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학상 "5층 아프리카" 시 <키리바시~>해설
시는 감동을 그린다. 하지만 상투적이지 않은 감동을 원한다. 한번도 반복되지 않은 새것으로서의 시. 이기적이지만 그렇다. 때문에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 는 어느 시인의 말은 낡았기에 ” 혁명 시인 김수영처럼 자유에 스며든 “피의 냄새‘로 가차 없이 수정되어야 했다. 시의 생명은 이처럼 상투성이 소멸한 자리에서 태어나는 최소한의 언어다.
해마다 문학실기장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도 것도 이것이다. 수많은 공모전과 백일장에서 제기되는 이 질문의 중심에 주체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감동의 물음은 사실 언어의 본질을 ‘존재의 집’으로 파악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보다 쉬워 보인다. 일상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추구하는 일탈의 가치가 항상 우리를 쉼 없이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쉽기만 한 것일까?
사람보다 코코넛 나무가 많은 나라 키리바시
군함조의 매서운 눈으로
지는 해는 크리스마스 섬을 노려봐요
파도처럼 자꾸만 밀려오는
최후의 날에 대한 예감에
해안은 뒷걸음질 쳐 온 지 오래예요
남태평양 귓속을 간질이며
군함조 수장된 땅의 기억을 낚아채면
저 아래 어버이들의 빵나무가 있단다
섬사람들은 젖먹이들의 귓가에
잠긴 목소리를 옮겨 심기도 해요
저물어 가는 산호섬 깊은 뿌리엔
무엇에 대한 월부금이 매달려 있을까요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섬사람들은 더 이상 빵나무를 심지 않아요
-- 고등부 시 부문 금상. 이연서 ‘키리바시를 살려 주세요' --
우리는 이 시에서 일상의 자본주의적 억압이 거꾸로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동지애로 전이된 것을 본다. 아이를 위해 ‘빵나무’를 심지 않는 키리바시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니다, 지하세계 타나토스(죽음)다. 자연과 인간의 폭력이 "최후의 날로" 조우하는 극한의 폭발지점이다. 남태평양이라는 먼 섬으로 타자화된 키리바시와 크리스마스 섬은 이질적이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라는 기후변동을 초래하는 동일한 자본주의적 원관념으로 인해 타자성을 상실한다. 감동은 비극성으로 인해 그 언어 존재의 자리마저 전복되는 충격을 준다. 바로 이 속에 현대시의 특징적인 무의식의 언어와 상징 그리고 실존적 존재들이 웅크리고 있다.
해일은 터 오는 동을 물어다 주는
새들의 발목을 깨물며
기울어진 섬 그림자 일그러뜨리네요
몇해 전인가 한 학생이 고민을 털어 놓았다. 자신은 가족에 대한 불만이 많은 데 그것을 시로 써도 되느냐고 물은 것이다. 내용은 참 거북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그것을 쓰라고 주문했다. 다만 문학과 미학 가치에 관한 몇가지 주의점을 알려 주었는데 실기 결과가 매우 좋게 나타난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문학적 텍스트를 구성하면서 스스로의 내면에 대해 검열한다. 이것을 자기 검열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국가와 관습 문화 도덕적 체계로 개념지으며 초자아(super-ego)로 명명했다. 지난 정치독재 시대에 이것은 국가의 권력을 대신하는 것으로 지목되었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억압과 폭력의 주체로 규정되었다. 문학은 그 방어선 이었다. 자아와 무의식은 이러한 초아자적 억압과 방어에서 살아남은 최소의 잉여를 말한다. 한국 사회는 근대화라는 서구의 모더니티을 받아들이며 이러한 집단 검열체계를 권위주의적 폭력으로 강제했다. 전통이나 관습에 위배되는 모든 튀는 행동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것은 독재적인 권위주의적 정치규율의 억압을 가장 완벽하게 내면화한 것이다. 연고주의와 담합 공공론장을 말살하는 모든 밀실지향의 사적 기표가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동양 특유의 공동체주의는 이러한 터부를 통해 자아를 강박적으로 몰개인화 시킨다.
문학은 이러한 모든 문화적이고 관습적이며 현실적 억압에 대한 앙가주망(저항)을 말한다. 프랑스 혁명기의 격동을 가장 격렬한 개인적 파토스로 상징화 시킨 보들레에르는 모더니즘으로서의 이러한 저항의 전위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보들레에르에겐 구시대 왕의 아들로서 스스로 알바트로스가 되어야하는 거세공포증도 있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서구적 검열의 존재론적 양태라면 몰개인적 공동체주의는 공공영역에서 형성되는 한국인의 존재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기 그러니까 19세기 중반을 전후해 헤겔과 다윈이즘· 마르크시즘 나아가 소쉬르와 니이체의 실존주의 철학을 포함하는 모든 현대적인 사상이 일제히 싹을 티운다. 욕망과 개인의 승리가 낭만적 사랑을 통해 사생활의 전영역에 일제히 표출됨과 동시에 이전 구세계에서 볼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상과 이성 그리고 지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멘델이 종교적 사제와 과학자로 분리되는 이지점에 프린키피아를 쓴 뉴튼의 고전과학이 현대의 전자기학과 분리된다. 이성적 주체와 사랑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환희가 돈이라는 물질적 풍요화 함께 부르주아의 사적 영역을 철옹성 같이 구축하던 이 시기가 바로 현대 민주주의가 탄생한 시기라면, 시와 소설의 전성기이자 산업 자본주의의 눈부신 개화기도 바로 이 시기가 되는 것이다.
흔히 개인주의의 승리는 부르주아의 자본주의로 전유되면서 제국주의로 전체화되거나 파시스트화 될 때까지 자아의 극단을 폭력적으로 밀어부친다고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혁명이후 서구 부르주아의 재봉건화도 분명 이러한 역사적 연장선상에 있겠지만 한국의 근대, 나아가 동양의 근대는 혁명적 마르크시즘만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후기의 완화된 수정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를 도입하는 과정과 같았다. 프랑스 혁명을 추동한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러시아를 공산화한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은 이러한 서구의 개인주의적 폭력이 반성적으로 반응한 계몽적 모더니티의 탈근대적 기획에 속하며 이는 한반도 그리고 중국의 등소평적 사회주의 개념으로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서구 자본주의 황금기와 반자본주의는 이 시에서 보여지는 "기울어진 섬 그림자" 처럼 위기의식으로 표출된다. 군함조가 낚아챈 "수장된 땅의 기억" 이나 "잠긴 목소리, 해일" 등은 모두 크리스마스로 표현된 서구적 청교도주의의 디스토피아적 아마겟돈을 상징하고 있다. 아마도 위 시가 열대섬의 낭만주의적 유토피아 -남태평의 섬들은 흔히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우리에게도 환상의 섬이라는 이미지를 강요한다-를 도용했다는 느낌도 들것이다. '빵나무'가 기만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런 중의성 위에서 탈출로를 마련한다는 뜻에서 --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유토피아적 이미지 마저 황금과 스파이스(향료)를 찾아 잉카를 약탈한 야만적 개척에 나섰던 서구적 자본주의의 식민주의적 모더니티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여기서 묘사된 시적 폭력의 가용 범위는 매우 근본적인 것이 된다.
위 시에서 보여지는 특징은 이러한 서구적 자본주의가 어느덧 개인의 검열을 넘어 반성적 자본주의로 나가는 단계를 보여준다는데 있다. 시는 ‘새들의 발목을 깨물며, 섬 그림자를 일그러뜨리’는 부정을 통해 연민이라는 자기 검열을 거쳐 거시적이고 탈식민지적인 자본주의적 폭력의 성찰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섬은 탓할 누군가도 모르는 채
물에 잠긴 빵나무처럼 시들어 가고 있어요
가라앉는 나라 키리바시에
크리스마스를 돌려주세요. 빵나무를 돌려주세요
대산 문학상은 전통면에서나 그 수준면에서나 학생 문학의 정전이자 입시의 개인적 학습서 구실을 한다. 학생들은 대개 기성의 관념이나 가치 혹은 그보다 더 급진적이거나 본질적인 정치·사회적 구조를 전복하거나 의문을 표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정확히 말하면 두려움보다 막연한 거부감을 느낀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텐데, 이는 우선 학생들이 기존의 가치가 어떤 구조위에 있으며 어떤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접근이 수능제도로 지체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아의 열린 토론과 텍스트의 개방적 독해가 필요한데 그것은 아까도 말햇듯 검열되거나 막혀있기 일수다. 복합적인 논술은 이것의 전면적 반성을 구조적으로 수용한 제도지만 --이것은 분명 서두에서 인용한 김수영 시인 처럼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걸어온 민주주의에 대한 고결한 투쟁으로 환원될 것이다 -- 문학실기는 개인의 문제적 자아를 정면에서 다룬다는 면에서 이것과도 전혀 다른 영역을 요구한다.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고등부 학생 대다수의 약점이었습니다. 다수 학생들이 누군가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씨를 쓰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 대산 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
그렇다, 우리는 지금 1990년을 기점으로 해체된 서구 공산주의와 때맞춰 더욱 위기화한 자본주의적 문명의 새로운 정신적 탈출로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아마도 이 시의 힘은 오롯이 여기서 발현될 것이다. 그 힘의 근거들이 얼마만한 언어적 묘사의 실체성과 진성성으로 발현되고 있는가가 이 시의 미학이자 소통가치가 될 것이다. 시를 읽는 다는 것은 그것을 찾는다는 것이고, 시를 쓴다는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존주의가 프랑스 혁명을 통해 가능해진 언어의 내밀한 문학적 영역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적 존재의 전통을 소환했다면, 오늘날의 탈구조주의나 탈현대이론들은 이것의 에피스테메(언설구조)에서 더 근원적인 탈출을 요구한다. 이연서의 시 <키리바시를 살려 주세요>는 이 절규의 표명에 다수의 심사위원들이 뜨겁게 응답한 결과인 것이다.
문명에 내재하는 새로운 모든 언어적 기표들이 폭력 속에 근거한다는 인간 본질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적 성찰은 분명 현실을 권력의지로 재해석한 니체의 전복적이고 비판적 사고의 연장선에 있고,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자본주의를 노동이라는 본질부터 재 성찰한 마르크스의 시기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울러 꿈의 낙원 키리바시를 태평양 바다 속으로 가라 앉혀 버리는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의 폭력과 억압을 어떻게 시적으로 승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문제도 이 근저에서 제기된다. 일상 밖으로의 탈출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당의 언어인 샤머니즘으로까지 접근해야 하는 반이성적인 시어의 숙명은 이 시에서도 알수 있듯이, 상투성과 성찰적 시어의 사이를 헤메는 충분히 애매한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읽기와 쓰기로서의 텍스트에서 더욱 도전적인 해석의 권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늘 학생들에게 비판적 읽기를 요구한다. 시간 앞에 있는 자아의 불완전한 본질과 뜨겁게 대면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기존 질서와 자아 검열의 감옥에 완벽히 포획되어 있다. 합리성의 도구와 이성에 속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의 대칭적 폭력이자 극단인 지난 냉전시기가 그나마 문학을 가능하게 했다는 역설이 그것을 간명하게 증거한다. 때문에 문학의 역사, 더 정확히 감동의 역사는 그것에 대한 도전의 기록이며 미학역시 그런 기록의 당위성이다.
빵나무를 돌려달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은 사실 커피콩으로 가난한 제3세계 어린이들을 빈곤에서 해방시킨다는 커피광고 처럼 왜곡되고 수단화한 동화적 퇴행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지금 이 혼란과 위기의 시점에서 어디로 자신의 시적 메시지를 마치 해님 달님을 구원하는 동아줄 처럼 날려보낼 것인가? 그럼으로써 현실권력에 포획된 묘사로서의 시어와 그 한계를 어떻게 일상성을 벗어나 존재를 깬 채 감동적 질서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인가?
나는 현실의 자본주의와 인간의 불화 속에서 가슴 떨리는 우주의 시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