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외 4편
한정우
빗장이 풀린 채
대문은 그곳에 오래도록 매달려 있다
대문 끝에 걸어놓은 풍경이 밤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별들 몰려와 가슴을 짚는다
저 문을 열고
아흔아홉 번의 봄이 오고
유성처럼 가을이 소리 없이 다녀갔다
새는 등 위에 흰 구름을 얹고 건너와
마당 가 대추나무에서 녹색의 계절을 살다 가곤 했다
어느 새벽 다급한 손이 등을 후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검은 날개를 펼친 늙은 영혼이 새벽 찬 바람을 앞세우고
대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밤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쏟아져 내리는 별을 다 받아 삼켰다
별을 삼킬 때마다 눈에서 왈칵왈칵 참꽃이 피는 것이다
흔들리는 착란의 순간들
어둠의 뒤안으로 밀어내고 있다
나는 드나드는 별과 바람의 파수꾼
바람은 낡은 문 앞에서 방향을 꺾는다
이제는 저 높은 벽기둥으로부터
족자 속 대문을 내려놓을 때,
- 2019년 제2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수상작
죽거나 혹은,
바다로 가는 강릉발 고속버스는 지금
예보 없이 몰려온 먹구름 속을 혼신으로 달리고 있어
곧 장대비가 퍼부을 것만 같은 깊은 두께의 구름
마침내 천둥을 동반한 짙은 먹색비를 퍼붓기 시작했어
집을 나서기 전, 비둘기 날개처럼 펼쳐 넌 옥탑 마당의 하얀 수건
비의 무게로 휘청이다가
먹비에 물든 비둘기 날개 되어, 툭툭 떨어져
죽어 있을지도 모를
거친 비가 쏟아지면
좁은 마당은 젖은 비둘기 날개로 가득 덮일 거야 덮인 적이 있었어
버스를 되돌려 옥탑으로 가는 동안 모든 상황은 이미 끝이 나 있을 거야
아 그예 죽었구나
햇볕 펄펄 끓던 여름 한때,
옥탑의 기온이 상승한 만큼의 높이로 비둘기가 날아올라
기어이 날아간 적도 있었어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너무 춥거나 엄청난 비가 오거나 무지하게 덥거나
죽거나 혹은,
아주
날아가거나
강릉발 버스는 먹구름 속을 막 통과했어
* 웹진 《시인광장》(2020년 8월호)
카페 同人 1985
한 풍경이 흘러갔다
담쟁이가 주인 없는 담을 넘는다
벌건 속살을 드러내던 능소화
올여름에는 피지 않았다
역병이 길어지는 동안
우리들 방학도 길어지고
일몰의 그림자도 짙어졌다
수업 후 동인에 모여 따뜻했던 시간들
턴테이블이 멈추고
긴 탁자에 놓였던 어묵탕 국물도 식은 지 오래,
제자들 그윽한 저녁 풍경을 온몸으로 품었던
노시인의 따스한 의자도 더는 볼 수 없어
사람들을 기다리던 대문은
세 번째 봄을 넘기지 못하고 아주 잠겼다
나무 빗장 밖에는
아직 돌리지 못한 발길들이 서성이는데
우리는 역병을 예기치 못하고
길어질 방학을 예기치 못하고
추억의 몰락을 예상치 못했다
무언의 더딘 세월이다
그 많은 풍경들
담쟁이 담 밑에 고이 묻혔다
* 《문화도시 용인》 초대시, (2022년 상반기호)
서해
바다가 빠져나가고 잿빛 영토가 광활하게 드러났다
방금 전 그리고 어제, 엊그제 뉴스로 전해진
바다로 투신한 사람들의 시신은 드러나지 않았다
여기 이 바다, 이 자리였던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빈 갯벌 위로 낙조가 드리운다
어디까지가 바다의 영토이고, 일몰의 붉은 경계인지
시신이 떠내려간 바다의 뒷면 어디까지가 죽음의 경계인지
불콰해진 갯벌 속의 갓 생명들은 끈적한 숨소리 내뿜으며 줄기차다
벌 가장자리에서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물결무늬조개 하나
앙다문 아가리 속에 서해를 숨긴 침묵의 시간
밀물의 시간이 오면 천천히 입을 열어
숨겼던 바다를 울컥울컥 토해내리
목울대에 걸려있던 검은 뼈들을 와르르 쏟아내리
서해는
너를 품고, 너를 묻고 광활한 바다의 영토를 넘어
순환의 물때를 기다리고 있다
나비는 뼈를 버렸네
제라늄 화분에 따라온 나비가 나비를 불러
집 안이 호접으로 가득 찼다
모나크나비뼈, 사향제비나비뼈, 부전나비뼈, 모르포나비뼈, 뼈, 뼈를 버린
무척추의 언어 무척추의 날개
손가락뼈가 없어 부드럽고 가슴뼈가 없어 순하구나
숨소리에도 모서리가 없어
친밀하게 내밀하게 더 가까이 다가가
세상 자유로운 나비를 사랑했다
몸 밖으로 뼈를 버리지 못한 나,
산제비나비 한 마리 키우고 싶지만
구석구석 모난 뼈가 많은 내 안에는
나비가 날지 않는다
잡았던 날개를 놓아준 두 주먹 사이로
푸른 공간이 생겼다, 푸른 공간을 날아 떠나는
날개, 날개들
놓아주어야 할 것이 날개뿐일까
한정우|2019년 제2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우아한 일기장』이 있음.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