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준의 음식 사람 <32> 산청 봄나물밥상·흑돼지구이
국제신문 2021-04-20
푸릇푸릇 지리산 봄나물…노릇노릇 흑돼지구이는 조연
- 돌미나리·돌나물·머위·방풍 …
- 지리산 지천에 고개 내밀어
- 먹을 만큼 뜯어도 소쿠리 가득
- 나물마다 향 맛 식감 변화무쌍
- 생채로, 또는 데쳐서 숙채로
- 된장·간장·고추장에 조물조물
- 가죽·엄나무순 장아찌는 밥도둑
- 부침개·비빔국수로도 입맛 돋워
봄볕 따사로운 날, 불현듯 지리산 자락에 있는 지인에게서 기별이 왔다. “막걸리 한 사발에 봄나물 한 접시 놓고 보니 최 시인 생각이 나오. 멀리 지리산 중턱까지 연초록으로 눈이 시린데, 한 번 다녀가면 어떻겠소?”
일정 다 제쳐두고 불원천리 산청의 지리산으로 향한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고개 몇 개 넘어 덕천강이 순하게 흐르는 산청 뒷골이라는 마을로 찾아간다. 이미 마음마저 지리산 사람이 다 된 그가 봄물 가득 나그네를 맞이한다.
모든 풍경이 첩첩산중이면서 모든 색깔이 푸릇푸릇한 연초록의 세상. 한참을 봄꽃 자지러진 마당에 앉아 봄볕바라기를 한다. 세상의 분답함을 잠시 내려놓는 것만 해도 온몸이 그윽하기 이를 데 없다. 늦은 오후, 밥상 겸 술상을 보자며 마을 뒷산으로 사람을 이끈다. 여느 산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지리산도 봄이 오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다양한 봄나물이 피고진다. 몰라서 지나치는 일은 있어도 없어서 지나는 일은 없다.
■ 지리산에 고개 내민 온갖 봄나물
마을을 가로지르는 맑디맑은 개울에는 돌미나리가 지천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고, 개울 둔덕에는 토실토실한 돌나물이 소복하다.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곳곳에 취나물과 고사리가 밭을 이루고 제피나무에는 어린 순이 올망졸망하다. 비비추도 잎 자락을 제법 넓게 펼치고 있고 산부추도 풀잎 사이로 언뜻언뜻 얼굴을 보인다. 먹을 만큼 뜯는다는 것이 어느새 한보자기 가득 봄나물이다. 내려오는 길에 엄나무와 두릅나무에서 잘생긴 나무순도 몇 개 딴다. 가만 보니 온 마을이 봄나물로 속절없이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지인의 집 안팎으로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에서 이사 온 마가목과 화살나무에서도 부드러운 잎이 토실토실 차오르고 밭둑에 머위와 방풍이 상추, 정구지 밭 주위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두어 시간 산책하고 나니 집안이 향긋한 지리산 봄나물 냄새로 그득하다.
여인네들이 봄나물로 상을 차릴 동안 지인과 지리산 골골에 숨어있는 막걸리를 두어 되 사러 간다. 작은 면소재지의 오래된 양조장에서 막걸리 한 바가지 얻어먹고는 흔쾌한 마음으로 서너 되 산다. 괜히 마음 한 곳이 든든해진다.
■ 봄나물과 어울리는 흑돼지도 사고
가는 길에 지리산 흑돼지도 두어 근 끊는다. 산청사람들은 지리산에서 키운 흑돼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봄나물을 곁들인 흑돼지구이를 즐겨 먹는다. 고깃살은 탄력이 있으면서 쫄깃하고 지방은 적당량 고루고루 퍼져있기에 고소하면서도 질리지가 않는다.
마침 한 마을의 장날이라 장 구경을 한다. 지리산의 장터답게 장터 대부분이 약초장이고 봄나물장이다. 온갖 봄나물과 푸성귀들이 파릇파릇 싱그럽다. 봄나물 한 줌에 사는 이와 파는 이간에 실랑이도 벌어지는데, 그래서인지 장구경이 소소하면서도 정감이 넘친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봄나물들이 생채로, 숙채로 장만되고 몇몇은 된장에, 간장에, 고추장으로 조물조물 나물로 무쳐져 있다. 그중 처음 접하는 마가목과 화살나무순 나물은 꽤나 관심이 간다. 마가목이란 이름은 새순이 돋는 모습이 말의 이빨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단다. 마가목 새잎을 살짝 데쳐 고추장을 조금 넣고, 마늘과 참기름을 넣어 버무렸다. 맛도 맛이지만, 향이 독특하고 강해 호불호가 갈릴 것 같지만 봄날 나른함을 깨우기는 좋을 것 같다.
화살나무는 나뭇가지가 화살의 날개처럼 생겼다. 어린잎은 조물조물 무쳐놓으면 고소하면서 식감 또한 좋다. 고추장 베이스에 참기름을 넣어 무치니 순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엄나무순과 두릅순은 데쳐서 초장과 젓갈에 찍어 먹고 머위는 데쳐 밥과 함께 쌈을 싼다. 엄나무순은 연한 생선비린내 같은 향이 있어 젓갈과 잘 어울리고 두릅순은 향이 강하면서도 단맛이 돌아 초장에 찍어 먹으면 좋다. 머위는 쓴맛이 있어 밥으로 먹으면 겨우내 잃어버린 식욕을 금방 되돌릴 수 있는 나물이다.
며칠 전 담근 장아찌도 한 접시에 담아내는데, 가죽나무순과 개옻나무순, 엄나무순, 머위 등속이다. 손가락으로 한 입 집어 맛보는데, 짭조름하면서도 각각 특유의 향은 그대로 품고 있어 밥도둑으로 악명깨나 높겠다.
■ 집 앞마당에 차려낸 봄나물 밥상
봄나물 밥상을 식탁으로도 쓰고 있는 집 앞마당 너럭바위에 차려낸다. 마당 한 구석에는 가마솥 뚜껑을 걸어놓고 지리산 흑돼지를 굽는다. 잘 마른 감나무 가지를 땔감으로 쓰는데 그 화력이 대단하다. 타닥타닥 불이 피어오르자 솥뚜껑에는 흑돼지가 노릇노릇 익어간다. 산에서 딴 고사리와 쑥을 함께 올리고 마늘도 곁들인다. 쑥과 고사리가 돼지기름에 젖어들면서 구수하게 익어간다. 봄나물에 흑돼지까지 밥상에 오르자 드디어 지리산 봄나물밥상이 완성된다.
자리에 앉고 보니 모든 봄이 식탁 위에 다 오른 느낌이다. 막걸리 한 잔에 봄나물을 안주 삼아 술추렴을 한다. 각각의 봄나물이 쌉싸래하고 고소하고 달콤하고 은근하다. 부드럽고 쫀득쫀득하고 살강살강하면서 매끄럽다. 성숙한 여인의 짙은 지분 냄새가 나는가 하면 앳된 소녀의 순한 마음씨 같기도 한 것이 다채롭고도 변화무쌍하다.
취나물, 머위 등속에 흑돼지를 올리고 당귀나 제피 잎을 얹어 싸 먹는다. 흑돼지의 고소하면서 쫄깃함에 봄나물의 짙은 향이 어우러지면서 입안은 온통 바람 좋은 봄날이다. 또 한 잔의 막걸리에 봄나물장아찌 한 점 곁들여 먹는다. 순하고 부드럽고 쌉쌀하면서도 새콤하다. 밥에 얹어 먹어도 꽤 괜찮은 봄 반찬이다.
정구지와 산부추, 미나리, 쪽파 등으로 부친 부침개도 상에 오른다. 향긋하면서 아삭아삭한 맛이 제대로인 봄나물전이다. 굽기가 바쁘게 접시가 비워진다. 이 봄날 지리산 자락에서도 막걸리 안주에는 부침개가 찰떡궁합이다. 하물며 봄나물부침개이니 더 일러 무엇 하겠는가?
마지막 봄나물밥상의 정점은 입가심으로 차려낸 봄나물비빔국수. 소면에 온갖 봄나물을 넣고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으로 비벼냈는데, 고명으로 제피 잎 몇 개를 올려놓았다. 갖은 봄나물이 제각각의 향기와 식감을 자랑하면서도 비빔국수에 함께 어우러져 봄나물비빔국수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구러 지리산의 밤은 깊어만 가고 주흥 또한 도도해지니, 사람 간의 대화조차 덕천강 물 흐르듯 지리산으로 스며들고 있음이다. 이렇게 사나흘만 묵다 보면 마음마저 지리산 봄물 들어, 어느 산자락 한 곳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시인·음식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