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 복효근
겉보기엔 멀쩡한데
발이 빠져나간
구두의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
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
무엇이 보정(補正)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
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을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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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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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새를 위하여
복효근
늦은 저녁 숲에
날개를 다쳐 돌아오는 새 있다
무리에서 저만치 처져서
어느 이역의 하늘을 떠돌다 오는지
꺼져가는 석양이 아쉬워
별 가까운 먼 하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지
절름거리는 날갯짓으로
별빛 한 가닥 물고 오는 새 있다
밤새 새는
부서진 깃을 다듬어
새로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숲은
쓰린 달빛으로 수런거리던 것을…
숲에 가보라 새벽
새는 그새
해뜨는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깃엔
언제나 핏빛이 돌아
아침해 저리 고운 것을
보라 새가 떠난 자리엔
상처받은 자만이 부를 줄 아는
곱디고운 노래가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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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복효근
한 점 얻어먹어 보겠다고
뒷집 새댁 부탁으로 닭 모가지를 비틀어본 적도 있는데
아내 잘못 만나
파리 한 마리 잡는데도
관세음보살한테 허락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다 잘하면 나도 극락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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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촛불 /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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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날엔 / 복효근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이윽고 서로에게 이르고자 하는 곳이
꽃 핀 그 환한 자리 아니겠나 싶으면
왜 길이 없으랴
왜 모르랴
잘 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길이 없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 해도 자 봐라
그대가 있으니 됐다
길은 무슨 소용
알고 모르고가 무슨 소용
꽃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허공에 길을 내는
저기 저 나팔덩굴이나 오래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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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편 / 복효근
채석장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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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후기 /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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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 /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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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복효근
깊게깊게 뿌리내려서 겨울난 냉이
그 푸릇한 새싹, 하얗고 긴 뿌리까지를
된장 받쳐 뜨물에 끓여놓으면
객지 나간 겨울 입맛이 돌아오곤 하였지
위로 일곱 먹고 난 빈 젖만 빨고 커서
쟈가 저리 부실하다고 그게 늘 걸린다고
먼 산에 눈도 덜 녹았는데
막내 좋아한다고 댓바람에 끓여온 냉잇국
그 푸른 이파리 사이
가늘고 기다란 흰머리 한 올 눈에 띄어
눈치채실라 얼른 건져 감춰놓는데
그러신다 냉이는 잔뿌리까지 먹는 거여
......
대충 먹는 냉잇국 하얀 김이 어룽대는데
세상 입맛 살맛 다 달아난 어느 겨울 끝
두고두고 나를 푸르고 아프게 깨울 것이다
차마 먹지 못한 당신의 그 실뿌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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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에 병합(2010년 3월)
복효근(1962년~, 남원출생)
대한민국의 시인
1988년 전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91년1995년 제5회 편운문학상 신인상을 수상받고
2000년12월 월 시와시학 젊은시인상을 수상받았다.
현재 송동중학교>
출간 시집[편집]
-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시와시학사-1993년
- 시집 <버마재비 사랑> 시와시학사-1996년
-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 시와시학사-2000년
- 시집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문학과경계-2002년
- 시집 <목련꽃 브라자>
- 시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문학의전당-2006년
- 시집 <마늘촛불>
- 시집 <따뜻한 외면>
- 시집 <그 눈망울의 배후>
첫댓글 시 감상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은총 온가족 가득 받으셔요
할레루야
벌써 교회 전례적으론 새해입니다.
대림시기의 축복으로 기쁜성탄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