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답이 왔네?"
사실 무시해도 좋았을 쪽지였다.
「진심이죠, 당연히. 전 제가 너무 사랑스럽거든요.」
아하, 이분은 도플갱어의 뜻을 알고계시는군. 뭐 잡학다식한 사람은 의외로 많으니까.
도플갱어란 자신의 거울. 외형뿐만이 아니라 자기자신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제가' 라고 말했다.
이거 좀 재밌겠는데?
「저도 제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니, 기쁘네요.」
물론 거짓말. 하지만 일단 그렇게 보냈다. 답은 금방 왔다. 이분도 웹서핑을 하시는 중인가.
「오, 동지로군요. 제 주위에선 제가 그런 말을 하면 미친놈 보듯이 해서 왠지 반가운데요?」
미안해요. 나도 살짝 미친놈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답이 금방오네요, 웹서핑중이신가요?」
찔린다. 그래서 화제를 바꿨다.
「네. 영화쪽에 관심이 있어서요. 그쪽 검색해보고 있어요.」
친절하시네. 묻지 않은것도 말해주고.
「영화.. 전 잘 모르겠네요;; 저는 영상보다는 글자가 좋아요.」
활자중독증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나다. 책읽는것을 너무 좋아한다.
그저 그것에만 빠지게 만들어서 나는 책을 너무나 좋아한다.
「아, 저도 책 좋아해요. 활자중독증이라고도 불렸었는데..
하지만 글자가 상상이 아닌 영상 그대로 보인다고 생각하니 영화가 좋아지더라구요.
물론 책을 먼저 읽은 다음 영화를 봐요. 그리고 상상했던 장면 그대로 나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보다 별로면 멋대로 실망하고..그런거죠. 그런데 우리, 취미가 같네요? *^^*」
흐음.. 저 깜찍한 이모티콘을 좀 보게. 이거 참 기분이 묘해지는 걸?
그것보다.. 영화라...
「그거 괜찮네요. 영화라.. 저도 책을 읽을 때 눈앞에 영상을 그려가며 읽거든요. 영화라는 거 의외로 재밌을지도.」
의외의 부분에서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얼굴을 보고서는 하지 못했을 대화들이 컴표터라는 매개체를 통해 오갔다.
「나이가 몇이세요? 왠지 저와 비슷한 또래이실 것 같은데요.」
음.. 진실을 말해야겠지? 게임을 통해 수많은 사기를 쳐도 마음에 든 상대를 속이지는 않는다.
「18이에요. 수능이라는 압박에 숨이 막힐것 같은 시기이죠.」
「나이가 같네요. 말 놓아도 될까요?」
정중하시군요. 보통 넷에서 나이가 알려졌을 경우 바로 말을 까면서 들어온다. 난 잘 모르는 상대에게는 존댓말을 쓴다.
거리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하지만 왠지 이 사람에겐 존댓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나이가 같다면.
「뭐, 문제 없겠지? 나 원래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존댓말 쓰는데..」
「너, 나랑 꽤나 비슷한 것 같다? 난 나랑 비슷한 사람 보면 그냥 막 끌리던데」
「그건 당신이 나르시스트라서 그런거야. 자기애가 엄청난거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대하는 것 처럼 편하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이 편안함. 겁쟁이라고 부를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편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괴로운건 싫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문제도 덮어두고 그냥 지나간다.
그것이 정말로 드러났을때의 괴로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다시는 아프지 않기 위해 방임주의로 살아가고 있다.
「마치 너는 아닌것 처럼 말을 하네? 자기 자신이 매우 사랑스러우시다면서?」
이사람은 나와는 다르다.
나 자신을 마음속에서부터 경멸하는 나와는 달리 이 사람은 말 하는 그 자체가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차있다.
동경..정도 일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
「음.. 그거 사실 거짓말이야. 난 내가 싫거든.」
그러니까. 나는 맘에 든 상대는 속이고 싶지 않다구.
「...뭐 사람마다 다른거니까.」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라는 분위기를 마구마구 풍기는 쪽지에 무언가 울컥했다.
아까 서희에게 들었던 감정과는 좀 다른.. 알수는 없지만 뭔가 좀 다른 감정이었다.
"감정놀음따위.. 안하기로 했잖아."
나에게 조용히 세뇌시킨다. 감정따윈 불필요한거라고.
「난 말이지. 소중한 존재라는 건 만들지 않기로 했어.」
「왜??」
「오래전에.. 초등학교 고학년때쯤이었나.. 인터넷소설이라는 걸 봤거든. 거기서 보니까 소중한 존재라는 건 약점밖에 안돼더라.」
「쿠쿡.. 나도 글쎄.. 사랑이라거나 그런건 안해봤는데 말이야. 약점이 될 정도라면 나를 꽤 행복하게 만들수 있는 존재이지 않을까?」
행복이라.. 나는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 길지 않은 행복이 끝나고는 항상 행복의 단짝 불행이라는 놈이 찾아오니까.
「뭐, 나는 그냥 혼자인게 편해.」
혼자라면 상처따윈 받지 않거든. 여러사람일때 느끼는 온기가 없어서 조금 춥기는 하겠지만
둘러싸여 있을때의 온기를 느끼고 나서 혼자 남겨지게 되면 그만큼 더 춥기 때문에 난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이길 원했다.
하지만 그 추위를 알게 되었을때, 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혼자면.. 외롭지 않아?」
「조금 외롭다고 느껴도 타인의 시선, 타인의 생각같은걸로 상처받진 않거든.」
처음엔 그저 흥미였을 뿐인데, 장난식으로 보낸 쪽지로 나는 꽤 괜찮은 카운셀러를 만난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인정하면 돼. 그런 건 생각의 차이거든.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
그러고 보니, 우리 정말 닮은점 많은거 같지 않아?」
인정하면 된다라.. 난 조금 웃었다. 나는 그걸 인정할 만큼 강하지 못해.
「넌 정말 강하구나.」
「그래. 나랑 비슷하니까 너도 곧 강해질거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위로받았다.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코웃음치며 웃기지 말라고 했을 나였다.
누구도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아니, 그전에 누군가에게 나를 보인적이 있었나.
「친구하자.」
친구라.. 친구하자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었나?
사실 소꿉친구라 불리는 김준형도 사실은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녀석이다.
그 흔하디 흔한 짝사랑이라는 것을 나도 하고 있으며 그 대상은 김준형이라는 것.
그래서 친구라는 건 사실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냥 싸늘하게 있으니 다들 슬금슬금 피했고 나 또한 그들을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았으니..
「그래.」
이런 사람이 친구라는 건. 의외로 좋은걸지도 모른다.
「으윽..너랑 대화하는 거 즐거운데 우리집 마녀가 컴퓨터 끄라고 난리야 지금.」
「아깝네. 나도 꽤 즐거웠어. 」
「아..정말 아쉬운데, 핸드폰 번호좀 알려줄래? 심심하면 문자하자.」
아쉬울것 없지. 나야말로 정말 즐거웠으니까.
「010-XXXX-XXXX」
바로 문자가 온다.
-혹시 Dream님이 맞으세요?-
이건 내 닉네임이다. 확인차 하는 문자인거 같은데.. 왠지 장난을 쳐 보고 싶은 생각이 물씬 피어오른다.
-누구신지..?-
당황했을까? 얼굴을 알 수 없는 상대의 표정이 문득 궁금해 진다.
-죄송해요;; 잘못 보냈나봐요.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해 질 정도로 사과멘트를 보내왔다. 그나저나 정말 뉘집 자식인지 교육은 제대로 배웠나보군,
할아버지의 말투를 속으로 따라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장난 좀 쳤어. 나 맞아. -
컴퓨터를 끄고 거실에 좌르륵 펼쳐둔 문제집을 정리했다. 방에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다.
나오가 움직이는 펜을 보면 달려들기 때문에 나오는 방에 들여보내고 나는 나와서 공부를 한다.
부모님은 그게 뭐니, 라고 하시며 싫은 기색을 보였으나 어쩔 수 없다.
문제집을 책장에 꽂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가 왔는지 보았다.
-어휴.. 진짜 잘못보낸줄 알았잖아. 그래도 맞다니 다행이네 쿡쿡-
-그나저나, 너 닉네임이 뭐지? 그걸로 저장할까?-
그러고 보니 이사람의 닉네임마저 기억해두고 있지 않았다.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보낸 문자에 대한 답문자의 시작은 귀여운 이모티콘이었다.
- ㅠㅠ 닉네임마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니.. -
거참. 어쩌자는 거요.. 그러면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요.
-통성명 어때?-
이름 석자 안다고 별로 달라질 건 없겠지 뭐.
-그래. 나는 민 서현.-
-나는 한 현후-
오케이, 전화부에 등록.
-나 진짜 무지하게 졸립다.. -
이사람이 정말 오늘 처음 알게 된 사람이 맞을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 상황에 경계심마저 일 정도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경계심을 키울 필요는 없다.
어쩌면 나도 지친걸지도 모르겠다. 모든사람에게 벽을 세우고 나를 내 속에 가두는 일은 의외로 힘이 든다.
-그러면, 잘자^^ -
졸리면 자야지. 졸립다는 건 휴식이 필요하다고 몸이 외치는 거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을 참는것 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물론 내게만 통용되는 나의 논리이다.
수업시간에 자는 일은 왠만해선 없지만 수업시간에 쏟아지는 잠을 참는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너도 잘자^^-
17년 생을 살며 받은 고백과 연애경력이 화려하고 찬란한 동생과 달리 나는 같은 본판을 가지고 있음에도 고백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 나라도 방금 주고 받은 문자에 '내 꿈꿔'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매우 닭살돛아오르게 되는 걸 알고 있다.
수많은 소설책을 섭렵한 나다. 로맨스는 기본이요 추리소설에 법전까지 손대본 적이 있다.(물론 보다가 관뒀다.)
그러니까 직접경험은 없어도 간접경험은 있다,이거다.
조금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든 나오를 안아들었다.
나도 자야지.
하지만 오늘은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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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자리 -2-
아를레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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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1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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