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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미국 실리콘 밸리은행 파산 한국 국민연금 여파
국민연금은이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속한 SVB 금융그룹의 주식을 10만주 넘게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년 말 주가 기준으로 2300만달러(약 304억원) 정도의 가치였지만, 지난 9일 주가가 반토막난 상태다.
미국 스타트업의 자금줄이었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급격한 금리인상을 이가지 못하고 파산절차에 들어가면서 세계 금융권들이 긴장하고 있다.
SVB의 작년 말 총자산은 2090억달러, 총예금은 1754억달러다. 게다가 금리 인상과 기업공개(IPO) 시장 둔화로 자금난에 빠진 벤처캐피털(VC)과 스타트업들이 예금 인출에 나서자, SVB가 금리 폭등으로 급락한 매도가능증권(AFS)을 '떨이'로 내다팔면서 손실이 가중됐다. 작년에 SVB가 채권 매각으로 입은 손실만 18억달러다. 이런 상황에서 23억달러 증자마저 무산돼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 사태)이 일자, 미국 금융당국이 위기 차단을 위해 SVB를 폐쇄한 것이다. 문제는 SVB 불똥이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SVB 영국지점은 파산 선언 직전이고, SVB가 현지 영업 중인 캐나다, 중국, 덴마크, 독일, 인도, 이스라엘, 스웨덴 등도 피해가 적지 않다. 실리콘밸리은행 주식 10만주(2300만달러)를 보유한 국민연금 역시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한 상태다.
2023년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대회 1500m에서 박지원 금메달 획득
2023년 걸그룹 블랙핑크 88억8천만번 스트리밍으로 기네스 세계 신기록 추가
YG엔터테인먼트는 블랙핑크가 전 세계 걸그룹 중 스포티파이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로 영국 기네스 월드 레코드(Guinness World Records)에 공식 등재됐다고 밝혔다. 스포티파이가 184개국 4억 명 이상이 이용하는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인 데다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 집계에 반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류 팝 시장 내 블랙핑크의 압도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기네스 측은 “블랙핑크가 발매한 모든 트랙이 올해 3월 3일 기준 스포티파이에서 총 88억 8천만 번 스트리밍됐다. 이는 영국의 걸그룹 리틀 믹스가 보유했던 종전 최고 수치인 84억 회의 스트리밍 기록을 넘어선 것”이라고 전했다.
2020년 국제보건기구(WHO) 코로나 19 팬데믹(pandemic 전지구적 감염병)으로 규정
2020년 전세계 미투(#Me Too 나도 피해자다) 운동 불러일으킨 미국 헐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슈타인(67세) 징역 23년형 선고
2018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국가주석 임기5년 1회 연임 허용) 개정해 시진핑 종신집권 토대 마련됨
2016년 영국 좌파정치인·급진적 지리학자·여성주의자 도린 매시 세상 떠남(72세)
2011년 노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씨 별세
건축가인 정기용(성균관대 석좌교수·66)씨가 1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정씨는 5년 전부터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최근 합병증이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1970년대 초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하고 1975년 프랑스 파리장식미술학교(ENSAD) 실내건축과, 1978년 프랑스 파리 제6대학(UPA6)에서 수학했다.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뒤 1982년 프랑스 파리 제8대학 도시계획과를 졸업했다.
1975년부터 1985년까지 파리에서 건축 및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했으며 1986년 한국으로 돌아와 '기용건축'을 설립했다. 한양대·서울대·성균관대·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서 가르쳤으며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다.
대표작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김해 봉하마을 사저, 서울 동숭동 무애빌딩, 효자동 사랑방 등이 있다. '무주프로젝트' 등을 통해 지역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여성가족부가 주는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2011년 3.11 일본 대지진(규모 9.0) 발생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또는 3.11 대지진은은 일본 미야기 현 센다이 동쪽 179 km 해역에서 일본 표준시로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경 발생한 모멘트 규모 9.0의 초대형 지진으로, 보통 동일본 대지진이라고도 한다. 이 지진으로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의 대부분은 물론 홋카이도, 주에쓰 지방 및 나가노 현 등지에서도 강한 진동이 관측되어 큰 혼란이 일어났다. 지진은 도호쿠의 이와테 현의 미야코에서 40.5m에 달하는 강력한 쓰나미를 발생시켰고, 센다이 지역에서, 10 km 내륙에 이르기까지 나아갔다 일본의 사실상 수도인 도쿄에서도 강한 진동이 관측되어 오다이바의 텔레콤센터 인근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지진은 미 지질조사국의 지진 규모 기준으로, 근대적인 지진 진도 관측이 시작된 이래 4번째 규모이자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이다. 원자력 발전소도 지진의 피해를 입어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진은 혼슈를 2.4m 동쪽으로 이동시켰고, 15,878 명 사망, 6,126 명 부상, 2,713 명 실종을 확인했고 또한, 254,204동이 반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129,225 동이 붕괴되었고 691,766동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음을 확인하였다.
2010년 법정 스님 입적
법정(法頂, 속명 박재철(朴在喆), 1932년 11월 5일 ~ 2010년 3월 11일)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왔다.
1932년 11월 5일에 전라남도 해남군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 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다. 그는 당시에 일어난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 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에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에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강원도 산골의 주인 없는 오두막을 빌려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그야말로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실천하셨던 스님은 우리 시대 가장 순수한 정신으로 손꼽혀 왔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 ‘버리고 떠나기’,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아름다운 마무리’, ‘산에는 꽃이 피네’ 등 20권이 넘는 대중저서를 출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창건한 길상사에서는 2003년까지 회주를 맡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지난 2007년 폐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2009년 재발해 그 동안 삼성서울병원에서 투병해 오다가 이날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거처를 옮겨 열반에 들었다.
2009년 독일 학교 총기난사, 16명 사망
독일 남서부 슈투트가르트 부근 빈넨덴에 위치한 알베르트빌레(Albertville) 중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 15명을 살해한 뒤 자살했다
’팀 크레취머’로 알려진 17세의 범인은 학교 수업이 시작된 직후인 오전 9시33분, 9㎜ 베레타 권총을 난사한 뒤 도주했으며 추격에 나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살했다.
범인은 한 교실에 난입한 뒤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학생 8명과 교사 3명이 사망했고 부상한 학생 1명은 나중에 병원에서 목숨을 잃었다. 범인이 학교를 떠나 도주할 때 학교 앞 정신병원 정문에 서 있던 이 병원 직원 1명에게도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경찰특공대가 최소한 10대의 헬기와 탐색견을 동원해 범인 추격에 나서자 범인은 인근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폴크스바겐 샤란 승용차를 탈취한 뒤 뒷좌석에 앉아 운전자에게 고속도로가 있는 남쪽으로 차를 몰도록 지시했다. 운전자가 경찰의 검문을 보고 도로에서 이탈하자 범인은 차에서 뛰어내려 학교에서 약 30㎞ 떨어진 벤들링겐 시의 공단 지역으로 도망쳤다.
그는 자동차 대리점에 들어가 영업사원 1명과 고객 1명을 살해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결국 자살했다.
2006년 ‘발칸의 도살자’ 前유고대통령 밀로셰비치 옥중 사망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64)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2006년 3월 11일(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 외곽에 있는 유고국제전범재판소(ICTY)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1990년대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인 독재자에 대한 법의 심판도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밀로셰비치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세계는 실망과 기대가 엇갈렸다. 밀로셰비치는 이날 수감돼 있던 감방 침대에서 숨진 채 교도관에게 발견됐다. 자살의 징후는 없으며 부검을 위해 시신은 이날 늦게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 법의학 연구소로 인도됐다.
2003년 영국 맨체스터 법원, ‘남자의 넥타이 착용 강요는 성차별’
남자 직원에게만 넥타이를 매도록 한 복장 규정은 성차별이라는 판결이 영국에서 나왔다.
영국 맨체스터 법원은 11일 영국 고용연금부 산하 고용지원센터에서 일하는 한 공무원이 복장 규정이 남성을 차별하고 있다면서 소송을 제기한 데 대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BBC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맨체스터주 스톡포트시 고용지원센터에서 일하는 매튜 톰프슨(Thompson·32)은 지난달 여직원들은 티셔츠나 운동복 차림으로 일해도 문제가 없는데 남자 직원들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착용하지 않을 경우 감봉·해고 등 부당한 인권 침해를 당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고용연금부는 이번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며 즉각 항소하기로 했다. 고용연금부 대변인은 “우리는 여전히 복장 규정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1년 마르코스 멕시코 반군지도자, 3000km 평화대장정을 끝내고 멕시코시티 도착
멕시코 원주민인 인디오의 권익 보호를 요구하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지도자 24명이 보름 동안 3000km에 걸친 평화대장정을 마치고 2001년 3월 11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도착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이끈 평화행렬이 광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기다리고 있던 약 20만명의 환영인파는 `마르코스`를 연호하며 비무장 평화행진의 성공을 축하했다.
이들의 평화행진에는 이탈리아 인권단체 회원 5백여명의 외국인들이 참가했으며 멕시코 정부는 수천명의 연방경찰과 군병력을 동원, 이들을 보호해 우려할 만한 사고는 없었다. 마르코스는 이날 열린 평화대행진 종료 선언 및 원주민 권익보장 촉구대회에서 원주민 권리보호를 주내용으로 하는 산안드레스 협정의 의회 비준, 반군의 근거지인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의 정부군 전면 철수, 수감중인 반군포로 및 동조자 전원 석방 등을 요구했다.
중남미에서 제2의 `체 게바라`로 영웅시되고 있는 마르코스의 본명은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으로, 백인이다. 그는 멕시코 명문 국립자치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 유학한 인텔리다. 부드럽고 하얀 손에 검은 복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상류층 스페인어와 영어,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뛰어난 논리와 해박한 지식, 유머와 재치로 신비로움을 불러일으켜왔다.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멕시코 국민들은 실상이든 허상이든 그를 `현대판 로빈후드`로 여겨왔다.
2000년 칠레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 취임
칠레 대통령으로 사회주의자 리카르도 라고스가 2000년 3월 11일 취임했다. 라고스는 2000년 1월 16일 대선 결선 투표에서 집권 중도좌파 연합 후보로 51.31%를 얻어, 보수우파 후보 호아킨 라빈(46ㆍ48.7%)을 누르고 당선된 바 있다. 라고스의 당선은 지난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붕괴된 이후 첫 좌파정권을 탄생시켰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1998년12월)과 아르헨티나의 페르란도 델 라 루아 대통령(1999년 10월)의 집권을 낳은 남미의 좌파 바람이 칠레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경제학자이자 변호사인 라고스는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 급진적이던 아옌데 정권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피노체트의 독재에 항거하다 1980년대 중반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그는 온건 사회주의자로 변신했다. 온건-보수표의 이탈을 우려, 우파와도 타협하는 중도노선을 제시한 것이 승리 요인이 됐다.
1997년 한국이동통신, 말로 거는 휴대폰 서비스 실시
1997년 일본 핵재처리장 사고 발생
일본 동경의 동북부에 위치한 이바라키현 도카이 소재 핵연료 재처리 공장에서 1997년 3월 11일 밤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폭발이 일어난 시설은 도카이 사무소의 저준위 핵폐기물 재처리공장으로 원자력발전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를 화학적으로 처리해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추출하는 시설이다.
이날 폭발 사고 전에 오전10시 이 공장 내 아스팔트고체화 처리시설에서 불이 났었고, 진화되지 않은 이 불로 인해 실내공기가 높아져 이 아스팔트가 폭발했다고 밝혀졌다. 이번 사고는 무대책, 늑장보고로 파문이 확산됐다. 지난 1995년 12월 발생한 고속증식로 몬주 사고 당시 보고는 1시간 뒤 이뤄졌으나 이번엔 3시간 뒤였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1996년 전두환-노태우, 12·12 및 5·18 사건에 대한 제1차 공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나란히 법정에 섰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1996년 3월 11일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 심리로 열렸다. 이날 공판에는 전-노 피고인을 비롯, 황영시 허삼수 피고인 등 12·12와 5·18 관련자 8명, 박준병 장세동 피고인 등 12·12관련자 5명, 정호용 피고인 등 5·18관련자 3명 등 모두 16명의 피고인이 나왔다.
이날 재판에서는 검찰과 변호인측이 5공 정권의 정통성 문제와 12·12사건의 군사반란 여부를 놓고 치열한 법률 공방을 벌였다. 또 전씨 변호인이 모두 진술내용이 담긴 책자를 배포하자 이종찬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장도 기자간담회를 열어 “변호인측이 법정을 정치 선전장화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장외공방’도 벌였다.
검찰은 이날 기소장 낭독을 통해 “전-노 피고인 등 신군부측이 대통령의 재가없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짓밟아 권력을 찬탈하는 등 쿠데타를 자행했다”고 밝혔다
1995년 전 멕시코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 미국으로 망명
1992년 SBS농구팀 창단
1986년 청주-중문간 고속화도로 개통
1985년 노태우 민정당대표, 현대통령 임기중엔 대통령직선제개헌에 반대한다고 회견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으로 선출
재임 13개월 만에 사망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의 뒤를 이을 후임자 선출을 위한 임시 당중앙위원회 총회가 다음날 11일 열려, 위원가운데 최연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54)가 새 서기장에 선출됐다.
고르바초프는 1980년 정치국원에 임명돼 농업, 경제, 이데올로기, 당인사정책 등 요직을 담당, 체르넨코 정권하에서 2인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우수한 지도력과 정력적인 활동, 뛰어난 연설, 매력적인 용모로 국내외의 기대를 받아왔다. 그는 최연소 정치국원일 뿐 아니라 스탈린 시대 이후에 성장한 첫 지도자였다.
취임후 그는 이중의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의 소련은 지속적인 생산성 저하와 관료사회의 동맥경화현상으로 막다른 골목에서 바향을 잃고 있었다. 우선 `페레스트로이카(재편)`에 의해 부분적으로 비밀투표가 실시됐고, 시장경제를 한정적으로 도입해 지방분권을 꾀하는 한편 '신사고'의 기치 아래 탈이데올로기, 탈군사화가 추진됐다. 또한 `글라스노스트(개혁)`에 의해 해빙무드가 시작됐다. 소련의 정치, 문화, 역사의 재평가가 시작됐으며 스탈린시대의 공포정치와 브레즈네프시대의 정체를 비난하며 경직된 구간부를 정치국으로부터 추방하는가 하면 정치범을 석방하기도 했다.
특히 고르바초프는 외교에서 거침없는 행보로 세계사를 다시 써 내려갔다. 레이건과는 '중거리핵전력(INF) 폐기조약'(1987년 12월)과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991년 7월)에 조인하고, 유엔에서는 병력 50만 감축선언(1988년 12월)을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동유럽을 옥죄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의 구정권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안없이 도입한 자유경제는 기존의 통제경제와 마찰을 일으키며 그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고르바초프를 따라가기 벅찼던 보수파들은 쿠데타(1991년 8월)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강압적인 소비에트 연방을 느슨한 연방으로 바꾸려 했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이미 고삐가 풀린 연방구성국가들은 독립의지는 소련마저 해체시켰다.
결국 개혁을 추진하면 할 수록 그 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자신의 절대권력이 무너져 내리는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이루려던 자신의 이상을 실현 시키지 못했다.
1982년 수리남에 불발 군사 쿠데타
1978년 팔레스타인 게릴라, 텔아비브 해안 기습
1977년 브라질, 미국 인권외교에 반발, 대미 군사협정 폐기
1971년 유일한 박사 사망
한국기업사에 모범을 남긴 유일한 박사가 1971년 3월 11일 사망했다. 향년 75세였다. 유일한 박사는 일찍부터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기업경영으로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 `위대한 민족 기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26년에 유한양행을 설립해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며 1936년 주식회사체제로 전환했고 193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업원지주제를 채택했다. 1962년에는 경성방직에 이어 한국 기업사상 두번째로 주식공개를 단행하기도 했다. 1969년에 이미 2세에 대한 경영권 상속을 포기하고 전문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었다. 그의 사후 공개된 유언장에는 자신의 소유주식을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쓰도록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많은 이들을 숙연케했다
1969년 미 공군 포커스레티나 작전 제1진 도착
1968년 간첩 홍춘희 사건
1967년 스탈린의 딸 스베트라나 알리루예바 망명
스탈린의 딸 스베트라나 알리루예바가 인도로부터 이탈리아를 경유, 1967년 3월 11일 스위스로 망명했다. 소련은 스베트라나의 망명에 대해 `조국의 명예에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할 경우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스베트라나는 인도인 공산주의자였던 3번째 남편이 1966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후 소련을 탈출해 뉴델리에 숨어있다 3월 9일 이탈리아로 출국했다.
스위스 도착후 그녀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고 스위스 정부로부터 3개월간의 스위스 체류허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후 미국 정부는 그녀가 인도를 출국할 때 이미 미국 입국 비자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스베트라나는 발표대로 미국으로 이주,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6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 수하르토 육참총장에 실권 이양
1964년 캄보디아, 반서방 데모
1963년 군일부 쿠데타 모의혐의로 김동하 등 19명 구속 발표
1963년 중-소 이념분쟁 해소회의 갖기로 합의
1961년 원내외 야당, 반공법 반대 극한 투쟁 선언
1960년 미국, 금성 로켓 파이어니어 5호 발사 성공
1959년 한국-스웨덴 국교 수립
1955년 페니실린 발견한 세균학자 플레밍 사망
1928년 9월3일, 휴가를 마치고 영국 세인트 매리 병원 연구소로 돌아온 알렉산더 플레밍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목격됐다. 부스럼의 원인인 포도 모양의 병균을 배양하던 많은 접시 가운데 유독 한 배양접시에서만 병균 무리가 죽어있었던 것. 플레밍은 곧 푸른 곰팡이(Penicillium notatum)가 병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 물질을 ‘페니실린’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페니실린은 열이나 산, 알칼리를 가하면 곧 약효를 잃어서 순수한 페니실린을 얻는 일이 쉽지 않자 플레밍은 연구를 중단했다.
페니실린이 ‘기적의 약’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11년 뒤인 1940년 옥스퍼드대 병리학자 플로리와 체인이 등장하면서였다. 둘은 1년여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 정제에 성공하고 이듬해 대량생산의 길까지 열어 30%에 불과하던 수술환자의 생존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수많은 부상병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폐렴에 걸렸으나 페니실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처칠은 “페니실린이야말로 연합국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숨은 공로자”라며 약의 효능을 격찬했다. 세 사람은 페니실린의 발견과 제조로 1945년의 노벨 생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플레밍은 1955년 3월 11일 심장병으로 숨졌다.
1954년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 퇴폐논쟁
작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소설 ‘자유부인’ 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소설은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215회 동안 서울신문에 연재됐고 연재 완료와 동시에 정음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당시 상류층의 타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전환기적 사회상을 묘사한 이 소설은 대학교수 부인이자 선량한 주부인 오선영이 우연히 대학동창을 만나게 되면서,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고, 유부남과 깊은 관계에 빠져 가정 파탄의 위기에 처하지만, 남편의 아량과 이해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파격적인 스토리 전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소설이 더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당시 저명인사들이 이 소설을 주제로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시작은 황산덕 서울 법대 교수였다. 황산덕 교수가 1954년 3월 1일 대학신문에 정비석을 비난하는 글을 쓰고, 정비석이 이를 반박하는 글을 3월 11일 서울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전 사회적 논란거리가 된 것이다. 6.25피난시절 대구와 부산에서는 춤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가정파탄에 이른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작가는 대학교수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불륜행각과 타락상을 그려나가다 황산덕 교수로부터 `중국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란 공격을 당했다.
정비석이 반박하는 글이 나오자 황산덕 교수는 다시 더 격력한 반박문을 발표했고 이러서 변호사 홍순엽과 문학평론가 백철까지 논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은 삽시간에 일반인에게로 비화되어 대학교수단과 여성단체 등은 관계당국을 찾아가 연재금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북한에서 남조선 부패상을 알리는 교양물로 이용된다’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당시 일부 여성들의 허영심을 잘 꼬집은 세태소설이므로 ‘용기를 갖고 계속 집필하라’는 격려가 쏟아졌다.
연재 기간동안 논란도 많았고 권력으로부터 중단 압력을 받기도 했지만 자유부인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자 최초의 10만 부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1946년 함흥학생의거
1945년 8월 소련군에 의하여 점령된 북한에 소련군정이 실시되면서 각 도의 도청은 소련군의 군정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 1946년 초에 소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도인민위원회가 들어설 도청은 이미 소련군이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함남중학의 교사(校舍)를 청사로 차지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모교사수(母校死守)를 외치며 이에 항거하였다. 한편, 이 무렵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한 큰 공장의 기계가 어디론지 뜯겨가고, 식량배급이 끊기면서 시민들의 불평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3월 11일 마침내 함흥공업학교 학생 200여 명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 ‘우리의 쌀은 어디로 갔는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에 호응한 600여 명의 함흥농업학교 학생들도 거리로 뛰어나와 합세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인민위원회는 긴급대책으로 3월 20일 예정이던 학년 말 방학을 3월 13일로 앞당겨 실시하도록 각 학교에 시달하였다. 그러자 각 학교 학생대표는 12일 밤 비밀회합을 가진 다음, 이튿날 방학식이 끝나자 함흥의전(咸興醫專) ·함흥중학 ·함흥농업 ·함흥공업 ·영생고녀(永生高女) ·실과여학교(實科女學校) ·함흥고녀 등 약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하였다. 시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약 1만 5,000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은 보안서원과 소련군이 동원되어 일대 격돌이 일어났는데, 보안서원의 발포로 학생 1명, 시민 2명의 희생자가 나고, 보안서원 3명이 사망하였으며, 학생 ·시민 ·보안서원 1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건진압 후 많은 학생 ·시민이 검거되었다.
1941년 루스벨트 미대통령, 무기대여법에 서명함으로 전쟁중립을 포기
193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신문발행인.언론기업가 머독 출생
1931년 독일의 영화감독 무르나우 사망
1926년 마틴 루터 킹의 수석 보좌관이자 흑인 민권운동가 애버내시 출생
1917년 러시아 3월혁명에 군부 가담, 병기고 습격, 정치범 석방
1912년 원세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
1908년 이탈리아 소설가 데아미치스 사망
1899년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9세 출생 -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저항
1894년 독일 정치가 그로테본 출생
1886년 서양화를 개척한 최초의 화가 춘곡 고희동 출생
1838년 일본의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와세다대학 건립) 출생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갑술경화(甲戌更化) 또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고도 한다.
조선 숙종 20년(1694) 소론의 김춘택 등이 숙종의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한 사건이다.
폐비민씨 복위문제를 계기로 남인 실권, 소론과 노론 재집권
희빈장씨 및 남인 처벌, 소론과 노론 요직에 등용
당시 서인인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서인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권했는데, 이때 그들은 민씨 폐출(廢黜)의 원인이 된 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의 원자정호(元子定號)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만일 민씨가 복위하여 다시 왕비가 되면 남인은 또 실권하게 되므로 민씨를 지지하는 김춘택 등을 몰아내려 한 것이다.
처음에 숙종은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禧嬪:희빈장씨)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으나,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뉘우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종은 도리어 민암의 처사를 미워하고 김춘택 등의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민암을 사사(賜死)하고 그의 일당인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유배하였으며, 동시에 민씨를 지지했던 소론의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한편,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고 그때 민씨를 지지하여 2번이나 상소를 올렸다가 사사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김수항(金壽恒) 등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544년 이탈리아 시인 토르콰토 타소 출생
1444년 화가 보티첼리 탄생
527년 신라, 불교 공인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이제까지 금해 오던 불교를 신라 사람들이 믿어도 좋다고 허용을 하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허용한 것은 이차돈의 거룩한 순교에 충격을 받아서인데, 이 불교는 이듬해인 528년에는 신라의 국교로 되어 찬란한 신라 문화를 꽃 피우는 모체가 되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 하기는 13대 미추왕 시대인 263년 고구려의 중「아도(阿道)」에 의해서이다.
**이차돈 순교 : 3월11일은 법흥왕의 뜻을 받들어 신라 사회에 불교를 수용케 하려던 이차돈이 순교한 날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본래 더없이 이성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종교였다.
그러나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불교는 국가목적에 봉사하는 종교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불교는 삼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될 무렵 전래되었다.
당시 사회는 병합과 정복을 통해 이미 씨족공동체의 폐쇄적인 상태를 넘어 초부족적인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씨족사회 당시에 성립되었던 무격신앙이나 조상숭배 신앙만으로는 넓어진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가진 새로운 국가를 효과적으로 이끌어갈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영역내의 잡다한 집단의 신화와 무격신앙을 포용하면서 보다 한 단계 높은 종교와 철학체계로 이들을 규합시켜 새 국가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이자 고도의 논리로 무장된 철학이 필요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의 수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고구려를 통하여 지금은 알 수 없는 여러 전도자들에 의해서 신라의 북쪽 지방에 불교가 전해졌지만 이들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미미하였던 왕실의 박해를 받고 쫒겨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6세기 초 끊어졌던 중국과의 교류가 재개되면서 호불(好佛)의 군주였던 남조의 양무제가 사신과 함께 승려를 보냄으로써 불교가 공식적으로 신라왕실에 전해졌다.
이처럼 불교가 왕실과 관계를 맺은 뒤 법흥왕은 불교를 바탕으로 정사(政事)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따라주는 신하가 없었다.
마침 그때 사인(舍人)의 벼슬을 하고 있던 22살의 이차돈(異次頓)이 왕의 속내를 알아차리고서 불사의 건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왕은 왕경내의 천경림(天鏡林)을 베고 흥륜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교가 자신들의 세력권을 침해할 것이라 우려했던 귀족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왕은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결국 불사 창립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이차돈에게 뒤집어 씌웠고, 이차돈은 순순히 그 뜻을 받아 우리나라 역사상 이름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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