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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시와 음유吟遊의 간극으로 바라본 세상
- 이형란 시집〈먹고살기歌〉에 부쳐
글/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
가. 들어가며
음유吟遊라는 단어가 있다. 명사로 사용할 때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짓고 읊는다는 말이다. 주목할 것은 시를 짓는다는 말이다. 짓는다는 말은 재료를 들여 만든다는 말이다. 시를 짓는 것은 재료가 있어야 한다. 시의 재료는 미시적인 부분과 거시적인 부분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인 것은 우주, 섭리, 자연, 법칙, 별과 행성의 운행, 운명 등등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나 지혜를 문장화하여 시문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 미시적인 것은 자신의 시각을 좀 더 구체화하여 글의 질료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주변, 관계, 이웃, 사람, 생각, 사랑, 희생, 이 모든 삶이라는 회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색과 구도, 배치 등이 어우러져 한 편의 시를 짓게 되는 것이다. 시 한 편에 삶의 전부를 담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욕심이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삶의 부분 부분들이 어느 날 오직 내 눈에만 담겨 하나의 풍경이 될 때, 그 풍경에 대한, 혹은 풍경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하나의 그림으로 착색이 될 때, 그 질감을 이용하여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짓게 되는 것을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는 것을 다만 보이는 대로 읊는다면 단어 그대로 음유吟遊에 그칠 수 있겠지만 음유에 행간을 입히면 한 편의 좋은 작품, 시가 된다. 시와 음유의 간극은 어쩌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형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간극을 정확히 이해하고 삶을 대하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일정한 형태의 틀과 Manual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저 노래하는 것과 노래에 생각과 사유를 담아 시라는 형태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좀 더 견고한 집을 만드는 것이며 보이는 풍경에 배경을 입히는 일이다. 하루라는 시간이 지나면 노을이 진다. 하지만 그 노을에 대한 생각이나 연상 작용은 누구나 다르다. 당신의 노을 색과 나의 노을의 색이 같을 수 없다. 하늘에 펼쳐진 스란치마 한 폭에 시를 지어 읊는다고 생각해 보자. 스란치마에 얽힌 내 유년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다면 단순히 아름다운 노을 한 폭이 아닌, 노을은 어머니가 되고 기억이 되고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음유시吟遊詩가 되는 것이다. 이형란의 시집이 그렇다. 시집 제목에 가歌를 붙였다고 음유가 아닐 것이며 그 문장이 음유시吟遊詩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이형란 시집 〈먹고살기歌〉속 질료와 구도와 구상과 채색들은 모두 이형란 시인 자신의 삶과 자신이 바라본 프리즘을 통해 나온 색의 결정체들이다. 그 결정체가 영롱할수록 정체성이 두드러진다.
Identity는 독자성이며 개성적이며 주체성이다. 사유와 생각에서 나온 삶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정체성이라고 하면 옳은 말일 것이다. 삶은 사지선다형이나 객관식 등으로 답을 내는 것이 아니다. 삶은 철저하게 주관식이며 객관화된 내 가치를 주관화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평을 의뢰받으며 시집 속 원고들을 살펴보았다. 이형란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관과 시에 대한 가치관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Unique하다는 점이다. 다른 작품과는 시를 보는 관점이 유독 다르다. 소재를 선택하는 것도, 소재와 주제를 버무리는 것도, 이미지즘보다는 서술적이고 진술적인 언술의 폭과 깊이가 이미지즘으로 인해 가독성에 방해가 되는 불투명을 깔끔하게 지워낸다는 점이 가장 돋보이는 점이다. 두 번째 장점은 긍정의 힘이다. 긍정은 세상을 따듯하게 만든다. 아니 주변을 따듯하게 만든다. 툭툭 튀어나온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는 것은 둥근 소리를 만든다. 둥근 소리가 가득 찬 곳은 훈훈하다. (제1부 먹기 歌) (제2부 살기歌) (제3부 먹고살기歌)라는 다소 독특한 소제목들이 시사하는 바는 삶이다. 먹는 것, 사는 것, 먹고 사는 것, 모두 통칭하면 삶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무엇이 이것보다 중요할 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의 근간이 없으면 삶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형란 시인의 서평 제목을 〈삶, 시와 음유吟遊의 간극으로 바라본 세상〉으로 지은 이유다. 진솔한 어투가 위선과 가식의 포장이 아닌, 육화된 육필의 언어로 변환하여 감동과 공감으로 다가와 진득한 울림이 되는 이유다.
나. 〈먹고살기歌〉의 이야기들
시를 생각해 본다. 시는 구체화한 언술을 문장화된 성찰로 전환하여 보이는 것에 풍경을 덧입히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주변과 이웃 그리고 주관의 나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성찰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사람이 살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스스로 방향을 제시하는 일종의 내비게이션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맞을 것 같다. 먹고 사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다음 중요한 일은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다. 다 같은 옷을 입고 다 같은 생각을 하며 살 수는 없다. 오늘 아침의 생각이 내일 아침에도 같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삶의 목적성이나 지향성에 몰입하다 보면 관계를 잃게 된다. 내 안에 몰두하여 주변을 잃어버리거나 이웃을 잃어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생은 지우개 하나를 들고 지우며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 지우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정情이다. 사람이다. 엄마다. 자식이다. 그리고 나를 불러주는 모든 것에서 잊히면 안 되는 것이며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무게만큼의 이유를 그들에게 붙여주고 나누고 공감하기 위해서 내가 본 세상을 정직하게 이야기할 의무를 갖고 있다. 이형란의 시집 속에서 이형란이 보는 세상의 독특한 시선과 초점을 통해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지난한 삶을 같이 조망해 보자. 어쩌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과 놓친 것에 대한 정답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정답은 시인이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시를 읽는 독자인 우리가 스스로 찾는 것이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나를 대입하여 그의 초점과 나의 초점을 눈높이를 맞추게 하는 것이 시의 순기능 중의 하나다. 시를 쓰는 이유, 읽는 이유가 모두 해당한다. 어렵고 화려한 문장으로 독자의 눈을 현혹하는 것이 아닌, 가능한 쉬운 문장으로 공감을 획득하는 것이 시인이다. 시집 속 몇 편을 선별하여 하나둘 이형란의 세계를 공감해본다.
한 잔
그 옛날 엄마네 등심구이집
여덟 시면 사내 하나 문가에 자리잡고
찬 두 개와 소주 한 잔
약속처럼 놓여졌지
한 잔이라 불리던 그
가게 한 구석을 잠시
남루한 풍경으로 만들다가
정성껏 잔술을 비우곤
먼지라도 털 것처럼
모자 한 번 들썩이곤 나갔는데
손님도 남자도 아닌 그를
왜 쫓아버리지 않는지
어린 내 눈엔 늘 의아했으나
목숨 붙은 것들은
기댈 벽 하나만 있어도
험한 생각 않는다는 걸
지붕 없는 세상살이 요만큼에
어렴풋이 알 듯도 싶고
『한 잔 전문』
시는 가벼운 회상의 한 페이지로 시작한다. 추레한 사내의 이야기. 등심구이집을 경영하는 시인의 어머니 가게에 저녁 8시면 어김없이 찾아와 한 잔 술로 삶을 달래는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행동인데 시인의 초점은 (한 잔)이라는 것의 배경을 읽고 있었다. 한잔하기까지의 과정, 그 한 잔을, 돈이 되지 않는 한 잔만 주세요라는 말이 입에 붙은 공짜 손님을 내쫓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성찰을 담아냈다.
목숨 붙은 것들은
기댈 벽 하나만 있어도
험한 생각 않는다는 걸
기댈 벽 하나만 있어도 험하고 모진 생각을 안 하고 스스로 달래며 다독이며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정말 시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시인의 시도 시지만, 추레한 손님을 쫓아내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 배려는 어린 나이의 나에게는 의아한 일이었지만 살아보니 그 작은 배려가 누군가에게 삶을 살아가는 긍정의 힘을 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시 한 편에서 우주의 섭리와 이치를 깨우칠 수는 없다. 다만, 살아가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배려)를 깨우칠 수는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흥분하고 화내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보인다. 하지만 결국 삶이란 먹는 일, 사는 일, 먹고사는 일 이 세 가지 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지? 한발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면 마음부터 먼저 나눠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기댈 벽으로 존재하길 바라면서도 그 방법을 모르거나 거창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추레한 한 잔, 공짜 술의 손님을 쫓아내지 않는 배려. 그 배려가 어쩌면 시보다 더 중요하거나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가 物价
라면 한 봉지 오원
버스 타는 데 오원
사과 한 개 오원
나 다섯 살
엄마 서른다섯
라면 한 봉지 십원
버스 타는 데 십원
사과 한 개 십원
나 열 살
엄마 마흔
그리고 오랜 중략
라면 한 봉지 천원
버스 타는 데 천원
사과 한 개 천원
제일 조금 오른 나는 쉰다섯
엄마는 여든셋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았습니다
『물가 物价 전문』
삶의 대부분은 그리움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움을 지우며 사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살아볼수록 지우기는커녕 저장강박증처럼 그리움만 한가득 저장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년의 물가와 나이, 청장년의 물가와 나이, 현재의 물가와 나이, 그리고 내 나이, 엄마 나이. 시를 읽으며 참 독특한 시선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오랜 중략
한 연으로 처리한 3연의 한 줄, 그리고 오랜 중략 속에 내포된 삶의 질곡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게도 오랜 중략으로 처리된 기억이 있을 것이며, 오랜 중략으로 처리된 이름이 있을 것이며 오랜 중략으로 처리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면 한 봉지 천원
버스 타는 데 천원
사과 한 개 천원
제일 조금 오른 나는 쉰다섯
엄마는 여든셋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멈추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다. 물가처럼 계속 올라가지 않고 쉰다섯에서, 여든셋에서 멈추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다. 나도 나지만 엄마도 엄마인 것에서 우리의 관계에서 그 관계의 실종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더 나이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아니고 엄마는 엄마가 아닌 그런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이란 그런 것이다. 강렬한 태양 빛이 아닌 은은한 그늘 빛이며 살갗을 태우는 여름이 아닌, 낙엽 구르는 가을이다. 엄마와 딸이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기 시작하고 그 과실이 익을 때쯤 情은 무거워지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집을 출간한 이후 (그리고 오랜 중략)의 시간이 깊어갈지도 모른다. 오랜 중략의 어디쯤에서 멈출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억할 것이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아무리 더께처럼 머리에 앉은 그리움이 많아도 그리운 것은 그리운 것이다. 마치 2~3살 먹은 아이를 보며 더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 같은 마음. 그런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5월의 햇살처럼 부드럽다. 달큰한 끝맛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이형란의 시집에서 지금 배우고 있다. 시는 문서가 아니다. 영혼의 모음母音이다.
어느 낮 풍경
평일 낮 제과점 앞
안기엔 큰듯한 아이를
팔에 앉히고
창 안을 들여다보는
수염 거뭇한 사내 하나
저 케익 맛있겠다, 아빠
그래
나중에 나중에
아빠 돈 많이 벌면
그래
매일 사 줄 거지
그래
조르지 않는 아이와
윽박지르지 않는 어른
소근거리는 한낮에
무심히 지나가는 태양
『어느 낮 풍경 전문』
이형란의 시선이 독특하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케이크를 사달라는 아이와 나중에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사 주겠다는 아빠의 풍경. 그걸 보는 시인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그저 보아넘길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인데, 조르고 떼쓰고 말리는 그런 풍경일 수 있는데 시인의 시선은 그 너머를 보고 있다.
조르지 않는 아이와
윽박지르지 않는 어른
조르지 않는 = 아이
윽박지르지 않는 = 어른의 등식은 어쩌면 실제 상황일 수도 있고 시인만의 눈으로 짐작하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보는 눈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다. 조르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서로 소곤거리는 그 한낮의 풍경을 보는 시인의 눈이 서늘하다. 불가에서 말하는 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아니,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正이든 反이든 正反合이든 내가 보기 나름이다. 세상의 얼굴은 피상적이 아닌 능동적인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가벼운 일상의 풍경 하나지만 그 속에서 삶의 무량한 지혜를 배운다.
저 케익 맛있겠다, 아빠
그래
나중에 나중에
아빠 돈 많이 벌면
그래
매일 사 줄 거지
그래
아빠의 답은 늘 (그래)다. 아니라거나 이 녀석이라던가 하는 부정이 아닌, 긍정의 답이다. 그것이 바로 아빠의 자리다. 아빠를 배려하는 아이의 나중에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매일 사 줄 거지? 하는 말속에 정이 숨어 있다. 한국식 情은 그런 것이다. 배려다. 내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에둘러 표현하는 아이의 심상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라는 아빠의 대답에 익숙해진, 좋은 의미로 익숙해진 아이의 배려다. 자식과 부모는 그런 관계다. 다투고 싸우는 관계가 아닌, 조르고 윽박지르는 관계가 아닌, 무엇이든 해 줄 수 있고 나중에 나중에 사 줄 수 있지 하는 배려다. 시인이 바라본 어느 낮 풍경은 일상의 풍경 너머 좀 더 다양한 삶의 방정식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읽는다. 시는 진수성찬이 아니다. 고급 뷔페처럼 다양한 음식을 일정한 맛으로 골라 먹는 것이 아니다. 질박한 그릇에 끓여낸 된장찌개처럼 손맛이 느껴질 때 시의 맛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라는 아빠의 말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이형란 시인의 독특한 시선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다. 해학과 어우러져 육화된 글의 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의 일부를 소개한다. 탭댄스라는 작품 중 (혹은 인생)이라는 부분을 인용해 본다.
혹은 인생
바닥에서 머무는 시간이 짧을수록 고급이다
바닥을 칠 때는 되도록 산뜻하게
미련 없이 다시 튀어 올라야 한다.
바닥에서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탭댄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없지만, 상식적인 부분만 놓고 생각해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문장이다. 중요한 것은 (바닥)이다. 내려갈 때까지 내려간 것을 바닥이라고 가정할 때 시인의 해학은 바닥에서 머무는 시간이 짧을수록 고급이라고 한다. 바닥에서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한다. 그렇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바닥) 그 바닥에서 머물러있거나 주저앉아 있으면 바닥은 그대로 바닥이 된다. 바닥에 대한 마음을 바꿔야 한다. 짧아지려고 노력하거나 되도록 산뜻하게 다시 뛰어오를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 역시 이형란의 시에서 꾸준하게 말하고 있는 긍정의 힘이다. 흥겨운 탭댄스를 생각해 본다. 타다닥타다닥, 바닥을 밟으며 추는 탭댄스는 인생이다. 즐겁게 신선하게 명쾌하게 사는 것을 위해 바닥에서 탈출해야 한다. 같은 글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는 유쾌하다. 박자가 생명이라고 한다. 끝은 반드시 동시여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잘못은 한 박자 더 끈 쪽에 있다고 한다. 한 박자를 더 끈 쪽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린 모두 상대방에게 상대편이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닌 다만, 한 박자를 더 끈 쪽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한 번 더 생각하면 한 박자를 더 끌게 만든 쪽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 한 박자를 유념하며 살아야 한다. 단순하게 단 한 박자의 늦음으로 인하여 서로의 인생에 짐이 될 순 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닌 애증이며 스토킹이며 자기교만이다. 사랑의 정의는 매우 단순하다. 한 박자만 조심하면 된다. 더 끌든지 더 먼저 가든지가 아닌, 상대에 맞춰 우아하게 춤을 춰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국가에서 제정한 헌법의 제1장 제1조다.
청춘
좋을 때다
말하는 당신은 모른다
온몸이 꽃인 게
얼마나 무거운지
『청춘 전문』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다. 寸鐵殺人은 짧은 경구로도 사람을 크게 감동하게 할 수 있다는 나태경(羅大經)의 학림온로(鶴林玉露)가 출전인 말이다. 정확하게 촌철살인을 각인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대하며 여러 번 읽었다. 내게도 온몸이 꽃인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누구나 이 작품을 읽으면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하는 유명한 작품과 같은 생각을 하며 읽다 온몸이 꽃인 게 얼마나 무거운지에서 턱 숨이 멈추는 느낌이 든다. 시 한 편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이형란의 작품은 때론 인간적이며 때론 예리하다. 시인이 휘두른 칼날의 각도는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 시퍼런 날을 들이민다. 깜짝 놀라 다시 보면 그 칼날의 서슬이 매우 깊은 곳에서부터 각을 만들어 나온 것 같다.
정체성에 대한 고찰
뭘 좀 끄적이고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면
처음부터 빨간 줄이 뜬다
이영란으로 고쳐야 한단다
그런가 싶다
남편은 처음 전화해서
김형란을 찾았다
결혼한다고 했더니 언니가
김형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랑
결혼이 하고 싶냐고 물었다
안되나 했다
어려운 이름 탓에
제대로 불리지 못하지만
김영란부터 이향단까지 다 괜찮다
만나서 눈이 반달이 된다면
나를 안다는 뜻이니까
『정체성에 대한 고찰 전문』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일상의 한 부분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작품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자기 고백이며 자칫 자기 자랑에 불과할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 역시 두드러진 특징은 긍정이다.
어려운 이름 탓에
제대로 불리지 못하지만
김영란부터 이향단까지 다 괜찮다
만나서 눈이 반달이 된다면
나를 안다는 뜻이니까
무어라고 잘못 불려도 상관없다. 김영란이든 이향단이든 다 좋다. 하지만 나를 만나서 눈이 반달이 된다면 나를 안다는 뜻이라는 말이 참 좋다. 긍정의 힘이다. 호칭이야 어떻든 나를 만나 반달눈이 되고 그제야 비로소 이형란이라는 사람을 안다는 말이라고 자부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아니,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가장 척도가 아닐까 싶다. 누구네 딸로 불려도, 누구네 집사람으로 불려도 모두 다 나를 만나서 반달눈이 된다면 내가 정말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니 필자도 따라해 보고 싶다. 그렇게 먼저 다가가는 일이 중요한 일이다. 관계에서, 관계를 맺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중심을 잃지 않고 다가가는 일이다. 상대를 반달눈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내 눈이 반달눈이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내 눈이 반달눈이 된다는 것은 상대를 그만큼 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살면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 서로 반달눈으로 볼 혜안이 있어야 한다.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첫인상부터 다르게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반달눈으로 나를 봐주면 나 역시 반달눈으로 보게 된다. 작품의 배경에 깔린 이형란 시인의 심상이 그렇게 읽힌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하게 자신의 말을 다 하는 기술, 아니 언술, 아니, 시라는 작품이다. 그 정체성은 충분히 세상을 안온하게 만들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다. 맺으며
시집 원고를 읽으며 내내 드는 생각은 시는 울림이라는 것을 공유할 때 가장 좋은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울림은 내면의 소리다. 살면서 느끼거나 감동하거나 아름답거나 우아하거나 하는 모든 감정의 요소들 속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부분에 모두 울림을 준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문득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시는 미사여구와 암호화된 기호의 나열이 아니다. 울트라 하이퍼 계열 등등의 시문학적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전통적인 서정성에 기반을 둔 공감의 영역이 있어야 하며, 그 공감의 영역이 울림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어 나와 너를 맺어줄 때 비로소 문학은 그 가치를 제공하거나 받거나 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의 파생적 요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시 문학만큼 촌철의 감동을 주는 것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그 촌철이 촌철의 울림이 되기까지 시인이 얼마나 절제하고 고민하고 뜬눈의 시간을 보냈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모두 살과 피같이 아까운 것들이다. 그 소중한 시간의 배려를 이 가을에 눈으로 읽게 되는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이 든다. 첫 장부터 펼치는 것이 아닌, 아무 곳이나 아무 시간이나 어딜 펼쳐도 이형란 시인이 조곤거리는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시간이 성큼 지나간다. 황홀한 계절의 어느 마디쯤에서 삶을, 지나온 내 시간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고 싶다면, 그것도 한껏 멋을 부린 껍질이 아닌 큼큼한 사람 냄새를 맡고 싶다면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것이 인생을 멋지게 사는 최고의 방정식이다. 마지막으로 중, 후반의 삶에 권면이 될 수 있는 작품 하나를 소개하며 서평을 마친다. 이형란 시집〈먹고살기歌〉가 이 가을의 대미를 우아하게 장식하길 기원한다. (김부회)
분실 신고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렸다
나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노란 색을 좋아해요, 맞아요 개나리색이요
결혼할 때와 포스터 사진 찍을 때
화장을 두 번 해봤어요
밥은 혼자 먹어요, 남과 먹으면 체해요
아, 술은 괜찮아요, 술은 체하지 않아요
다리가 굵어서 부츠를 신지 못해요
남과 다른 나를 백 가지도 더 댈 수 있는데
여전히 나는 투명인간이다
이리 서 보세요, 줌-인, 찰칵
자, 이제 됐습니다
피사체가 되고서야 살아났다
나를 되찾았다
이형란 시인 약력
부산 출생, 고려대 중어중문어과 졸업, 중국어 강사, 저서 (중국어 성어 사전, 중국어 어휘 사전,번역서 (가자, 가자 베이징) 외 다수, 2022 시집 〈먹고살기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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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함박눈도 종일 지상으로 눈 배달하느라 고단한지 잠시 해찰하는 자정. 좋은 글 찾다가 부엉이가 먹이를 발견하듯 화들짝! 멋진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형란 시인" 처음 듣는 이름, 시인의 첫 시집이라 매우 호기심어린 눈으로 해설을 읽었다. 사위가 너무 조용하니 글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제 나름 판결은, "가히 천의무봉이란 말을 써도 손색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쩜 시인의 詩도 천의무봉이요, 어쩜 詩를 해설한 평설도 천의무봉이요, 읽으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詩와 그 詩를 해설한 두 분의 케미가 이렇게 환상적으로 맞아떨어질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눈 그친 밤,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글을 읽었다. 고로 나는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어이쿠...이런 과찬의 말씀을.....^^ 아침부터 덕담을 들으니 부끄럽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날 되세요...
* 달궁....1980년대 서정인 소설가의 작품제목으로 기억합니다만....남원 쪽에 그 지명의 산과...여러 곳이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