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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어 왕이 되었고, 신으로 모셔진 김유신!~
경주 충효동에 자리한 한 무덤.
신라의 무덤 중에서 가장 호화롭게 단장되어 있다.
봉분은 지름이 30미터,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다시 난간을 둘렀다.
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시대 12지신 중 가장 조각이 뛰어나고 섬세한 것이다.
이 화려한 무덤의 주인은 바로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이다.
'태대각간 김유신묘'
그리고 그는 죽어서 왕이 되었다.
'흥무왕릉'
우리 역사에서 왕족이 아니면서 왕이 된 유일한 사람 김유신.
그는 어떻게 왕이 된 것일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기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7세기는 우리 역사상 최대 격동기였습니다.
신라의 장군으로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 김유신.
김유신은 지도력이 뛰어난 명장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기록에는 이른 아홉살 죽기전까지 야전 사령관으로 맹활약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 김유신이 왕위에도 올랐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김유신은 죽은 지 160여 년만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됩니다.
죽어서, 그것도 신하로서 왕이 된다는 것은 유례 없던 일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고, 그 뒤 그 어떤 누구에게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장군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른 아홉 그의 삶은
생과 사가 엇갈리는 전쟁터만큼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김유신.
그만큼 그의 인간적인 갈등도 컸습니다.
김유신의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충북 진천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길상사는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김유신 장군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
통일 신라 시대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나라의 제사로 계속 되고 있다.
이 제례에는 주목할 것이 있다.
일반적인 제사에는 절을 두 번 올리지만, 이 제사에는 절을 네 번 올린다.
네 번의 절은 바로 왕에게 올리는 제례인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죽어 왕으로 추대되었고, 지금까지 왕으로 모셔지고 있다.
성암고서박물관(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
그렇다면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김유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이래, 모두 다섯 차례 판각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완질로 된 가장 오래된 판본이 이곳에 보존된 정덕본(1512년 간행, 보물 제723호)이다.
전체 50권으로 구성된 삼국사기, 그 중 10권은 삼국의 인물을 소개하는 열전이다.
여기에는 삼국 시대를 풍미했던 50여 명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열전 중에서 김유신편은 제41, 42, 43 세편입니다.
당대 유명했던 을지문덕 장군은 제44 한 권입니다."
김유신 열전은 다른 인물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열 권 중에서 세 권, 1/3가량이 김유신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김유신은 지금도 전국 곳곳에 살아 있다.
강릉에서는 김유신을 특별히 모시고 있다.
대관령에 자리한 산신당에서는 매년 음력 4월 15일 단오 때마다 강릉 단오제가 열린다.
강릉단오제는 대관령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신제로 시작된다.
대관령 산신에게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태평, 집안의 화평을 기원한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허균이 외가인 강릉을 다녀와 적은 문집 <성소부부고>엔
강릉단오제인 대관령 산신의 정체에 대해 적어놨다.
"대관령 산신은 신라대장군 김유신이다"
- 허균, 성소부부고
김유신 장군은 어떻게 대관령 산신이 되었을까?
"실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인물로,
또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모셔진 데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신라 시대 때 많은 호족들이나 신라 세력들이 자연스럽게 강릉으로 이주를 하고,
또 이 지역이 국방으로 진출을 하는 방어적인 의미도 있었는데,
자연히 그러다보니 강릉으로 외적도 쳐들어오고 수호적인 측면이 필요했는데,
거기에 김유신 장군을 신격으로 모시게 된 것이죠."
- 장정룡 교수, 강릉대 국어국문학과, 강원도민속학회 회장
김유신 장군이 지켜준다고 믿는 강릉에는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 화부산사도 있다.
사당 입구 사적비에는 이 사당을 짓게 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변방인 이곳 강릉은 말갈족들의 침입으로 편할 날이 없었는데
김유신 장군이 와서 이곳 백성들을 지켜주어, 그에 대한 감사로 사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661년 말갈이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괴롭히므로, 문무왕이 김유신에 명하여 정벌케 하였다.
김유신이 명주(강릉)에 출병하여 무력을 과시하자 말갈이 도망쳤다."
- 화부산사 기적비
김유신이 이곳에 출전에 말갈족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이곳 사람들에게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가 사적비에까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후대 사람들은 무장 김유신을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김유신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은
전국 각지에 십여 개에 이른다.
강원 강릉 화부산사, 경기 화성 금산사, 충북 진천 길상사, 충남 부여 부풍사, 전북 전주 완산사,
전남 부안 보령원, 전남 광주 장렬사, 경북 군위 효령사, 경북 경주 서악서원, 경남 울산 은월사, 경남 진주 남악사.
삼국사기 저자인 김부식은 열전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적어놨다.
"김유신에 대한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능히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위인이 틀림없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 삼국사기 권제43 김유신 열전
김유신.
그는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추앙받고 있다.
2. 멸망한 가야 왕국의 후손 김유신!~
신분 상승의 길은 오직 전공을 세우는 길뿐!~
"김유신은 삼국 통일을 이룬 주역으로 죽어서는 왕으로 추앙되었고,
더 나아가 호국신으로 추앙받고 있는데요
그런데 삼국사기에 보면
죽은 김유신이 나타나 자신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한다며 강한 불만과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김씨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미추왕릉을 둘러싸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긴데요,
어떤 일인지 그 내막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오리 바람이 일더니 먼지와 나뭇잎 사이로 죽은 김유신 장군이 말을 타고 나타나
미추왕릉속으로 들어가더니 그 속에서 울면서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났다"
"신은 어려운 나라를 구하고, 죽어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제 임금과 신하들이 신의 공을 잊은 까닭입니다.
이제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편히 쉬고자 하오니, 원컨데 대왕께서는 허락해주소서."
이 이야기를 들은 미추왕은 대신들을 보내,
제를 지내고 절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고 하는데요.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죽어서도 가문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전에도 가문을 지키는데 각별했던 김유신, 그 이면에는 뼈아픈 가문의 비애가 있습니다."
삼국 시대 말기, 신라의 변경이었던 충북 진천.
이곳 태령산(436미터) 정상에는 특이한 유적이 하나 있다.
봉분을 낮게 쌓고, 자연석을 둥글게 둘러놓아 작은 무덤처럼 보이는 이것은 무엇일까?
"여기가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은 태실입니다.
대개 옛날에는 왕족이나 귀족은 탄생하면 태를 높은 곳에 모셨답니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의 태를 모신 이곳을 태령산이라 합니다."
- 김종화, 진천김해김씨종친회 대표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었다는 이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의 태실이라고 한다.
"김유신의 태를 높은 산에 묻었으므로 지금도 그 산을 태령산이라고 한다."
- 삼국사기 권제41 김유신 열전
김유신의 태를 모신 태령산 아래 진천 상계리 계양 마을은 당시 백제와의 접경지였다.
김유신은 신라의 수도 경주가 아닌 변경 지역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것이다.
신라는 백제와의 변경이 되는 이곳 산줄기를 따라서 여러 개의 산성을 쌓았다.
그 중에 하나가 도당 산성이다.
고구려, 백제의 침입에 대비해 신라가 쌓은 성이다.
이 성을 쌓은 사람이 바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다.
그는 이곳 진천의 태수였다.
"이곳은 신라의 도당 산성으로 신라의 국경 지대가 되겠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아버님 되시는 김서현 장군이 진천군 태수로 오셔서 국경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으로 보입니다."
- 김종화, 향토사학자
김유신의 아버지가 이렇게 변방에 머문 것은 출신의 한계 때문이었다.
경남 산청 금서면 화계리 왕산 기슭 가파른 경사면에 크고 작은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있다.
일곱 단으로 쌓아올린 모습이 마치 피라미드 같다.
이것은 김해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구형왕은 신라에 가야를 양도했다고 해서 죽어서 양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구형왕릉(사적 제214호) - '가락국 양왕릉'>
"신라의 23대 법흥왕이 가락국을 쳐들어옵니다.
지금의 양산인 황산진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구형왕께서는 단 한사람의 가야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권을 넘겨줬던 것입니다.
그 뒤로 시조 대왕의 별궁이 있었던 태왕궁 바로 이곳에
가까운 가족과 국가의 중요한 문서만 가지고 은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즉위 하신 지 12년만에, 이곳에 은둔 하신 지 4년만에 승하를 하셨던 것입니다."
- 김봉호 회장, 가락중앙종친회
덕양전 - 구형왕 사당.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 그는 바로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다.
김유신은 몰락한 왕조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의 지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 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
그렇다면 신라로 편입된 후 김유신 집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구형왕의 가족들은 진골에 편입되어 진골의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신라 최고의 관등인 각간에까지 올랐다.
가락국왕자 신라각간 김무력 묘(경남 양산시 하북면)
엄격한 신분 사회인 신라에서 멸망한 나라의 왕자 김무력은 어떻게 각간이라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당시 신라는 진흥왕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군사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했다.
진흥왕은 백제와 동맹을 맺고(나제동맹),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점령한다.
그리고 다시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강을 독차지한 후 여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한다.
이 때 신주 군주로 임명된 사람이 김무력이다.
김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 시키는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신주 군주 김무력"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신라에 포함된 후 멸망한 나라의 왕자 김무력의 선택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 뿐이었다.
충북 단양군 적성.
진흥왕은 고구려의 영토였던 이곳을 점령한 후 적성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공을 세운 자들을 포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공을 세운 자들의 이름 가운데 '김무력(金武力)'의 이름이 있다.
진흥왕이 함경도 마운령까지 진출하여 세운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여기에도 공을 세운 자들의 이름 속에 '무력'의 이름이 보인다.
김무력은 진흥왕의 정복 사업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 공을 세웠던 것이다.
마운령비 탁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통해 가지고, 신라 중앙 세력 속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수단으로 활동을 했던 거죠.
김무력이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신라 정부에서 살아 남으려고 하는 몸부림을 쳤다 볼 수 있죠."
- 주보돈 교수, 경북대 사학과
멸망한 가야 왕족의 출신이라는 한계는 김유신의 아버지에 이르러 표면화 되었다.
취서사(경남 양산시 하북면).
김유신의 부모인 김서현과 만명 부인, 이들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만명 부인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이다.
신라의 왕족인 것이다.
반면 김서현은 멸망한 가야 왕족으로, 편입된 진골이었다.
같은 진골이었음에도, 이들의 결혼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삼국사기에 그 일화가 전한다.
김서현을 만나 첫눈에 반한 만명.
만명은 아버지 숙흘종의 반대로 집안에 감금된다.
그런데 대문에 벼락이 치고 지키는 사람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김서현과 도망가서 함께 살게 된다.
그런 김서현과 만명의 결혼을 삼국사기는 '야합(野合)'이라고 표현했다.
'야합'이란 떳떳하지 못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서로 어울린다는 뜻이다.
"이 편입 진골은 진골이 되었지만 워낙 신라가 배타적 아닙니까?
진골은 진골끼리 결혼하니, 무력이나 서현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정통 왕가의 딸이랑 결혼 할 수밖에 없는데, 결혼이 맘대로 허용된 게 아니니까 '야합'이라는,
요새 말로 강제 결혼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해서 좀 어려움은 거쳤지만 신분 상승의 길을 택한 겁니다."
- 신형식 초빙교수, 상명대 사학과
김유신은 멸망한 가야 왕국 출신이라는 한계를 안고 태어난 것이다.
3. 천관녀와의 사랑!~
"패망한 나라의 왕족으로 신라에서는 변방의 장군에 불과했던 김서현,
그리고 신라의 왕족이었던 만명.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신라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파격이었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열정적인 사랑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김유신입니다.
그런데 김유신에게도 이런 부모님 못지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관녀와의 사랑입니다.
김유신에 관한 유명한 일화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긴데요,
어느날 김유신이 술에 취해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향한 곳은 김유신의 집이 아닌 사랑하는 여인 천관녀의 집이었습니다.
그러자 김유신은 자신의 말을 단칼에 베고 천관녀의 집 앞에서 돌아섭니다.
이렇게 모질게 해서라도 김유신은 천관녀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김유신은 왜 천관녀를 버려야 했을까요?
천관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김유신과 천관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파한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 두 권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고려 중엽 이후에 씌여진 것들이다.
이 책들에 나와 있는 내용은 거의 같다.
그 중 김유신과 천관녀가 처음 만난 장면을 보면 두 줄의 기록이 나올 뿐이다.
"하루는 우연히 계집종의 집에서 묵었다."
"하루는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데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기생의 집에 이르렀다."
천관녀는 과연 기생이었을까?
천관녀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경주 교동 곳곳에 예사롭지 않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이 거대한 돌들은 탑의 기단과 탑재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탑의 기초 부분이구요, 이 위에 탑이 올라가는 거죠.
이 위에 기단 면석이 세워집니다."
- 오춘영 학예연구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거대한 탑들이 있었던 이곳은 바로 천관사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2000년 밭이었던 이곳을 논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탑돌이 대거 발굴되었다.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520여 종에 이르는 대거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 중에는 7세기 신라 유물이 많이 눈에 띈다.
김유신이 살았던 당시의 유물인 것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야 전해진 김유신의 사랑 이야기가 천관사터 발굴로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 기와를 보시면 '하늘천(天)'자가 새겨져 있죠.
더 출토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일단 이 글자로 이곳이 천관사터로 추정할 수 있다는 거죠."
- 오춘영 학예연구사
신라는 기와에 사용처의 이름을 새긴다.
'천'자가 새겨진 기와는 이 절이 '천관사(天官寺)'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천관사터 바로 옆 도당산 일대는 신라 고유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왕의 즉위 의례 등 국가의 중요한 의례들이 이곳 도당산 신궁에서 이뤄졌다.
바로 그 도당산 옆에 천관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이 천관이라는 여자를 추모하기 위해 그녀의 집터에 지은 절이 천관사라는 것이다.
"천관사는 그녀의 집이며, 천관은 그녀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신궁 옆에 살았던 천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누구였던 것일까?
"제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제사가 하늘에 대한 제사인데, 신궁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가 이뤄졌거든요.
천관녀는 신궁 바로 옆에 기거했던 것을 알 수 있고,
천관녀라는 명칭 자체가 벌써 하늘에 제사 지내는 여자라고 우리가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관사는 천관녀가 죽은 자리에 세운 겁니다."
- 최광식 교수, 고려댜 박물관장
천관녀는 기생이 아니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여사제였다.
"나는 이미 늙었다.
낮이나 밤이나 네가 성장하여 공명을 세우고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제 네가 천한 아이들과 더불어 음탕한 방과 술집에서 놀아난단 말이냐..."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그러나 김유신의 어머니는 김유신이 천관녀와 사귀는 것을 반대했다.
원래 시조묘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여사제는 왕의 누이였다.
그리고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은 화랑의 원조인 '원화'가 담당했다.
여사제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어머니는 왜 그토록 천관녀와의 사랑을 반대한 것일까?
이차돈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불교 공인(법흥왕 15년,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불교가 채택되면서, 고유 신앙의 지위가 위협받게 되었다.
황룡사지.
불교가 공인되면서 고유 신앙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고
이에 따라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는 천관녀의 지위도 하락했다.
"고유 신앙이 약화되고 불교가 강화되죠.
따라서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 입장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자기 아들을,
가야 출신이어서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에 득세하는 불교 세력에 믿보이지 말아야 하고,
따라서 고유 신앙과 연관된 천관녀와 끊어야 한다고 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 최광식 교수
김유신은 고유 신앙과 불교의 선택에서 고유 신앙을 버렸다.
가야계인 김유신은 정치적 출세를 위해서 천관녀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4. 백전백승의 김유신의 지도력!~
"천관녀와의 이별은 신라의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김유신의 가슴 아픈 선택이었습니다.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김유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전쟁은 김유신을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김유신은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였습니다.
김유신의 지도력을 짐작해볼수 있는 일면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는데요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로 나가면서 가족들의 마중까지 외면하고 멀리 가서야 집에서 떠온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본 군사들이 대장군도 저러한데 어찌 우리가 가족들과 헤어짐을 슬퍼하겠는가 하면서 힘을 내어 싸웠다고 전하는데요,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유신은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는 지도력을 가진 세심한 지도자였습니다.
용맹한 장군이자 뛰어난 지략가인 김유신.
그의 면모를 살펴보겠습니다."
팔공산(경북 영천시 청통면)은 산악을 신격화하여 숭상하는 신라의 5악 중 하나다.
당시는 중앙이라고 불린 팔공산에 김유신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험준한 바위로 둘러싸인 이곳이 바로 그 전설의 장소다.
바위 안쪽 좁은 틈 속을 지나면 천연굴이 나온다.
바로 중악 석굴이다.
삼국사기에도 이 전설이 전한다.
"열일곱 김유신이 고구려,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데 분개해
혼자 중악 석굴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니 도사가 비법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열일곱살에 들어와 수도를 한 중악 석굴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돌의 구조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특히 중악이라는 게 팔공산을 가리키고,
팔공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서쪽으로 영천 또는 경주에 가까운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조적으로 볼 때나 기록상으로 볼 때 김유신의 기도처가 틀림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 주보돈 교수
화랑 시절 무예와 도를 연마하는 김유신의 이야기는 도처에 전설로 남아 있다.
단석산(827미터, 경주시 건천읍)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단석산은 신라 최초의 석굴 사원인 신선사 석굴에 있다.
네 개로 둘러싸인 자연 암벽에 화랑들이 불상을 새기고 지붕을 덮어 이 석굴 사원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신선사 마애불상군.
삼국사기 기록에는 화랑 시절 김유신이 홀로 향을 피워놓고 하늘에 기도를 하자
천관신이 빛을 비춰 보검에 연기를 쬐여 주었다고 한다.
"어느 지점에 얼마쯤 가면 성문이 있다.
돌문이 있다. 그곳에 칼이 한자루 있을터니 그 칼로 바위를 잘라봐라.
바위가 잘라지면, 단석이 되면 하산을 해라.
바위가 안 잘라지면 기도를 더 해라, 그런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 용담 스님, 신선사 주지
김유신이 단칼에 바위를 잘랐다고 해서 단석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단석산엔 김유신이 잘랐다고 하는 바위가 여러곳에 보인다.
화랑 시절 산천을 돌며 무예를 연마했던 김유신.
열여덟살에 국선에 올랐다는 기록 이후, 17년 동안 김유신의 이름은 역사에서 찾을 수가 없다.
상당산성(사적 제212호, 충북 청주)
김유신이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낭비성 전투에서다.
청주는 신라가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는 낭비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때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김유신은 첫대비전인 낭비성 전투에서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뛰어든다.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에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
- 삼국사기 권제41 김유신 열전
김유신은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활약을 펼치고, 이에 힘입어 신라군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후 김유신은 승승장구 한다.
40여 년간 단 한번도 패한 기록이 없다.
644년(50세) - 백제 7성을 쳐서 이기다.
645(51세) - 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하니 물리치다.
648년(54세) -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유인하여 대파.
백제 악성 등 12성 함락, 2만급 베고, 9천명 사로잡다.
백제 9성을 쳐서 9천여급 베고, 6백인 사로잡다.
백제가 요거성 등 10성을 공격하니, 나가 다 잡아 죽이다.
백제가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하니, 공방전 끝에 대승하다.
655년(61세) - 백제 노비천성을 쳐서 이기다.
660년(66세) - 황산벌에서 계백의 백제군을 치고 백제를 멸망시키다.
661년(67세) - 웅산성의 백제 잔적을 쳐 함락시키다.
662년(68세) - 고구려군을 격퇴, 만여급을 베다.
663년(69세) -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다.
"김유신의 경우에 있어서 전쟁에 패전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기록 자체가 설화일 수도 있구요,
김유신을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패전 기록이 남아있기 어려운 그러한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쩌든 패전을 했든 안 했든 백제와의 전쟁에서 김유신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그동안 수세에 몰려있던 신라군이 오히려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그런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 강종훈 교수,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
무엇이 김유신의 백전백승을 가능하게 했을까?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3리.
통일 전쟁기 고구려를 치려 갈 때 군대를 주둔했던 곳을 기념하여 지은 사당 효령사이다.
이곳에는 김유신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패를 같이 모셔놨다.
662년 당나라 소정방군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군 공격에 나섰다가 평양성 근처에서 고립된다.
신라는 당의 요청에 따라 군량을 수송해야 했다.
워낙 위험한 일이라 나서는 자가 없을 때 예순 여덟의 나이로 자원한다.
김유신이 난관을 타개하는 첫번째 방법, 그것은 장군 자신이 선두에서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전투에서 승리를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을, 김유신은 잘 알고 있었다.
"험준한 곳에 이르자 때마침 날씨가 몹시 춥고 사람과 말이 지쳐 더러는 쓰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어깨를 벗어부치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감히 춥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권제42 김유신 열전
"강을 하나 건너는 데도 김유신이 먼저 건넙니다. 그래야 병사들이 따라와요.
그러니 김유신이 사기를 올려주면 청천벽력과 같아지고, 그가 없으면 전쟁을 못하는 그런..."
- 서영교 교수, 목원대 사학과
김유신은 전세가 불리할 때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김유신이 비령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비령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령자는 적진으로 달려가 싸우다 죽었다."
- 삼국사기 권제41 김유신 열전
삼국사기에는 전쟁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신라군인들의 이름이 여러명 기록되어 있다.
해론, 찬덕, 소나, 취도, 부과, 눌최, 반굴, 관창, 김흠운, 비령자, 거진, 합절, 죽죽, 필부....
"군사력이 열세했던 신라가 백제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소수의 희생이 전제 될 필요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원광 법사와 같은 분이 이른바 세속 오계라는 것을 가르치면서
'전쟁에 나가 물러서지 말라(임전무퇴)' 그런 것을 가르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순국하는 것을 아주 명예롭게 생각하는 그런 사회 풍조가 있었고
특히 삼국 통일 전쟁이 가속화 되는 7세기 신라의 굉장히 큰 힘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됩니다."
- 강종훈 교수
자기를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는 장군!
심리전에 능숙한 전략가!
김유신 군대가 백전백승 하는데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추격해온 고구려군대를 격퇴 시킨 '노'라는 무기!
기록에는 당시 삼국의 무기 중 특히 신라의 '노'가 우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군이 추격하자 김유신은 많은 노를 일시에 쏘아 격퇴시켰다."
노는 어떤 무기였을까?
영집궁시박물관(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는 각종 노를 복원해놨다.
노는 활에 기계적인 장치를 달아 발사하는 무기다.
그 모양과 위력도 다양하다.
"노는 활에 기계적인 장치를 붙여서
좀더 멀리 화살을 보내거나, 많은 양의 활을 한꺼번에 쏠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구요.
또한 일반 활이 오랜 기간 연습 시간이 필요한데 비해서, 이것은 짧은 기간 동안 쉽게 배울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 유세현, 중요무형문화재 47소 궁시장 조교
활이 전투에 쓰이기 위해 장기간에 걸린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데 비해
노는 평범한 농민이라도 단기간에 손쉽게 배워 전투에 사용할 수 있다.
기계 장치 위에 활시위를 당기고, 조준해서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다.
< 차 노 >
물레를 돌려 활시위를 당기는 차노를 복원했다.
이 차노는 활 세 개를 당기는 힘을 모아 한 개의 화살에 실려 발사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시위를 당기는데 드는 힘만큼 발사되는 화살의 위력도 크고 그만큼 멀리 날아간다.
"포노를 설치한 기록이나 아니면 차노를 사열한 기록들이 있으니까
차노라는 것은 수레위에 쇠뇌를 올려놓고 움직이면서 사열하는 걸로 봐야 하니까
그런 정도라면 최소한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쇠뇌들이 굉장히 많이 쓰였다 하는 정도는 알 수 있겠죠."
- 유세현
차노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고속 카메라를 설치하고 0.8mm의 함석판을 여러장 겹쳐 과녘을 만들었다.
화살은 함석판을 네 장까지 뚫었다.
노는 신라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무기였다.
"활에 숙련되지 않은 농민들을 집단 훈련 시켜가지고 어느 목표를 겨냥한다기보다는
어느 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사격을 하면 효과가 있는, 그것도 일제히 사격을 해야 합니다."
- 서영교 교수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는 군지도부.
그들에 의해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않는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
그리고 전 국민을 언제든지 전장으로 내보낼 수 있는 무기들.
이들이 하나로 모여 삼국 통일 전쟁을 이뤄낸 김유신의 신라군이었다.
5. 삼국 통일의 두 주역, 김유신과 김춘추 결합!~
"우리 역사에서 7세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누가 살아남을 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격동기였습니다.
이 격동기에 영웅들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계백 장군, 신라의 김유신 장군입니다.
이들은 시대가 낳은 걸출한 무장이었습니다.
당 태종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은
중국 경극에 무술의 달인으로 등장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계백 장군은 5천 결사대를 결성해
신라의 5만 대군과 맞서 싸우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스러져 간 충절의 대명사로 유명합니다.
김유신은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들은 누구 하나 뒤지지 않은 시대를 이끈 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승리의 편이듯, 삼국 통일을 이룬 김유신만이 역사 속에 칭송을 받고 후대에 추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결국 김유신이었습니다."
대야성.
지금의 합천.
김유신이 신라 정계에 본격적으로 출세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곳이다.
642년 신라와 백제, 나아가 삼국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가 이곳 대야성에서 벌어졌다.
대야성은 백제와 신라가 바로 통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지금 합천의 대야성터로 보고 있는 곳입니다.
대야성이라고 하는 곳은 아마 삼국 시대, 가야 시대부터 존재하던 성을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벌이면서 좀더 보강한 그러한 성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 조원영 학예연구사, 합천박물관
백제 무왕이 40년 동안 계속 해서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했을 만큼 천혜의 요새였다.
백제에서 신라로 진격해오는 길목을 낙동강 지류인 황강이 막고 있어 자연 방어막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을 지키는 신라의 최후 관문이었다.
"만약에 대야성이 함락이 된다면 그후 고령, 대구, 경주까지는 상당히 길이 평탄합니다.
요새가 될만한 곳이 없지요. 그러기 때문에 대야성을 지나면 경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지요.
아마 공격 루트로써는 최단 거리가 되지 않을까,
결국 대야성 함락이라는 것은 신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조원영 학예연구사, 합천박물관
백제 의자왕은 결국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한다.
신라의 수도 경주로 곧 바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이 때 최후의 교두보 압량주(경산)의 방어 임무가 김유신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대야성이 함락될 때 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함께 죽음을 당했는데
품석의 아내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다.
이 소식은 김춘추에게 큰 충격이었다.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고 하면서...."
- 삼국사기 권제5 선덕여황 11년
"삼국 통일 전쟁에서 이 대야성 전투는 신라로 하여금,
특히 나중에 신라의 왕이 되는 김춘추, 태종 무열왕에게 백제를 멸망시키는 의지를 굳히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 강종훈 교수
고구려로 군사를 빌리러 가는 김춘추, 신라 최후 방어선을 지키는 김유신.
신라의 운명이 이 두 사람에게 맡겨진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뜻을 함께 할 것을 피로써 맹세한다.
김춘추 -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요, 이번에 만약 내가 고구려로 들어가 변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김유신 - "공이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 고구려 두 왕성을 짓밟을 것이요."
"김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김유신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 삼국사기 권제41 김유신 열전
중국식 관복을 입은 신라 토우.
신라는 고구려와의 교섭에 실패하자 이어 당나라와의 외교에 사활을 건다.
당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연호와 복식까지도 당의 것으로 바꿀 정도로 당시 신라는 바람 앞에 등불, 바로 그것이었다.
"춘추는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 진덕여왕 2년.
"당시 신라는 이 처절한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상황이었죠."
- 서영교 교수
"애초에 신라가 삼국 통일 전쟁에서 목표로 두었던 것은 가장 자신들을 괴롭히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었고,
당나라를 끌여들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후에는 당나라가 원하는 고구려 정벌에 도움을 주고,
그 부산물로써 고구려의 일부를 얻는 것이 삼국 통일 전쟁의 전략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강종훈 교수
당시 신라는 독자적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삼국 통일을 이룰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당나라를 끌여들었고, 끝까지 살아남은 신라가 삼국 영토에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이 때 김춘추는 외교를, 김유신은 군사를 나누어 맡았다.
김유신과 김춘추, 이 두 사람의 연결은 이미 아버지 대부터 시작됐다.
두 사람의 아버지인 서현과 영춘은 낭비성 전투를 함께 이끈 동지였다.
진지왕이 왕위에서 폐위되면서 왕이 될 수 없었던 김춘추 집안과, 패망한 나라의 왕족이었던 김유신 집안.
엄격한 신분제 사회 신라에서 두 집안은 비주류라는 공통점은 이들 두 집안을 결집시켰다.
진지왕 - 용춘 - 김춘추
김무력 - 서현 - 김유신
"정상적이라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위치에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됨으로써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다른 진골 귀족들과는 정계에서 견제를 받고 있었고,
자기 아버지 김용춘 때부터 많은 갈등을 하고 있었고,
또 김유신 집안 역시 이질적인 진골 귀족 집단이었고,
따라서 이 두 집안이 정통의 진골 귀족 집단으로부터는 배척 당하는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죠."
- 주보돈 교수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인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속될 수 있었다.
김춘추의 부인은 김유신의 동생 문희다.
어느날 김유신은 김춘추와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을 밟아 찢는다.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에게 김춘추의 옷을 깁게 하여 두사람의 인연을 맺어준다.
문희가 결혼도 하기전에 아이를 갖자 문희를 화형 시키려고 한다.
자초지정을 들은 선덕여왕은 두 사람의 결혼을 명한다.
이것은 김유신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성사된 것이다.
가문의 결속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이들에게 귀족들을 누를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선덕여왕 16년,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명활성(사적 제47호)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상대등은 귀족의 대표로 왕위에도 오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비담이 난을 일으킨 구실은 "여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담과 염종이 여왕이 정치를 잘 못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켰다."
진지왕 폐위후,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자 딸인 선덕여왕이 왕위를 물러받는다.
최초의 여왕이 탄생한 것이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앞장 섰던 인물이 바로 김유신과 김춘추다.
그리고 선덕여왕에 이어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떠오르자, 진골 귀족의 대표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비담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김유신은 전면에 나선다.
이 때 진압군이 있던 월성으로 혜성이 떨어지자, 진압군의 사기는 위축되고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한다.
이에 김유신은 연 끝에 불을 부치고 하늘에 띄운다.
그리고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으니 길조라는 소문을 내, 반란군의 사기를 꺽고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마침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다.
그것은 보수 귀족 세력에 맞서 소수 개혁파 세력, 김춘추와 김유신의 승리였다.
"대개 기존 세력은 보수적입니다.
현상 유지가 기존 세력이고, 개혁은 소수파가 되지요.
사실 저는 어떻게 보냐 하면,
통일을 주도한 김유신과 김춘추가 만약 기존 보수 세력이었다면 그렇게 못했으리라 봅니다.
오히려 사이드에 있는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과 세력을 확보하려는 정책적 고안이
이런 모험에 가까운 통일로 나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 신형식 초빙교수
김유신은 상대등에 이어, 오직 김유신을 위해 만든 태대각간의 자리에 오른다.
살아서는 신하의 최고 자리에, 죽어서는 왕이 된 김유신, 그는 최후의 승자로 남아있다.
"지금도 김유신 장군은 전국 곳곳에서 호국신으로 받들고 있는데요
분명 김유신 장군은 영웅 중에 영웅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김유신과 같이 뛰어난 지도력과 지략을 갖춘 장군들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유독 김유신 장군만 후대에까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심각한 내부 분열로 멸망의 길로 달려갔던데 비해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습니다.
바로 그 힘이 삼국 통일을 이루어냈고 그리고 김유신이라는 빛나는 영웅을 만들에낸 것입니다."
- 고두심의 HD역사스페셜(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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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조상들의 역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