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관한 선의에서 나온 가정에 이런 게 있다.
인생을 하나의 건물이라 한다면, 인간은 마음속 깊이 평안과 평화를 갈구하며 이 건물을 지키려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인생이라는 건물은 건설이나 유지 면에서나 온갖 재주와 정성을 요하기 마련인데, 인간은 이 건물이 흔들리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심열을 기울인다는 이 가정은, 그러나 한마디로 가정일 뿐 사실로 증명된 적은 없다.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무너뜨리려 들고 몰락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그러한 발길을 저지하려는 자에게 전혀 감사하려 들지 않는다.
이 경우도 그렇다.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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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거만한 말투로 쪼그랑 할아범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더란 말인가?
자기 자신 또한 죽은 자로서 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사르시프가 누구인가? 그건 죽은 요셉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솔직히 말하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생각해 보려 한 것도 바로 그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까지 함께였다.
어떤 것? 신의 뻣뻣한 상태, 독수리 여자를 맞을 준비를 끝낸 그 팽만한 발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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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멈춰보자.
그리고 문제를 제대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자! 그녀와 함께 생각해 보자!
점차 강도를 높여 가며 자신을 번갈아 괴롭히는 쾌락과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그녀가 밤낮으로 생각해 보았을 그 문제를!
선택의 기로는 진짜였는가?
이것이 한번이라도 그녀가 신에게 바 쳐진 성물이라는 명예를 빼앗았던 적이 있던가?
그것이 문 제였다. 제물로 바쳐진 성물은 과연 순결함과 같은 뜻인가?
대답은 예와 아니오. 둘 다 가능하다.
그 이유는 신부라는 신분에서 대립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여신을 상징하는 베일은 순결의 징표로서 그녀의 희생의 상징이면서 수녀의 상징이지만, 다른 한편 창녀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와 신전의 정신은 성물인 흠 없는 자, 케데샤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혹하는 여자 , 즉 거리의 창녀였다. 베일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카디슈투들은 '흠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흠 없는 짐승이 그러하듯이, 흠이 없다는 이유로 축제 때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정해졌다.
그래서 성물이 되었 다고?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바쳐진 성물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쉬타르에게 바쳐진 성물이라면, 순결은 제물이 거치고 지나가버리는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베일은 곧 찢겨질 운명이니까.
우리는 여기서 사랑에 빠져 휘청거리는 자들의 생각을 함께 고려했다.
아마 난쟁이 곳립이 이 생각을 엿들었다면, 워낙 성 문제에 낯설어 성이라면 무서운 원수 취급하는 그답게, 영리한 생각들이 가련하게도 정신이 아닌, 특정한 방향으로 기우는 마음을 섬기는 것을 보고 울었으리라.
그는 두꺼비요, 그저 춤이나 추는 어리석은 멍청이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서 쉽게 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여주인 무트에게는 육신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그녀는 육신의 명예를 어떻게든 신의 명예와 화해시켜 줄 수 있는 생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그런 생각만 골라 했다 하더라도 그녀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너그럽게 봐줘야 마땅하다.
어차피 생각이 생각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그 너 또한 이 생각들로 인하여 더없이 괴로웠다.
성직자로서, 숙녀로서 잠자고 있던 자신의 여성을 발견한 그녀의 각성은 태초의 원형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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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열정에 희생되지 않고 열정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면 다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니까.
그러나 사랑에 빠진 자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다.
건강과 신선함과 대담함을 되찾는 것이, 실제로는 자신이 현재 유일하고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 목적을 이루는 데 큰 이득을 의미하는데도, 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이 식을 경우, 큰 손실을 겪게 되리라 철썩같이 믿고 있다.
감정이 식으면 황량한 상태, 공허감에 빠지게 되므로, 마약을 뺏긴 중독자처럼 그것이 두려워, 항시 이전 기분을 유지하고자 감정을 불태울 수 있는 또 다른 인상들을 상대방으로부터 얻으려고 만나고 또 만나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랑에서 의무와 권리의 관계가 이러하다.
어리석음 중에서 가장 큰 어리석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리석음의 본질과 그 어리석음에 희생되는 제물이 어리석음과 맺는 관계를 잘 관찰할 수 있다.
사랑에 사로잡힌 자는 격정에 휘말려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능력도
없으며, 그럴 능력을 갖기를 바랄 수도 없다.
그는 잠깐 동안,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상대방을 만나지 않으면, 자신이 그 어리석은 열정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잊는다는 것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
모든 이별의 고통은 앞으로는 어쩔 수 없이 잊게 되리라는, 이 필연적 망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망각 이후에는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게 된다.
바로 그래서 미리 애통해 하며 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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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는 데 익숙한 자는, 또 그럴만한 자격도 있는 자에게는, 이러한 자기 신뢰가 도리어 큰 위험이 되기도 한다.
그의 정신이 흐려진 경우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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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녀는 이젠 남은 건 죽음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비밀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한 자신과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야 자신이 그토록 지키려 한 비밀을 알게 될 그에 대한 벌이라 생각하면서!
사랑의 논리는 이처럼 터무니없고 혼란스럽다.
이는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런 일은 워낙 오래된 것으로 포티파르의 아내가 살던 시대에도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처럼 거기에 완전히 휘둘린 사람에게는 여전히 최초의 단 한번뿐인 일이며 가장 새로운 사건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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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나의 구세주, 나의 행복, 나의 별!"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는 어진 사람은 끔찍한 아픔을 겪은 후에 나오는 이런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리고 지금껏 그녀를 가엾게 여긴 게 실수 같고, 되레 그런 자신만 우습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고통의 근원을 인간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으로 여길 경우에는 있을 수 있 는, 아니 당연한 대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여길 수 있었을까?
그건 그 근원이 워낙 특별하여 나와 너로 나눠지되, 그 근원이 너와 결합된 것으로 보이는 동시에 내게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겉과 속이 하나가 되고, 상과 영혼이 서로 어우러진, 그러니까 결혼한 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결혼에서 신들이 출현하기도 했으므로 그 현현을 신성하다고 부르는 것도 허튼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준 존재에게 오히려 우리가 복을 빌어준다면 그는 신이어야 하며,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이라면 그를 저주해야 마땅하니까.
이것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존재는 사랑의 예에서처럼 신들의 범주로 편입된다는 건 분명하다.
원래 종속성이란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신을 느끼는 감정의 원천이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자신의 신을 저주하는 자가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러려고 시도한 자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저주는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게 마련인데, 위에서 우리가 본 것이 한 예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마음이 어진 박애주의자의 이해를 돕자는 뜻에서였다.
물론 이 설명으로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우리 에니의 경우 이것 외에도 자신의 연인을 신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던가? 물론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를 신격화함으로써 자신이 이방인 노예에게 반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당연히 느껴야 했고, 참으로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을 들쑤셨던 굴욕감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래로 내려온 자, 노예의 형상으로 다가온 신이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그의 아름다움과 황금 구릿빛으로 빛나는 어깨가 그 사실을 암시해 주었다.
그녀는 사랑에 사로잡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합리화해 주는 이런 생각을 자신의 관념세계 어디선가 발견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눈을 뜨게 하고, 피를 멈춰 줬던 그 구원의 꿈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은, 먼 곳의 이야기와 상을 양식으로 삼아야 했다.
그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 여자가 신의 그늘에 가려진 채 그와 짝짓기를 하는 이야기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녀가 이처럼 기이한 표상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남편으로부터 요셉이 성물이며 예비된 자로서 머리에 그 장식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그녀의 가슴에 불안이 싹텄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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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세요, 마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님께서는 이게 밖으로 불거져 나온 것만 보고 그러시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가련할 뿐입니다! 그걸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 기억하는 것은 물론, 이런 것을 보고 미소라도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상기시켜야 마땅합니다.
사람이란 워낙 연약하여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미천한 소재로 이루어졌는지, 모두 다 잘 알면서도 쉽게 잊어버리곤 하니까요.
또 그 소재는 오래 지속되지도 못하고 유한하고 무상하니 얼마나 가련합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이 머리카락도 그렇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다 빠지게 될 것이고, 지금은 하얀 이 이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눈은 또 어떻습니까? 피와 물로 이루어진 아교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들도 다 흘러내릴 것입니다.
다른 가상도 쪼그라들고 물러져서 결국엔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전 이러한 이성적인 생각을 저 혼자 간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님께도 쓸모가 있다면 사용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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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면 요셉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은연중에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길의 노정에서 또 하나의 작은 순환과정을 완성시키려면, 계획과 섭리의 책에 쓰여진 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또 한번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미 그렇게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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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과 악을 인간이 마음대 로 고를 수 있다고 하자.
과연 인간이 악을 향한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던가?
아니다. 활짝 열어둔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 일컬으며 불장난을 즐기는 게 바로 인간이다.
자기 힘으로 황소 뿔을 낚아챌 수 있다는 착각에서 엉뚱한 만용을 부리는 것이든, 아니면 은근히 쾌락을 탐하는 경솔함에서 나온 것이든, 결과는 같다.
그리고 또 누가 과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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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파르가 손에 든 것은 황금을 입힌 둥근 지팡이로, 솔방울 모양에 황금 잎사귀 화환을 둘렀다.
권력의 상징인 이 지휘봉은 실은 생산력을 뜻하는 주물로서 여자들이 숭배하는 물건이었다.
주인은 이것으로 두두의 어깨와 등을 갈겼다.
이렇게 매질이 계속되자 난쟁이는 앞에서와는 다른 이유로 청각과 시각을 잃고 허리를 꺾으며 돼지새끼처럼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아이고! 아야!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사람 죽네. 아이고, 이 피 좀 봐! 작은 뼈가 다 으스러지네!
전 충성을 다했습니다. 제발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은혜는커녕 페테프레의 입에서는 이런 말만 터져 나왔다.
"옛다! 이 악당 놈, 야비한 난쟁이! 청동처럼 차가운 악당, 제 입으로 자기가 저지른 간계를 죄다 고백한 놈!"
주인은 무자비한 매질로 난쟁이를 침실의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몰았다.
충성을 다했다는 종은 마침내 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등에는 혹이 불거진 채, 작은 발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그 문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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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만일 그대가 나를 그런 식으로 제 주인님께 고발한다면, 저는 혐의를 씻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페테프레 주인님은 지금 그대가 협박하는 형 중에서 단 한 가지를 골라야 할 것입니다.
한꺼번에 모든 형벌을 다 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것만 해도 그의 복수와 저의 고통에 한계선을 그어주는 셈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정도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제 고통은 또 하나의 한계선을 얻게 됩니다.
이 한계선이 미치는 공간이 좁든, 아니면 넓든 간에 고통이 이 한계선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는 끝이 있으니까요.
그대는 마치 쾌락과 고통이 한계를 모르는 엄청난 것처럼 묘사하는데, 그것은 과장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명 어느 순간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선에 도달하니까요.
한계를 모르는 엄청난 것이 있다면, 제가 섬기는 신을, 제 주님을 바로 모시지 못하고 그분 앞에서 타락하는 그런 실수 입니다.
그대는 이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대는 신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대의 소원을 따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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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필요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에도 말이다.
이것이 형벌을 불러들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시련과 훈육은 그에게 또 다른 행운, 파괴의 결과보다 훨씬 더 화려한 행운을 가져다주는 데 쓰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빙긋이 웃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영적인 존재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오래 전에 - 이야기의 준비 단계인 서곡 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 그 높은 곳에 있는 영적인 존재 들은 피조물이 실족하면 더없이 좋아하리라, 뭐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옛날부터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들을 생각하시나이까?’라는 비난이 입술 위에 떠다니는 곳이니까 말이다.
이럴 경우 당황한 창조주는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엄격한 자들을 의식하여 하는 수없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
이는 창조주의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라 엄격한 자들의 압박에 떠밀린 처사라 할 수 있다.
우리 요셉의 경우,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해, 어떻 게든 자비를 베풀려 하는 지고한 분이 엄격한 자들의 압박에 져주는 척 자신의 총아를 한 대 내려치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우롱하여 그 불행을 어느새 새로운 행운의 발판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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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침묵하지 않고, 또 침묵해서도 안 될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다.
그는 오히려 숨도 쉬지 않고,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쏟아내야 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정신의 우아함과 영리함으로 여자의 탐욕에 맞서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말을 삼가려는 진짜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는 모순에 휘감겼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의 모순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과 육체의 모순이었다.
그렇다. 여자에게는 말로, 혹은 침묵으로 응수하면서 그의 육신은 정신에 맞서고 있었다.
말은 그럴 싸하고 영리한 능변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당나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 얼마나 충격적인 모순인가? 화자는 이 자 리에서 말을 삼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혜로운 말, 그러나 육신의 배신으로 무서운 거짓말이 되는 말, 결국은 말 한 사람을 어리석은 당나귀로 만들어버리는 말!
여자는 요셉이 죽은 신의 상태로 도망치려 하자(다들 알 다시피 요셉은 도주에 성공했다) 엄청난 절망과 실망으로 거의 미치려 한다.
그녀의 욕망은 요셉이 남자로서 이미 준비 되어 있다고 멋대로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성한 사람이 발작을 일으키듯 자기 손에 남아 있는 요셉의 옷 조각을(요셉이 옷의 일부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다들 잘 안다) 가지고 한편으로는 감탄하면서 애무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옷 조각을 함부로 다루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입에서는 한탄과 환호 성이 번갈아 터져 나왔다.
이와 동시에 이집트 여자는 또 다른 소리도 외쳤다.
"메니 나흐테프!" "나는 그의 무기를 보았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뿌리치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정확한 사본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렇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이 보고가 진실 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인즉 이러했다.
요셉이 더 이상 말주변으로도 버티기 어려워 거의 쓰러질 것 같았을 때,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야곱의 상? 물론이다. 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이 곁에서 지켜보았던 야곱 개인의 얼굴 윤곽을 고집하는 상이 아니었다.
요셉은 오히려 정신 속에서, 정신을 통해 그 얼굴을 보았다.
이 아버지 상은 넓고 보편적인 이성을 뜻하는 일종의 표상이요 경고였다.
야곱의 윤곽이 아버지 같은 페테프레와 또 고인이 된 몬트-카브의 그것과 섞였다. 그리고 이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훨씬 큰 존재의 그것도 합쳐진 아버지의 얼굴이 요셉을 굽어보고 있었다. 눈 밑에 살이 불거져 나온 아버지의 갈색 눈에 수심이 그득했다.
이 아버지의 얼굴이 그를 구했다.
아니(이성적으로 평가하려면, 그러니까 유령의 등장이 아니라 요셉이 이런 상을 본 것을 순전히 그의 공으로 돌리려 한다면) 오히려 요셉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옳다.
경종을 울리는 아버지의 상을 불러낸 것은 바로 그의 정신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그는 너무 멀리 나가 있던, 그래서 하마터면 패배할 뻔한 상황에서 뛰쳐나올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가련한 여자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뜻했음은 당연하다.
여하튼 그의 육체 또한 언변 못지않게 날렵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하나. 둘, 셋. 셀 동안 번개처럼 웃옷에서 몸을 빼냈다.
그리고 절망에 몸부림치며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여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허둥대며 손님을 맞을 연회장을 지나 앞쪽 현관으로 빠져 나왔다.
실연당한 여인은 뒤에서 거의 실성한 듯, 그러나 절반은 기뻐서 이렇게 소리쳤다.
"메니 나흐테프!"
그러나 이는 참을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자기 손에 남아 있는 것에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옷에 키스를 퍼붓고 눈물을 적시며 이빨로 물어뜯었다.
그것도 모자라 발로 짓밟기까지 했다.
증오와 달콤함이 공존하는 옷 조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예전에 아들의 베일을 가지고 형들이 도단 골짜기에서 했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오, 내 사랑!" 그녀가 외쳤다.
"날 두고 어디를 가느냐? 여기 있거라! 오, 복된 소년! 이 수치스러운 노예, 저주받을 놈!
죽어 마땅한 놈! 배신! 폭력! 무뢰한! 명예를 더럽힌 살인자!
게 아무도 없느냐! 여주인을 도와다오! 무뢰한이 날 덮쳤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녀의 생각은 실은 분노와 눈물의 소용돌이에 지나지 않는 이것을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 호소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요셉에게 어디 한 두번 협박했던가.
자신에게 두려운 게 있다면 오로지 욕망에 사로잡힌 그녀 자신뿐이다.
그러니 욕망에 밀려 이성을 잃고 암사자가 발톱을 세우게 되면, 그때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여주인에게 무서운 죄를 범했다고 그를 고발해서 죽게 만들겠다.
그렇게 협박한 자신이었다.
가슴에서 슬며시 고개를 든 이 기억이 그녀를 덮쳤고, 그 힘에 밀려 그녀는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인간은 흔히 거짓에 진실성을 부여하고 싶을 때 목청을 높이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동정받아 마땅한 존재이므로, 이런 식으로나마 이 여인의 고통이 돌파구를 찾은 것에 우리 모두 기뻐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당한 모욕과 수치가 밖으로 표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 표현이지만, 얼마나 참담한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분노로 헐떡이는 복수심을 드러내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그녀의 비명이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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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이여!" 그녀가 외쳤다.
"케메의 아들딸들이여! 강물과 검은 흙의 아들들이여!"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녀의 청중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너나없이 술에 취해 있었다. 그
들이 하피의 자녀로서 그곳 원주민인 것은 사실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 쿠쉬 땅에서 온 무어족과 갈대아의 이름을 가진 자들도 있긴 했다.
여하튼 이들의 태생을 근거로 그렇게 불렀다고 하자.
하지만 그들이 이집트인으로 태어난 것이 어디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었던가?
그저 태어나보니 이집트인이었을 뿐, 한마디로 그건 자연이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행여 집안일을 제때에 하지 않고 거르게 되면 결코 좋은 꼴을 볼 수 없던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커다란 가죽띠로 허리를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이때는 이집트인이라는 고상한 출신 성분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때는 이처럼 각자의 실생활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저 뒤쪽에 밀려나 있던 출신 성분을, 느닷없이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상기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명예로운 이집트인이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켜 하나의 공동체로서 파괴해야 할 대상을 향해 성난 입김을 불어달라고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묘한 호소는 대단한 효력을 발휘했다.
우선 여기에는 그들이 마신 보리 맥주가 한몫 단 단히 했다.
"이집트의 형제들이여!" (와, 이제는 형제들이라! 이들에게는 이처럼 신나는 일이 없었다.)
"날 보아라. 너희의 여주인이요 어머니인 나를 보아라!
나는 페테프레의 첫째 부인, 정실부인이다! 집의 문턱에 서 있는 내가 보이느냐?
그리고 우리가, 너희와 내가 서로 상 대방을 알아보느냐?"
‘우리', 그리고 '서로' 라니!
참으로 엄청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낮은 신분의 시종들에게는 간지럽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표현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지금까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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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히 슬픈 이야기구려."
"슬프다고요?" 그녀가 협박하듯 말했다.
"나는 '심히 슬픈' 이야기라고 했소. 그러나 이 이야기는 끔찍하기까지 하오.
다행히 당신의 정신이 온전하고 법을 알아서 그나마 최악의 사태에 이르지 않았다는 그대의 말 을 듣지 못했더라면, 이보다 무거운 표현을 찾았을 것이오."
"치욕을 초래한 노예를 일컫는 표현은 찾지 않으셨나요?"
"그는 치욕을 초래한 노예요.
이 모두가 그의 행동에서 나온 것이니 '심히 슬픈 것’은 일차적으로 그에게 해당되는 표현이오.
그리고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이면 오늘 저녁에 이런 끔찍한 사건이 터져서 내게 치명타를 안기다니, 이 또한 심히 슬픈 일이오.
파라오의 사랑과 은혜를 입어 그분 의 유일한 친구로 들어 올려진 이 아름다운 날에 몇몇 지인들과 조촐하게 자축하려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런 일이 생기다니, 곧 손님들도 들이닥칠 터인데. 이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알기나 하오!"
"페테프레! 당신 몸에 대체 인간의 심장이 있기나 한가요?"
"왜 그런 걸 묻는 거요?"
"뭐라 말할 수 없는 이 시간에 궁정에서 새로 얻은 명예 호칭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을 어떻게 축하할지 그 이야기를 하니까요.”
"그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이 시간과 마땅히 높이 기려야 할 이 날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해서요. 이렇게 하여 뭐라 말할 수 없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요.
사람들이 그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어서 다른 것으로 표현하게 만드는 것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의 본성이라오."
"아니에요, 페테프레. 당신에게는 인간의 심장이 없어요!"
"오, 여보. 당신에게 한마디 해야겠소.
인간의 심장이 조금 결여된 것을 오히려 환영해야 되는 상황도 있다오.
당사자를 위해서나, 상황을 위해서도 그게 좋으니까.
왜냐하면 이 상황을 헤쳐나가는데 인간의 심장이 너무 많이 관여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그게 결여되어 있을수록, 훨씬 더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오.
나의 명예로운 날을 망치는 심히 슬프고 끔찍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소?
이 일은 망설이지 말고, 즉각 조정하여 세상에서 제거해야 하오.
우선 당신은 자신에게 가해진 형언할 수 없는 몹쓸 짓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기 전에는 적당치 않은 이 장소에서 일어서지 않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오. 그 점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오.
그리고 두번째로, 내 손님들이 곧 들이닥칠 터이니 그전에 모든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오.
따라서 나는 곧 집안의 재판을 열겠소. 판결도 빨리 내릴 수 있을 테니 천만다행이오.
모두 몸을 감추고 계신 분 덕분이오.
여기서 효력을 갖는 건 오로지 내 말일 뿐, 다른 사람의 말은 아무 비중도 없으니 말이요.
그런데 오사르시프는 어디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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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결에 뜰에 있던 모든 사람이 땅에 엎드려 손을 들어 올리며 부드럽고 지혜로운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는 소식에 놀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요셉 또한 감사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후이와 투이까지 돌봐주는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아들의 면전에서 찬사를 보냈다.
그러면 무트-엠-에네트는 어땠을지 궁금한가?
여주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판관 의자의 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남편의 발 위에 이마를 묻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고마워할 것 없소, 여보." 그가 말했다.
"이 시련의 시간에 그대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면 기쁠 뿐이오.
그리하여 그대에 대한 내 사랑을 힘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오!
이제 손님 맞을 홀로 들어가서 나의 명예로운 날을 함께 축하합시다.
당신은 낮 동안 지혜롭게 집을 지켰고, 오늘 저녁을 위해 몸을 아꼈지 않소."
이렇게 하여 요셉은 다시 한번 구덩이에 빠져 감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 구덩이에서 어떻게 위로 올라와 더 높은 자리에 이르게 되는지, 그것은 다음 노래의 대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