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업 트럭 다음 이미지
푸른 산 초원에 물이 졸졸 흐르는 걸 들으면
내 몸속에 피가 흐르는 듯 생기를 느낀다
높은 산 위에 구름이 휘몰아 가는 걸 보면 나의 기상이 꿈틀댄다
누런 들에 곡식이 익어가면 몸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겪어보고 아파 본 사람은 안다
그 거 하다가 들켜도 유유히 걸어 나오는 고 두툼한 뱃심
설마 끌려간들 능지처참을 당해도
네 앞이서라면 육시랄하게 곤장을 맞아도 쾌감인 거를
그런 배짱은 주야를 안 가리고 한참 청춘을 불사를 때 몸에 밴 가보다
그렇다 우리들은 실습실에서 밤새 스스로에게 호된 채찍을 가하며 해댔다
허약한 여학생들은 밤을 꼬박 새며 며칠씩 작품을 해대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을 때
그건 우리들 사이에선 계급장이 되곤 했다
그러다 보면 일에 대한 시야가 트이고 손은 내 손이 아니라
어깨로 하는 건지 허리 힘으로 하는 건지
몸놀림 손놀림은
한참 독기 품은 백사 눈 처럼 되어 현란해진다
그때가 꿈만 같고
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오뚜기표 사장집도 이태원 이 회장 댁도 구씨 댁도
아리랑 털실 모사 회장 댁 신축 공사장으로도 발바닥이 얼얼하게 다녔다 지금으로는 아마도 서래마을 위 같다
구씨 댁은 그때 여고생 자녀들 스커트가 단을 내서 입힌 자국들이 있을 정도로 검약하셨다
그때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교수님 심부름 다닐 때지만 참 좋았다
지금도 울동네가 원룸빌라 오피스텔이가 많아서
원룸이나 오피스방이 공실이 생기면 복덕방에서 나에게 관리비만 내고 세 나갈 때까지 사용하라고 한다
코로나 전까진 내 후학들이나 절친들이 모여서 큰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디스커션 하며 프렌을 짜고 하는
직성 풀림이 일상이 된 것이 그때 대학생활 때 생겼는가 보다
그렇게 해서 주면 받는 사람들도 신선하고 곱다고 좋아들 한다
우린 바로 세가 나갈지 모르니까 항상 컴 대형 모니터 스피커 두 개씩
그리고 커피포트와 전자레인지가 다다
요즘은 코로나 이후로 그 만남도 못하니 내 방이 전부다
미안하다 내가 일할 땐 문을 꽁꽁 잠그고 하지만
기침소리도 조심해주니까
그러다가도 내가 거실에 가서 텔레비도 보며 쉬면
앉아서 하는 다리 운동 하라
스트레칭하라 양손에 물병 들고 근력운동하라는 둥
잠옷 입고 있을 때도 팬티 입으라는 것까지 간섭이다
남자들은 거시기에 거시기가 낀다고 싫다는데도 그런다 ^
오늘은 동네에서 답례인사로 백화점 떡 한 상자가 들어왔다
별별 떡도 이쁘고 탐스럽게 많다
못 보던 잣떡에 궁중 상궁들이나 만들었다는 두텁떡 증편부터 꽃 화전
그리고 떡도 아닌 말린 전복을 얇게 포를 떠서 잣말이 한 것까지
난 좋아하는 소머리 찰떡과 분홍색 쑥색 꿀떡에 먼저 손이 가면 안 된단다
당뇨 전단계이니 팍팍한 무지개 백설기나 콩떡 먹으란다
나는 안 먹어! 하고 떼쓰면서 미국서 나온 조카에게 들기름 들깨가루랑 보내줄 때 함께 갖다 주라고 했다
나하곤 비슷한 나이라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
내가 모 회사에 다닐 때 나는 비자 인터뷰가 여권도 나오기 전에 빨리 나와 바로 통과되었는데
내 조카는 S대 의대 인턴 끝나고 레지던트 때인데도 닉슨 독트린에 걸려서 비자 심사가 늦어질 때
나를 귀엽게 봐준 그 영사에게 당돌하게 찾아가 조카일을 부탁하니 한마디로 정색하며 노했다
참 무던히도 똥 배짱이었다
물론 기억을 해주었는지 무난히 통과 돼서 조카랑 나랑 같은 시기에 미국에 함께 들어갔다
조카는 바로 병원으로 취직되어 갔고 나는 누나 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그때가 미국 경제사정도 안 좋아져서 패업을 하게 됐고
이일 저일 전전하다가 내가 미국서 자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름길 같다는 주위의 권유도 있어서
주한 미군과 결혼하여 함께 들어와서 투데이 라운지라고
새벽 3~4시까지 영업하는 클럽에 잡을 정했다
영어가 서투르니까 낮에는 집안 도랑을 치우고 일찍 취침한 후에 새벽 4시면 기상하여 텅 빈 홀을 정비하고 청소하는 일이다
바닥 청소를 하다 보면 동전들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걸 모아 카운터 위에 놓아두었더니
오너가 이 일은 네 일이니 이것도 네 것이라며 나를 무척 아껴주었다
난 그 배짱이 또 시키지도 않은 지하실의 깨진 빈병을 모아둔 드럼통을 혼자 옮기다가 평소에도 안 좋은 허리가 삐끗해서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그곳서는 캔맥주는 없고 병맥주인데ㅠ 먹고 난 건 카운터에 있는 홈통으로 버리면 밑에 지하실 드럼통에 떨어지면서 깨지게 되어있다)
오너 내외는 자기 가게에서 아팠고 보험에 가입 돼있으니 자기 집에서 맘 놓고 있으라고 했지만
뜨거운 온돌방만 생각나고
서울에 홀로 계신 어머님께서 고혈압으로 눈으로 코로 코피를 흘리셨다는 말을 들으니
내가 오자마자 미국 경제도 안 좋아져서 누나네 가게도 문을 닫아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 그 조카가 나의 잡 근처에 살아서 나를 며칠 케어해 주었다
나의 귀국 결정을 나 보다도 더 아파한 조카 내외다
그 몸에 새로 태어날 조카 아이의 침대도 내가 짜주고 왔는데
아래층에서 탕탕대는 소릴 경찰에 신고해서 오기도 하고
그때 내 조카내외는 쏙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영어도 서투른 내가 손짓 발짓으로
마이 프레센 훠 마이 네퓌스 웨딩 프레젠 라고 하니까 아래층을 가리키면서 쉬쉬하고 갔다
요번에도 와서 그런 저런 이야기를 3시간 이상 커피숍에 앉아 했다
그 조카의 할아버지께선 새문안 교회 창립 멤버이시고 초댄가? 보사부장관을 지내신 착실한 기독교집안이라서
이 조카가 장손이라서 한국에 나오면 이리저리 참 바쁘다 그런 중에서도
요번에도 의대 총동창회에 참석차 왔지만 꼭 그 교회 주일예배엔 참석하고 선친들 교회공원 묘원도 찾아보고는
나와 시간을 맞춰 놨다
집사람이 좀 괄달한 성격인데도
그 조카 내외 앞에선 내가 젊어 보여야 한다고 저런다
조카내외가 나 사는 거 보려고 울 동네 온 데서 머리도 깎으라고해서 깎았다
이 조카가 말이 참 없는 친군데도 이 사람 앞에선 놀린다
어떻게 만났냐고 하고 아저씨 숙모님 참 잘만났써요
아저씨 팔자가 쭉 늘어졌어요 한다^
어이 조카 이 숙모에 대해서 모르는 거 하나 있네
내가 일 할 땐 내 눈치 많이 보지만 여늬 땐 온갖 간섭 많아
그래도 내가 향수 찐한 건 싫어하니까 일절 안 뿌리고
손녀딸 보러 갈 때는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가
여자들은 숙모 조카 사이도 상관없이
조카 댁이 같은 또래라서 그런지 내가 더 젊어 보여야 한다고 저런다
난 통장 관리 하나 인덕션 사용도 제대로 못하니
내가 먼저 가야 하는데 자꾸 젊어 보이란다 ㅋ ㅠ
곤장을 맞아도 내 사랑 위해서라면 사랑의 쾌감이리라 ㅎ
楸子
가을이 와서 산이라도 가볼까 했더니
단풍이 든 영월 시내 큼지막한 가을 길이라도 가 볼까 했더니
그새 논과 밭은 다 거둬드리고
전깃줄만 차가운 소리 휑휑 낸다
가을 가는 길에는 비행기 타고 멀리간 네 생각이
하늘이 텅 비고 내 고인 발자국에 살얼음이 일 땐
산 것이 고독하고 지난 날이 한 없이 그립다
ps:
그때 미국 생활이 떠 오른다
한국을 떠나 올 무렵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막 사회 초년병 시절인데
당시엔 다방이 눈만 뜨면 여기저기 생길 때라서 다방 인테리어가 미대생들에겐
최고의 일거리 었고 존재감도 있었다
디자인이 독특하다고 하면 새로 개업하고 싶어 하는 다방 마담들이 줄을 섰으니까
그러나 당시 사회상은 군사정권 말이라 극도로 억압적이었으며
고속버스나 통일호를 타려도 뒷돈이 요구 됐고 사회 어디서나 말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언론인들까지 한국을 떠날 때고 외국 이민의 길을 택할 때다
나도 미국에서 건축가로는 인정을 받고 세금을 많이 내는 누나네의 초청과 당시 내가 근무하던 곳이 언론사라서 금방 비자가 나왔다
갓 대학을 졸업한 초년 생 시절이라서 더 당시의 사회에 회의를 느꼈는지 모른다
당시 어지간한 사람은 다 미국이민을 꿈꿨으며 그를 위한 별별 직업의 사이비 학원들도 많이 생겼을 정도다
그렇게 해서 바로 떠난 나의 20대 미국 생활은 체 3년도 못 버티고 돌아오게 된다
3년만 지나면 미국의 아름다운 봄을 알게 된다고
특히 나를 기거케 해 준 이태리계 미국 가정은 나의 귀국길을 친 동생 일처럼 만류 했지만
한국에 홀로 두고 온 어머님의 급한 건강상황과 나의 허리 부상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 미국 생활 2~3년에 안 해본 거가 없다
호텔 인스팩트(밤새도록 각층 복도를 순찰하는 거)였는데 못하는 영어로 교환수까지 해줬으니까
그 호텔이 내가 잠시 언급하고 조회수 조작에 역류된 사진작가 켓츠가 오너였기에 반가워서 그 밤시간에(맨해튼 시간으로는 근무하는 낮시간) 전화 통화하면서 몇 번을 그 포스팅에 드나들었더니
갑자기 나 혼자 있으면서 그 포스팅 조회수가 5~6번 올라갔다고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사건이다
이때도 처음엔 다 내탓으로 돌려달라고 했으나 더 댓글로 도배를 해대니
고 학생 때 습관 된 똥뱃장으로 정면 돌파했으니까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별별 한가한 사람들도 많다
미국서도 어딜 가나 똥뱃장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으며
근무처의 인사과에선 미국 생활에서는 꼭 필요한 거라며
공증받아 보증 표창을 해줄 정도로 일하다가 허리도 부상을 얻은 거다
보증 표창을 해준 곳이
내가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 오려고 데리앙 시 컨벌레스 센터에서 하우스 킵과 레크레이숀 파트에서 일한 곳이다
방 진공청소기 돌리면서도 소리가 크니까 일간 스포츠에 소개된 그 주의 태어난 띠에 해당하는 오늘의 운세를 참고하여
유 투 띵크 베리 하드 빗윈 유 엔 유어 도터 인로 낫 나이스 쏘 유아 론리 라고 해주면 다들 나를 써니 보이 훠니 보이라며 좋아들 해줬고
조리파트의 노랑머리 애도 나의 쌤 위치 패티를 두배로 넣어주었다
한 번은 옆 다운 타운으로 영화를 보러 가자고 쉬후트 포르쉐를 갖고 왔는데
영화 보고 돌아올 땐 그야말로 화이트 크리스마스 나잇였다
영화를 본 분위기도 있어서 나는 남자 현상이 일어났고 그걸 영어도 서투르고
미국 생활도 한지 얼마 안 돼서 그냥 꾹 참고만 있는데
컴 아웃~ 헬퓨? 하는 거다 나는 더 난처해서 냅다 꾹꾹 하고만 잇으니까
나를 힐끗힐끗 보다가 차가 도로옆 골로 미끄러져 빠졌다
한참을 걸려서 겨우 지나가던 스노 용 픽컵트럭 차가 견인해 준 일도 있다
그때의 인연들이 이젠 하나 둘 고인들이 된다
그 호텔을 소개해준 매제도 작년에 이태리 가족 동생분도 얼마 전엔 내 누나도 돌아가셨다
데리앙 컨벌레스센터에서 - 내 이니셜로 차를 LEEEEE
♫ Wild Mountain Thyme - Sarah Calderwood ♫ LYRICS
https://youtu.be/_G9VEvEx1Bc
첫댓글
데비님
전 요롷케 똥 배짱으로 미국 살아보고 왔습니다 ^*
눈 온 날 근무한 코네티컷 주 데리앙에서 기숙한 뉴케넌 집까지 걸은 적도 잇습니다
젊은날의 고생은 인생에 좋은거 같아요.
저는 실패자로 한국으로 귀국할 자신이 없어서
미국에서 이를 악물로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지금 다시 살아 볼래? 하고 물으면
처음은 경험이 없었으니까 살아나왔지 두번은 다시 안살것 같습니다.
@데비
제가 오늘에야 뵈었습니다 ㅠ
미국 생활 했던 초기의 고생을 함께 추억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가깝게 느낍니다
3월 25일경
미국서 저를 위해 애써주었던
사촌 여동생이 딸네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에 나온다고 해서
제가 들 떠 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학인당에 2박도 예약 해놓고
쇠고기 갈아 넣고 볶은고추장도 해 놓고 기름 발라 구운 김도 박스 체 사 놓고요^^^
건안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