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은 조선의 일부였던 번조선 기준 왕의 정권을 탈취 한 도적이었으나, 대한민국 사학계 는 위만을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위 대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중국 기록에 는 그런 강도 위만에 대해 생몰미상이고 그의 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위년도만 나온다. 위만(卫满, B.C194~B.C161 재위), 아들 위몽 (卫蒙, B.C161~B.C129 재위), 손자 위우거 (卫右渠, B.C129~ B.C108 재위)
그러나 우리 <북부여기>에 따르면 위만은 B.C 195년에 번 조선으로 망명하고, 3세 고해사 단군 조에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기병과 보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려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4세 고우루 단군 원년(B.C120) 신유년에 손 자 우거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할 때 20살 정도로 본다면 약 90살 가량 오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보니 위만 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없고 손자 우거에게 왕위를 넘 겨준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위만은 스스로 번조선의 왕이 되기는 했으나 원래 번조선의 상국이었던 북부 여와는 적대관계로 바뀌고 오히려 핏줄이 같은 한 족인 한나라에 친화적이었다. 위만은 이족(夷族) 들이 한나라의 변방을 노략질하지 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이 한나라를 찾아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나라의 외신(外臣=제후)이 됐다.
이를 배경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한 위만은 주변 지역을 복속시켜 사방 수천 리를 세력권에 넣게 되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가 왕위에 오르자 상황이 많이 달라 졌다. 우선 적대관계였던 북부여에 대해서 는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북부여기>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조에 따르면 “계해 3년 (B.C118) 우거의 도둑떼가 대거 침략하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해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우 거의 땅이 되었고, 이듬해인 갑자년 단제께서 장군 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우거의 세력이 상당히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우거의번조선이 이처럼 강 력해지자 한나라에서 망명하는 백성들이 대단히 많 아지게 됐다. 게다가 기고만장해진 우거는 한나라 무제를 알현하지도 않을뿐더러,진번(眞番) 주변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한 무제를 알현하는 것조차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했다.
즉, 나라에 예속되지 않는 완전한 독자정권임을 스스로 천명한 것이었다.
곽거병묘(오른쪽)와 위청묘.
★곽거병을 너무도 사랑한 무제
무제는 곽거병을 아주 사랑했다.
글도 모르고 우직하기만한 위청보다 재기발랄한 곽거병이 무제의 마음에 들 었다. 무제의 특기인 인재발탁은 또다시성 공을 거둔다.표기장군(票騎將軍)에 오른 스무 살의 곽거병은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흉노의 거 점인 기련산(祁連山)까지 진격하여 흉노군을 격파 하자 패전의 문책이 두려웠던 혼야왕(渾邪王)은 수 만여명의 군사와 함께 투항한다. 36세의 황제는너무 감격한 나머지 곽거병에게 대장군 위청과 동등하게 대사 마(大司馬)에 임명한다. 대장군 위청의 시대가 가고 표기 장군 곽거병의 시대가 온 것이다.곽거병의 흉노정벌로 감숙 성의 하서지역은 한나라 영토로 편입되고 흉노는 막북(漠北), 즉 고비사막 이북으로 달아나 더 이상 한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흉노는 천지가 뒤집히고 억장이 끊어질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한나라가 언제까지나 발아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나태에 서 비롯된 것임을. 중요한 요충지이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흉노 는 노래로서 슬픈 마음을 표현할 뿐이었다.우리 이제 기련산을 빼앗겨 가축들을 먹일 곳이 없네.우리 이제 언지산을 잃어버려 여인들은 화장도 할 수가 없네.흉노정벌이 완성되어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인 감숙성을 얻게 되자, 최고 공로자인 곽거병 이 24살로 요절한다.
곽거병의 죽음은
서역정벌을 구상한 무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제는 엄숙하고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철갑군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자신의 능으로 조성하던 무릉(武陵)까지 행렬하도록 했다. 이처럼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사랑은 죽어서도 같이 있고 싶었을 정도였다. 무제는 곽거병에게 경환후(景桓侯) 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무용을 드높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뜻이다. 분묘도 그가 흉노와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기련 산의 모양을 본뜨게 했다.
B.C 109년 우거의 이러한 독자행보에 괘씸함과 분로를 느낀 한나라 무제는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의 이러한 행동을 꾸짖으면서 또한 달 래려 했으나, 우거는 끝내 한 무제의 명령조차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조정에 실패한 섭하는 한나라로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浿水)에서 울화통이 치밀었는지 마부를 시켜 환송 나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여 버린다. 섭하는 국경인 패수를 건너 요 새로 도망친 뒤 한 무제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고, 한 무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섭하에게 요동동부도 위(遼東東部都尉)라는 벼슬을 내리고 그곳을 지키게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번조선의 우거가 군사를 보내 섭하가 지키고 있던 곳을 기습 공격해 섭하를 죽여 버린다. 우거가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즉 각 보복한 것이었다. “한나라, 하나도 안 무서우니 한 번 붙어보자”며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한 무제는 대노하며 죄수들을 모집해 번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 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게 했다. 또한 좌장군 순체(荀彘)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요동 으로 출격시켜 우거를 토벌토록 했다. 드 디어 한나라와 번조선 사이의 전쟁 일명 ‘한 사군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우 거 역시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한 나라 군대의 공격에 대응했다. 한나라 좌장군 순체의 부장인 졸정다(卒正多)가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 으로 출정했으나 싸움에 크게 패했다. 군사는 흩어지고 졸정다도 도망쳐 왔으므로 군법에 따라 참형(斬刑)에 처했다. 초전부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고 만 것 이다.선봉장이 참형까지 당한 것으로 보아 보통 참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의 누선장군 양복은 7천 명의 제(齊) 땅의 병사를 거 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우 거는 왕검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복이 이끄는 군사가 적음을 알고는 바로 성에 서 나와 공격하자 누선장군의 군사들은 크 게 패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다. 누선장군은 많은 군사를 잃고 10여 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이 패전 으로 양복은 종전 후 기시(棄市)라는 극형을 언도받 으나 벌금을 내고 서인(庶人)으로 강등 당한다. 좌장군 순체도 조선의 패수서군(浿水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 없었다. (주: 패수서군=패수상군 즉, 패수는 상류인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한나 라 무제는 두 장군의 전세가 결코 유리하지 않아 승산 이 없다고 여겼다. 사자 위산(衛山)을 보내 군사의 엄 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했다. 우거는 한 무제 의 사자를 보고 머리 숙여 사과하며 "항복하기를 원 했으나 두 장군이 신을 속여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므로 항복을 청합니다" 고 말했다. 그리고 우거는 태자에게 한나라에 들 어가 무제께 사죄하며 말 5천 필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또한 군량미까지 내어 주었다.
병장기를 휴대한 무리 만여 명이 막 국경인 패수 (浿水)를 건너려고 할 때 사자 위산과 좌장군 순체는 그들이 변 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부왕 이 이미 항복했으니 병사들에게 무기를 버리라 명하시오"라고 말했다. 태자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앞서 섭하가 했던 것처럼 자 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해 끝내 국경인 패수를 건너지 않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우거 가 기병 5천을 포함한 1만 군사를 중무장시키고 군량 미까지 휴대하고 태자로 하여금 한나라로 들어가게 한 것은 아마 위장항복일 가능성이 높다. 진짜로 항복하 려 했다면 군량미까지 지참시킬 하등의이유가 없고, 한나라 측에서 무장해제를 요구했을 때 거부할 이유 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거는 자기 조부 위만이 번조선의 기준 왕에게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 니 왕성으로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는 거짓 보고를 올려 방심하게 한 후 기습공격을감 행했던 것처럼 한나라 무제를 기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릉박물관 안의 곽거병묘.
사자 위산이 돌아와 한 무제에게 있는 그대로 사 대로 보고하니 그러한 우거 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한 무제는 우거와의 휴전과 선린우호 관계회복에 찬물을 끼얹었다 해 위산을 참수해 버린다. 한 무제는 수하 장수들이 연패를 당하자전쟁 을 일으킨 것을 크게 후회하며 우거와의 휴전을 간절히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우거와의 휴전협 상이 결렬되자 한나라 좌장군이 패수상군(浿水上軍) 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고, 누선장군 또한 합세해 성 남쪽에 웅거했 다.끝내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달이 돼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본시 시중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는데 연(燕)과 대(代)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다.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 해졌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 사를 이끌고 해(海=황하, 해 지방)로 출정했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서 패하 고 군사를 잃었다. <사기 조선열전>에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이미 크게 패했고, 도망한 군사들은 온갖 고통과 치욕을 맛보아 병사들 모두 두려워했고 장수들은 속으로 부끄러워 했다(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辱亡卒 卒 皆恐將心慙).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 을 유지했다(=공격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참패도 보통 참패가 아 닌 것 같아 보인다. 그야말로 한나라 군사들은 오합지졸이요 지리멸멸 그 자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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