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현판
202311.07~2024.02.12
2022년 서울 국립고궁 박물관 궁중현판전에서 보았던 현판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설명은 궁중 현판전 도록에 실린 기록을 가져왔습니다.
고궁박물관 궁중현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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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관
경주 객사
1882년 경주부윤 정현석(鄭顯奭) 글씨
경운궁. 고종 어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을 때 사용한 임시 정전인 즉조당卽阼堂에 걸었던 현판이다. 경운궁은 ‘경사스러운 운수가 가득한 궁’이라는 뜻이다. 위계가 높은 건물에 달았던 현판으로, 구름 모양 봉을 달았고 테두리에 길상吉祥 의미를 담은 칠보七寶 무늬를 장식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1905년)에 현판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가 나와 있어, 바 탕판의 검은 칠에 각각 진칠眞漆 1승 4홉과 매칠毎漆 3홉, 금색 글자에는 금박金箔 3속씩 사 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위계에 따라 사용하는 금박의 양에도 차이를 두었다. 현판 테두리를 따라 얇은 띠 모양 철물이 남아 있는데 어필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비단인 사롱紗籠을 고정했던 흔적으로 보인다.
주필사회제망묘루. 김재로(1682~1759) 1745년 글씨
영조가 건강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표현한 시
영훈당
왕을 위한 물건 보관. 외국 사신 만남 장소
1887년 우리나라 최초 전등을 밝혔던 곳입니다.
영훈당. 19C 후반
경복궁 흥복전興福殿 북쪽에 위치한 영훈당永薫堂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훈당은 ‘향기가 영원히 이어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지규식池圭植(1851~1911년 이후)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 영훈당이 ‘대전 곳간’이라고 되어 있어, 왕을 위한 곳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테두리가 없는 널판 형태로 흰색 바탕에 글씨를 반양각한 뒤 파란색으로 칠했다. 영훈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주요 전각이 철거될 때 함께 없어져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춘장대 어사(春塘臺御射)
정조正祖(재위 1776~1800년)가 임자년(1792년) 6월 30일에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에서 화살 [유엽전柳葉箭]을 쏘았던 일과 그것을 칭송한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춘당대는 영화당 앞 넓은 빈 터로 왕과 신하가 함께 잔치를 열거나 문·무과 시험을 개최하던 곳이다. 가로 형태 두루 마리를 펼친 모양으로 독특한 모습이다. 칠이 많이 벗겨져 본래 바탕색은 확인하기 어렵다. 음각으로 파낸 글씨 부분에 파란색 안료가 남아 있다.
종정부
쇠로 만든 글씨
조선 말기 종실의 업무를 관장하던 종정부(宗正府)에 걸었던 현판이다. 종정부는 종친부가 폐지되는 1894년(고종 31) 7월에 설치되었고, 의빈부(儀賓府)와 돈령부(敦寧府)를 흡수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 4월 종정사(宗正司)로 개칭되었으므로, 이 현판은 1894년(고종 31) 7월 이후에 제작되어 1895년(고종 32) 4월까지 걸려있던 것으로 보인다.
단연죽로시옥. 추사 김정희
均貢愛民 節用蓄力(균공애민 절용축력)
영조가 호조에 내린 어필. 1744
육조 중 하나로 국가 재정을 관리한 관청인 호조에 걸었던 영조의 어제어필 현판이다.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均貢愛民 節用蓄力]’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갑자년(1744년) 11월[甲子十一月日]’이라는 묵서가 있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현판의 네 모서리에 용머리와 봉황 머리 모양 조각을 달았고, 테두리에는 꽃무늬 단청으로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금박을 붙인 금색 글자로 만들었다
일심재. 순조 어필.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景祐宮의 일심재에 걸었던 순조의 어필 현판이다. 원래의 사당은 창경궁 안 도총부에 있던 현사궁이었으나, 사친私親의 혼궁魂宮이라는 이유로 1824년(순조 4) 궁궐 밖 한성 북부로 옮겨져 경우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우궁은 ‘큰 복을 받는 궁’이라는 뜻이며 일심재는 ‘한결같은 마음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현판에 빗각으로 넓은 테두리를 달았으며 칠보 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현재 글씨의 색은 거의 다 날아갔으나, 『현목수빈입묘도감의궤』를 통해 옻칠 바탕에 글씨는 금박을 붙였고 바탕판은 잣나무가, 테두리판은 피나무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현판 테두리 뒷면에는 어 필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사롱의 홍색 직물 조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의궤에 수록된 홍운문사紅雲紋紗, 즉 구름 무늬가 있는 홍색 비단 직물임을 알 수 있다. 일심재와 낙유당 현판은 을유년인 1825년 정월 24일에 걸었다
현사궁(顯思宮).순조 어필.1823
창경궁 현사궁에 걸었던 순조의 어필 현판이 다. 현사궁은 ‘생각을 떠올리면 환하게 나타나는 궁’이라는 뜻이며, 1824년(순조 24)까지 순 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이용되었다. 현판 테두리에는 구름 모양 봉을 달았고 칠보 무늬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무늬의 윤곽선에 니금泥金을 사용한 가는 금선을 둘러, 위계가 높은 현판으로서 상당한 공을 들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한 후 금박을 붙였다.
덕봉헌. 김성근(1835~1919)
경주 마동 덕봉정 현판
선원록 아문. 조선 후기
왕족의 예우를 담당한 종친부宗親府의 내삼문內三門에 걸었던 현판이다. 1864년(고종 1) 종 부시宗簿寺가 종친부에 통합되면서 종부시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의 관리를 종친부가 맡게 되었다. 이에 『선원록』을 관리하는 관청이라는 뜻의 선원록아문 현판이 종친부 안에 걸리게 되었다. 현판은 전서에서 발전한 서체인 예서隸書로 쓰였는데 전서체보다 획이 유려하고 단순한 특징을 보인다. 글자의 형태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추원재
면복각.조선 후기
국왕의 면복을 보관하던 건물인 면복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면복은 면류관과 구장복을 통칭하는 것으로 왕이 즉위식이나 가례, 제사와 같은 중요한 의례 때 입었던 최고 예복이다. 따라 서 왕실의 복식을 담당하던 상의원에 부속 전각을 두고 소중하게 보관・관리하게 하였다. 현 판은 경복궁 면복각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되며 글씨는 해서楷書로 쓰였다. 해서는 궁궐 현판에 가장 많이 사용된 글씨로 글자의 획이 반듯하고 깔끔하며 알아보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곤영합. 고종 어필
명성황후 처소에 걸렸던 현판
경복궁 건청궁 안 곤녕합에 걸었던 고종의 어필 현판이다. 곤녕합은 ‘왕비가 편안한 곳’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년)의 처소로 사용된 곳이다. 현판의 네 모서리는 활[弓] 모양이며, 테두리에 연화당초蓮花唐草 무늬를 그려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고 종이 쓴 현판 글씨를 모은 『어필현판첩』(1885년)에 이 현판의 글씨가 실려 있다
복수당. 영조 어필 추정
경희궁 복수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복수당은 ‘복을 받아 편안한 곳’이라는 뜻이다. 전각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와 성격은 알 수 없으나, 현판 뒷면에 묵서가 남아 있어 1741년(신유년辛酉 年) 4월 23일에 만들었음[辛酉四月二十三日造作]을 확인할 수 있다. 글씨는 영조의 어필로 추 정되며 행서行書로 쓰였다. 행서는 반듯함이 특징인 해서보다 획을 흘려 쓴 느낌이 강하고 해서의 보완적 서체로, 궁궐 현판 글씨 중 해서와 더불어 많이 쓰인 서체이다
반구정.
안동 반구정
윤집권중(允執厥中).어필
창덕궁 취운정翠雲亭에 걸었던 현판으로, ‘진실로 중도를 지키라’는 뜻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 중국의 고대 성군인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도에 어긋날 수 있는 약한 마음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내린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성군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조선의 역대 왕도 이 구절을 자주 신하와 논하며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어필로 제작한 현판이지만 어떤 왕의 글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글씨의 획을 생략적이고 자유롭게 표현한 초서草書로 기록되었다.
가애죽림(可愛竹林). 숙종 어필
창덕궁 후원 영화당에 걸었던 숙종肅宗(재위 1674~1720년)의 어필 현판이다. 가애죽림은 ‘사랑할 만한 대나무 숲’이란 뜻으로, 1692년(숙종 18)에 영화당을 중수한 후 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빗각으로 넓은 테두리를 달았고 봉황과 구름 등 무늬를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한 후 금박金箔을 붙였는데, 금색 글씨를 사용하는 경우 바탕판은 대부분 옻칠을 칠해 마감했다. 현판 뒷면 모서리에는 어필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여닫이문의 흔적인 경첩 일부가 남아 있다.
총효당. 미수 허목
서애 류성룡 종택 현판
삼계산방.순종 어필. 1907년 추정
석파정 부속건물로 추정
오헌. 1875년 박규수 글씨
영주 수도리 반남 박씨 오헌 고택
오헌 박제연(1807~1890)병조 참판,동지춘추관,의금부사 역임
제일난실. 흥선대원군
근암. 흥선대원군 글씨
안동시 임동면 근암종택
근암 류치덕(1823~1881). 近은 지나치게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
초당. 조희당의 9세 손 김희수 글씨
영양 일월면 한양조씨 옥천 종택 별당초당은 조희당(1680~1775)의 당호
직방재
장신(1629~1711)이 강학을 위해 건립
직방은 내면을 경으로 곧게 하고 외면을 의로써 바르게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폐려
안동 일직면 대산 이상정 종가 당호
폐려는 누추한 집을 의미하면 1773년 아들 간암 이완이 규모를 조금 늘려 지은 후 패려라고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퇴촌. 석봉 한호
퇴촌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정지재
안동 정지재 현판
정지재 김화
남송 시인 육유(1125~1210) 의 시 산록
원교 이광사 글씨
여실.원교 이광사
연려실. 원교
윤수재. 극암 이기윤(1891~1971) 글씨
경주시 안강읍 사당 현판
윤수재는 홍종린(1863~1941)의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올리기 위해 아들 홍순학(1897~1964)이 1945년 건립
추원재. 위창 오세창 글씨
안동시 안막동 안동 권씨 부호장공파 성곡문중 현판
화수당(花樹當). 완옹(추사)김정희
안동 풍산읍 오미리 풍산 김씨 문중 현판
화수는 친족의 모임을 뜻합니다.
입도문. 병암 이수인(1690~1737) 글씨
간재 이덕흥(1541~1596)이 세운 오계서원 현판
숭현재
안동시 녹전면 마곡서원 현판
달수재. 풍남 노응현 글씨(1852~?)
안동시 길암면 묵계리 보백당 종택
만귀산방
성주군 만귀정 현판
만귀정
조선후기에 공조판서를 역임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가 만년(1851년)에 귀향하여 독서와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대산루
상주시 외서면 입재 정종로(1738~1816)의 서재 현판
정경세가 지은 계정을 본떠 지은 건물, 정종로는 정경세의 7세 손
우세정. 석재 서병오(1862~1935)
우세정은 대구 대덕산 아래 있었던 정자로 전함
피염정
파염정은 피염정 이희음(1579~1641)이 지은 정자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속제의 불구덩이를 피한다는 의미도 있다고합니다.
반계정. 강세황 글씨
밀양시 단장면의 정자
반계는 이숙(1720~1807)의 호
녹천정.이유원(영의정)
박영원(1791~1854)이 지은 정자
고산정.
안동시 도산면 정자
고산은 성재 금난수의 호.
대안문.민병석 글씨, 1899년
덕수궁 동쪽에 위치한 정문에 걸렸던 현판이다. ‘크게 편안한 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본래는 경운궁(1907년 덕수궁으로 개칭)을 건설했을 당시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 정문이었다. 그러나 1902년(광무 6)에 인화문이 철거되면서 대안문이 정문 역할을 하였다. 1904년 경운 궁에 큰 화재가 난 후 고종의 명에 따라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했는데, 이 때 이름을 ‘큰 하늘’이라는 뜻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고 현판 또한 새롭게 달았다. ‘큰 하늘’이라는 의미에는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소망이 들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현판 중 가장 크기가 큰 현판이다
옥당. 이정영. 1652년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했던 홍문관弘文館의 현판이다. 홍문관은 ‘옥과 같이 귀중한 집’이라는 뜻의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고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문관에 소속된 관원은 왕과 학문을 논하는 한편 경연 준비를 겸하기도 하여 왕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세로 모양 현판은 효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홍문관 관원이 었던 이정영李正英(1616~1686년)이 쓴 것이다. 전해지는 옥당 현판 중에서는 유일한 세로 형태이다. 가로 모양 현판은 숙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역시 홍문관 관원이었던 김진규金鎭圭 (1658~1716년)가 쓴 것이다.
임옥서유감(臨玉署有感).영조 어제어필. 1760년
영조가 홍문관 관원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글을 새긴 현판이다. 밤늦도록 글을 강론하는 것을 즐거워한 중국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재위 25~57년)의 일화와 당나라 태종太宗(재위 626~649년)이 문학을 존중하고 뛰어난 인재를 얻은 일화, 세종 때 세자가 홍문관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연마했던 일화를 언급하여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영조는 직접 지은 글을 인쇄하여 첩으로 만들어 홍문관 관원에게 내려주면서 1건을 홍문관에 보관하게 하고 현판으로도 새기도록 하였다. 성리학을 정치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신하도 지속적으로 학문을 연마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옥당. 김진규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했던 홍문관弘文館의 현판이다. 홍문관은 ‘옥과 같이 귀중한 집’이라는 뜻의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고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문관에 소속된 관원은 왕과 학문을 논하는 한편 경연 준비를 겸하기도 하여 왕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세로 모양 현판은 효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홍문관 관원이 었던 이정영李正英(1616~1686년)이 쓴 것이다. 전해지는 옥당 현판 중에서는 유일한 세로 형태이다. 가로 모양 현판은 숙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역시 홍문관 관원이었던 김진규金鎭圭 (1658~1716년)가 쓴 것이다.
유수원신치부로민인(諭水原新治父老民人). 정조 어제. 1790년
정조가 수원의 새 고을 백성을 배려한 내용을 담은 현판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오다 근처에 새로 생긴 고을로 이사 온 백성의 생활이 넉넉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기존의 조세 면제가 살림이 미천한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실정을 파악해, 10년 동안 조세가 면제되는 토지 500 결을 하사하고 부족한 곡식을 나 누어주도록 명하였다. 백성에게 식량이 하늘 같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한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천민행기우유작, 영조 글
서하 호조(書下戶曹). 영조 어필. 1734년
영조가 재정을 담당한 호조에 내린 현판이다. 절약하며 힘을 비축하고 공물과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쓴 것이다. 국가가 백성에게 세금을 공평히 거두고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백성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조는 백성 이 조세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다각도로 노력했다. 현재 국세청 앞에도 공물과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현판의 내용을 발췌해 만든 비석이 놓여 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세금이 국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 어제, 홍낙성 글씨
융무루. 신관호. 19C 후반
‘문文이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과 ‘무武가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이다. 각각 경복궁景福宮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동행각과 서행각의 루樓에 걸었다. 융무루 현판은 고종 대 훈련대장인 신관호申觀浩(1810~1884년)가 썼다. 정치 공간의 중심인 정전의 양편에 걸어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보였다. 주요 건물 외의 부속 건물의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를 담아 구역 전체에 정치적 이상을 구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어제. 정동준 글씨
정조 어제. 장세경 글씨
등세심대상화점구(登洗心臺賞花口占).정조 어제, 이만수 글씨 추정. 1791년
정조가 3월에 세심대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왕실의 사당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심대에 올라 신하와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왕이 시를 지은 뒤 신하에게 답하는 시를 짓도록 했는데 차를 다 끓일 때까지 시를 완성해야 했다. 세심대 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세울 때 처음 염두에 두었던 장소이다. 사도세자의 사 당인 경모궁景慕宮은 결국 다른 곳에 세워졌지만 정조는 신하와 세심대에 들러 아버지를 여읜 마음을 달랬다. 시에서 정조는 봄날 세심대에서 세속의 소란을 씻고 같이 오른 연로한 신하가 내년에도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장소에서 신하와 꽃구경, 활쏘기 등 다양한 놀이를 즐기며 각별한 관계를 맺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춘방.효명세자 예필
왕세자의 교육 기관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에 걸었던 현판이다. 조선은 유교적 도리가 체화된 성군을 기르기 위해 세자를 어려서부터 교육했다. 세자시강원은 세자를 뜻하는 ‘춘春’ 자를 붙여 춘방春坊이라고도 불렸다. 현판에 는 ‘보도계옥輔導啓沃’이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는데 계옥啓沃은 중국 고대 정치 문서를 모은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 「열명상說命上」에 ‘그대 마음을 열어서 내 마음을 넉넉하게 하라 [啓乃心沃朕心]’는 글에서 따온 것으로, 신하가 충성스러운 의견을 아뢰어 왕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춘방 현판에 적힌 보도계 옥은 좋은 말로써 세자를 잘 보필해 성군이 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필(睿筆). 왕세자의 글씨
계인문. 19C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동행각의 계인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계인문은 ‘어짊을 여는 문’이라 는 뜻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치 공간으로 문의 이름에도 성군의 기본 도리인 ‘인仁’을 담았다. 경복궁의 주요 전각뿐 아니라 공간의 곳곳에 정치적 이상을 내재해 우러러보며 되새기도록 했다.
하춘방윤음(下春坊綸音). 영조 어제, 조명정 글씨. 1747년
영조가 세자 교육 기관인 세자시강원[춘방]에 내린 명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세자를 철저히 교육할 것을 신하에게 당부하면서 세자가 강독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 춘방에 걸도록 하였다. 세자가 오전과 오후에 각각 공부할 내용과 횟수 등 세세한 규칙까지 지시하고 있다. 10일마다 돌아오는 휴일이나 경연 중지일과 같은 휴식 시간에도 복습하고 강론할 것 을 명하고 있어, 영조가 세자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양덕당. 영조 또는 정조 어필로 추정. 18C
경희궁慶熙宮의 양덕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양덕당은 ‘덕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경희궁에서 왕세자가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정궁正宮인 경현당景賢堂 북쪽에 위치했다. 성리학 기본 서인 『근사록近思錄』의 해석본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존양存養」의 ‘예법에 맞는 몸가짐과 의를 행함이 덕을 기르는 것이다 [威儀行義 以養德也]’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선은 덕으로 하는 정치[德治]를 이상으로 여겨 왕은 자신의 덕을 수양해야 했다. 왕세자의 공간에 걸렸던 현판의 이름을 통해서 왕위 계승자인 세자는 성군의 덕목을 길러야 할 의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어제. 민백홍 글씨
융문루. 김병학. 19C 후반
‘문文이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과 ‘무武가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이다. 각각 경복궁景福宮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동행각과 서행각의 루樓에 걸었다. 융 문루 현판은 고종 대 영의정인 김병학金炳學(1821~1879년)이, 융무루 현판은 고 종 대 훈련대장인 신관호申觀浩(1810~1884년)가 썼다. 정치 공간의 중심인 정전의 양편에 걸어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보였다. 주요 건물 외의 부속 건 물의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를 담아 구역 전체에 정치적 이상을 구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진지만
영친왕 6세 글씨
영왕서실
영친왕 팔세 때 글씨
영조 어제
2023년 11월 14일
첫댓글 좋은글씨 감상 잘했습니다.
대단한 기획에 좋은 글에 눈호강했습니다. 시간내어 가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