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여섯째주일 성서일과
신명기 30:15~20 /시편 119:1~8 /고린도전서 3:1~9/마태복음 5:21~37
성숙한 신앙
본문 : 고린도전서 3:1~9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시크릿가든’에 있는 화분을 보니 수선화 싹이 올라와 봄이 오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꽃샘추위로 제대로 피지 못했던 키 작은 수선화가 올해는 제대로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살아있다면 피어날 것입니다. 죽지 않았다면 수선화 알뿌리에 지난 해 ‘꽃샘추위’가 새겨져 있을 것이요, ‘추위에 이기는 방법’ 역시도 새겨졌을 것을 것입니다. 지난 해, 키 작은 수선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꽃샘추위를 만난 것은 그의 죄 때문일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수선화 구근이 꽃샘추위를 만나 제대로 피지 못한 이유는 그의 죄 때문일까요? 수선화의 입장에서 보면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성서에서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욥’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욥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는 중에 그를 위로하고자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친구가 찾아옵니다.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인 신앙의 수호자로서 욥이 당하는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욥의 죄 때문일 것이니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은 ‘인과응보’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의 시각으로 이번 주 성서일과인 신명기 30장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과 시편 119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받는 복’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문자로만 읽으면 말씀의 결론이 너무 분명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법과 저주의 법이 있는데, 생명의 법을 선택하고 지키는 자가 복을 받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진리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욥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현실은 ‘인과응보’의 원칙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생명의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거나 선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을 지키며 살아도 현실에서는 고난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생명의 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 인과응보의 한계
인과응보(因果應報)란,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반드시 받게 된다는 말로 흔히 ‘죗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인과응보가 동양사상에 깊게 뿌리내린 데에는 불교의 영향도 크지만,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크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으면 ‘칭의’ 즉,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만일, 인과응보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선하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당하는 고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한 초대교회의 스데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생명의 법과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보면 ‘복 받은 삶’이 아니라 저주받은 삶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고, 형틀에 거꾸로 매달려 죽고, 창에 찔려 죽고, 옥에 갇혔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그들은 생명의 법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는데, 죽음의 순간까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인과응보’라고 했는데, 우리의 현실에서 ‘인과응보의 실현’은 요원해 보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현실도 역시 ‘인과응보의 한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철저하게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는 하나님, 인간의 구원도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기독교 신앙은 ‘인과응보의 논리’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복’,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받는 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의 개념과는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 것입니다.
■ 마태복음 5:21~37
성서일과 복음서는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전통을 뒤흔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깊은 뜻을 설파하십니다. 전통적인 가르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 속에 들어있는 본래의 의미를 제시하며 실천해야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 속에 있는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하고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서 단순히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맹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어른의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고 비난하는 자, 형제를 고발하는 것이 곧 살인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노하지 말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음에 대해서도 육체적인 순결을 넘어서서 마음으로 음행을 품는 것도, 정당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생계의 위협을 당하는 이들을 아내로 삼는 일도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고엘법에 따라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에게 버림받아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여성을 아내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옳다 아니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자기 말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일에 대해서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에 얽매여 있는 신앙은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성숙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고린도교회
고린도는 고대로부터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의 이름은 매춘업을 의미하는 ‘Corinthianize(방탕해지다)’에서 유래했는데, 고린도의 주된 신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신화를 통해 알고 있는 미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프로디테는 사실, 음탕한 사랑의 여신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주된 신으로 섬기는 도시 전체에는 신전 매춘을 포함한 성적 방종과 헬라 문화가 창궐했습니다. 헬라 문화(헬레니즘)는 우상숭배와 이원론적인 철학과 몸의 부활을 거부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상업적인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지만, 세속적인 문제들이 교회 안에 속속 들어와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분쟁, 음행, 소송사건, 혼인문제, 우상숭배 등 다양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뒤에도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었고, 그러자 세상의 것들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왔고, 그들은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에 처한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보낸 서신이 고린도전서입니다.
■ 어린 아이의 신앙(육신에 속한 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하며, ‘어린 아이를 대함과 같이 한다(고전 3:1)’고 합니다. 본문에서 ‘어린 아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여전히 복음의 진전이 없이 영적인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책망하는 상징이 담긴 말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시기와 분쟁 속에 있고, 사람을 따라서 다메섹에서 회심한 바울파,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자신은 복음의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씨앗에 물을 주었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왜 당신들은 본질을 벗어나 ‘심는 이가 중요하다, 물을 준 이가 중요하다’고 다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다툼에 몰두하다보니, 신앙적으로 유아기에 머물고 있으니, 심오한 복음의 진수를 전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신앙은 현세적인 복을 받는데 몰두합니다. 상업적인 중심지인 고린도에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소위 말하는 기복신앙적인 한계를 넘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과응보 신앙과 전통적인 신앙관에 사로잡혀 복음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표층에 드러난 것에만 몰두함으로 수박겉핥기식의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 성숙한 신앙
오늘의 말씀을 통해 성숙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고 있는데도 여전히 고난 중에 계신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인과응보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둘째,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며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키십시오. 고난의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든든히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셔서 문자로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깊은 진수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넷째, 깨달은바 하나님이 말씀으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침묵이 금이라고 하시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거짓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병행본문 시편 119편의 말씀에서 성숙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 받는 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시 119:6,8,9).“
시편의 말씀에서 ’성숙한 신앙인‘이 받는 복은 ’늘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런 삶을 사랑가는 이들이 ’생명‘을 택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네가 생존하여 번성할 것이요, 또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6)“하십니다.
믿음 안에 사는 성숙한 신앙인도 까닭 없는 고난의 시간에 거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분들 되시고, 고난 중에 계신다면 그 모든 고난이 복의 디딤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