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호는 동해안에만 있는 특별한 호수인 석호의 하나로서 그 규모가 크고 특히 경관이 너무 좋아서 과거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아왔던 곳이고 강원도를 들른 양반들과 벼슬아치, 심지어는 임금님까지도 이곳은 반드시 거쳐갔으며 그래서 수많은 글과 시부가 남게된 그런 곳입니다...한 마디로 말해서 옛날부터 이미 강릉의 대표적인 관광지였지요...
우리는 호수를 따라 왼쪽으로 시계방향으로 걸어갑니다...
봄을 맞이하여 예쁜 곷들과 신록의 싱그러움이 잘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먼저 허균.허난설헌 기념관과 생가터를 보고 갑니다...
왼쪽으로 가니 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탐방지가 먼저 나타납니다...오리배도 탈 수 있다네요...
과거에는 이쪽도 모두 경포호였을 듯합니다...지금은 습지로 변하면서 많은 새들이 살고 있고 약간은 인위적으로 운하와 습지를 가꾸어둔 듯합니다...
오솔길이 예쁘긴 한데, 나무위에서부터 애벌레들이 자꾸 늘어져와서 귀찮네요...ㅠ.ㅠ
여기가 허엽의 집으로서 그의 아이들이었던 교산 허균과 누이인 난설헌이 태어난 생가터와 기념관으로 가는 길입니다...
전에 울 여행 동호회 회원들과도 처음에 왔었고, 다음에는 답사 동호회 회원들과, 그리고 연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도 둘러본 곳이라 오늘의 일정에서는 패스입니다...갈길이 워낙 멉니다...
[[ 허 엽 1517~1580 ]]
허 균의 아버지로서 호를 집이 있는 마을이름을 따서 초당이라 하였다. 1546년 문과급제후 대사성에 이르렀고 나중에 동부승지가 되어 경연의 자리에서 조광조의 복권을 상소하다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삼척부사와 중국을 다녀오는 사신과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는 동인의 영수로서 다소 과격한 언행을 하기도 하였으며, 사류의 큰인물이었다.
[[ 허 균 1569~1618 ]]
교산. 손곡 이달에게 글을 배우고 26세때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정랑과 사복시정 등을 지내다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어 명의 사신으로 왔던주지번을 접객하다 자신의 누이인 난설헌의 글이 중국에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안군수와 삼척부사때는 불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공주부사때는 서류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구실로 파직당했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천민출신 시인인 유희경과 교분을 쌓기도 하였다. 첨지중추부사로 다시 복직되어 형조참의가 되었지만 과거시험 부정혐의로 다시 파직, 유배되었고 계축옥사가 터지자 이이첨의 대북에 일원으로 붙었다. 1617년 좌참찬이 되어 폐모론을 주창하다가 당시 영의정이었던 기자헌을 유배보내었는데, 남대문 격문 사건으로 하옥되어 국문을 받고서 능지처참 당하였다.
호민론, 관론, 정론, 홍길동전 등을 썼으며, 신분타파와 붕당배척 및 민본사상에 있어서 과격한 급진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허 난설헌 1563~1589 ]]
본명은 초희. 호 난설헌. 김성립과 15세에 혼인하였지만 엄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기방출입, 아이를 잃은 슬픔에다 나중에는 집안의 몰락에 따른 충격으로 요절하였다. 어릴적부터 이야기책 읽기를 즐겨하였으며, 천부적인 글솜씨를 가져 스승이었던 손곡 이달이 감탄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상당한 시부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주로 도교사상이 담긴 신선세계, 가정사 등을 담은 글들이 많다. 후기에는 자신의 슬픔과 인생의 허무함을 담은 시가도 남겼다. 총 213수의 시가는 난설헌집으로 묶여 주지번에 의해 중국으로도 알려져있다.
허균.허난설헌 두 사람은 조선 중기에 무척 기구한 삶을 살았던 천재들이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람들입니다...언제나 그렇듯 시대를 너무 먼저 살면 그들은 비극적인 삶의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더 많지요. 그저 강릉과 경포대라면 해수욕장과 해산물만 생각하게 되지만 때로는 차분하게 강릉의 은근한 향과 멋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그들의 글을 읽어보면서...
호안둘레길가에 소담스럽게 피어난 둥굴레...참으로 탐스럽군요.
조용한 호수에 왜가리 한 마리가 역동적인 몸짓으로 파문을 남깁니다...
여기가 허균.난설헌 기념관과 집터에서 생태습지를 거쳐 다시 경포호 둘레길로 나오는 곳입니다...
도로와 붙는 곳에서 길을 건너 저 길로 올라가면 경포대가 있습니다...
경포대로 오르는 길가에는 많은 경포대와 경포호에 관한 시부들이 새겨진 돌들이 있습니다...
위의 것은 이산 정조가 남긴 글입니다.
경포대는 이미 고려 충숙왕때인 1326년에 세워진 것으로서, 조선을 거치고 지금까지 모두 7번 중수되어 내려온, 관동팔경의 으뜸으로 인정받는 정자입니다...
전면 5칸 측면 5칸에 28개의 우람한 기둥과 내부의 상하3단으로 나눠진 공간 배치, 그리고 벽체가 없이 전면 계자난간으로 둘러진 처리기법은 특징적인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율곡 이이와 정조 등의 시가 쓰여진 현판들이 붙어있고 특히 경포대란 큰 현판과 제일강산이란 현판이 경포대의 격을 확실하게 이야기해주는 듯 시원시원합니다....물론 아래 내려다보이는 경치도 일품이구요...
계단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정면의 탑은 이곳에서 일어났던 3.1운동 진혼탑이며, 우측으로는 사임당 신씨의 동상이 있는데, 가려져서 잘 안보이네요...
경포대를 내려와 참소리박물관 뒤편 펜션길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참소리 박물관에 딸린 소리의 전당 공연장입니다...
청보리와 연산홍과 철쭉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펜션입니다...
펜션길을 지나면 다시 도로와 합류되는데, 여기에는 경호정, 상영정, 금란정 등의 정자건물들이 있습니다...
경호정과 상영정은 계조직의 의논과 강의 등을 하던 곳이며, 금란정 역시 금란계의 모임과 강신활동을 위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여기가 금란정입니다...
방해정은 원래 절터였는데, 철종때 신석거사 이봉구가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객사건물 일부를 이쪽으로 옮겨와 세웠다고 합니다...
누마루를 들인, 거의 사랑채와 별채 수준의 건물들로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물입니다...
이제 여기가 예로부터 경포대 입구 역할을 해왔던 중심지입니다...저 큰 건물이 아마도 이전에 경포나이트가 아니었을까...싶네요...ㅎㅎㅎ
다시 해변으로 원위치하면서 이젠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사천진을 향합니다...역시 송림을 거쳐 갑니다...
안목~송림간 송림과 이곳 경포대 송림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런 멋진 오솔길을 안고서 우리들에게 멋진 그늘과 편안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순긋해변으로 들어서면서 송림이 없어지고 도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여름에는 이곳이 물(?!!) 좋은 곳으로 변할까요...?ㅎㅎㅎ
이제 순긋해변을 통과합니다...
이곳 해변은 멀찍이 떨어져서 철책선을 안고 있으니 접근해볼 맘이 안나네요...
다시금 송림숲으로 길이 나있습니다...이제 햇살이 꽤 강해서 이러한 그늘은 너무너무 행복감을 줍니다...
항구가 보이는데, 아마도 사천진항이 아닐까...싶습니다...
길가에서 본 문화재인데...기록이 없군요...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하평교를 건너면 바로 사천진입니다...
사천천 하구에서 열심히 초망을 던지고 계신 할아버지...많이 잡으셨나요?ㅎㅎ
다리를 건너 우측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잠시 놓친 해파랑길의 표식이 나오고 사천항으로 바로 길이 이어져갑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막국수집 신세를 지려고 했는데, 하필 오늘은 가족모임이라 안하신다나 뭐래나...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물회!!! 이곳에는 물회전문식당들이 여러 집 있습니다...
여기가 물회식당들이 있는 사천항 입구입니다...
국수대신 쫄깃한 냉면면발이 더 맛있게 느껴지구요...
싱싱한 생선과 해삼 등의 향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여기에 밥 조금 더 말아 먹으면 딱 한끼 식사로 최곱니다...ㅎㅎ
새벽부터 여기까지 걸어왔기에 허기가 제법 졌었는데, 이젠 다시 힘을 내서 걸어갑니다...
첫댓글 물회에 냉면사리!!!굿^^
지역마다 물회 스똴이 다 틀린데 여기 것도 특색이 있고 맛있었습니다...ㅎㅎ
물회 당근 동네마다 다르다는~~ 저는 부산물회가 ㅋ
@케빈 근데 난 부산물회가 젤루 맛이 없다고 생각하는데...ㅋㅋㅋ
@남저 ㅋㅋㅋㅋ
열흘간 한국 떠났다 돌아와서 이글 보니 물회가 진짜군침돌게 하네요.
진짜 맛있어요...션~하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