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참말로 한 자리에 박혀 있는 산장을 누가 파가는가? 박샌이랑 토지떡이 잘 허고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니까, 글고 아이들도 다 컸는데 걔들이 물가에를 가것능가,
불장난해 집을 태우것능가? 암말도 말고 여그서 나랑 같이 쪼끔 더 있다 가란 말이네,
맨날 경안이 그 친구하고만 앉아 있으려니까 좀이 쑤세 가꼬 그렇더라고…….”
“정도를 지키지 않은 그것도 죄가 된다 안 헙디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아무도 못 본상 싶어도 누가 봐도 보고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니까요.”
“아따 참말로 보기는 누가 본다고 그래 쌓는가?”
“한두 사람은 속여 묵을랑가는 몰라도 하늘은 못 속인다고 허지 안 헙디까? 이제부터는
당신도 생각을 바꿔야 헌다니까요.”
일반 사람이 특별면회실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도 정도가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를 남자는 더는 자리에 주저앉히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했던 바를 다른 사람에게 꺾여보지 않았던 남자가 영산댁의
사람이 되고 나니 하나둘 자기주장이 꺾이고 있는 걸 느꼈다.
며칠 전날 밤 특실에서 그 황홀함과 기쁨, 즐거움, 행복은 말할 수 없었다.
그놈의 정도가 무엇인지 특별면회실 사용에, 특실에 들어가는 일도 정도에 크게
어긋난다며 들어가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멋지게 두 번째 밤을 보내리라고
장영팔이 야심 차게 세웠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 같아 부아가 끓어오르는 표정이 역력했다.
“전국에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전부 사표 내 뿌렀응게 당신을 잡아간 명채랑 그 사람들도
다 사표를 내 뿌럿담 말 아니어요?”
“하먼, 여그 지방에 조사관들도 다 사표를 냉 거라니까. 그 사람들이 특위원들이 사표를
내 뿔고 손 놓고 있는디 조사관들이 무신 힘이 있겠는가? 여그 전남지부에서 그런 거
메키로 우리나라 몇 군데에서 조사관들이 친일파들을 처단한다고 까불어 싸도 그거이 되것능가?
대장인 위원들이 사표를 내버리고 활동을 안 하고 있는디 심도 없는 조사관들이 버티고
있등마는 결국은 그 사람들이 손을 들고 사표를 내기는 그저께 7일 날 전국적으로 낸 것인디,
신문에는 어제 8일 자에 대문짝만하게 났더니마.”
“시숙이랑 당신도 기분 좋았겠네요.”
“그 바람에 어짓밤에 축배를 간단하게 든다는 것이 너무 많이 묵어 뿌럿당게.”
“그렁게로 당신들을 멀라고 가두어 놓겠소? 오래 있지 않을 것인디, 여그서 나와서
술을 묵든지 해야지요, 과음을 자주 하면 건강도 해칠 것이고마요.”
“금메 말이시. 나도 오늘 아니믄 내일은 풀려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담 말이시.
오늘 밤 나랑 같이 여그서 자고 내일쯤은 우리가 항꾼에 집으로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자네를 집에 가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헝 가라니까.”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국민은 열렬히 환호했다.
보름 만인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해가 바뀐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날 화신 그룹 창업자 박흥식이 반민특위에 제1번 타자로 검거되었으니 반민특위가
힘차게 시동을 걸었었다.
이틀 뒤인 1월 10일에는 일제 충견 노릇을 했던 이종형이 체포되고, 사흘 뒤인 1월 13일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이 한순간의 실수로 친일 부역자가 되어 체포되자
그는 국민에게 사죄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1월 25일 악덕 고문 경찰로 유명했던 노덕술을 체포할 때까지만 해도 국민은
모두 친일 청산은 깨끗하게 이루어질 줄로 알았었다.
국민의 염원을 담은 반민특위가 야심 차게 출발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부와 친일 경찰의 끈질긴 방해 공작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1949년 5월 20일 국회에 간첩들이 침투해 있으며 반민특위 위원 중에도
간첩 혐의자가 있다며 국회 프락치 사건을 만들어 발표했다.
이로 인해 왕성하게 의정에 활동했고 반민특위 탄생에 공이 컸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인
김약수, 이문원, 노일환 의원 등 10여 명의 국회의원을 국회 프락치라는 올 가무를 씌워
구속하더니 6월 6일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소를 습격해 난장판을 만들고 특경대를 해산시켜버렸다.
백범 선생까지 암살했으니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와해 공작은 완전히 성공했다.
위원들이 먼저 사직서를 내고 이어서 7월 7일 전남지부 이순남, 김명채, 이형기
조사관을 포함한 전국지부의 조사관들도 일제히 사직서를 내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다.
2천만 남쪽 국민이 친일 청산을 갈망했었다.
이승만 정부는 도무지 감당치 못할 큰 대못을 국민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그러나 광주서부경찰서 유치장 VIP 별장에서 이경안과 장영팔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는 한 축이 되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며 벌써 축배를 들었다고
영산댁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얘기는 다시 무등산 산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순남 팀장과 김명채, 이형기, 이렇게 세 사람이 이경안과 장영팔을 반민족
해당 행위자로 차례로 체포하고 1차 조사를 마쳤다.
유치장에 인계했으니 밤늦게까지 회포를 풀다가 아침에 잠을 깼다.
무심코 라디오를 켰다가 청천벽력 같은 백범 선생의 서거 소식을 들었었다.
장흥 헌병 사령관은 고향에 부친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백범 선생께서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부친 묘소로 향했다.
안두희는 현역군인이라 암살을 사주한 윗선들을 ‘이 나라 최고책임자라 할지라도 철저히
파헤치리라.’ 참배하며 다짐하기 위해서였다.
현역군인의 수사권이 헌병 사령관에게 있는 것을 고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와
가까운 사이인 점을 꺼렸다.
백범 선생의 가슴에 맞은 총탄 자국에 피도 마르기 전에 장흥 헌병 사령관을 해임하고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을 후임 헌병 사령관에 임명하는 야만적이고 비겁한 상식 밖의 짓을 저질렀다.
우리 국민 모두는 백범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을 의심하고 미국 OSS 또는 하우스만과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김창룡이라고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육군 헌병 사령관을 지낸 임시정부 출신 퇴역 육군 헌병 대령인 장흥은 신성모가
배후라고도 주장했던 적도 있다.
원래는 헌병 사령관인 장흥 대령이 그를 수사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백범 김구와
장흥 헌병 사령관, 두 사람은 임시정부 출신이라 이승만은 미리 겁을 집어먹고 그가 수사를
못 하게 전봉덕으로 안두희를 조사하게 했다.
“아까 막, 황은찬 교수가 타임머신 호를 타고 안두희 그놈의 장래를 보고 온 것을 끝까지
라디오에 보내주지 않은 거 말이시. 뒤를 이어 내가 보고 왔던 걸 자세하게
설명을 해줄 테니까 들어보라고.”
안두희란 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지는 황은찬 교수가 타임머신 호를 타고
미래 여행을 하면서 안두희의 행적을 알아냈던 것은 너무 간단한 줄거리만
간추린 것이었고 그나마 다음 얘기는 내일 이어 보내주겠다는 바람에 명채와
형기는 알고 싶어 좀이 쑤셨었다.
“팀장님께서 타임머신에서 보신 것이나 황은찬 교수가 봤던 것이나 내용이 같습니까?”
“하먼, 황 교수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이랑 내가 탄 타임머신도
다 같은 거라니까. 그런디 아까 막 아나운서가 읽어준 안두희의 장래는 대강 줄기만
읽어주면서 그놈이 죽을 무렵인 늙은 후와 80살 묵어서 죽는 기간까지가 미흡헌 데를
내가 얘기해줄 거그만.”
명채와 형기가 이 팀장 얘기를 귀를 쫑긋해 듣고 있었다.
“안두희 그놈은 신의주에 있는 상업학교에 다녔는데 공부는 안 하고 온갖 못된 짓은
다 했던 놈이라 말이시. 겨우겨우 졸업을 했는디 즈그 부모 애를 무지하게 먹여뿐
놈이라니까. 즈그 집이 엄청 부자라 일본 메이지대학에를 갔는데, 술집서 살다시피 험서
기생하고 결혼도 했다니까. 그러니까 조선에서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고 일본에 유학
가 가꼬도 공부하는 디는 담을 싼 놈이람 말이시. 그런디 우리나라가 해방되니깐 어쩔 것인가?
조선으로 나와야 헐 거 아닝가? 1947년에 남쪽으로 내려와서 서북청년회에 가입해 가꼬
육사 8기로 졸업을 했던가 본데, 남조선 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 소위가 되었다고 허드라 말이시.”
여기까지 큰 숨도 쉬지 않고 얘기하던 이 팀장이 막걸릿잔이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목마르다고 말했다.
“시원한 냉수를 한 그릇 드릴까요?”
형기가 시원한 냉수를 드리겠다고 일어섰다.
“아니당게, 막걸리를 한 잔 주소.”
이 팀장이 형기가 따라준 막걸리를 얼추 반 대접이나 꿀꺽꿀꺽 마신 후 두 사람에게도
한잔하라고 말했다.
“어이, 자네들도 한잔썩 험서 야그를 듣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