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247FE9415515042719)
♣성산이씨 정언(사직)공파 합천,외곡리 연혁♣
성산이씨 14世·諱-여량(汝良)·좌정언(左正言)공 시조는 고려 사공 諱 能一인데 성산백에 봉해짐으로서 자손들이 관향을 삼았다. 11세 諱 익손(益孫)은 전공판서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公의 증조가 되며 할아버지는 예의판서로 諱는 배(培)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으로 휘는 문광(文廣)이며, 비(妣)는 광산탁씨 판윤(判尹) 천성(天成)의 따님이다. 배는 성산여씨 판서 극회(克誨)의 따님으로 墓는 성주 화곡방 수동(凁洞)이며, 표석(表石)이 있다. 세분의 아들을 두셨다.우(友)는 목사(牧使), 선(善)은 생원(生員), 시(時)는 현감(縣監)이다. 우(友)의 아들 유구(悠久)는 사직(司直), 양(陽)은 진사(進士)이고, 선(善)은 후손이 없다.
16세 장자 유구(悠久).사직공(司直公)선조께서도 3子를 두었는데 맏이 의지(宜智)와 次子 의인(宜仁)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고, 3子인 의용(宜勇)은 순천부사(順天府使) 이다. 의지는 한개에서 떠나 성주 용암면 구연리(龜淵里)에서 살다가 뒤에 황간(黃澗), 상주(尙州)에 분거하였다. 宜仁의 아들 증 자헌공(資憲공) 규(珪)가 합천(陜川)에서 처음 살았다.자헌(資憲)공 선조께서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4년)를 피해 고향인 금릉군 개령현 대조동(開寧縣 大鳥洞-황새골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봉남2리)에서 합천으로 입향 하셨다.자헌공께서는 3자를 두셨는데 장자인 贈 가선(嘉善)인 희관(希寬)은 소사(少沙), 양전(良田)에 희대(希大)는 평촌(坪村)에 증통정(通政)인 희단(希檀)은 외곡(外谷)에서 살았다.
宜仁의 曾孫 贈 가선인 운(雲), 아들 영원(永源), 영순(永淳), 영청(永淸), 영택(永澤)과 통덕랑(通德郞) 춘형(春亨), 아들 진사(進士)인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 영숙(永淑)과 증 공조정랑(工曹正郞) 수(需), 아들 영해(永海), 영항(永沆)과 참봉(參奉)인 영(霙), 아들 종인(種仁)등 12종숙질과 가동(家僮) 100여인을 거느리고 임진란에 창의(倡義)한 공(功)이 있다. 운(雲)의, 아들,영순(永淳), 영청(永淸), 영택(永澤)은 정유재란때 순국 하였다.
18世,규(珪) 자헌공(資憲公)의 셋째아들 19세 희단(希檀)(통정대부(通政大夫))선조께서는 처음 외곡(外谷)에서 살았다. 公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그 형(兄)인 희대(希大)의 아들로 아들을 삼았으니 즉 운포(雲圃)공 이시다.아들 20世,영(霙, 1546~1616)운포공(雲圃公)은 자는 여흡(汝洽), 호는 운포(雲圃)이시다. 운포공(雲圃公)께서는 1592년 임진왜란 이 발발 하자 公의 집안에서는 사촌 이운(李雲) 등 12명(십이종반 : 十二從班)이 의병 대열에서 가문의 기백을 지켰다. 합천 가야면 숭산동에서 내암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창의 할 때, 아들 이종인(李鍾仁)과 함께 향병으로 지원하여 초계전투(草溪戰鬪), 무계전투(茂溪戰鬪) 등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과 의병을 모으고 곽재우(郭再祐)장군 진영에 소속되어 의령군 정암진(鼎巖津 : 솥 바위 나루) 전투 등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활약하면서 왜적과의 싸움에 있어 사재를 털어 군량과 병기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이 후일 참봉(參奉)으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김오(金汚), 곽재우(郭再佑), 김성일(金誠一), 조종도(趙宗道) 등과 더불어 진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운포(雲圃)공의 추후 포상과 관련 1814년 암행어사 상언(上言) 문서로 합천이씨 후손 69인의 연명이 있으며 마패인이 날인된 제음이 있다.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운곡재(雲谷齋 希大・19世・坪村),운포(霙・20世・壬亂倡義使)선생 사적비,운포정(雲圃亭),경지당(敬止堂・廷稷・22世),효효당(囂囂堂・廷龍・22世),백순당(百順堂・廷麒・22世), 자산정사(紫山精舍・炳奎・31世)등이 있다. 교육자 집안이기도하다.현재 33세 이정원,35세 이규열 등 후손들이 사비로 종중의 대,소사에 활동 중이다.
글쓴이:합천,자헌공파 15대 종손 33세 영조(英兆)
![](https://t1.daumcdn.net/cfile/blog/275A47485514C95A30)
![](https://t1.daumcdn.net/cfile/blog/235E1F485514C95D2D)
![](https://t1.daumcdn.net/cfile/blog/27591C485514C95E32)
♣합천 외곡리 마을 전경♣![](https://t1.daumcdn.net/cfile/blog/255A854D5514CC1B26)
![](https://t1.daumcdn.net/cfile/blog/22490A4D5514CC1C2E)
마령재가 시작되는 길 아래 양지 바른곳에 위치한 농촌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외곡, 신평이 있다. 외곡은 자곡이라고 불렸는데 조선시대 이 마을을 왕래하던 중국 선비들이 뒷산이 황폐하고 주변 바위들이 검붉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후에 바깥자지리라고 부르던 것이 외곡으로 바뀌었다. 신평마을은 서산리 계림마을과 인접한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홈내미란 속명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179054F5514CCB32C)
![](https://t1.daumcdn.net/cfile/blog/2268D14F5514CCB335)
![](https://t1.daumcdn.net/cfile/blog/2341DF4F5514CCB40A)
![](https://t1.daumcdn.net/cfile/blog/2105B34F5514CCB426)
![](https://t1.daumcdn.net/cfile/blog/272CE54F5514CCB515)
![](https://t1.daumcdn.net/cfile/blog/2760434A55120DB61E)
사직공파 개요(槪要)
사직(司直·유구-悠久·16世)공은 목사(牧使·우-友·15世)공의 장자로서, 애석(哀惜)하게도 임진왜란과 수차례의 병화(兵禍)로 인하여 묘소를 실전(失傳)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 1956년에 건립한 검암재(儉巖齋·諱-珪·자헌대부)옆에, <옛날 공자(孔子)의 지자(支子=맏아들 외의 아들이 종가(宗家)를 떠나 먼 곳에 살며, 묘(墓)를 바라보고 시사(時祀)를 행하였다는 말이 있어, 주자(朱子)는 이를 가례(家禮) 묘제(墓祭)의 조목(條目)에 넣어 후세에 보게 하였다. 이로 因하여 실묘(失墓)한 사람도 또한, 단(壇)을 차리는 그 유래는 이미 오래 되었다.
오호라! 우리 선조 사직(司直, 감찰(監察) 양대(兩代)의 고비(考妣)분묘(墳墓)를 지키지 못함이 이제 몇 백 년이라. 추모(追慕)의 성심(誠心)을 펼 수 없으니, 어찌 후손의 恨을 가져오지 아니 할 것인가?> 라는 설(說)에 근거(根據)하여 후손들간에 종의(宗誼)가 준발(俊拔)하여, 공과 子 감찰(監察·의인-宜仁·17世)공의 단소(壇所)를 조성하기로 의결하고, 1963년 3월 설단(設壇)을 하여 3月 初丁日을 定하여 수십년동안 단향(壇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그 내력(來歷)은 단소앞에 조성되어있는 후손 덕균(德均)이 찬(撰)하고 임희(任熙)가 쓴 비문에 기록되어있다.
이에 세월이 흘러 2006年 9月에 다시 후손들이 모여, 사직공파 종중회를 창립하기로 하고, 공의 후손으로는 구연(龜淵)파의 정화(廷華)공의 후손이 직계(直系) 장손(長孫)이겠으나, 그 후손이 한미(寒微)하고 참사(參祀)치 않아, 6대손 정봉(廷菶),정웅(廷熊),정헌(廷憲)의 후손을 소사·양전(所沙良田)파, 정계(廷契)의 후손을 평촌(平村)파, 정직(廷稷)의 후손을 외곡(外谷)파, 만성(萬星)의 후손을 청도 · 영산(淸道靈山)파, 경춘(景春)·사립(士立)·화춘(華春)의 후손을 오도(吾道)파등 5개 소파(小派)로 하여, 초대 회장에 등현(燈鉉·32世·良田)을 추대(推戴)하고, 시대적인 변천(變遷)에 따라 公의 父子간의 단향을 음력 10월 8일로 변경하여 봉행하기로 의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 동안 후손들이 공의 묘소를 찾으려고 누대를 노력하여 왔으나, 그 흔적을 아직도 찾지 못함은 후손으로서의 불민(不敏)은 물론이고, 참람(僭濫)함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