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부모님은 이북 함경도 출신이세요. 아버지는 함흥.엄마는 흥남. 6.25 당시~아버지는.고급 중학교 2학년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 당시~학생회장 이었는데...전쟁이 나자 학생들은 소년의용병으로~ 조국을 위해~인민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자~!!! 연설(학생회장이라)하고.. 다들 나가고 아버지도 의용군으로..
미군에게 잡혀서~거제도.포로 수용소로. 휴전이 되고.소년병들에게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당시~이북에서는 일명 부르조아 집안인지라.... 수척의 배 소유주 선장.의사.교사.천석군 집안인지라.. 이미 인민재판 형식을 거쳐~몇분이 돌아가셨고.학생인 어린 남자들과 나약한 여자들만 남아있던터라...이북으로 돌아간다해도 조만간 인민재판으로 사형 당할 확률이 크기에~한국군으로 남기로.... 서울에 유학 간 큰아버지는 전쟁이 나자 한국군으로 입대.
할머니..삼촌 .큰엄마.사촌언니는 비행기 폭격 피해서 미군 배에 잠시 피신해 있는다는 게~마냥 남으로 흘러흘러 부산으로..부산 피난민 판자촌 마을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두분이 판자촌 천막 이웃이 되었어요. 마침~양가 모두 장성한 아들딸이 있었기에 ~사진관에서 예식복 빌려 입고 두 분만 결혼사진만 찍고는~ 서울에 직장을 얻게 된 아버지와 이웃집인 울 엄마를 결혼 시켜서 서울로 보내게 되어~ 나라에서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 옆 빈 땅 시유지에 집터를 나누어 주어서~ 직접.나무와 벽돌로 집을 짓고.터전을 마련~저는 집짓기 전에 판자촌 천막에서 태어났답니다.
부산에서 할머니 .삼촌 .큰어머니와 사촌언니도 서울로 올라와서.. 모두 같이 살았답니다. 아버지 혼자 돈 버시고 엄마는 살림하시고~대 가족 꾸려 갔지요.
그러다~서울에서 전쟁통에 헤어진 큰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미 큰아버지는~서울 신여성과 결혼해서 자녀도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전쟁에 가족이 피난 나오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셨기에.....ㅜ 서울에서 결혼 했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큰어머니는 격노. 큰 엄마의 반대로~(당시 큰어머니에게는 이북에서 신혼 초에 낳은 딸만. 서울 그 분은 큰아버지와는 아들을 두었지만...호적에 못 올렸어요. 큰어머니가 극렬히 반대하셔서..) 큰 아버지는 두집 살림을 하시며... 평생을 큰엄마에게 구박 받고 죄인 처럼 사셨습니다 .
작은 아들인 울 아버지가~ 할머니와 삼촌과 외갓집에 놀러 왔다가 같이 피난 온 친척 언니까지~모두 같이 살았답니다 울 엄마는 시댁 대가족에.우리 4남매 까지 평생을 가족 보살피다가 11년전에 돌아가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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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현충일 전날에는 아버지랑 동작동 국립묘지로 참배 작년 현충일 연휴에는 아버지가 묻히실 괴산 호국 충효원으로 ~ 어제는~그나마 북한이 가까운 강화도로 외식 겸 나들이~
80세 이전의 전쟁 후 세대들에겐
실향민의 한이 없을 듯 하네요.
먼나라 이야기 같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