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어린 파스텔 톤에 깃들인 고요한 매혹에 잠기다
문학을 하고 싶었던 화가와 미술을 옹호하였던 시인이 있었다.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과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벨 에포크의 끝 무렵에 파리의 예술계에서 축복 받은 연인이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와중에 현대로의 길은 찬란하기도 하고 험난하기도 했는데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현대’라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들은 에즈라 파운드와 파블로 피카소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르 코르뷔지에와 코코 샤넬…들이었다. 현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우리 생활의 틀을 규정짓는 모든 변화가 이때에 비롯하였다. 로랑생도 그들 전위대의 일원이었다.
여성화가가 드물었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녀는 파리의 뮤즈로서 피카소와 장 콕토의 환영을 받으며 바토 라부아르에 합류하였으며 이곳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 아폴리네르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아폴리네르는 시인으로서 천재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평가로도 탁월하였다. 화가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가 체현할 입체주의(큐비즘)라는 말을 만들어 그들의 그림을 옹호했고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슴)라는 말도 처음 만들어냈다.
그런데 로랑생은 5년의 연애 끝에 돌연 결별을 선언하고 곧 독일인 귀족과 결혼을 했다. 새로운 사랑이 싹튼 것인지 오랜 연애에 싫증이 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녀가 남작이라는 신분상승에의 허영심으로 흔들렸을 수도 있다. 그녀로부터 버림받은 후, 아폴리네르가 실연의 아픔으로 남긴 시가 바로 저 유명한 <미라보 다리>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오리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중에서
이별 후에 이어서 세계1차 대전이 터지고 참전하였던 아폴리네르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아깝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로랑생은 적대국의 사람이 되어 조국에 돌아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남편과 함께 스페인으로 망명했을 때에는 자신의 심경을 시 <잊혀진 여인>에 담았다.
고독한 여자보다 가엾은 여자는 유랑하는 여자다
유랑하는 여자보다 가엾은 여자는 죽은 여자다
죽은 여자보다 가엾은 여자는 잊혀진 여자다.
-로랑생의 <잊혀진 여인(신호등)> 중에서
결국 로랑생은 이혼을 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시절의 파리에는 주류 미술의 흐름에서 빗겨가며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 작품세계를 만들어간 이들이 있다. 그들을 뭉뚱그려 에콜 드 파리, 파리파라고 불렀다. 그들 중에 처연한 모딜리아니, 노스탤지어의 위트릴로, 동화와 환상의 샤갈…그리고 우수어린 파스텔 톤으로 유니크한 자기만의 화풍을 이룬 로랑생이 있다.
피카소의 큐비즘이 미술계를 점령했을 때, 로랑생도 이 첨단의 사조에 잠시 동참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큐비스트들과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녀는 애초에 경도되었던 마네를 추종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목판화인 우끼요에의 평면성에 주목한 마네로부터 촉발된 서양회화의 평면화 작업은 일군의 인상파 회화로 폭넓게 수용되었다. 로랑생도 평면화의 영향으로 화면에서 선명한 직선이나 분명한 윤곽을 지웠다. 두께감의 마티에르가 전혀 없이 얇은 색감의 담박한 아름다움을 전하는데 미학적 단순성은 라파엘전파로부터, 장식성은 아르누보로부터 왔다. 그러나 명암의 그림자가 없는 그녀의 그림이 보여주는 형태와 색채의 양식화된 단순함에는 큐비즘의 면분할의 요소가 다분하며, 나아가 표현주의 나비파 화가들의 색분할의 분위기도 있다. 이는 다시 훗날의 마크 로스코 등의 색분할과 면분할이 함께하는 색면추상화로 이어진다. 마네와 로스코 사이에 그녀가 있다.
로랑생은 그때까지의 모든 미술계의 흐름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 내재된 탁월한 시대감각으로 생략기법을 구사하였다. 윤곽의 희미한 겹침은 움직임의 중첩으로 다면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앉아있는 듯 서있는 정중동의 정지화면 속에 인물들은 움직일 듯 말 듯, 웃을 듯 말 듯,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가운데 유독 눈동자만은 뚜렷한 검은 색이라서 생생한 응시의 분위기가 마냥 나른하지만은 않다. 핑크색의 이미지라는 것이 도회적이지도 세련되지도 지성적이지도 않건만 로랑생의 그림에는 격조와 단아함이 있다. 무언가 몽환적이고 아련한 분위기는 그렇게 1920년대를 장식하며 그녀에게 전성기를 맞이하게 해주었다. <키스>를 비롯한 소녀상들이 주는 피부의 투명함은 촉각적 즐거움을 꿈꾸게 한다. 한없이 말랑하고 부드러울 것이다. 그렇게 내내 아름답다. 분홍을 주조색으로 배경은 청색, 회색, 청회색인데 이들도 모두 흰색을 듬뿍 담아 정갈하고 차분하다. 애조를 띤 색조가 창백하지만은 않아 조화를 이루며 한껏 감미롭고 애써 무엇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상과 동화의 분위기를 지닌 로랑생의 그림은 단호함과는 거리가 있다. 힘없이 스며드는 윤곽과 낮은 채도의 흐린 색조를 보고 있으면 나약한 마음의 행로가 들여다보인다. 도발성이나 선정성은 없고 그저 청순한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라서 센티멘털한 순정만화 같기도 하고 장식적인 일러스트 같기도 하다. 신랄한 현실에서 한걸음 비껴있고 싶은 안일한 태도가 읽히는데 이는 렘브란트나 고흐가 지닌 치열함과는 거리가 멀다.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의 공연들을 위해 샤넬은 의상을, 로랑생은 무대장식을 맡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로랑생이 샤넬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다른 그림들에 비해 한껏 화려하다. 그럼에도 샤넬은 그림을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상념에 잠긴 표정에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샤넬은 늘 강렬하게 항상 새로운 경지를 꿈꿨다. 로랑생은 샤넬만큼 과감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미약하다. 샤넬이 붉은 장미라면 로랑생은 빨강을 흰색으로 덮은 연분홍 장미다.
사생아로 태어난 로랑생은 누구보다도 현실에서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림은 곱고 부드럽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상태에 깃드는 밝고 맑은 기쁨과 행복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로랑생의 여인들이 지닌 티 없이 순진한 모습에 자신의 소망을 담는다.
‘죽은 여자보다 가엾은 여자는 잊힌 여자’라고 탄식하던 로랑생은 누구에게 기억되기를 그토록 바랐던 것일까. 후세의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그림 설명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作 《키스(Le baiser)》
(1927년, 81,2x65,1cm 캔버스에 유채, 마리 로랑생 뮤지엄(Musée Marie Laurenc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