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둘레길
이 근 현
인왕산(338m)은 서울의 내사산(인왕산, 북악산, 남산, 낙산)의 하나로
조선 초기에는 서산(西山)이라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하여 우백호(좌청룡은 낙산)에 해당하며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에 위치한다.
산 전체가 기기묘묘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서인지
그 바위 아래엔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인들이 푸닥거리를 한 흔적이 곳곳에 널려있다.
정상에서는 청와대와 경복궁, 서울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옛날 인왕산은 호랑이 출몰이 빈번하였고 정조 때에는 궁궐과 민가까지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한다.
필뚱말뚱하는 진달래 몽우리를 보며 인왕산둘레길 8.4km 한 구비 돌아서니
허름한 촌락의 개미마을이다. 내 땅 한 평 없어 성 밖으로 밀려나와
나라에 지세(地稅)를 내고 얼기설기 판잣집을 짓고 서민들이 살던 곳으로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맞은편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능선에 자리한 빌라엔
문재인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이라고 이혜연님께서 설명해 준다.
계단을 한참 내려오니 탕춘대 성(城)의 정문이기도 하였던 홍지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한양 북서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인왕산에서 수리봉까지 이어진 4km 성곽을 완성하고 숙종이 현판을 하사하였으나
홍수로 무너져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7년 박정희대통령이 재건축하고 휘호를 내렸다고 한다.
얼마를 올랐을까? 수도경비사 33경비단에서 사용하던 초소를
리모델링하여 book cafe를 아담하게 가꾸어 놓았다.
창문을 통하여 보는 북악산의 전경이 책 읽는 분들과 어울려 너무 아름답게 보인다.
30경비단에 근무하던 1974년8월15일.
광복절을 기념하여 북악산 중턱에서 소대 대항 바둑 선수로 출전하여 열을 올리던 시간에
난데없이 비상근무 명령이 하달되었다.
실탄 장전하고 초소에 배치되어서야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문세광의 흉탄에 육영수여사께서 피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날은 서울역에서 청량리가지 지하철 1호선 7,890m가 개통된 뜻깊은 날이기도 했다.
자하문 입구에는 68년1월21일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종로서장이었던 최규식경무관이 막아 싸우다 순직하여 세운 동상이 보인다.
젊은 날의 함성을 뒤로하고 인왕산 정상을 쳐다보니
바위가 치맛자락 되어 물결치는 듯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이 치마바위는 중종의 왕비였던 폐비 신씨가 이곳에 올라
궁궐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며 치마를 걸어 놓았던 곳이라 하여 치마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삼청동에 북촌이 있다면 효자동엔 세종마을이라 부르는 서촌이 있다.
세종대왕이 태어나고 성장(지금의 통인동)한 이 마을엔 문인, 화가,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시인 이상,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화가 이중섭과 윤동주가 살던 하숙집,
현진건의 집터가 있었으며 겸재 정선은 이곳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인왕제색도(국보제216호)”를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일제 잔재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화풍을 시도한 화가 박노수.
자신이 살던 집과 그림을 기증하였고 그 집터엔 작은 박노수기념관이 있다.
선바위(스님이 품과 소매가 넓은 장삼을 입고 참선하는 것 같은 형상으로
서울시 민속자료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무당들이 즐겨 찾는 기도처 중 하나) 아래 국사당은
조선의 태조와 무학대사 등을 모신 당집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일본인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에 지으면서
팔각정 자리에 있던 국사당을 해체하여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였던 인왕산 선바위 아래에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수성동(계곡 물소리가 아름다워 수성이란 이름을 갖게 됨)계곡은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비 온 뒤 인왕산의 모습)를 화폭에 담은 곳이고
안평대군의 별저로 사용하였던 무계정사지를 복원하여
3대 요정(오진암, 대원각, 삼청각)인 오진암의 건축 자재로 무계원을 짓기도 했다.
종로3가에 있던 오진암은 김두한의 단골집으로 정권실세들이 요정 정치를 펼치던 곳이었고
이후락과 박성철이 7.4남북공동성명을 사전 논의하던 곳이기도 하다.
수치스러운 역사의 산물이라고 하여 철거한 건축자재를 이용하여 부암동에 무계원(武溪園)을 지었다.
무계정사지는 안평대군이 화가 안견에게 자신의 꿈을 삼 일만에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로 유명하다.
삼청동의 삼청각은 남북공동성명을 체결하기 위하여 박정희대통령이 삼 개월 만에 지었으며
남북적십자회담 장소로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으로 한옥카페와 식당으로 탈바꿈하였다.
성북동의 대원각은 길상사란 사찰로 변신하였는데
대원각의 주인인 김영한은 일본 유학을 하고 가무에도 능한 문학도였으나 17살에 기생에 입적하였다.
시인 백석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명 받아
대원각을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시주하여 길상사란 아름다운 사찰로 재탄생시켰으며
김영한은 길상화의 법명을 얻었다.
잊지도 말아야 하고 절대 잊어서도 안되는 아픈 역사의 현장.
독립투사를 투옥하고 고문하고 사형(493명)시켰던 서대문형무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의 발족과 심포지엄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예술인들의 혼이 숨 쉬는 통인시장 입구에서 계절의 별미인 쑥국도다리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북악산둘레길과 인왕산둘레길을 걸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뿌듯했지만
여기에 쌓여진 역사가 느짓한 시간과 세월 속에 담겨져 와
어쩜 인생은 바람결에 실려 가는 거문고 한 자락 같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