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7 주께서 약속하신 복 시 133; 행 4:32~35; 요일 1:1-2:2; 요 20:19-31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성서 인물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정당한 거래 같지만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일을 계기로 형과 적대관계가 되고, 형을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피했는데, 외삼촌이 야곱보다 한 수 위입니다. 외삼촌의 둘째 딸과 눈이 맞았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7년을 일했는데, 둘째 딸이 아닌, 첫째 딸과 첫날밤을 보냅니다. 분하지만 외삼촌의 불편한 거래에 고개를 숙입니다. 어릴 적 저의 모습이 마치 야곱 같습니다. 거짓은 아니지만 교묘하고 영악하게 다른 사람을 이용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속인 것과 다르지 않은 행동입니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솔이를 보면 깜짝 놀랄 만큼 따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대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부모 입장이라서 그런지, 이해심이 부족해서 그런지 잔소리 강도가 더 높습니다. 심지어 성서 이야기까지 전해 줍니다.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 일을 도와 달라고 했는데, “예” 라고 대답은 잘했지만, 도와주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거절했지만, 뉘우치고 아버지 일을 도운 이야기입니다. “솔아, 대답이나, 말주변 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약속이란다” 여전히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주의할 말이, “아빠도 그랬잖아” 압니다. 나는 되고, 너는 안돼! 이것보다 먼저 본을 보이고, 약속과 신뢰를 우선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합니다.
부활 절기를 보내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의 한결성에 주목합니다. 공생애 시작과 함께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시절 제자들의 모습은 하릴없는 노동자 정도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생존자입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일차적 목적이나 의식입니다. 사람이 여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는 것은 동물과 다른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라고 하는 미래, 혹은 희망과 기대가 있다는 방증입니다. 예수와 만나기 전의 제자들, 예수의 부름을 받기 전의 제자들은 일차적 노동자였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의 “나를 따르라” 라고 하는 그 한마디에 하던 일을 멈추고 즉각 따랐던 모습은 기존의 삶이 일차적이라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의 부름은 새로운 해방구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던 일을 멈추고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부름은 강력한 이끌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에 병을 고쳐버립니다. 절대 권위에 굴하지 않고 비판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약하고 소외자의 곁에 따뜻하게 위로하고 함께 합니다. 심지어 죄인마저 죄보다 사람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큰지,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건지를 탐내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 자신의 권력 탐하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의 발전이기는 하지만, 참된 부름의 응답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자립과 자존보다는 의존형입니다. 스스로 헤쳐나가지 못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리 지키기 뿐입니다. 영역보존입니다. 쉬운 말로 텃세입니다. 예수의 수난, 십자가 앞에 모두 숨죽이며 돌아선 모습을 봅니다. 심지어 모른다는 부인과 급기야 저주마저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욕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저와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십자가가 재연된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입니다. 그래서 연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바울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한결성은 여기에서 확연해집니다. 제자들은 모인 곳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손가락질, 누군가의 고발이 두렵습니다. 당신들도 예수와 함께 있던 비겁한 자들이요.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야 합니까? 이전의 일터로 돌아가 숨죽이며 살아야 합니까? 한숨만 내쉴 뿐입니다. 그 순간 뿌연 안개가 한순간 사라지듯, 죽었던 예수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꿈인지 생신지 너무 놀랍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휘둥그레진 눈, 멍한 상황에서 어떤 말이 들립니다. “평화가 있기를...평화가 있기를...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처음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 희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입니다. 죽음의 공포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기대감입니다. 십자가 이전에 보던 예수와 똑같은 당신이지만, 달라 보입니다. 표현할 수 없지만, 만감이 교차됩니다. 십자가 앞에서의 행동이 떠올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얼굴로 미소짓는 예수를 봅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기에, 이럴 수 있는가? 그 한결성, 그 신뢰성, 그 확신, 제자들의 변화를 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증언합니다. 굳게 잠근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변화됩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말하기를 함께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과시욕과 소유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시편 본문은 말하기를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 거기에 주께서 약속하신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복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의 다른 이름 같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의 부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여전함, 급기야 십자가 앞에서의 배신, 그럼에도 평안을 빌어주는 예수,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부활, 이 모든 결과는 함께 더불어 사는 일 같습니다. 요한 일서 본문의 표현으로 마무리합니다. “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침묵!
240407 시 133; 행 4:32~35; 요일 1:1-2:2; 요 20:19-31
시 133
1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
2 머리 위의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께서 여기에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행 4:32~35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요일 1:1-2:2
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
2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본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4 우리는 1)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고 이 글을 써 보냅니다.
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8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0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1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요 20:19-31
19 그 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그들에게로 숨을 내뿜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해 주면 사해질 것이요, 사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2)'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시어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런 다음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3)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4)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