혹하였으나 율곡의 아버지는 꿈꾼 것을 생각하고 거절한 뒤 부인 신사임당에게 와서 율곡을 잉태하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율곡의 아버지는 대관령 주막에 들러 여인의 소망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그 여자는 이미 큰 인물을 낳을 시기를 놓쳤다며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경기도·강원도 일대에서 널리 전승된다. ①임진왜란을 예언한 방화정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고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의 어가가 몽진차 임진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궂고 밤이 되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 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퇴계와 대좌한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율곡은 퇴계와 대좌한 일이 있는데, 퇴계는 나이의 고하를 불문하고 제자들에게 절을 하도록 시켰다. 제자들이 불평을 하자 퇴계는 율곡이 동방의 대성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 귀신을 퇴치하여 신부를 구한 이야기 등이 전하여지나, 이는 이인(異人)설화가 율곡에게 부회된 것으로 본다. 율곡설화에는 율곡이 국난을 예견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힘쓴 큰 인물이라는 것이 부각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전우치 이야기 : 하루는 선조가 꿈을꾸었는데 신하들로 하여금 그 꿈을 해몽하라고 하니, 영의정 최일경이 꿈을 듣고 왜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풀이하였다. 이에 임금은 태평 성대에 요망스런 말을 한다고 동래로 귀양을 보내 버렸는데, 귀양지에서 왜침을 목도한 최일경이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린다. 조정에서는 관군을 파병했으나 패배하고 방위선이 뚫리는 지경에 이르자, 이순신을 비롯하여 초야에 있던 여러 인물들이 전국에서 기병(起兵)하여 왜적과 맞서 싸운다. 이순신은 승승장구하며 전공을 세우던 중 원균의 모함으로 고난을 겪고, 왜군이 계속 북상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신하게 된다. 이 때, ①김덕령이 초야에서 기병하여 막강한 도술로 왜진을 대파하고, 최일경의 천거를 받은 ②김응서는 기생 월선과 합세하여 왜장 조섭을 처치함으로써 왜적의 기를 꺾어 놓는다. 이어 명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원병이 온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왜적을 멸하고 전사하며, 육지에서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적을 물리친다. 김덕령은 상중에 출전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모함을 받아 죽고 만다. 이여송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 산천의 혈맥을 끊다가, 지리산 산신령에게 봉변을 당하여 황급히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얼마 후 강홍립과 김응서가 임진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일본 원정을 떠나지만 자중지란으로 실패하고, 사명당이 재차 나서서 강력한 도술로 왜왕을 욕보인 후 항서(降書)를 받아 돌아온다. 임진록 (1) 하루는 선조가 꿈을 꾸었는데 신하들로 하여금 그 꿈을 해몽하라고 하니, 우의정 최일경이 꿈을 듣고 왜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풀이하였다. 이에 임금은 태평 성대에 요망스런 말을 한다고 동래로 귀양을 보내 버렸는데, 귀양지에서 왜침을 목도한 최일경이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린다. 조정에서는 관군을 파병했으나 패배하고 방위선이 뚫리는 지경에 이르자, 이순신을 비롯하여 초야에 있던 여러 인물들이 전국에서 기병(起兵)하여 왜적 과 맞서 싸운다. 이순신은 승승장구하며 전공을 세우던 중 원균의 모함으로 고난을 겪고, 왜군이 계속 북상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신하게 된다. 이 때, 김덕령이 초야에서 기병하여 막강한 도술로 왜진을 대파하고, 최일경의 천거를 받은 김응서는 기생 월선과 합세하여 왜장 소섭을 처치함으로써 왜적의 기를 꺾어 놓는다. 이어 명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원병이 왔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왜적을 멸하고 전사하며, 육지에서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적을 물리친다. 김덕령은 상중에 출전하여 수많은 전 공을 세웠으나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결국은 모함을 입어 죽고 만다. 이여송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 산천의 혈맥을 끊다가, 지리산 산신령에게 봉변을 당하여 황급히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얼마 후 강홍립과 김응서가 임진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일본 원정을 떠나지만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실패하고, 사명당이 재차 나서서 강력한 도술로 왜왕을 욕보인 후 항서(降書)를 받아 돌아온다. (2) 선조 대왕이 꿈을 최일경이 해몽한 결과 왜군이 쳐들어 온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임진년 3월에 청정, 소서, 평수길 등이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게 되자, 이때 이순신이 국나을 예측하고 거북선을 만들어 수군을 지휘하여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왜군이 서울을 침공하게 되자, 선조 대왕은 김도경이란 소년이 말고삐를 잡아줌으로써 간신히 의주로 피난하였다. 왜군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소서는 월선이란 기생을 첨으로 삼았다. 그 사이에 최일경이 의주로 와서 왕과 의논한 결과, 유성룡을 명나라 조정에 보내어 구원군 파견을 요청하도록 결정지었다. 그리고 관운장이 나타나 청정을 꾸짖고, 김덕령이 도술을 부려 청정이 곤욕을 치르도록 하였다. 한편 최일경은 김응서를 시켜 월선으로 하여금 소서를 암살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군대 파견 요청이 실패하자 관운장이 나타나서 명나라 천자로 하여금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게 하였다. 이여송이 압록강에 이르러 물 때문에 건너갈 수 없다고 핑계대자, 도술로 강을 육지로 만들어 용탕을 먹여 의주로 안내하였다. 이여송이 선조 대왕을 알현하고 드디어 출전하였다. 이여송과 청정이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데 관운장이 나타나 청정의 머리를 베었다. 대장을 잃은 왜군은 대패하게 되었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김응서와 강홍립을 대장으로 내세워 왜국의 항서를 받게 하였다. 두 장군이 가서 도술로 많은 장군을 죽이자 왜왕은 하는 수 없이 화친을 청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지 13년만에 서산 대사가 꿈을 꾸고 상경하여 선조 대왕을 뵙고 왜구의 재침략을 막을 묘책을 논의한 끝에 자기의 제자 사명당을 왜국에 보내 강화하게 하였다. 사명당이 생불이라는 소문을 들은 왜왕은 여러 차례 그를 죽이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는 하는 수 없이 항서를 올리도록 하였다. 사명당이 형제지국의 항서를 받고 일 년간 수자리 설 사람 300명을 조공하라는 조약을 맺은 뒤 무사히 귀국하였다. 김덕령설화 조선 중기의 명장 김덕령에 관한 설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김덕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인물전설이다. 문헌설화는 ≪연려실기술≫·≪동야휘집 東野彙輯≫·≪풍암집화 楓巖輯話≫·≪대동기문 大東奇聞≫ 등에 전하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김덕령의 뛰어난 용력에 대한 일화나 억울한 죽음에 관한 내용은 문헌이나 구전 자료 모두 일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문헌보다는 구전설화 쪽이 보다 다채롭고 풍부한 전승을 보이고 있다. 특히, 도술을 통한 능력의 현시(顯示)와 죽을 때의 신이성(神異性) 등이 구전설화에 부각되는데, 현재 구전되는 김덕령설화는 대부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문헌설화 중 ≪동야휘집≫에는 〈추노설화 推奴說話〉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의 사회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후대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전과 문헌 자료를 종합하여 김덕령설화를 정리해 보면 출생, 용력 발휘 및 공을 세움, 억울한 죽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출생 과정은 풍수설과 관련되어 있는데, 김덕령의 비범성은 명당의 기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중국 지사가 보아 둔 땅을 김덕령의 부모가 몰래 조상의 묘지로 썼지만, 쓰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구전설화에만 나타난다. 또, 김덕령의 용력은 대단하여, 손으로 호랑이를 잡거나 거친 말을 길들이고, 백 근의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왜장은 김덕령의 화상(怜像)만 보고도 두려워서 군대를 철수했다 한다. 이는 구전과 문헌에 모두 나타난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부친의 복상을 입게 되어 어머니의 만류로 출전할 수 없었지만, 답답하여 싸움 구경을 나갔다가 왜장의 진중에 들어가 도술로써 그들을 두렵게 하여 물러나게 한다. 이 과정에서 김덕령은 충과 효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경험한다. 이 부분은 구전설화에 나타난다. 한편, 문헌에서는 김덕령의 죽음을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당한 것으로 기록하여, 실제 행적과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구전설화는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①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덕령이 용력이 있으면서도 출전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라에서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으나 죽일 수가 없었다. 이 때 김덕령이 “나를 죽이려면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이란 비를 써달라.”고 요구하여 그대로 하자,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을 뜯고 그곳을 세 번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 주어 죽음을 당했으며, 죽은 뒤 비문의 글자를 지우려고 해도 더욱 또렷해지자 그냥 두었다 한다. 김덕령설화는 역사와 설화의 관계를 여러 가지 변이를 통해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다.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향유층의 동정은 실제로 김덕령이 가졌던 용력을 과장하여 도술의 차원으로까지 확대하며, 그의 죽음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미화한다. 이와 같은 김덕령의 다양한 모습은 소설 〈임진록 壬辰錄〉의 여러 이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록〉의 김덕령은 문헌설화보다는 구전설화와 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전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따라서, 김덕령설화는 ‘아기장수전설’로 대변되는 좌절당한 영웅의 모습을 지닐 뿐만 아니라, 민족적 영웅의 면모까지 겸비한 민간영웅담으로서 이 유형설화의 뚜렷한 맥락을 잇고 있는 중요한 설화이다. 이 설화는 〈임진록〉·〈임경업전 林慶業傳〉 등의 역사군담소설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楓巖輯話, 東野彙輯, 壬辰錄, 大東奇聞, 壬辰錄硏究(林喆鎬, 正音社, 1986),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壬辰錄에 나타난 金德齡(趙東一, 常山 李在秀博士還曆紀念論文集, 螢雪出版社, 197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이름난 효자였다. ②축지법 : 전설에 의하면 광주에 있던 김덕령 장군은 어머니의 병환이 중해지자 하룻밤 사이에 진주의 유명한 의원에 모시고 가서 치료를 하게 해, 어머니가 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이와는 반대로, 김덕령 장군이 진주에 있을 어머니의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주의 유명한 의원을 자신의 백마에 태우고 하룻밤사이 광주까지 데리고 가서 어머니의 병환을 고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김덕령 장군이 광주에서 진주를 하룻밤 사이에 달릴 수 있게 했던 장군의 백마에 관한 전설도 많이 있다. 김덕령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진을 쳤던 진주 월아산 아래에는 말의 무덤이 있었다 해서 ‘몰뫼등’이란 불리는 능선이 있다. 또 경남 남해군에도 김덕령 장군의 백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지금의 남해군 창선면은 진주목 목장으로, 섬 전체가 군마를 키우는 목장이었다. 이 목장은 오랫동안 전쟁을 치뤘던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기르는 말의 수가 천 필이 넘었다. 이 목장에는 사람이 근접할 수 없이 성질이 사나운 용마가 있어, 아무나 자신에게 올라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김덕령 장군은 남해로 와 한번에 용마에 훌쩍 올라탔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용마는 하늘을 향해 포효를 한번하고 김 장군 뜻대로 순순히 달렸다고 한다. 말에 관한 전설은 이외에도 순천에서 가져왔다는 설, 담양에서부터 타고 왔다는 설, 진주목사가 타기위해 준비해 놓은 것인데 어떻게 사나운지 아무도 다루지 못하고 있던 것을 김덕령 장군이 나타나자 순순히 응해서 진주목사가 김 장군에게 주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김덕령 장군이 호남에서 진주로 출병하며 지나친 각 고을에도 김덕령 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우선 경남 함양을 지나칠 때 김덕령 장군은 남문밖에 주둔했다고 한다. 경남 함양에는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상림 숲이 있는데, 장군은 그 숲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거기에 주둔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김덕령 장군은 철갑을 입었는데 그 옷이 굉장히 화려해 어디서든 눈에 잘 띄었다고 전해지고, 주둔하고 있을 때도 ‘익호장'(翼虎將)이라는 깃대와 ‘충용장’(忠勇將)이라는 깃대만은 세워놓고 있었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에 관한 전설은 경남 산청에도 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3년만이 선조 27년(1594년) 4월 경 산청을 지났는데, 그 행렬이 십리가량 뻗쳤다고 한다. 당시는 진주성이 함락된 후이기 때문에 의병들이 진주로 행하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이제는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며 모두 길거리에 나와 환영했다고 한다. 함양과 산청 이외 지역에서도 김덕령 장군의 행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한결같이 그 위용이 대단했다고 한다. 행차시에는 항상 ‘충용장'이라는 깃발과 ‘익호장'이라는 깃발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장군이 월아산에 머물 때도 자주 백성들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 행렬이 지날 때에는 그것을 구경거리 삼아 주민들이 모여들고 모두 길거리에서 장군의 군대를 환영했다고 한다. 때는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된 뒤라서, 진주백성들에게는 김덕령 장군이 하루속히 왜군을 격멸하여 원수를 갚아 달라는 바람이 간절했다고 한다. 또 김덕령 장군은 행차시 언제나 백성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의 근심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또 경남 의령 정암진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적이 밤을 이용하여 의령을 침공하기 위해 얕은 여울에 표목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김덕령 장군은 적이 모르는 사이에 표목을 물이 깊은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에 야밤을 틈타 의령을 침공하며 표목있는 곳을 지나던 왜군은 깊은 물에 당황하였고, 김덕령 장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곽재우 장군과 함께 추격하여 왜군을 모두 섬멸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선조실록을 보면 김덕령 장군이 고성에서 왜에 잡혀가던 50여 명을 구출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고, 고성에는 김덕령 장군이 호랑이를 직접 잡아 왜군에 전하니, 왜군이 혼비백산해 도망갔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경남 하동은 임진왜란 때 진주목에 속해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섬진강은 예전에 두치강이라 임경업설화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에 얽힌 설화. 임경업은 병자호란을 전후로 활약하였던 인물인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 〈임장군전〉에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소설이나 전기에 없는 임경업의 설화가 문헌이나 구비로 전하여지고 있다. ≪동야휘집 東野彙輯≫에는 〈대녹림논검결의 對綠林論劍結義〉라는 제목으로 임경업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임경업이 어느날 사냥을 나가서 태백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났는데, 그 나무꾼은 검술이 신통하여 자기 여자와 간통한 세 남자를 죽이는 장면을 임경업에게 보여준 뒤 뒷날에 쓸 일이 있을 것이라면서 검술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청구야담≫ 등 다른 문헌설화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구비로 전승되는 임경업의 이야기는 서해 연평도의 임경업장군 사당과 관련된 것이다. ①임경업은 호국의 요청으로 한나라의 수군대장이 되어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서해를 건넜고, 다시 청나라로 잡혀가다가 도망하여 서해를 건너 명나라로 망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연평도 부근에 머물게 되었는데, 바다 가운데 식수가 없어 군사들이 동요하자 한군데 닻을 내리고 바닷물을 퍼서 마시게 하였는데 이 물이 바로 담수였다는 것이다. 또한, 반찬이 떨어지자 근처의 가시나무를 베어다가 바다에 꽂아 놓았는데 조기떼가 가시에 많이 걸려 반찬으로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밖에 ②임경업장군 사당에 왜병들이 들어갔다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와 임경업이 호국공주에게 관상을 보인 이야기, 병자호란 때 호국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으나 국왕의 항서 때문에 참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東野彙輯,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논개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 6만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 여수시 관련 설화 역의암과 여기암 현위치 : 순천으로부터 소라면,덕양으로 들어오는 입구 임진난 때 이충무공이 갑자기 많은 왜적을 만나자 백성과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푸른빛과 붉은 빛의 옷을 나누어 입고 어지럽게 서로 바꾸게 하니 왜놈들이 바라보고는 물러가 버렸다. -여수읍지- 임진왜란 때 한 女妓가 이 바위 가지 쫓아온 왜군에게 붙잡히자 오욕을 물리치고 투신하여 죽었다는 전설이다. -강남악부- 옛날에는 역의암까지 물이 들어 왔는데 거기서 이순신 장군이 묘계로 군인들에게 옷을 서너 가지를 입혔다. 흰 옷을 입고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와서 노랑 옷을 입고 한바퀴를 돌고 해서 왜적들이 그걸 보게 했다. 그렇게 의복을 갈아 입혀서 전쟁을 한 곳이다 해서 역의암이다 그 역의 바구가 산꼭대기에 서있다. 우리가 호칭하기로는 맷돌바구란 곳이다. 그 산을 처음에는 ①검은 옷을 입고 나중엔 붉은 옷, 푸른 옷을 입고 돌았다. 옷을 바꿔 입고 그 바위를 돌았다 해서 역의바구다. 덕양 뒷산에 있는데 저 묘도 바닥에서 보면 잘 보인다. 여의암 동쪽으로 바다다. 왜적들이 쳐들어 올 때 우리 군이 작으니까 ②부인들을 군복을 입혀 가지고 우리도 이만한 군사가 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산꼭대기를 순회하게 했다. 그래서 여의암이라 한다. 벌통수박 현위치 : 율촌면 장도 정유재란 대 순천 해룡면 신성포에는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이 충무공이 거느린 우리 수군은 장도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으며 육군은 신성포를 중심으로 포위하고 있었는데 신성포 왜교성을 얼마나 튼튼히 쌓았는지 난공불락이었다. 이 때 이 지방 출신 의병들이 잘 익은 수박 수 십 통을 따와서 수박 속을 전부 굵어내고 그 속에 벌 수 십 마리씩 집어넣어 물때와 바람을 이용하여 모래목(현재 율촌면 여흥 3구)에서 한밤중에 신성포 왜교성으로 띄워 보냈다. 이번에는 왜군들이 속지 않으려고 박을 모두 바닷가에서 수거해 가지고 와서 장작불을 피워 놓고 박을 모두 불 속에 넣었다. 이 때 불 속에서 폭약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그 근처에 있었던 왜군들이 몰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여천군마을유래지 노루섬 이야기 현위치 : 율촌면 장도 정유재란때 순천 해룡면 신성포에 있었던 왜교성의 왜군을 교란하기 위해 빈 배에 대나무 다발을 올려놓고 돛을 달아 물때를 이용하여 대나무 다발에 불을 붙인 후 장도섬에서 왜교성에 배를 띄워 보냈다. 이 배가 왜교성 가까이 가면서 불이 붙은 대나무 터지는 소리가 총소리인줄 알고 왜군들은 그 빈 배를 보고 집중사격을 했다. 그러나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총포 속에서도 배는 계속 신성포 왜교성에 도착하여 화염에 쌓여 타버렸다. 이때야 왜군들은 속은 줄 알고 보복하기로 결심했다. 왜군들은 노루섬(장도)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신령한 섬이기 때문에 그 섬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왜군을 공격해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노루섬의 맥을 끊어야 한다며 마을 뒤쪽산을 깊이 파고 많은 장작을 놓고 불을 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검은 흙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때 왜군들이 불을 질러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여천군마을유래지 흰비 쏟아지는 밤의 곡성 현위치 : 여수시 봉산동 일대 -쇠철 마을과 풀무골에 얽힌 전설- 「영명한 호국의 신이시여 이 민족의 성스러운 역사를 시련에서 구하오소서」백여명의 수군과 쇠철마을 백성들은 10여개의 용광로에 쇠돌을 채우고 풀무질로 녹여낸 쇳물을 받아 굳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굳어진 쇠는 두드리고 다듬어서 왜적의 침노를 박살낼 예리한 활촉과 거북선등에 꼽는 장못을 비롯한 각종 병기(창, 검)를 만들기에 주야의 가림이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3백89년 전인 조선조 제14대 선조25년 적장 풍신수길을 앞잽이로 한 왜적이 평화로운 이 강토를 침고,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고 귀중한 우리의 재산을 노략질하던 임진왜란이 피로 얼룩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3도수군 절도사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는 옥포, 노량, 고성 한산도 안골포 부산 등 해전에서 거북선으로 3백 여 척의 왜군 병선을 격파 이 땅을 넘보는 왜 오랑캐를 혼비백산케 하여 오금을 펴지 못하게 했다. 당시 시내 봉산동 5백 19번지와 5백41번지사이 3천 여 평의 당산일대에는 수 십 여 곳에 풀무간(대장간)을 차리고 우리의 삼도수군이 사용할 활촉을 땀 흘려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수군과 이곳 백성들은 어른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서 서당산에서 캐오는 쇠 돌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열을 가하여 뽑아낸 쇳물을 다시 굳혀 그를 두둘기고 다듬어서 하루에 수 천 개씩 우수한 활촉을 만들어 내었다. 이와 같이 하여 제작된 활촉으로 갈가마귀떼 처럼 병선을 타고 몰려오는 왜군을 무찌른 충무공 휘하의 수군들은 날로 사기가 충전, 승승장구의 전과를 거두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명한 호국의 신이시여 이 민족의 성스러운 역사를 시련에서 구하오소서」활촉을 만드는 수군과 풀무골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는 신의 가호아래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일을 어쩔꼬」측량을 불허할 만큼 많은 전과를 거두었던 충무공께서 명나라 수군과 합세 순천의 적을 봉쇄한 후 패퇴하는 적을 다시 노량에서 대파했으나 불행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아 이 민족의 진로에 찬란한 광명을 다 뿌리지 못한 채 한 많은 운명의 날을 맞았으니-「아! 이일을 어쩔꼬.」 불구대천의 원수인 왜적을 남김없이 섬멸치 못하고 충무공이 눈을 감자 온 나라 백성들은 통곡으로 닥쳐올 국운을 염려했다. 물론 활촉을 만들던 풀무골 사람들은 한꺼번에 일손을 놓고 식음을 전폐, 비통한 시름에 잠겼음은 두 말의 여지가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런 통한의 슬픔이 강물로 흐르던 어느 날 밤, ①풀무골을 관장하던 궁촉장 노인은 꿈을 꾸었다. 칠흙같은 적막한 삼경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두 조각으로 잘라지더니 난데없는 하얀 비가 쏟아지고 남쪽 예암산 너머 어디에 선가 애간장을 찢는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온 동네를 흔드는 것이었다. 꿈을 깬 궁촉장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행장을 챙겨 급히 풀무골로 나가 보았다. 「아뿔싸」때는 늦었던 것이다. 하늘을 태우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모든 풀무간에 불은 꺼져있고 활촉을 두드려 다듬던 대장장이들은 하나같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있고부터 풀무골 화덕에는 불이 붙지 않아 활촉의 제작이 중단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사철 쇠를 다루던 이 마을(봉산동)은 쇠철, 활촉을 만들던 이 지역 일대는 풀무골이라 불렀는데 그 당시 당산이었던 이곳이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민가의 집단 주거지역으로 변했고 이 부근에서는 현재도 땅을 팔 때마다 철석이 불에 탄 그대로 새까맣게 변한 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무슬목 전투 현위치 : 여수시 돌산 무술목 (1)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지역을 침범해 오자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무술목 양쪽에 있는 대미산과 소미산에 우리군사 300명을 매복 시켜 놓은 후 왜적을 이곳 무술목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니 왜적들은 좁은 수로에 갇혀 우왕좌왕 하다가 양쪽 산에서 내려오는 우리 복병이 이들을 공격하여 왜선 60척과 왜군 300명을 섬멸했다고 한다. (2) 무슬목의 지형이 쏙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이장군이 꾀를 썼다. 일본군한테 지도를 흘리기를 육지가 없고 탁 트인 것으로 해서 주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쫒아 포위를 해서 들어오니까 일본군이 도망을 하다가 막혀 땅을 파서 배를 뒤쪽으로 빼려고 했는데 그렇게 땅을 파다가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 거기서 이장군의 계략에 걸려들어 가지고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 투구성터 현위치 : 여수시 율촌면 중산리 율촌면 중산리 수암산에 투구바위를 끼고 있는 산성으로서 높이 2미터, 둘레 약 250미터 정도의 석성으로서 축성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장도에 진주하고 있던 왜군들이 이곳으로 올라오려하다가 그 때 마다 패하여 후퇴하였으며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전략 요충지로 쓰였다고 한다. 이순신과 송구봉 현위치 : 여수시 둔덕동 이순신이 십 이삼 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연습을 했다. 송구봉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이순신이 밤에 송구봉의 집에 갔는데 방에 누워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송구봉의 방에서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송구봉이 묵언으로 교지한 것이다. 여수 수사로 와서 여수 둔덕재의 솔을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구봉에게 다시 가서 물었더니 그 구멍이 사청목(巳聽目) 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 화치노적산 현위치 : 여수시 삼일면 (1) 이순신장군이 군량이 없으니까 뽈록산의 나무를 전부 베고 날개를 이었다. 왜놈들이 그걸 보고 저렇게 군량이 많이 있는가 보다고 놀래서 도망을 갔다 (2) 이순신장군이 군량이 없으니까 뽈록산의 나무를 전부 베어 버리고 날개를 이었다. 왜놈들이 그것을 보고 "저렇게 군량이 많이 있는가 보다"고 놀래서 도망을 갔다. 노적산이라고 한다. 여수망마산 현위치 : 여수시 시전동 (1)이순신장군이 망마산에서 망도 보고 훈련도 시켰다. 훈련을 시킬 때 한 번은 빨간 옷을 입혀 한 바퀴 돌리고 또 한번은 흰 옷을 입혀 돌렸다. 군대가 많이 집결한 것처럼 해서 왜적들이 두려워 생각하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2) 망마산 건팽나무 망마산 가면 나무가 하나 서 있다. 이순신이 훈련하면서 쓰던 지휘봉이 그 때 저 나무다. 그 때 그 나무를 꼽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은 내가 살 것이고 만약에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을 것이다"고 했다. 상하 화도 현위치 : 상,하 화도 상화도, 하화도를 위꽃섬, 아래꽃섬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병사들에게 여자옷을 입혀 가지고 유인하면은 둔병도, 조발도에서 기습해서 잡았다. 조선성에서 왜놈들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데 거기서 빨간 옷, 파란 옷, 깔을 바꿔가며 돌았다. 색색으로 나오니까 수 천 명 같이 보여 왜놈들이 당황했다. 신성성포와 야죽불 현위치 : 율촌면 장도,송도 신성포 야트막한 산 위에 있는 성은 한국에서 쌓아 놓은 것이었는데 우리 수군은 왜놈들에게 밀려서 거기를 뺐겠다. 그래서 왜놈들이 거기서 진을 친 것이었다. 그 때 이순신 장군은 하동의 대를 베어다가 짚을 펴놓고 짚 둥치안에 대를 다발 다발 넣어서 둥그렇게 묶어 야죽불울 만들었다. 노량 바다 쪽에서 신성포로 들어오며 불을 내논께 대 매듭 튀는 소리가 총소리보다도 무섭거든 하나도 아니고 수 십 개가 불이 붙어서 튀니까 "조선도 이렇게 무기가 많구나 우리 여기 있다가는 죽겠다"고 그것에 놀래서 그놈들이 다 달아나 버렸다. 그래 가지고 남해 노량강 거기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 이장군은 남해섬 저 건너 어디가 대기해 갖고 있었던가 적진으로 오다가 그 자리에서 그냥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남해 이내기에서 죽었는데 남해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그 곳의 지명을 물었더니 이내기라고 했다. 이순신이 자기가 죽을 자리라고 했다. 이내기에 들어가 갖고 "여기서 죽을 거다"고 했다. ※ 왜놈이 쳐들어오는 길목에 철모를 놔두고 조선군인은 그것과 똑같이 생긴 바가지를 쓰고 다녔다. 왜놈들이 와서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전부 철모를 쓰고 다녔다. 길가에 철모가 있어 다섯, 여섯이 들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한국 사람들은 한 사람씩 쓰고 다녔다. 조선 군대가 장사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이려고 그렇게 한 것 이었다. ※ 사람의 형용을 만들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짚 둥치를 해 놓고 왜놈들이 거기에다 활을 쏘면 화살을 빼어 갖고 되쏘고 했다. 의병들이 그런 전술을 썼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도움 왜놈들이 자물질을 해서 조선의 군함 밑을 뚫고 있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놀고 있는 배를 보면서 문득 할아버지가 명심하라던 글귀를 생각해 냈다."伐木丁丁 山更幽요 毒龍潛處水偏淸이라"는 글귀였다. 이순신이 부하들을 시켜 "저 건너 앞산에 나무 비는 소리가 나는구나 창을 갖고 배밑을 더듬어 봐라"라고 시켰다. 과연 배밑 양쪽을 찔러대니까 피가 나왔다. 이순신 할아버지가 일러준 글귀 덕분에 왜놈들을 없앨 수 있었다. 산에서 나무 베는 소리가 쩡쩡 나는데 군함에 구멍을 뚫는 소리와 박자를 맞춰 소리를 냈다. 보통사람이 볼 때는 '초부가 나무벤다' 그랬을 것인데, 충무대감은 선견지명이 있어서"伐木丁丁 山更幽"란 고시가를 생각해 내서, 산에서 나무 베는 놈도 잡고 배밑을 조사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어디를 가서 배를 정박해 놓고 있는데 물이 매우 잠잠했다. "毒龍潛處水偏淸"이란 한시를 생각하고 배를 옮기게 하여 몰살을 면했다. 우리 같으면 '물이 좋으니까 쉬어가자' 그랬을 것인데 "독륭이 잠긴 곳은 물이 평범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는 양반이다. 처녀 원혼과 장군 (1) 이순신이 열여덟 살 때 활 공부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다 목이 말라 처녀에게 물을 얻어 마셨다. 처녀가 그릇에다 나뭇잎을 따서 주었는데 이순신이 괘씸하게 여겨 처녀의 가슴에 활을 대었더니 물에 체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 후에 패랭이 쓴 영감이 와서 그 처녀가 상사병이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순신이 이 말을 듣고 초상을 치루는 곳에 갔다. 밤이면 처녀가 앞 동을 서서 성공하고 안하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남해에서는 '실패하니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가서 이내기에서 이순신이 죽었다. 이순신이 죽으면서 '죽었다고 말고 적을 쫒아라'해서 노량서 왜놈들도 못살고 말았다. (2) 이웃집 처녀가 이순신을 사모했는데 신분이 달라 혼사를 꺼내지 못하고 상사병이 들어 죽었다. 뒤에 이순신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시체를 하루저녁 부둥켜 안고 잤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투가 치열할 적에 꿈에 영혼이 나타나 울둘목에 진을 치라고 현몽했다. 충무공이 울돌목에 가서 보고 정말 진을 칠 요새지라고 느꼈다. 거기서 배 열두 척을 가지고 적함 삼백 척을 무찔렀다. |
출처: 남도문화유산해설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호양(구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