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선수들(8)...야구 천재
임신근
고교야구 시절의 임신근
임신근, 남우식, 김동수, 추신수...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의 2년 연속 MVP로 선정된 이름들이다. 고교야구 당시 이미 대물(大物)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러면 다시 하나 더...이대호, 이승엽, 추신수 그리고 임신근의 공통점은? 이들 이름들은 고교시절 뛰어난 투수에서 후일 타자로서 일세를 풍미한(혹은 풍미하고 있는) 이름들이다. 그때 그 선수들 여덟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미 고인이 된 임신근이다.
경북고의 전성시대를 이끈 임신근
올드 야구팬들은 '임신근'이란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1949년 대구에서 태어난 1967년 2학년 왼손투수 임신근을 앞세운 경북고는 그야말로 혜성과 같이 등장해 제1회 대통령배대회 등 4개 대회를 휩쓸었다. 경북고는 이듬해인 68년에도 대통령배와 청룡기를 제패하며 바햐흐로 경북고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 경북고 전성시대를 이끈 명투수 임신근은 고등학교 1학년 까지만 해도 투수가 아닌 1루수였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기만 했다. 임신근은 최동원이나 선동열같은 불같은 강속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기막힌 콘트롤과 수싸움에 능했고 특히 슬로커브는 타자들의 방망이를 헛돌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였다. 게다가 방망이질도 매서워 가끔씩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경기를 보여주곤 했다.
경북고 출신인 영화배우 신성일이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맨발의 청춘)에도 경북고 야구와 임신근에 대한 회고담이 있어서 간단히 소개해 본다.
영화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67~68년, 경북고 야구팀은 전국 최강팀으로 우뚝 섰다. 좌완투수 임신근을 앞세워 67년 전국대회 5회 우승, 68년 전국대회 7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경북고 야구팀이 결승을 이틀 앞두고 이태원 181번지 우리집을 찾은 적이 있다. 서영무 감독을 비롯해 후배 선수들과 학부모까지 스무 명 남짓했다. 아내 엄앵란은 불고기 파티를 열어주었다. 고기 먹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이태원 181번지는 선수단 전원이 들어와 있어도 넉넉했다. 3층 응접실에는 선물로 받은 값진 술이 있었다. 엄앵란이 “이게 세계 최고의 술”이라며 코냑을 한 잔씩 따라주었다. 코냑을 처음 마신 학생들이 얼마나 알딸딸했을까. 임신근을 비롯한 선수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집에서 꼬냑 마신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실업야구 완전정복
초고교급 투수로 이름을 날린 임신근은 69년 한일은행에 입단해 10승7패를 거둬 실업야구 신인왕에 올랐다.
임신근은 이후에도 투수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여세를 몰아 실업야구 입단 이듬해에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에 뽑혔다. 1970년에는 승률 1위를 했다. 71년 해병대에 입대해 72년 실업야구 다승 1위(18승8패)와 승률 1위(.818)를 거머쥐었다. 주목할 사실은 72년 해병대가 거둔 20승 가운데 18승을 임신근이 혼자 올렸다는 점이다. 임신근은 한일은행 투수시절 특이한 기록을 하나 남겼는데 무려 21회 완투가 그것이다. 이 경기는 임신근의 한일은행과 해병대의 상대편 투수 김병우가 둘 다 21회까지 던지는 초인적인 힘을 보여주는데 임신근이 투구수 247개, 김병우가 투구수 233개를 기록한 것. 이 경기에서 21회에 한일은행이 승리하면서 임신근이 승리투수가 된 것이다.
임신근은 매해 실업야구 올스타에 당연히 선정되었고 1970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선정하고 시상하는 '청룡야구상' 베스트나인에도 이름을 올린다.
실업야구「베스트9」
▲투수=임신근 (한일은) ▲포수=정동진 (해병대) ▲1루수=김응룡 (한일은) ▲2루수=한동화 (해병대) ▲3루수=김우열 (제일은) ▲유격수=김동률 (제일은) ▲좌익수=박영길 (한전) ▲중견수=이재우 (육군) ▲우익수=김태령 (상은).
1971년 실업야구 올스타
금융단 ▲투수=김호중(한일) 25,759표 ▲포수=우용득(한일) 20,027 ▲1루수=김응룡(한 일) 30,433 ▲2루수=한동화(제일) 12,185 ▲3루수=강병철(한일) 26,471 ▲유격수=김동율(제일) 16,063 ▲외야수=이재우(제일) 23 471 최남수(한일) 20,558 김차열(제일) 19,233
실업단 ▲투수=임신근(해병) 24,091표 ▲포수=최재봉(육군) 18,852 ▲1루수=장원순(해병) 26,093 ▲2루수=강태정(한전) 27,544 ▲3루수=김우열(해병) 29,175 ▲유격수=조윤식(해병) 22,266 ▲외야수=황성록(한전) 27,533 박영길(한전) 25,791 조창수(육군) 16,098
타자로 전향하다
74년 해병대에서 제대하고 한일은행에 복귀한 임신근은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한일은행 새 사령탑에 오른 김응룡 감독이 임신근에게 타자전향을 권유한 것이다. 투수로도 좋은 재목이었지만 이미 구위가 전만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왼손타자가 귀했던 그 시절, 김응룡 감독은 임신근의 야구센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고투수 자리를 박차고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타자로 돌아서는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결국 임신근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지만 김응룡 감독의 '강권'에 못이겨 방망이를 들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임신근은 타자전향 3년만인 76년 실업야구 타격판도를 뒤흔들었다. 춘계리그에서 타율 5할1푼2리, 추계리그에서 타율 4할4푼으로 잇달아 타격왕에 오른 임신근은 77년에도 금융단 타격왕에 등극했다. 실업야구에서 2년연속 타격왕은 임신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76년에는 타자로서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국제대회에 출전하기도 한다.
감독 = 허종만
투수 = 김호중(한일은) 강용수(한전) 황태환 이선희(이상 육군) 계형철(롯데) 정순명 (한양대)
포수 = 우용득(한일은) 박해종(기은) 신언호(연대)
내야수 = 김봉연 구영석 배대웅(이상 육군) 김재박(영남대) 김용철(한일은) 김일권(상은)
외야수 = 장효조(한양대) 임신근(한일은) 김우열 (제일은) 이해창(농협) 윤동균(기은)
70년대 초중반 임신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과묵한 성격에 남자다운 표정 그리고 넘치는 카리스마로 인해 임신근 주변엔 여자팬들이 줄을 지었다.
영원한 별로 남다
선수 은퇴 후 한일은행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1981년 김응용이 미국 연수를 떠나자 김응용의 후임으로 한일은행 감독을 맡는다. 그러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연고팀인 삼성라이온스의 창단 코치 겸 선수로 합류했다. 선수로서는 2경기에 대타로 들어서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원년에 준우승을 기록한 후 삼성라이온스 구단에서 그를 투수코치직에서 해임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우스조지대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1985년 해태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1987 시즌 후 해태와 계약이 만료되자 이듬해 태평양 돌핀스의 2군 코치로 부임했다가, 1988년 4월 강태정감독이 팀의 부진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감독 대행이 되었다. 이후 태평양 투수진을 안정시키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듬해 태평양이 김성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며 태평양에서 나왔다.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초대 수석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던 1991년 9월 17일, 전주에서 OB베어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의 타격훈련을 지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향년 42세.
따뜻한 미소와 온화한 성품을 간직했던 임신근. 고교야구를 정복하고 실업야구로 넘어와 다승왕과 타격왕을 차례로 따낸 전무후무한 기록의 소유자. 그에게'야구천재' 라는 수식어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최초의 야구천재라 불릴 만한 선수네요... 선수로서의 모습은 기억이 안 나지만 코치 감독대행 마지막 쌍방울 수석코치 시절은 기억나네요...
황태환은 원년 세이브왕이지만 그저그런 선수로 기억되는데 아마 땐 잘한 모양이네요 행님이 올려주신 글마다 국대네요 ㅎ
잘 읽었습니다^^
좀 한다 하는 선수들만 올리다 보니 전부 올스타에 국대 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임신근 이후엔 남우식이란 투수가 나타나 또 한번 전국대회를 휩쓸면서 전통의 강호가 되지요...그리고 이선희, 황규봉 등이 줄줄이 나타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