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초의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16:11~15)
우리 한국 기독교사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한국(조선) 최초의 개신교 목사인 7분 가운데 한 분인 이기풍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본토가 아닌 외지(제주도) 선교사로 활동하셨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 했는데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은 날을 허송세월하며 보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조선을 찾은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하는데 열심을 냈던 분입니다. 그가 총명하고 재주가 많음에도 그러한 것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것은 ‘홍경래의 난’ 당시에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할 뻔했으나 구사일생으로 평양성을 빠져 나와 황해도 구월산에서 숨을 거둔 조부의 영향 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크게 경계하고 있던 터라 이기풍 또한 서양 오랑캐를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양코배기라 불리던 서양 선교사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봤던 외국인 선교사를 그 집까지 쫓아가 돌을 던지고 결국 턱에 큰 상처까지 입히기도 했는데, 이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그 외국인 선교사가 향후 이기풍의 영원한 스승이 될 바로 마포삼열 (S. A. Moffett)이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1894~5년)으로 인해 원산으로 피난을 떠난 이기풍은 담뱃갑에 그림을 그려가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자신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하던 김석필의 도움으로 스왈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기풍은 1901년까지 매서(성경책을 파는 사람, 나중에는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인 권 서로 불림)로서 함경도에서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1902년에서 1907년까지는 스왈른 목사를 따라 황해도의 안악, 문화, 신천, 장연, 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업무를 돕는 조사(helper)로 활동했습니다. 또 마포삼열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1903년경(연도가 정확하지 않음)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기풍은, 대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였던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서경조, 한석진, 길선주, 양전백, 송린서, 방기창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 목사 안수를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노회가 설립되었으며, 목사 안수 다음날 속회된 노회에 서, 마포삼열 선교사는 이기풍 목사에게 회중을 대표하여 참회기도를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3일째 회의가 열린 9월 19일에는, 7인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기풍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907년 인천항을 출발, 목포를 경유해 제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이 목사는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구사일생으로 이듬해 봄 제주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며칠이 지나도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고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도 제주 방언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심신이 지친 이 목사는 해안가에 전도를 나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한 해녀의 도움으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이기풍 목사는 해녀에게 전도하기 시작했고 하나 님은 해녀의 마음을 움직여, 이기풍 목사에게 제주도에서 복음의 첫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1918년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 목사로 전임되었고, 1921년 순천중앙교회 시무 중 장로회 10대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이후 순천과 제주 등에서 사역하다가, 1934년 70세의 나이에 우학리 교회에 부임, 산과 완도 등 도서지방을 돌며 전도하고 교회 개척에 힘쓰신 분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우리 한국의 처음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은 유럽에 처음으로 기독교인인 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세아로 향한 전도의 발걸음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옮긴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 말합니다. 오늘 세계사를 형성하게 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획을 바꾸어 유럽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고 처음 빌립보에서 안식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이후, 이를 기념하여 성을 세우고 그의 부친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 지었다고 합니다. 자연히 헬라문화와 지식, 로마의 정치와 문화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곳이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불모지였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곳을 찾아온 바울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강가에 있는 기도처를 찾아갔을 때 그곳에서 루디아라고 한 여인을 만났을 뿐입니다.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이 오늘의 유럽 지역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 나약한 여인의 힘이 유럽을 구원하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유럽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이 여인에 대하여 몇 가지 살펴보면서 교훈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루디아는 자기의 생업에 열심을 내고 일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비단 장사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빌립보 시의 특징은 할 일없이 놀고 있는 가정주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부유한 생활과 향락을 추구하는 삶은 노동을 경시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극장이나 유흥장에는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여인들로 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이러한 여인들과는 반대로 일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추구하며 실천하는 삶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루디아는 사귐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장사하는 사람이기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장사를 위해서 사람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려고 하는 마음의 소유자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경건한 예배자들과 함께 교제하는 아름다운 생활을 유지해 온 생활의 여인이었다는 점입니다.
3) 루디아는 경건한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심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강가의 기도처라는 말은 세상의 풍조나 유행을 같이 즐기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녀는 멀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보려는 아름다운 믿음의 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 루디아는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늘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종류의 일을 하는 여인으로 더 나가서 두아디라에서 이민 온 여인이었음으로 그의 삶이 얼마나 건전한 삶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녀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만나서 대접도 하고 도와주는 열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5) 루디아는 건전한 가정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바울을 초청하는 것, 숙식을 제공하는 것, 세례를 받는 것, 전도의 본부로 자신의 가정을 제공한 것, 모든 것을 그 가정이 협조하고 이해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건실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모범적인 여인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루디아의 성품과 활동은 유럽에 기독교가 건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