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제목 : 기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자
성경 본문 : 마가복음 1장29절-39절
설교 자 : 지 명 숙 목사 <2021년 12월 22일 수요일>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하루를 특별히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 셨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공생애를 사시면서
<예수님>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우리들의 하루와 어떻게 달랐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하루의
일과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루 일과는 ,
1)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였고
이것은 그의 생애 동안 변함이 없었습니다.
2)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는 것을 보시자
<예수님>은 즉시 그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 사람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회당에서 나온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에 걸려 있는 그의 장모를
치료하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이유는,
사위가 <예수>에 미쳤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이 어머니도 여느 어머니와 같이 자기의 딸을
<시몬>에게 시집보내면서 잘 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어부 인지라 큰 부자로 살거나 크게 명예 롭 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배 한 척을 갖고 사니까 딸을 고생시키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사랑하는 딸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위 <시몬>이
<예수>라는 사람에 미쳐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고기도 잡지 않고 이곳저곳 돌아다닌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확인 차 사위집에 가보니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날 벼락이냐고 딸을 걱정하던 장모는
급기야 화병(열병)에 걸려 드러 눕고 말았습니다.
충청노회의 어느 목사님이 일신여고 교사를 하시다가
50이 넘어서 신학을 한다고 하니까 처갓집에서 다시는
사위집에 가지도 않겠다며 심한 반대를 하였다고 합니다.
결혼 전에 많은 신학생들에게 중매가 들어왔지만
딸이 고생 할까 봐 다 거절하고 학교 교사라고 해서
안심하고 딸을 맡겼더니 어느 날 그 사위가 신학을
한다고 하니까 열이 나신 것이지요.
화병에 누어있는 <시몬 배드로>의 장모를
<예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이 치료를 받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는 자기 생각이 잘못임을 알고
사위를 용서하고 자기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였고
그래서 치료를 받은 후 시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은 직장 생활 잘 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생활 하다가 갑자기 신학 한다고 다른 사람
놀래 키고 화병에 걸리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직장 생활을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전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시면서 거기서 전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온 목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일상은 전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의 하루와 <여러분>의 하루는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여러분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의 일상이
예배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날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림으로
매일과 같이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봉사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심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전도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하실 때 그것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귀한 삶을 살아가시면서 또한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면서 잊지 않으시고 빼 놓지 않으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도의 삶 입니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로 인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능력 있는 분으로
새롭게 보았을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었다는 소식이
온 동네에 퍼지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직 안식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저녁 6시가 되니까 온 동네사람들이 다 <시몬>의 집에
몰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여온 사람들을 일일이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고 <예수님>은 밤 늦게
주무셨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조금 늦게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새벽기도를 생략한다든지 할 터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새벽 미명에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하시고는 몰려오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인기가 있던
그곳을 떠나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고 피곤하신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 하셨을까요?
왜 기도를 하신 후에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그곳을 떠나시는 결정을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기도는 삶의 중심, 삶의 핵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힘들면 쉬고, 피곤하면 건너뛰고, 무슨 일이 있으면
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빼 놓을 수 없고 건너뛸 수 없는 필수적인 일이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를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기도는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어떤 능력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기도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잠언> 30장에 보면
<아굴>이라는 사람의 <잠언>이 나옵니다.
<아굴>은 특별히 두 가지를 간구한다고 하면서
죽기 전에 이것을 이루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1) 허탄과 거짓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 달라는 간구이며,
2)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말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두 번째 간구에서
<아굴>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너무 부해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고 <하나님>을 멀리할까
두렵기 때문이요,
너무 가난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굴>의 간구의 핵심과 목적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영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아굴>의 간구가 진정
우리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만
많은 성도들은 이 간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방 가서 이 말씀을 전하면 별로 반응이 좋지 않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자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인가 우리는 부하게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신앙의 목적이요
<예수> 믿는 목적으로 변질된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부하게만 된다면 허탄과 거짓과 기타 잘못된 것도
용납 받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굴>은 이 간구를 통하여 우리의 삶의 목적이
부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기도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19세기 <영국>의 설교가
< P. T. 포사이스는 > 이렇게 말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은
기도를 잘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크리스천>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평소에 항상 옳은 일을 행 하셨고,
항상 옳은 길을 걸어가셨다. 왜냐하면
‘기도를 잘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포사이스>의 말은 기도의 중요성을
한층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기도는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요
가장 핵심적인 신앙의 삶입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이룰 목표가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요
가장 올바르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기도하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바쁘고 피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은,
신앙의 목적인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올바른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가버나움>동네를
떠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셨을 때 <하나님>은 분명
<예수님>에게 이곳에만 머물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잘 해주는 곳에,
인기가 있고 환영하는 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가버나움>이 바로 그런 동네였고
그 동네를 떠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곳만이 아니라
다른 동네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셨고
그 사실을 깨달은 주님은 그곳을 떠나
다른 동네로 가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의 유혹이나
인간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나는 바쁘기 때문에 더욱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면서
종교개혁의 와중에서도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더욱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쁘면 <하나님>을 잊기 쉽고 <하나님>을 잊다 보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쁠 때 일수록 더욱 기도함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바쁨을 핑계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하고 맙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였을 때
얼마나 공허 하였습니까?
<덕 필즈> 목사는
성도들이 영적 공허함을 느낄 때
나타나는 증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이기적이 된다. 참을성이 없어진다.
긍휼한 마음이 없어진다.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간다.
보상을 당연하게 여기며
받을 자격이 충만하다고 느낀다.
사람들에게 쌀쌀맞게 군다. 반항적이 된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냉소적이 된다.
좋은 결정을 내리기가 더 어려워진다.
대체로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허함을
다른 사람에게서 채워보려고 한다.
말뿐만 아니라 생각도 비판적이 된다.
영적으로 공허하게 될 때 우리는 본성적으로
구분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사라지면 세상의
손짓이 매우 유혹적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러한 공허함을 느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영적 공허함에서 오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허함을 식탐이나
쇼핑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도 합니다.
분주하게 살아감으로 스스로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륜이나 살인처럼 치명적인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그런대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간다고 자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충만은
큰 영역뿐 아니라 일상의 작은 영역에서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공허함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꼭 새벽기도에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광야에 가서 기도하고
금식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하여
영혼을 재충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는 멈추어서야 하고
둘째는 잠잠해야 하고
셋째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을 재충전하기 위하여
하루 중 잠시라도 멈추는 법을 배우기 바랍니다.
차를 세우지 않으면 연로를 공급할 수 없듯이
여러분들이 바쁘게 이리 저리 움직이는 동안에는
영혼을 재충전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연료통을 채우려면 우선 멈춰야 합니다.
멈추기 위하여 우리는
거짓의 뿌리를 추적하고 그 실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거짓은 모든 것을 할 만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기도하고
지금은 한창 바쁠 때라 멈출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 멈출 수 없고
성공과 바쁨은 동일 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우리를
유혹하는 잘못된 사상과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멈추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일상에서 멈추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멈춤의 여백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루에 몇 번씩 멈춰서 잠잠히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5분 먼저 가서 잠시 묵상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출 퇴근길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기 전에
2-3분 동안 성경 구절을 암송할 수 있습니다.
퇴근하기 전에 컴퓨터를 끄고
몇 분간 조용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집안일을 하다가 잠시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멈춘 다음에는 잠잠해야 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 지어다..”
(시편46편10절)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멈춤과 더불어 또 다른
근본적인 실천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잠잠함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잠잠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잠잠 하려고 하면 염려가 속삭이면서
자꾸만 염려되는 일들이 밀려옵니다.
탐심의 소음은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게 하고
지연의 소음은 오늘 해야 할 일이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빨리 마무리하라는 나지막한 잔소리를 통하여 우리를
잠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소음을 멀리하고 소음이 사라지면
우리는 내면의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기도로 묵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재충전될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분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직장에서 특별히 일찍 퇴근해서
자녀들도 모두 일찍 재우고, 수화기도 다 내려놓고,
부부가 함께 저녁 9시 50분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특별기도 하시는가? 했더니 TV연속극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기 위해서랍니다.
기도하기 위해 그런 정성을 다하고
기도를 그의 삶에 우선순위에 둔다면
얼마나 더 훌륭한 인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바쁘고 힘들고 복잡한 일상 속에서 기도하시므로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갔던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