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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의 도마뱀
김재중
그날 연수는 나를 밀실로 안내하여 눕혀놓고는 여기가 사막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 방의 크기나 분위기를 헤아리기도 전에 눈가리개를 씌워버렸다. 무허가 업소이긴 해도 연수는 배운 사람답게 전문가다운 풍모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그녀의 음성이 찾아온 사람을 평온하게 안심시켰다.
나는 그날 그녀와 언제부터 무슨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뚜렷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여기가 사하라 사막 모래 언덕 위다. 아무도 없다.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래요, 정말 우리 생은 알 길이 없어요. 여기까지 와서 내가 가는 길이 어딘지 궁금해요. 여정은 언제 온전해질까, 그 끝을 만나기 전 명(命)이 쏙 빠져나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미적거릴까 걱정하는 때도 있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몰랐다. 내 어깨를 주무르던 그녀의 손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피부와 근육에 몰려 있던 모든 신경이 잠깐의 침묵으로 자리를 바꾸어 청각으로 이동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끝내야 하는데, 아쉽기도 전에 끝을 못 봤죠?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의 속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여자처럼 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연수의 손가락에 다시 힘이 실리고 청각과 어깨 사이에서 감각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제초제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했어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살아난 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도 점점 의심이 가요. 조금 전에 여기 누울 때 그냥 햇빛에 말라 죽으러 왔다고 생각하자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연수 씨한테 뭔가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신(神)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게 느껴져요. 기생충같이 제 감각에 꽉 붙어 있네요.
연수는 손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는 내 귀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몇 차례 그런 동작이 반복되자 몸에서 꿈틀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불면으로 지치고 무감각해져 있던 몸이 부스스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근육 포의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점점 몸에서 생명 하나가 밖으로 빠져나오려 움직이는 듯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신이 이젠 기적을 행할 차례예요. 벌겋게 달아오른 모래 능선에서 그가 도마뱀 한 마리를 끄집어낼 겁니다. 그의 미물은 태양을 향해 빠르게 움직일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용기를 내었다. 어쩌면 이 말을 하기 위해 그녀를 찾은 것인지도 몰랐다.
처음 그 남자를 만난 것은 2022년 여름 가르멜 산이라는 카페에서였습니다. 미루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연못에 비쳐 어른거리는 것을 보며 작설차를 마실 때였습니다. 연못은 꽤 컸는데 수심이 깊어 위험하다는 경고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제가 일찍 그 카페에 간 시간은 월요일 오전 11시경, 막 카페를 오픈하고 나서 사람들이 없는 시간이었죠.
욱신거리는 오른손에서 손을 바꿔 왼손으로 잔을 들을 때 그는 나무 밑 그늘에 준비된 원형 테이블에 앉아 언제 주문했는지도 모를 음료를 앞에 두고 끝없이 저수지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잡지를 읽는 것도 아닌 그가 눈을 감고 조는 듯 마는 듯하더니 갑자기 머리를 테이블 위로 떨구고 의식이 없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슬슬 걱정되어 점원을 불러 상황을 전했지요. 점원은 그 남자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건넸고, 그 남자는 고개를 들고 그 점원에게 응대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리고는 유리창을 통해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보이더군요.
나는 멋쩍어 그냥 고개만 끄떡였지요. 그렇게 끄떡인 고개가 그와의 교감의 시작이었지요. 그는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웃으며 이야기했어요. 마치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모래 능선을 따라 걷는 구도자가 목마름에 지쳐서 쓰러져 갈 때 느낌이 어떨지 한번 흉내를 내본 거라고. 그 말이 어이없기도 하고 매우 신선하다는 느낌 같았습니다.
그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계속되었지요. 우리는 대부분 경우 오전 11시경에 만나 오후 4시까지 시간을 함께했지요. 5시간의 범위에서 다닐 수 있는 전국의 카페, 서점, 시장, 유원지 등을 함께 하기도 했지요.
그는 동방 순례에서 사막의 길을 안내하는 사람처럼 세상에 눈을 뜨게 했어요. 내가 가보지 못했던 어디라도 데려다주곤 했지요. 남편에게는 간혹 친구를 핑계 삼아 저녁 늦게까지 어딜 다녀오거나 며칠 여행을 갔다온 적도 있었답니다.
내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창밖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은 너무도 편안하고 아늑했습니다. 같이 독서하고 토론하며 사람과의 교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의 생각 하나하나가 커다란 의미가 되고, 새롭게 해석되어 원고지에 쓴 문장부호처럼 삶을 교정해 놓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답니다. 나의 핸드폰을 우연히 보게 된 남편이 그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남편은 배신감에 분노하여 그를 찾아갔고 온갖 협박을 통하여 나를 만나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더욱 화가 나 그 사람과 나를 떼어 놓으려고 협박했지요. 만일, 다시 또 만난다면 그의 직장과 가족에 모든 것을 알리겠다고요.
그는 윤리가 강조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만일 이 일이 알려진다면 그의 삶은 송두리째 망가질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그에게도 이게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생이별을 하게 되었지요.
그 후 한 달이 지나면서부터 몸이 너무 안 좋아졌어요. 삶에 의욕도 없었고 무기력해지기만 했어요.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자꾸만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수면제를 먹었지요. 오랫동안 잠들어 버리면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 같아서 수면제를 다량 먹고 3일 만에 깨어났답니다.
3일 만에 병원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느낀 것이 배고픔이었습니다. 뭔가를 먹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들었어요. 대충 미음 같은 것을 먹고 나니 내 몸에 미안해지더군요. 달라진 상황은 하나 없고, 오랜 잠에 빠져서 다시 일어났을 뿐인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까 무서웠어요. 그리고 연수 씨 생각이 났어요. 일전해 준 명함을 뒤적거리며 연수 씨를 찾기 시작했죠.
나는 두려워요.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도 믿음이 뚜렷하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 잊힐까 봐 두려워요. 내가 심연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못 나오는 꿈을 꾸기도 해요. 특히,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떻게 잘못될까 봐 그것이 제일 두려워요.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손으로 나의 몸을 어린아이에게 하듯 감싸다가 목에서부터 어깨를 지나 허리 밑으로 압박점을 찾아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이 모든 것을 용서하실 거예요. 당신의 사랑을 놓치지 마세요. 삶의 굴레를 던져버리세요. 그 선택이 불행한 인고의 시간을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놓치지 마세요. □
첫댓글 에고~~ 늦게 올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ㅠㅠ
Mount Carm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