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일 시인>>
<<김중일 시인의 양력>>
* 1977년 서울 출생.
*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시집 :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 『가슴에서 사슴까지』, 『유령시인』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김중일 시인의 시>>
시인의 애인/김중일
아주 오래전에 고드름처럼 자라는 열매가 있었다, 그건 잠든 시인을 안고 있는 애인
의 눈꺼풀에 매달린 눈물, 불현듯 시인의 정수리로 뚝뚝 떨어질 뾰족한 운석, 시인이 한
숨 많은 애인을 끌어안자 가슴 가득, 울음 참는 들숨처럼 스며드는 한숨의 애인, 오늘도
시인은 애인에게 보여줄 시를 썼다, 시를 받아든 시인의 애인은 한숨을 폭 쉰다, 이 시는
당장 읽지 않으면 금세 녹아서 사라져버리겠지, 두 손이 부재의 기억으로 끈적이고, 기도
를 멈출 수 없게 완전히 달라붙어버리겠지, 시인의 애인은 시인을 먼저 살다 간 사람, 시
인이 이제 살다 갈 사람, 한달 전에도 백년 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은 여기 있다,
오늘도 시인의 애인은 시인의 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창 밖에는 막대사탕같이 꽂힌
세상 모든 꽃송이를 초여름의 태양이 혼자 다 녹여 먹으며, 한자 한자 시를 읽고 또 고심
하는 시인의 애인을 본다, 있잖아 내내 묻고 싶었는데, 시는 왜 쓰지, 시인이 말한다, 나도
그런 시, 네게 무작정 읽히는 시, 불가피한 시가 되고 싶다고, 시인의 애인은 잠든 시인의
그림자로 매일 밤 드나든다, 시인의 꿈속, 구석구석 애인의 체온이, 어디를 가든 시인보다
먼저 시를 찾아 헤맸던 애인의 메모가 적혀 있다, 시인이 가진 고독의 주머니가 희생자의
주먹을 넣은 것처럼 불룩해졌으면 좋겠어, 코앞에 펼쳐놓은 공기 위에 한자 한자 새겨져 불
가피하게 읽히는, 이해할 필요 없는 시들이 세상을 무작정 가득 채웠으면,
좋겠어.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김중일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 '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튼튼한 집이 남지만
열심히 밤새 지은 '시'라는 채널의 관건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나누고 허무는가에 달렸다.
아침 해와 함께 흔적 없이 증발하는,
실체가 남지 않는 일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큰 직업'은 직업이 아니라는 뜻이 분명하다.
무작위로 배정되는 한 편의 채널에 접속을 기다리며 들었던 상념들을 서로 나누며,
빨래 개기를 마친 너는 노동의 대가로 배달 음식을 시킨다.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함께 있는 공간을 둘러보며 한 마디 덧붙인다.
이런 수십 개의 채널을 모아놓은 한권의 시집은 말이야
다림질까지 한 듯 기막히게 반듯이 개어놓은 시인의 속옷 같단 말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표백제로는 아무리 빨아도 결코 다 빠지지 않는 슬픔의 때가 미량이나마 껴 있어서, 결국 죽을 때까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다시 빨아야 하는.
빨다가 갑자기 눈물이 톡 터질 정도로 허무하기가 그 어떤 시적 수사로도 비유할 수 없는.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시’라는 침실/김중일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팔베개를 한 팔이 저려온다. 감각이 사라진다. 네가 눈 감고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걸 하릴없이 바라본다. 마치 전생처럼 썰물처럼 내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깜박깜박 잠이 밀려온다, 미래처럼 밀물처럼. 우리는 함께 잠긴다.
책장을 넘기듯 등이 찰나 꺼졌다 켜진다.
가수면 상태에서 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어느새 깼는지 아니면 잠들지 않았는지,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홑이불 같은 너의 목소리를 끌어 덮는다.
전 세계 해변의 면적은 어느 정도일까?
최소한 그 면적의 합은 서울보다 클 거야.
서울이 다 뭐야, 최소한 우리나라보다는 클 거야.
우리나라가 뭐야, 웬만큼 큰 나라보다는 클 거야.
적어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시 세계’에서만큼은 그 모든 나라를 다 합한 것보다 클 거야.
드넓은 해변의 모래.
지난여름 내가 한쪽 발로 절뚝이며 모래 위에 쓴 너의 이름.
해변의 모래는 죽은 이들이 미처 못한 말들이 해와 달빛에 그을려 부스러진 잔해들이야.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라텍스 침대 위를 눈을 감고 걷는다.
한껏 달아오른 해변의 모래에 네 발목까지 다리가 푹푹 빠진다.
죽은 이들의 화장된 말들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네 콧등에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무슨 소리가 좀 들려?
내가 걱정스레 묻는다.
한없이 밤이 이어지고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세상 약속의 절반 이상은 사라질 텐데.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내일 또 보자, 라는 말을
못 지킬 약속으로 남기는 일은 다시 없을 텐데.
밤의 벌어진 검은 입
밤이 창문들을 벌리고 도시가 떠나가라 울기 시작하는 시간.
갓난아기처럼 밤이 울면서 기어 오고, 창문마다 둥근달이 우유병처럼 꽂힌다.
되레 밤을 꿀꺽꿀꺽 삼키며 세상에 흘러넘치는 흰 구름들.
책장을 덮듯 밤이 하얗게 잠든다.
밤에 링거액처럼 눈물들이 듣기 시작한다.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커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너는 내일 아침에 또 보자는 약속도 없이 창문을 통해 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너는
시 속으로 들어올 때와 나갈 때가 다른 사람 같다.
시 밖에서 우리는 생면부지다.
좋은 날을 훔치다-‘시’라는 식당/김중일
우리는 한날한시 한 유령시인의 애도 시 속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 사이.
주방에서 나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콧노래를 부른다.
오늘은 지금까지 슬펐던 것이 그다지 슬프지 않은 날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껏 슬퍼해도 좋은
날이다.
콧노래를 부르다가 불현듯 얼굴을 약간 찡그린다.
얼굴 안에서 밖으로 갑자기 쏟아지려는 물풍선을 급히 붙잡듯 얼굴의 주름은 순간 수축한다.
"인간의 얼굴은 감정의 괄약근이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풀려서 문제"라며 나는 양파를
썰면서, 네가 불편해할까 봐 너스레를 떤다.
오늘, 아직 슬프지 않은 나는, 미리 눈물을 훔친다.
내 안에 그렇게 많이 고여 있어도, 눈물은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내 것인 적이 없다, 눈물은 너의 것도 살아 있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이들 중에는 애초에 눈물의 주인이 없다.
다시 못쓰게, 감정에 뒤섞여 얼굴 밖으로 결로처럼 맺힌 후에야
결로를 맨손으로 훔치고 창밖의 풍경을 살피듯, 비로소 나는 내 안에 고여 있던 것이 내 것이 아
니었던 눈물을 만진다.
내 안팎의 온도 차로 발생한 축축하고 미지근한
제 가치를 잃은 눈물을 좀 훔친다고 해서 탓할 사람이 있을 리도 없다.
몸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는 건 성긴 학설이다.
정확히 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눈물'을 담는 그릇이다.
때때로 온몸이 주먹만한 심장 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고통에 그릇이 흔들리는 만큼 눈물이 흘러넘
칠 뿐이다.
그릇은 하나도 잘못이 없다 그러니 그릇은 슬퍼할 자격이 없다.
세월 따라 주름이 많이 간 그릇이 깨지기 전에 '눈물'이 다른 그릇으로 매일 조금씩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잘 옮겨지면 된다.
휴일 늦은 저녁, 눈물이 듬뿍 들어간 나의 맛없는 요리를 맛있게 떠먹으려 너는 한참 전부터 커다란
숟가락을 들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공기 청정기와 나/김중일
정기적으로 공기 청정기를 분리해
먼지가 잔뜩 낀 검은 필터를 꺼내 볼 때면
마치 활자로 시커멓게 가득 찬 내 시집 속 한 페이지 같다
공기 청정기가 되었다는 전설의
죽은 시인들의 시를 읽고 침대에 누운 밤이면
죽은 시인들이 지금 자고 있는
잠의 깊이로 잠시나마 빠져들기를 고대하게 되지만
그 '깊은 잠'은 비극만을 기록한 죽은 시인들이 독과점하고
오히려 나는 완전한 불면이다
번개탄을 피운 듯 매캐한 잠냄새에
깊은 밤 공기 청정기를 켠다
청정기 속의 죽은 시인들과 죽은 독자들은
먼지 한 톨만큼의 잠도 남기지 않고
시집의 페이지와 페이지
활자와 활자 사이로 필터링한다
페이지마다 활자마다 시커먼 잠이 슬픔의 때처럼 잔뜩 끼어 있다
이제 청정기 밖 공기에는 먼지 한 톨만한 잠도 떠다니지 않는다
잠을 걸러낸 청정한 시간의 공기를 청정기는 밤새 내뿜고 있다
내가 뒤척이며 한숨을 내쉴 때마다 하품을 내뱉을 때마다
청정기가 윙윙 힘겹게 그러나 힘차게 모터를 돌린다
그때마다 나는 청정기처럼 자꾸 깬다
밤새 내 콧구멍 속에서 흘러나온 잠이 청정기 속으로 빨려 들 때마다
청정기도 나도 자꾸 윙윙, 놀라며 깬다
살얼음 같은 선잠 위에 아슬아슬하게 누운 공기 청정기와 나
결국 뜬눈의 청정기와 나
‘둘 중 누가 완전히 잠들기 전에는
결코 먼저 잠들지 못한다’
애초에 누구도 잠들지 못할 모순이다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 새벽에 몰래
나는 침낭 속으로 기어들듯 공기 청정기 속에 들어갔다
그제야 잠시 잠에 들었다가. 나오니
또 밤이다
공기 청정기가 어느새 나를 옆에 뱉어내고
윙윙 힘겹게 모터를 돌린다
국수처럼 쏟아지는 잠/김중일
한 사발의 잠에 국수를 말아 먹는 밤에
비가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밤에
폭식의 밤에
썩은 이빨처럼 까만 창문들 사이에 끼어
지구가 시커멓게 벌어진 입처럼 둥근
지구가 천공의 빗줄기를 태풍처럼 둘둘 말아
한 젓가락에 후루룩 끌어당기는 밤에
영문도 모르고
땅과 바다에 묻힌 사람들은 배가 부르다
지구처럼 지구만큼
터질 듯 배가 부르다
영문도 모르고
살아 있는 나는 배가 고프다
부재자의 잠은 완전히 침수되고
들고나올 살림이 하나도 없는
부재중인
한 사람의 잠에 국수를 말아 먹는 밤에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김중일
― 이야기의 끝
아름답게 찢어진 커튼처럼 폭우가 내리고
일만이천사십오번째로 간이 진료실을 방문했을 때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수련의의 피곤한 눈꺼풀을 열고 손 흔들었건만
내 손에 만져지고, 내 손을 붙잡고 흔드는 건
단지 비바람뿐이었습니다
피가 침에 섞이듯
자다 깨 겸연쩍은 그의 웃음에 달빛이 뒤섞였습니다
어젯밤의 토사물이 말라붙은 변기 같은 창문에는
인류가 동시에 뱉어놓은 가래침처럼,
추접스러운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반복 재생되는 레코드의 노이즈 같았습니다
기적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수련의가 내게 일만이천사십오번째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저랑 이야기하는 걸 멈춰도 된다는 뜻입니다
삭신이 쑤시네요 저는 아직도 이렇게 아픕니다
수련의는 만지작거리던 호두를 망치로 내려쳤습니다
당신의 뇌는 여기 이 녀석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기름지고 윤기가 흐릅니다
그게 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효과입니다
무중력 속에서의 가벼운 핑퐁처럼 무한정 반복되는
비가 눈으로 바뀝니다 농담같이 슬그머니
세계는 조금 느려집니다
단 오분 간의 폭설로
시커먼 적설이 병원 옥상까지 쌓였습니다
수련의와 제가 있는 진료실은
심해 속의 기포처럼
우주 속의 작은 공기주머니처럼
한 점 공기보다 작은 소형 우주선처럼
어둑어둑하고 희박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진료실의 두꺼운 전공서들이
우리가 흡입해야할 공기를 다 들이켜고 있습니다
활자들이 배고픈 병정처럼 식판을 들고 도열해 있습니다
우리는 폭설의 한가운데 있었고
폭설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침묵과 이야기는 세팅된 일정 비율로 혼합되었습니다
축축한 손아귀처럼 비바람이 우리의 머리와 사지를 깍지 끼듯 붙잡고
그리고 수억년 전부터 계속되었던 합창 연습 시간에 따라
단조로운 리듬에 맞춰 일정하고 힘차게 손을 흔듭니다
우리는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이곳에선
물구나무를 선다면 당장이라도 하늘의 적설을 밟을 수 있습니다
여긴 희박하고 어둑하고 아늑하고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정전.
눈썹이라는 가장자리/김중일
눈동자는 일년간 내린 눈물에 다 잠겼지만, 눈썹은 여전히 성긴 이엉처럼 눈동자 위에 얹혀 있다. 집 너머의 모래 너머의 파도 너머의 뒤집힌 봄.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바람의 눈썹이다.
바람은 지구의 눈썹이다. 못 잊을 기억은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까지 다 밀려온다. 계속 밀려온다. 쉼 없이 밀려온다. 얼굴 위로 밀려온다. 눈썹은 감정의 너울이 가 닿을 수 있는 끝. 일렁이는 눈썹은 표정의 끝으로 밀려간다. 눈썹은 몸의 가장자리다. 매 순간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울음이 울컥 모두 눈썹으로 밀려간다. 눈썹을 가리는 밤. 세상에 비도 오는데, 눈썹도 없는 생물들을 생각하는 밤. 얼마나 뜬 눈으로 있으면 눈썹이 다 지워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밤. 온몸에 주운 눈썹을 매단 편백나무가 바람을 뒤흔든다. 나무에 기대 앉아 다 같이 뜬 눈으로 눈썹을 만지는 시간이다.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털과 다르게 눈썹은 몸의 가장자리인 얼굴에, 얼굴의 변두리에 난다. 눈썹은 사계절 모두의 얼굴에 떠 있는 구름이다. 작은 영혼의 구름이다. 비구름처럼 낀 눈썹 아래, 새까만 비웅덩이처럼 고인 눈동자 속에, 고인의 눈동자로부터 되돌아 나가는 길은 이미 다 잠겼다. 저기 저 멀리 고인의 눈썹이 누가 훅 분 홀씨처럼 바람타고 날아가는 게 보이는가? 심해어처럼 더 깊은 해저로 잠수해 들어가는 게 보이는가? 미안하다. 안되겠다. 먼 길 간 눈썹을 다시 붙들어 올 수 없다. 얼굴로 다시 데려와 앉힐 수 없다. 짝 잃은 눈썹 한 짝처럼 방 가장자리에 모로 누워 뒤척이는 사람. 방 한가운데가 미망의 동공처럼 검고 깊다. 눈물이 다 떨어지고 나자 눈썹이 한올 한올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가장자리에는 누가 심은 편백나무가 한 그루.
그 위에 앉아 가만히 눈시울을 핥는 별이 한 마리.
두근거리는 신전/김중일
허기진 하루가 골목을 어둑어둑 집어먹고 있다
아이들은 밥 먹으러 불려가 하루 햇볕 다 나눠 먹고
창문마다 배가 불러 환하다
닫힌 창문으로 가족들이
너무 오래되어 흐릿해진 상형문자처럼
새겨져 있다 불빛은,
두 눈뜨고도 읽을 수 없는
점자처럼 일어서고
창문과 창문은 더듬거리며 점점 가까워져
뜻을 알 수 없어, 빛나는
글자 하나씩 이어 붙이고 있다
언제쯤이면 明明白白해 질까
담장 너머로 창문은
하나 둘 검은 추를 토해내고
행간에 느낌표로 전봇대가 서 있다
聖所에 꼭꼭 숨어 별들도 나오지 않는 밤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하늘로 고개 들면, 지워진
문장 아래 남은 밑줄처럼
전봇대와 전봇대를 잇는 전선
그 혈관으로 갑골문 같은 통점이 수혈된다
전봇대가 炭柱처럼 캄캄하게 서서
하늘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시간
문설주에, 弔燈 하나가 꺼내 놓은 심장처럼 환하다
2002년 신춘문예 당선시집
초록의 눈사람/김중일
사지가 많이 나뉠수록 완벽해진다고
아름다워질 거라고 눈사람은 믿었다.
눈사람은 지금 제 옆에 선 나무가 되고 싶었다.
눈사람은 나무였다.
바람이 나뭇잎을 굴리고 뭉쳐 초록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무는 눈사람이었다.
초록의(衣) 눈사람 ; 눈사람이 입은 초록 옷.
잎과 잎 사이, 올과 올 사이에 반짝이는 아침
햇빛이 정교하게 수 놓인 옷.
공중을 초록실로 자아 만든 옷.
‘옷’이라는 글자는 사람을 닮았다.
계절마다 서로의 몸을 바꿔 입었다.
겨울에는 나무가 눈사람이라는 옷을.
여름에는 눈사람이 나무라는 옷을.
매일매일 석양을 뒤집어쓴 적록색 옷.
나무라는 눈사람이 입은 적록색 옷.
저녁의 나무는 지구라는 우주선이
명왕성으로 이륙하며 뿜어내는 추진 화력.
잔뜩 둥글게 웅크리고 자는 눈사람이 있다.
사지가 많이 나뉘고 갈라진 것은
최대한 더 작고 단단하게 웅크리기 위한 것.
더 멀리 오래 날아가기 위한 것.
지구의 사지를 펼치면 우주를 뒤덮고
창틀의 먼지 하나가 사지를 펼치면
지구를 다 덮고도 남을 것.
가지는, 무수하나 단 하나도
같은 곳을 가리키지 않는 나무의 손끝이다.
나무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공중의 끝
끝의 공중은 눈사람이 살던 빈집이다.
지상이라는 망루 위의 눈사람은 집에 가고 싶다.
애도일기*/김중일
잠든 사이 지구상에서 또 몇 명이나 떠났을까.
내 가슴으로 뛰어드는 아파트 이십층의 공중.
공중에서 날개를 베고 잠든 새처럼 밤을 보내고
오늘로 뛰어들어, 뚜벅뚜벅 걷고 있는데
눈앞에 파지처럼 공중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한쪽이 뾰족하게 불거지다가 옷이 툭 터지듯
공중에 구멍이 뚫렸다.
공기가 실오라기처럼 풀리며 바람이 불고
산들바람 사이로 나뭇가지가 펜촉처럼 불거지고
붉은 낙엽들이 줄줄 새나왔다.
계절이 바뀌고 잉크가 다 마르도록
나뭇가지는 내 이름을 공중에 썼다.
백지처럼 바스락거리는 환절기 공기 위에
풍경에 도배된 바람 한 장 위에
천천히 망설임 없이 내 이름을 썼다.
그리고 일기장의 마지막 문장에 찍힌 구두점처럼
멀어지는 작고 까만 뒤통수.
날 위해 기도하는 말더듬이 우주인.
내 몸은, 지구를 관람하다가 그만 어쩔 도리 없이
슬픔에 잠긴 우주인이 쓴 일기장.
표지처럼 내 몸을 감싼 공기를 오늘 나는 만진다.
내 살갗과 옷 사이의 얇고 엷은 공기를.
내가 일생 입고 있는 공기를.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옆 사람과 돌려 입고 돌려 읽은 공기를.
살갗과 옷 사이의 공기를 우리는 알몸으로 만진다.
자식 잃고 부모 잃고 울고 있는 몸의 리듬으로 만진다.
살갗과 옷 사이로 온종일 흐르는 울음으로 만진다.
지금도 몸과 옷 사이
첨단의 얇은 공기층을 나는 껴입고 있다.
공기층 속에는 구름과 같이 건조된
빙하 같은 우주선이 있다.
나를 나의 우주로 되돌려 보내줄 우주선.
대대손손 물려 입고 물려 읽고 간다.
말줄임표로 가득찬 말풍선을 배기구로 뿜어내며 간다.
* 롤랑 바르트,『애도일기 Journal de deuil』제목 인용.
시인의 선물/김중일
줄 게 이것밖에 없어요.
길거리에서 그는 빈손을 내민다.
나는 그의 빈손을 받아간다.
빈손을 파지처럼 구겨서 주머니에 넣는다.
주머니 속에 시인의 주먹이 공처럼 불룩하다.
그의 빈손은 곧 빈 코트에 내리꽂힐지도 모른다.
그의 빈손은 곧 빈 코트에 나를 내리꽂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전에 주머니에서 무심히 툭 떨어져 코트 밖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친구, 나의 그 빈손만은 부디 잡아주면 좋겠어.
보잘것없지만 그건 내 선물이잖아.
물론, 나는 기꺼이 떨어진 그의 손을 다시 잡는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나를 꽉 움켜잡아 순식간에 제 주머니에 욱여넣는다.
시인의 주머니 속은 역시 밤이다.
시인의 주머니에 오늘밤은 나로 가득하다.
줄 게 이것밖에 없군요.
시인은 나를 꺼내 네게 내민다.
너는 시인이 내민 빈손을 받자마자
전단지처럼 구겨버리며 바삐 계단을 내려간다.
눈물이라는 은색 지퍼/김중일
망루 위에서 그의 눈물이 뛰어든 곳은 너무나 깊다
당신 꿈의 열배도 넘는다
깊은 망루의 밤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입술을 빚다 보면 그것은 자칫 울음이 될 수 있다. 검은 구유의 밤에 팔을 걷어붙이고, 팔 없는 손으로 저 멀리 흐릿하게 빛나는 별의 얼굴을 더듬었다.
파지처럼 매일 손바닥 한 장씩 꽉 구겨 쥐었다
편지는 손금을 따라 구겨졌다
망루 위에서 그가 흘린 눈물의 궤적은 너무나 길다
당신 키의 열배가 넘는다
은빛 눈물의 레일은 너무도 길어, 눈물이 반짝이는 얼음 지퍼처럼 까마득한 지상에 뚝 떨어지는 찰나, 벌어진 공중의 틈새로 그을린 구름에 휩싸인 불기둥이 비어져 나오기도 했다.
그의 눈물은 놀랍도록 작고 뜨겁고 무거워
그믐의 무릎 위에 고요히 올려진 완고한 손등을
관통하고 발등을 뚫고 지각과 맨틀을 뚫고
지구를 꽁꽁 싸맨 검은 보자기 한가운데
달처럼 환한 구멍을 냈다
밤의 긴 베럴 속을 빠져나온 눈물은 한 방울의 만월로 흘러 언 구름에 번지고, 그는 하늘 깊숙이 떨어진 달의 은색 지퍼를 다시 목 끝까지 올리며 제 스스로 공중에 갇혔다.
식탁 한켠 작고 각진 검은 창문 속에서
당신이 뽑아 건네는
한 장의 티슈처럼 아침 하늘이
천천히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당신의 벼락/김중일
당신의 팔은 밤사이 당신에게 떨어진 벼락이에요
토요일이었던 어젯밤 당신은 그 팔로 벼락같이 날 끌어안았죠
멋대로 갈라진 벼락의 끝자락처럼 뜨거운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허리를 휘감고
내 온몸에 온통 당신의 손자국을 냈죠
내 온몸을 떠돌던 당신의 손은 지금 내 손바닥 위에
내 손금 속에 갇혀 있어요
그때가 벌써 언젠지 몰라요
오늘은 까마득한 어제의 멀고 먼 미래예요
내 손안에는 지금까지
내가 잡았던 손들이 켜켜이 쌓여 있어요
내가 잡았던 잿빛 손이 내 맥막을 타고 쏘유즈 같은
내 피톨의 항진 경로를 따라 온몸을 떠돌다가 밤이면
내 손등에 내려앉아 내 손을 꼭 잡아요
내가 주먹을 쥘 때마다 그 손은 내 손을 꼭 잡아요
내가 주먹을 꼭 쥘 때마다 그 손은 내 손을 더욱 꼭 잡아요
나는 낡은 장갑처럼 당신의 잿빛 손을 끼죠
나는 잿빛 손으로 빨간 꽃을 꺾고 파란 벌레를 때려잡고 다시
내 무릎 위로 떨어진 낙엽 같은 갈색 손을 잡아요
잠든 멧새를 잡듯 조심히 잡아요 갈색 손은 조롱 같은
내 몸 안을 헤집으며 날아다니다가 팔목 위에 앉아 나를 봐요
나는 이제 깨야 할 꿈 밖으로 새를 먼저 놓아 보내요
새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아요
작게 소용돌이치며 그림자들 곁을 맴돌아요
오래전 잡았던 손이 여전히 내 손안에 있어요
오래전 놓았던 손이 내 손을 방한장갑처럼 끼고
아직도 추운 내 손안에 있어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울리는 손뼉 소리
나는 당신의 손이 날아가지 않게 주먹을 꼭 쥐고
당신의 손은 내 손을 빌려 끼고
내가 막 사랑하기 시작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요
당신의 손안에도 내 손이 가득하죠
내 손이 당신의 손을 찢긴 장갑처럼 끼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손을 모아 밤마다 기도할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벼락처럼 기도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벼락 같은 당신의 그 팔과 그 손으로
당신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몰라요
돌팔이 詩師/김중일
너는 절뚝거리는 예언자 가끔은 맞고 자주 기울었다 양팔 저울로 별들의 몸뭬를 재면서도 하얗게 지우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밀실에서 검게 태어난 너는
투명한 벽지에 나비의 울음소리를 그린다 촛농을 문지르고 흰색으로 덧칠한다 새치같은 더듬이를 들추고 날개를 들추면 울거나 잠든 네 모습이 보인다
너무 늦게 핀 복사꽃
떨어진 자리마다 발자국이 선명하다 아픈 꽃들은 이별의 방식을 노래한다 실컷 원망하고 떠났더 문장이 내 두 손에서 우치를 바꾸고 또 바꾼다 같은 노래를 다시 듣는 버릇이 생겼다
동어반복의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가루약 같은 권태가 펄펄 흩날이는 것은 부드러운 바람이 잠깐 내 몸을 스쳐 지났기 때문이다 발을 헛디딘 봄바람이 내 왼손을 잡아당긴다
너무 일찍 찾아온 앵무새
그렇게 계절은 시차를 조정하며 수평을 잡았다 너의 부재로 너만 기억하는 바람이 분다 기우뚱거리는 문장 사이로 저울추 같은 고요가 반짝거린다 기우뚱거리는 문장 사이로 저울추 같은 고요가 반짝거린다 운이 좋으면 가운 대신 시스루를 입을 수도 있겠다
달력/김중일
밤에 빌딩이 달력처럼 일렁이며 걸려있다
열두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단지
백열등 같은 동그라미 안에 기억의 불이 환한 날과
캄캄하게 지워진 날,
불이 들어온 날들과
불이 꺼진 날들
불이 꺼진 어떤 날에 불현듯
불이 난다
밤과 밤이 부싯돌처럼 부딪힌다
부질없는 바람이 불고 영문 모를
불이 순식간에 번진다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력 한 장이 활활 타고 있다
불타는 달력을 지나쳐
내 기억이 여태 사는 날짜로 귀가한다
기일과 생일이 잔뜩 입주한 달력을
온전히 내버릴 수 없어
바람 없는 날을 잡아 태우기로 한다
비의 마중/김중일
어린아이가
무지개 우산을 쓰고 맞은편에서 동동 떠내려오듯
오고 있다.
네가 비켜서는 방향으로 아이도 비켜서기를
여러 번,
가만히
멈춰 선 아이의 우산은 비의 무릎 같다.
네 앞에 쪼그려 앉아 마치 너를 어린아이처럼 내려다보는
키가 큰 비의 한쪽 무릎 같다.
너를 마중 온 비.
한쪽 무릎을 꿇고,
우산도 안 쓴 너의 이마를 매만지는 비의 젖은 손가락.
너는 아이의 무지개 우산 위의
공중에 목례를 하고 서둘러 마중 간다.
급히 챙긴 하나 남은 우산을 쓰고 갈 생각을 미처 못하고.
기다리다 울지 마라, 울다가 가지 마라 기도하며
죽은 딸을 마중 간다.
그동안 잃어버린 우산들을, 그렇게 모두 다 주고 돌아왔다.
나의 퍼즐-임종/김중일
잠든 너의 입술을 매만져보며 새삼 놀란다.
입술에 난 촘촘한 주름따라 티끌 같은 퍼즐들이 모여 입술을 이루고 있다.
키스한다 마지막으로, 키스는 입술이라는 복잡한 퍼즐을 심지어 뒤섞는 놀이다.
이후 원래대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몸을 섞는다는 말은 절묘하다.
온몸의 주름은 우리가 얼마나 복잡한 퍼즐인지를 알게 한다.
혼자라서 신이 된 신은 퍼즐 놀이를 즐기는데, 번번이 퍼즐 조각 하나가 사라져 버린다.
어느새 눈 뜬 너는, 곧 네가 잃어버릴 퍼즐 같은 내 얼굴을 만지며, 너도 많이 늙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유일한 유언 같다.
흐른 시간만큼 주름은 늘고 이제 너도 의지로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 복잡한 퍼즐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꼭 눈물로 잠시만 완성되는 퍼즐이 되어 버렸다, 나도.
정말 유감이야, 단 한 번도 완성되지 않는 이 시간이라는 퍼즐이.
유독 ‘너’라는 조각 하나만으로 완성되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던 밤만, 잔상만 남기고 감쪽같
이 사라져 버렸다.
잔상 같은 문장 끝에 유일하게 선명히 남은
새까만 마침표 속으로 뛰어내리듯
잠들었다.
그저 오늘 또는 하루라는, 평생을 사라지지 않는 잔상에 어지러워 잠시 눈을 감았을지도.
너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비어져 나온다.
부피와 질량을 갖고도 유일하게 눈물은, 나의 퍼즐에 포함되지 않는 조각이다.
그래서 자꾸 틈만 나면, 시작부터 끝까지, 네 몸에서 뚝뚝 떨어져 나갔다.
이야기하는 사이 너는 떠난다.
눈물은 시트에 떨어지는 순간 감쪽같이 스며들어 영원히 잃어버리는 퍼즐 조각,
혼자라서 신이 된 신이, 퍼즐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에 번번이 잃어버리던 그 조각이다.
백자/김중일
온 세상에 무수히 실금이 가 있다
봄날의 아지랑이에서 한겨울의 나뭇가지까지,
무수히 무심한 얼굴들의 주름들
특히 네 입술의 주름들, 키스하는 순간 산산이 깨질 것 같다
기어이 백자를 깨뜨릴 듯 검은 새 한마리가 내 정수리 위로 화살처럼
스치고 간다
머리카락이 백자 위로 난 실금처럼 쭈뼛 선다
이러다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백자가 산산조각 날까 무섭다
내 머리 위에서 땅거미가 내 머리카락으로 거미줄을 치고
밤마다 내 꿈밖으로 달아나는 것들이 걸리길 기다린다
달아나다 공중에 난 실금에 걸려드는 순간 백자가 산산조각 나는 꿈
하나뿐인 백자에 누군가 매일 던지는 짱도러럼 해와 달이 눈부시게
날아든다
백자 한쪽에 오늘은 검은 구멍이 뚫린 듯 먼 산의 연기와 불길,
연기와 불길을 뿜으며 하늘로 까마득히 추락하듯 산 넘어 멀어지는
비행기
너는 거대한 산불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우리에게 언제나 단 하나 남은 백자를
무심히 내쉬는 한숨에도 재처럼 허물어질 온통 실금투성이 오늘 하
루를 두 손으로 조심히 들어올린다
무척
깨지기 쉬우나
그래서
깨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유골이 담긴 오늘의 백자를 검은 창에 묻는다
마음의 잠/김중일
어느 날 마음이 잠들어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다
마음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때마침 깜박 마음이 잠들어 있는데 애인에게 전화가 왔다
마음도 없이 길게 통화했다
늘 깨어 있는데 하필이면 잠들어 있을 때 그런 오해를 살 만한 일들이 있다고 해명해도
그런 소리 말고 평소에 마음을 좀 흔들어 깨워보라는 친구의 간곡한 충고에
때마침 깨어 있는 마음을 보란 듯이 또 흔들어 깨워본다
내 순한 마음은 가만히 있다가 불시에 얻어맞은 기분이 된다
그러기를 수차례 차라리 마음은 이제 거의 잠들어 있다
(깨어 있는데 누가 흔든다고 또 깰 수는 없으니)
흔들면 언제든 깰 수 있게,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위험하다
자칫 크레바스처럼 좁고 깊은 잠에 빠지면, 마음은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있다
이를테면,
마음은 지금 한창 꿈을 꾸고 있다
마음에 꼭 맞는 다른
몸을 얻는 꿈을
꿈일 뿐인 꿈을 꾸기 시작하면 마음은 제 몸에 마음 붙이지 못하게 된다
불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마음에 꼭 맞는 단 하나의 몸 따위는 애초에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누군가의 몸에 대해 애써 기억하고
하물며 신도 제 마음을 수십억 개로 찢어, 인간이라는 몸을 나눠 입혔으니
흔히 알 듯 마음의 잠은 죽음이 아니다
단 한 벌이던 몸은 깨끗이 세탁되고
세상을 덮을 솜이불로 지어지는 중인 죽은 이들의 마음에,
한 조각의 내 마음을 기워 붙이는 일이다
다만
마음은 이 순간에도 새로운 모양으로 계속 태어나므로
우리 마음의 잠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국수처럼 쏟아지는 잠/김중일
한 사발의 잠에 국수를 말아먹는 밤에
비가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밤에
폭식의 밤에
썩은 이빨처럼 까만 창문들 사이에 끼어
지구가 시커멓게 벌어진 입처럼 둥근
지구가 천공의 빗줄기를 태풍처럼 둘둘 말아
한 젓가락에 후루룩 끌어당기는 밤에
영문도 모르고
땅과 바다에 묻힌 사람들은 배가 부르다
지구처럼 지구만큼
터질 듯 배가 부르다
영문도 모르고
살아있는 나는 배가 고프다
부재자의 잠은 완전히 침수되고
들고나올 살림이 하나도 없는
부재중인
한 사람의 잠에 국수를 말아먹는 밤에
슬픈 손/김중일
우리의 손은 잘못 빚어졌다
너의 손에서 슬픈 것이 자꾸 땀처럼 배어나온다
금간 손금 따라 산산이 깨지기 쉬운 손
손금에서 자꾸 물이 샌다
누구나 양손은, 훔쳐온 것이다
그리고 어디서 누군가에게 훔쳐온 것인지 까맣게 잊는다
손금 따라 깨지기 쉬운 손을 하얀 털장갑에 감싸거나,
급한 대로 주머니 속에 감추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걷는다
내가 훔쳐온 손은 누구의 손일까
아무리 입김을 불어넣어도 차가워지는 두 손을 비비며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내 손을 찾기 위해,
내가 훔쳐온 손으로 누군가의 손을 많이도 붙잡았다, 놓쳤다, 꼭 붙잡았다 놓아왔다
제사상에 놓을, 작은 흠도 없는 과일을 고르듯
그중에 내가 가장 오랫동안 망설이며, 붙잡았던 그리고 결국 놓아버린 손을 잊지 못한다
기억한다,
아무런 근거와 증거는 없으나 아무래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잃어버린 내 손인 그 손을
기적적으로 거의 찾을 뻔한 내 손을
따뜻한 장갑 같던 내 손을 또다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손은 내가 잃어버린 내 손이 맞지만,
내가 가진 손은, 내 손을 훔친 그 사람이 잃어버린 손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는 그 사람의 손을 미처 훔치지 못했다
내 손은, 그 사람에게는 얼마나 낯설고 슬픈 손일까
차갑고 축축하고 손에 맞지 않는 장갑같이
끼고 있을수록 손이 시렸을 내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