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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임기 5년인 제20대 대통령선거
20대 대통령 선거일이며 법정공휴일이다 투표시간은 오전 6시 ~ 오후 6시까지 실시되었으며 코로나19 확진·격리 유권자는 오후 6시 ~ 오후 7시 30분까지 투표했다
사전투표는 03.04.(금) ~ 03.05.(토) 실시 했으며 사전투표율은 36.9%로 역대 최고였으며 재외투표일 02.23.(수) ~ 02.28.(월) 실시 했다
후보는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15명의 후보가 등록했으나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국민의힘 윤석열후보와 단일화 하는 등 3명이 사퇴하면서 12명이 되었다
국민 51,629,720명 중 유권자는 44,197,692명이다
3월 5일 코로나-19 확진자·자가격리자는 오후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약 1시간동안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데, 준비 부족 및 관리 부실로 논란이 되었다. 확진자용 임시 기표소에는 투표함이 없는가 하면, 참관인이 박스나 쇼핑백 등을 이용해 투표용지를 대리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1번에 기표가 된 투표지를 배포하는 사례가 발생돼 부정선거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선거결과 역대 선거 중 최 박빙의 접전 끝에 윤석열후보가 48.6%, 이재명후보가 47.8%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2020년 북한 함경도 선덕에서 다종의 단거리 발사체 발사
2019년 민주화운동가 문동환 목사 세상 떠남(98세)
2018년 평창 겨울패럴림픽 개막
2016년 이세돌 바둑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바둑대결 3대1로 패배
2014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 선거에서 김정은 대의원 첫 선출
2009년 이성자 화백 타계
재불(在佛) 화가인 이성자(91) 화백이 2009년 3월 9일 새벽(한국시각) 프랑스 투레트에서 타계했다. 이 화백은 〈우주의 노래〉등 대지와 모성으로부터 우주의 신비와 무한성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유럽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유화를 비롯해 목판화·도자기 등 다양한 작품에 동양적 감수성을 담아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1918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958년 라라 뱅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국내외에서 70여 차례의 개인전과 300여 차례의 단체전에 참가하면서 정열적으로 활동했다.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남관·김흥수·박영선 화백과 함께 공부했으며, 고(故) 이응로·김환기 화백 등과 파리에서 함께 활동했다.
국내보다 프랑스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한 이 화백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 니스미술관, 파리 그랑팔레, 파리 피에르 카르댕 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가졌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훈장을 받았다.
2009년 양용은, 미국 PGA 첫 우승
양용은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혼다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 최경주(7승)에 이어 두 번째로 미 PGA투어 정상에 오른 한국 선수가 됐다.
양용은은 2009년 3월 9일(한국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가든스 PGA내셔널 골프장 챔피언스코스(파70·7158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5개, 보기 3개로 2타를 줄이며 합계 9언더파 271타로 미국의 존 롤린스(8언더파 272타)를 1타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양용은은 우승 상금 100만8000달러(15억6400만원)를 받아 상금 랭킹 9위(110만5771달러)로 뛰어올랐으며 2011년까지 2년 동안의 투어카드와 CA챔피언십, 마스터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출전권도 획득했다. 양용은은 지난해 성적 부진으로 PGA투어 퀄리파잉스쿨 시험을 다시 보기도 했지만, 이번 대회 2라운드부터 선두 자리를 굳게 지켜 첫 정상의 감격을 누렸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평검사 공개토론
2003년3월9일 100분 넘게 이어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검사들의 토론은 서로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을 주고받는 등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했다. 검사들은 작심한 듯 노 대통령의 ‘아픈 곳’까지 공격했고, 노 대통령은 이 때문에 서너 차례 감정이 상해 흥분한 모습도 보였다.
발언에 나선 검사들은 사전에 준비한 듯 한두 가지씩 공격 포인트를 꺼냈다. 부산지검 윤장석 검사는 “징계의 자리가 아니라, 대화의 자리에 불러줘 고맙다”며 노 대통령의 ‘항명 검사 징계론’을 꼬집었다.
노 대통령이 “당선 이후 일반 검찰이건 수뇌부 검사건 단 한 건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하자, 바로 마이크를 잡은 수원지검 김영종 검사가 “대통령은 후보 시절 부산 동부지청장에게 청탁 전화를 한 적이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죠”라고 했는데,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격앙돼 있었다. 서울지검 이정만 검사는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안된다는 취지로 ‘노 대통령 형님 해프닝’을 거론했고, 노 대통령은 “자꾸 이런 식으로 토론할 것이냐. 대통령의 낯을 깎아내리려 하느냐”며 불쾌해 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흥분했다고 느꼈는지 “여러분이 공격적으로 나오니 나도 공격적이 되는 것 아니냐”고 했고, 검사들이 자신의 저서까지 들춰내자 “많이들 연구하셨다”고 했다. 한 검사가 “거슬리는 얘기도 있겠지만, 양해해 달라. 우리가 토론의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라며 긴장을 누그러뜨리려 했지만, 노 대통령은 “여기는 대통령의 개인적 약점, 신문에 나는 것을 거론하는 자리가 아니다. 토론 아마추어라는데 그렇다면 검찰개혁 문제도 아마추어답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양측 간 날카로운 신경전 속에서도 노 대통령은 시종 “여러분은 믿지만, 검찰 상층부는 믿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토론에 참석한 평검사들과 검찰 지도부를 분리하겠다는 전략적 구상이 있는 듯했다. 노 대통령은 “여러분이 과거 대통령들의 검찰 중립화 의지를 믿지 못하듯, 나 역시 현재 검찰 지도부는 신뢰 못한다”, “여러분도 지금 지도부로 몇 달을 그대로 가자는 뜻은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러나 검사들은 선뜻 맞장구를 치지 않았고, “선배 검사들에게 일부 문제점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인적 청산 역시 투명한 절차로 이뤄져야 한다”는 답을 반복했다.
함께 자리한 문희상(文喜相) 청와대 비서실장, 문재인(文在寅) 민정수석 등 청와대 참모들도 대통령과 검사들의 격한 발언이 계속되자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숙이는 등 긴장된 표정이었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개를 푹 숙이기도 했다. 문 수석은 토론이 끝난 뒤 상기된 얼굴로 “아슬아슬했다. 정말 조마조마했다”면서도 “원래 이런 것 하자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었느냐”고 말했다. 민정수석실의 관계자는 “SK수사 같은 진행 중인 사건을 어떻게 브리핑 할 수 있느냐”고 했다. 토론 후 기념촬영 때도 노 대통령의 얼굴은 붉게 상기된 상태였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시작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당내 경선이 2002년 3월 9일 제주시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제주지역 경선을 시작으로 전국 16개 광역시·도별로 실시됐다. 경선에는 김중권 노무현 정동영 김근태 이인제 한화갑 고문과, 유종근 전북지사 등 7명이 출마했다.
그러나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은 3월 12일 민주당 김근태 고문의 대선 후보 경선 사퇴를 시작으로, 14일 검찰로부터 수뢰혐의를 받고 유종근 전북지사가 사퇴했고, 한화갑 고문이 19일, 김중권 고문이 25일 각각 경선에서 사퇴했다. 이인제 후보도 제주 경선에서 단 3표 차이로 1위를 놓치면서 `이인제 대세론`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예상치 않았던 `노무현 돌풍`에 밀려 결국 4월 17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하는 꿈을 접기로 했다"며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결국 노무현 후보와 정동영 후보 만이 끝까지 경선에 참여했다. 4월 27일 서울을 끝으로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대선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전체 유효득표의 72.2%(1만7568표)를 획득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2002년 ‘걸레 스님’ 중광 타계
걸레 스님’으로 알려진 중광 스님이 2002년 3월 9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중광 스님은 평생 “나는 걸레다” “내 생활 전부가 똥이요, 사기이다”고 외치며 파격으로 일관한 자유인이었다. 제주도가 고향인 그는 1960년 양산 통도사에서 입산했지만 불교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 때문에 1979년 승적을 박탈당했다.
그의 예술세계는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1977년)·버클리대학(1980년)·록펠러재단(1983년) 등에서 선화와 선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은 것이다. ‘걸레 스님’이란 별칭도 1977년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초대전에서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하면서 붙었다.
승적을 박탈당한 후에도 계속 승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지낸 것처럼 그는 성속(聖俗) 등 모든 경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발표한 그림과 시(詩)도 거침이 없었다. 성기를 노출시킨 동물 그림을 발표한 것은 예사이고, ‘나는 똥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는 등 일반인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퍼포먼스에서는 자신의 성기에 붓을 달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외국 대학 강연 중 여학생과 키스를 하기도 했다. 지난 1997년 건강이 약해진 후에는 강원도 백담사 등에서 요양하며 술·담배도 끊고 달마도 그림에 열중했다. 그러나 2000년 10월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그동안 그린 달마도 50여점으로 연 작품전이 마지막 전시회가 됐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 4개항의 대북제안 `베를린 선언` 발표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3월 9일 오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행한 `독일 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문제`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1. 남북 당국자간 직접대화와 협력 2. 한반도 냉전종식과 평화정착 3. 이산가족 상봉문제 적극 호응 4. 남북 특사교환 등 4개항의 대북제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같은 김대중 대통령의 새 대북제안을 이날 박재규 통일부장관 명의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측에 사전 통보했으며 외교부를 통해 미국-일본-중국-러시아에도 통보했다
2000년 세계 최장 국제 해저 광케이블 ‘제7 국제해저케이블(SEA-ME-WE3)’ 개통
제7 국제해저광케이블(SEA-ME-WE3) 연결도. 유럽으로 통하는 ‘해저 실크로드’가 뚫렸다. 아시아와 유럽 63개국 92개 사업자가 참여해 15억 달러를 들여 건설한 세계 최장의 해저 광케이블인 ‘제7 국제 해저케이블(SEA-ME-WE3)’이 2000년 3월 9일 개통되었다. 이는 미국을 경유하지 않고 우리나라와 중동, 유럽 국가들의 인터넷을 초고속으로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국제 해저 광케이블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해저 광케이블은 한국과 일본 중국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아시아 중동 유럽의 33개국을 연결하며 길이는 3만9000㎞. 초당 24만1920회선을 소통시키고 20Gbps(초당 A4용지 250만장 전송) 용량을 갖는 최첨단의 광파장분할다중화방식(WDM)을 채택했다.
이날 개통된 케이블은 이미 운용 중인 HJK(홍콩-일본-한국), RJK(러시아-일본-한국) 등의 케이블과 연결, 국제통신망을 한국 중심으로 만들어 급증하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충족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1999년 태국 주재 북한 대사관 홍순경 참사관 일가, 북한요원에 납치됐다 탈출
태국주재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던 홍순경 참사관 부부가 아들과 함께 북한인 4명에게 납치돼 압송되다가 탈출하였다
홍 참사관은 쌀 수입대금 수천만 달러를 빼돌린 뒤, 지난 2월 19일 돌연 잠적해서 그 행방에 관심이 모아졌다.
탈출에 실패해 북한측에 억류당하고 있던 아들 원명씨는 태국정부의 강경한 요청으로 같은 달 23일 석방됐다.
이 사건은 태국과 북한 사이의 외교문제로 비화되면서 태국주재 북한외교관 6명이 추방됐다.
1999년 에콰도르, 경제난으로 60일간 비상사태 선포
하밀 마우아드 대통령은 9일 “경제 위기의 와중에 총파업에 따른 불안이 가중돼 60일간 비상 사태를 선포한다” 고 발표했다. 원유-전기시설 보호와 공공 집회-시위 진압을 위해 군이 투입되고, 앞서 8일 발표한 은행폐쇄 조치는 11일까지 연장됐다, 또한 환투매-예금 인출 방지를 위해 10∼11일을 임시휴일로 선포했다.
정부가 환율 방어에 나서면서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자유 변동 환율제 도입으로 통화 가치는 80%까지 폭락했다. 엘니뇨 현상에 따른 26억 달러 피해와 원유가 하락에 따른 수입 감소도 경제를 옥죄어왔다.
성장률은 제로인데 비해 인플레는 50%, 재정 적자는12억 달러로 불어났다. 군부 내 반정부세력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문이 나오는가 하면, 금융 전문가들은 경제 통제 능력을 상실했다는 원색적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에콰도르는 10일 만에 국가비상사태를 해제했다. 하밀 마우아드 에콰도르 대통령은 18일 의회와 5억2000만달러의 세수 증대에 합의함에 따라 지난 9일 선포한 비상사태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위기극복을 위해 소집된 의회 특별회의에서 마우아드 대통령과 내각, 당-의회지도자들은 연료 폭등으로 촉발된 택시와 트럭, 버스 총파업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료 가격을 우선 인하키로 합의하고, 통신·전기·석유부문 민영화 등 의회에 일괄 제출한 10가지 비상조치를 철회했다.
1997년 프랑스 ‘엘르’ 전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 사망
프랑스 여성잡지 ‘엘르’ 전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가 심장마비로 1997년 3월 9일, 4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이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생애 마지막 기간에 왼쪽 눈꺼풀의 움직임만으로 ‘다이빙복과 나비’라는 제목의 130쪽 짜리 책을 펴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엘르’의 편집장으로 있던 1995년 12월 그는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 측은 그의 뇌와 신체를 잇는 신경망이 끊어졌다고 진단했다. 이때부터 보비는 말을 할 수도, 무엇을 먹을 수도, 심지어 혼자 힘으로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뇌 이외에 살아있는 신경망은 오직 한군데, 왼쪽 눈꺼풀뿐이었다.
이 때 전에 그의 편지를 받아보았던 출판사 사장 안토닌 오두아르씨(씨)등 친구들이 그에게 눈을 깜빡임으로써 의사소통을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본떠 책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그만을 위한 의사소통 방법이 고안됐다. 프랑스어(어)의 각 알파벳을, 눈 깜빡거리는 횟수로 표시하기로 했다. e나 s 같은 자주 사용하는 문자는 가능하면 눈을 적게 깜빡거리도록 순서를 재배열했다. 마침표는 ‘눈을 아예 감아버리는 것’으로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써나간 글은 하루에 책 반쪽 정도. 1년3개월 동안 20만번 이상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행동은 인간승리인 동시에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젊은 지식인의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삶에 최대한의 존경과 애도를 보냈다.
199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공식 출범
북한에 대한 경수로 공급사업지원을 목적으로 설립한 기구 !
창립 회원국 한-미-일 3국 대표는 이날 유엔주재 미대표부에서 설립협정 서명식을 갖고 첫 집행이사회를 개최함으로써 활동에 들어갔다.
KEDO의 활동은 북한에 대한 한국형 경수로공급이라는 설립목적에 따르며, 주요 결정들은 모두 집행이사국인 한-미-일 3국의 전원합의로만 내려지도록 규정됐다.
정부간 국제기구의 지위를 갖게 될 KEDO의 조직은 한미일 3개국으로 구성되는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전원 합의제 집행 이사회와 모든 회원국들이 참여하는 총회, 그리고 경수로사업, 대체에너지 공급 등을 담당하는 소관 자문위원회로 구성된다.
1994년 컴퓨터 통신 동호회원, 컴퓨터 통신망에 이적표현물 게재혐의로 구속됨
1993년 부정방지위원회 설치
1993년 `파킨슨 법칙` 만들어 낸 영국의 역사가 파킨슨 사망
1992년 메나햄 베긴 전 이스라엘 수상 사망
메나햄 베긴 전 이스라엘 수상이 1992년 3월 9일 텔아비브의 이치로브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78세였다. 베긴 전 수상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어 중동지역에 처음으로 공존의 씨를 뿌렸는가 하면 1982년의 레바논 침공 등 숱한 비난을 받는 등 여러가지 얼굴을 보여준 이스라엘의 극우 민족주의 운동 정치인이었다.
그는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6일전쟁을 결산하는 평화협정을 맺어 이 공으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197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1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베긴 전 수상은 부모가 나치 정권에 살해당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으며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이스라엘 극우 독립운동단체인 `베타르`에 가담, 1943년에는 유태 과격지하해방단체인 `IZL` 총사령관을 맡아 이스라엘 건국운동을 벌여왔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후 자유당 당수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1973년 우파들과 함께 보수 우익의 리쿠르당을 창설해 노동당을 누르고 29년간의 야당생활을 청산했다. 그후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총리직을 맡았었다.
1991년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반공시위(40여명 사상)
1989년 제1차 남북체육회담(판문점)
1979년 중국, 미국 AP와 UPI통신 북경지국 개설 허가
1978년 서울 순환선인 지하철 2호선 건설 시작
1977년 미국 정부, 미국인의 북한 여행제한 해제 발표
1977년 카터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계획발표
1977년 3월 9일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한-미관계를 놓고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선거당시 주한미군지상군의 단계적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고, 이날 박 외무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선거공약은 불변임을 강조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기간은 4-5년이 적절하며, 철수일정은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마련할 것이며, 철수는 또 일본의 완전한 이해와 참여로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했다.
이외에 한국정부가 북한의 어떠한 침략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적절한 지상군을 갖도록 한국의 전력증강계획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한국의 공중방위를 위해 상당기간 미공군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1975년 미국 알래스카 개썰매 경주
1975년 루마니아 선거
1973년 스페인- 중국 외교관계 수립
1969년 천안시장 화재
1968년 일본 이타이이타이병 환자, 카드뮴을 배출한 삼정금속광업 고소
일본 도야마현(富山縣) 진즈가와(신쓰가와·神通川) 유역에서 발생한 이타이이타이병 환자와 가족 28명이 1968년 3월 9일 카드뮴을 배출해 온 미쓰이(三井)금속광업을 상대로 총액 6천만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제1차 소송을 벌였다.
이타이이타이병은 뼈가 굽거나 약해져서 때로는 기침만으로도 늑골이 절골되는 경우도 있으며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을 보인다. 환자가 "이타이 이타이"(아프다 아프다)라며 죽어가기 때문에 붙여진 병명이다.
1961년 카드뮴 중독이 이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첫 발표되자 후생성은 3월에 특별연구반을 발족시켰고 5월에 이타이이타이병을 공해병 제1호로 지정했다. 미쓰이 금속광업이 배출한 폐광석 속의카드뮴은 광산폐수에 섞여 농작물, 어패류, 상수원 등을 오염시켰다.
1971년 6월 재판부도 "미쓰이금속광업 가미오카광업소로부터 배출된 카드뮴이 원인"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1972년 8월 나고야고법은 회사측의 항소를 기각해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56명이 숨진 뒤였고 여전히 수백 명이 이타이이타이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966년 초대 주한 일본대사 기무라 부임
1965년 이탈리아, 고속도로 붕괴
1965년 한국-이탈리아 무역문화협정 체결
1965년 한국-말라위 국교 수립
1962년 정부, `해외이주법` 공포
1962년 3월 9일 정부는 법률 1030호로 `해외이주법`을 공포했다. 이날 보건사회부장관은 "58년 만에 다시 실시되는 이민은 주로 농업이나 광업, 기타 산업분야에서 노동하기 위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3월 15일에 관민으로 구성된 4명의 시찰단은 1962년 이주대상국인 `브라질`에 현지조사를 하여 정식으로 교섭을 한 후 세부적인 모집요강을 발표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민은 1904년부터 1906년사이에 중남미 멕시코에 약 400여명, 하와이에 3천여명 정도가 있은 후 건국 후 이번이 처음이 되는 것이었다.
해외이주법은 해외이주를 하는 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해외이주절차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 법률로 전문 17조와 부칙으로 되어있다. 해외이주법은 해외이주 제한, 이주자의 결격사유, 이주종류, 해외이주신고, 해외이주정책심사위원회, 해외이주 알선, 영주귀국의 신고, 해외이주자의 재산반출, 해외이주 알선업자의 금지행위, 해외이주 알선업의 등록, 등록의 결격사유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해외이주법 제정이후 9번의 일부개정이 있었다.
1961년 달라이 라마 유엔 방문
1959년 바비인형 등장
1959년 3월 9일, 39-18-33 사이즈의 성인여성을 축소한 30cm 크기의 섹시한 ‘바비(Barbie)인형’ 이 뉴욕박람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바비는 흑백 줄무늬 수영복 차림에 선글라스와 링귀걸이를 하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바비인형은 1958년 루스 핸들러가 자신의 딸 바바라가 어린이 인형보다 성인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에 착안해서 만들었다. 루스 핸들어는 딸인 바바라의 이름을 따서 ‘바비’ 라고 이름지었으며 바비인형의 원조는 독일의 ‘릴리’ 인형으로 알려져 있다.
바비인형은 첫 등장 이후 우주비행사, 외과의사, 패션모델, 야구선수 등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제조회사인 마텔사는 바비의 남자친구 ‘켄’(1961년)과 여자친구 ‘밋지’(1963년)를 만들기도 했으며, 38마리의 애완동물도 만들었다. 바비인형은 1968년에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말까지 하고 1976년에는 100년 뒤 열어볼 타임캡슐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 동안 10억 개의 바비인형이 판매되는 등 성공을 거둔 반면에 여성에 대한 미적 기준을 왜곡하고 백인지상주의 문화를 대표한다는 이유로 여성운동가와 제3세계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7년 함백선 개통
제천-영월-함백의 단선 철도!
남한 3대 산업선의 하나.
강원도 영월과 함백 사이 22.6km.
준공된 영월-함백 구간과 2년전 개통된 제천-영월구간이 연결돼 함백선은 모두 60.7km로 늘어났다.
영월 화력 발전소에의 석탄 공급․함백의 석탄․상동 광산의 중석․기타 망간․형석․금․은․구리․아연․자철 등의 개발 촉진에 기여.
함백선의 완공으로 함백탄전의 무연탄 수송이 쉬워져 서울과 대도시의 연탄 공급이 원활해 졌다.
1957년 유엔군, 가자지구 진주 완료
1956년 영국, 키프러스의 마카리오스 대주교 추방
1952년 구소련의 여성 정치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사망
1945년 미국, 라인강 도하
1945년 미군기, 동경 대공습
1945년 베트남 독립 선언
1942년 일본군, 남부 인도네시아 점령
1934년 1961년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출생
1918년 러시아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1916년 독일, 포르투갈에 선전포고
1910년 낭만적 경향의 대표적인 미국 작곡가 바버 출생
1908년 응용화학계의 토대를 마련한 한국의 화학자 김동일 출생
1907년 루마니아의 종교학자 머시아 엘리아데 출생
1903년 법부, 법률학교 설립
1891년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한 필리핀 대통령(1943~45) 라우렐 출생
1888년 독일 빌헬름 1세 사망
1871년 대원군 사액서원 4개만 남기고 모두 폐쇄
대원군은 서원이 당쟁을 일으키고 국가 재정을 축내고 있다는 생각에서 1864년에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했고 마침내 서원을 철폐하였다
서원 철폐는 지방 유생들의 완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대원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강경하게 실행하였다. 대원군은 모범적이고 유명한 도산서원 등 47개만 남기고 모두 폐쇄시켰다. 서원은 조선 중기에 보급된 사학기관으로 이름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유림들의 학문과 사상을 장려한 기관이나 서원에 특권이 주어지면서 폐단도 생겨났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2년(중종 37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 시대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 서원이라 한 것이 처음이다.
1856년 카보런덤 발견, 흑연 제조방법을 완성한 미국의 발명가 애치슨 출생
1824년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 건설자, 미국 상원의원 스탠퍼드 출생
1796년 나폴레옹, 조제핀과 재혼
3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파리 사교계의 여왕이던 조제핀이 결혼식을 올렸다.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출세가도를 달리던 청년장교 나폴레옹은 두 아이를 둔 미망인으로, 숱한 염문을 뿌리던 조제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1779년 조제핀은 부유한 보아르네 자작 알렉상드르와 결혼했으나 이후 별거했다.
남편이 좌익 자코뱅당의 미움을 사면서 처형되자, 그녀 역시 투옥되었다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풀려나면서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된 이후 그녀는 1804년 12월 1일 종교의식으로 다시 결혼식을 치르고 다음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이 주재하는 나폴레옹 1세 대관식에 황후 자격으로 참가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 루이즈와 정략결혼할 생각으로 1810년 1월 교구 사제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1804년의 결혼식을 무효화했다.
1734년 스페인의 극작가. 시인. 비평가 가르시아 데 라 우에르타 출생
1374년 고려 문신 이인복 사망
1365년 왜구, 강화도에 침략
왜구(倭寇)라 함은 고려 중기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 나라와 중국 연안을 무대로 많은 인명과 재산을 해치고 약탈하던 일본 사람 해적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의 이들의 활동 시기는 여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사이에 가장 심하였고 고려조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구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있었으나 당시는 그 수나 피해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1차 1274, 2차 1281년)이 실패한 후 그들의 노략질은 더욱 심하여지고, 공민왕 때는 고려의 해안 도서 지방은 물론 공주․전주 등 대륙의 성읍에 까지 깊이 침입하기도 했으며, 왜선의 수도 늘어났고, 침입 지역이 더욱 넓어졌다.
1200년 주자학의 창시자 주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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