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헌 ㅡ당호를 짓다

[퍼팅박사]

가로헌佳老軒ㅡ당호堂號를 짓다.

전,당,합,각,재,헌,루,정.
殿,堂,閤,閣,齋,軒,樓,停.

꽤 오래전 인문학이 유행할때 인근 대학 '최고경영자과정'에서 한국문화에 대해 잠깐 공부를 했었다. 그때 저 어려운 걸 외우고, 이해하고, 가끔은 답사를 하기도 했었다.
결국은 집을 말함일텐데, 권력이 얹혀지면 집의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다.

전당합각, 까지야 권력이 있어야겠지만 재헌루정은 권력이 없어도 가능하지 싶다.
설사 내게 권력이 있다손치더라도 손바닥만한 집에 무슨 전, 무슨 당, 무슨 합, 무슨 각,이라고 붙일수는 없는일.
알다싶이 전당합각은 결국 임금이 머무는 궁궐의 당호 아니겠는가.

헌軒, 부터는 좀 만만해 보였다.
아니 재齋도 그런대로 넘겨다 볼만했다.
고민하다 헌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기회가 되면 무슨 헌, 하고 당호를 지어 멋지게 붓글씨로 써 표구를 해서 걸어야지.

그렇게 생각만하다 잊고 산지 꽤 됐다.
한국문화를 공부할때가 사십대 초반이었으니 그럭저럭 이십년이 지났다.

최근 수원에서 천안으로 이사하기로 한 집이 시내에서 벗어난 배梨로 유명한 성환이었다.
봄이면 사방에 배나무 꽃이 환하게 피는 마을이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이화梨花에 월백月白'을 원없이 할 수있는 동네다.
배를 빼놓고 성환을 말하기 쉽지 않을 만큼 배꽃 또한 지천인 동네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일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야만은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유명한 이조년의 시조 '다정가'를 나도 모르게 읊조리게 되는 동네다.
이를테면 준 전원주택 같은 아파트였다
자연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했다.
그래서일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당호가 생각났다.
그래, 이사가면 멋지게 표구한 당호를 내 방겸 서재에 걸어야겠구나....

뭐라고 지을까?
중국 고시古詩에서 따올수도 있겠으나 왠지 남의 다리 긁는 것같아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정조 임금이 노년을 보낼 염으로 지어 둔 수원 화성 행궁내 정자 '미로한정未老閑停'에 닿았다.

아들(후일 순조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으로 내려와 노년을 펀안하게 보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곳이다.
원 싯귀는
미로한득방시한未老閑得方是閑.
늙기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전히 옛 싯귀를 따온 것이 '거시기'했지만 그건 큰 문제 될 게 없었다.
가만히 보니 옛 싯귀도 별거 없었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쉽게 얘기하면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노랫가락에 다름없지 않은가.

싯귀의 출처와 전문은 잘 모르겠고 '미로한정'이란 이름이 왠지 좋았다.
늙음을 잊고 사는 집. 내 멋대로 해석해도 큰 차이는 없을 듯했다.
잊고 사는 거야 언감생심이고, 아름답게 늙어갈수만 있어도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 살때 화성華城에 매료되 숱하게 답사하고 나름 깊이 있는 공부도 했었다.
정조의 삶도 제법 깊이 들여다 봤다.
더러는 지인들에게 정조와 화성에 대해 순례를 하며 해설도 해줬다.
강사료는 끝나고 순댓국에 막걸리였지만.

그래, 미로헌美老軒으로 당호를 하자.
아름답게 늙어가는 집.
앞뒤가 맞는지 또 격에는 맞는지는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누구에게 보여줄것이 아니기에 그저 내가 좋고 내게 의미가 있으면 되지, 했다.
왠지 정조 임금과 격이 같아지는 것같은 느낌도 좋았다.
美,老,軒. 글자도 이뻐 보였다.
그렇게 해서 당호는 결정되었다.

누구에게 부탁할까 고민하다 페북으로 인연이 된 인권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유거柳居 이창수 선생에게 의뢰했다.
선생과는 인사동에서 본인의 서예 전시회를 할때 직접 찾아가 얼굴과 작품을 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주제 넘게도 서예전을 보고난 감상기(리뷰라고 하기엔 쑥스러운)를 써 페북에 올리기도 해서 조금 가까워 진 느낌이었다.

미로헌을 정한 이유를 설명하고 부탁하자 흔쾌히 허락한 선생은 미로헌과 가로헌佳老軒 두 편을 써서 사진으로 보내주었다.
본인 생가으로는 美보다는 佳가 더 어울릴것 같다고.

안그래도 美자가 너무 도드라진 느낌이 있었으나 따로 대체할 한자를 알지 못하는 처지였다.
추천한 佳자가 퍽 좋았다.
美자보다 덜 도드라지고 의미도 다양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미로헌에서 가로헌으로 정해졌다.
선생께서 이틀인가 뒤에 완성되었다며 사진을 보내주셨다.
예서체로 멋지게 쓴 작품이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우편으로 받은 작품을 표구했다.
그러자 이렇게 멋진 작품이 되었다.
액자를 내 개인 방이자 서재에 걸어두자 아연 묵향이 온 방에 가득한 느낌이다.
한쪽 벽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불이선란도가 있었으니 묵향이 안날수가 있겠는가.

작품 하나 더 걸었을 뿐인데 이토록 그윽해졌다.
아파트에 당호가 어울리는지 또 맞는지는 따지지 않기로 한다.
내 좋으면 그만, 이라고 고집을 부린다.

이제 내집 당호는 佳老軒이다!

이곳에서 아름답게 늙어 가야겠다.
늙으면서 더 이상 추해지지 않기를.
이미 충분히 추함을 감내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젠 내안의 나를 잃지 않고 살기를.

늙어가는 일이 이토록 힘겹다.

미로헌의 모티브를 준 수원 화성의 미로한정.
작은 정자다.

유거 이창수 선생님이 써준 가로헌.
내가 좋아하는 예서체라 더 정감이 간다.

방에 걸어두자 방이 훨씬 품격 있어 보인다^^.

[백팔타]

와우~ 멋지네!!

[퍼팅박사]

백프로도 하나 맹글어 걸어두셔^^

[유승]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와보니 퍼팅박사님의 아주 반가운 글이 올라와 있네요.
수원에서 성환으로 이사하신다는 내용에 너무 반가워 글을 안 쓸수가 없어 정말 간만에 댓글 이라도 답니다.~~^^
성환! 제 외갓집 동네 입니다. 초등학교때부터 결혼해 서까지 참 열심히 다녔던 성환면 우신리가 제 외갓집입니다.~~
예전에는 참외가 유명했고 지금은 배로 유명하지요.
외할머니, 외숙모님, 외삼촌 돌아가시고 외사촌들 다 천안, 안양등지로 이사가서 지금은 못 다니지만 어릴때 방학이면 몇시간씩 완행타고 가서 참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칠순을 며칠전에 지냈던 지금까지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회되면 퍼박님도 볼겸 예전 외갓집도 볼겸 꼭 성환에 한번 가고 싶네요.
가게되면 연락 드릴께요.~~^^

[퍼팅박사]

유승님 오랫만에 소식을 접합니다.
건강하시죠.

네 2년 반 전 부터 천안으로 직장을 출퇴근을 했는데 피곤하고 시간을 너무 뺏겨서 이사를 했습니다.
마침 딸아들도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한터라 두 부부만 남아 전원생활 한다는 생각으로 직장에서 가까운 성환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하길 잘한거 같습니다.
씨끄러운 곳에 살다 이곳으로 오니 너무 여유롭고 좋습니다,
언제고 오시면 연락주십시요.
성환역에서 멀지 않습니다^^

[타이틀리스트1]

아~~~!!!!!!!

정말 멋진 현판입니다.

예서체는 저도 좋아하는 서체인데

거실벽이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성환..포도밭도 많은 지역이죠.

아름답게 늙어가고싶네요.

[퍼팅박사]

멋지다니 감사합니다 ^^^
성환이 살기 좋은 동네라 오래전 소망을 이제사 이루려 당호를 지은게 아닐까 합니다.
예서체는 보고 있으면 편안해져서 좋아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