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시조는 글자수 맞추는 놀이가 아님
시조도 시의 한 부분이기에 그 속에 시심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글자수만 맞추어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죽 나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냥 초장이 중장에 이어지고 중장이 다시 종장에 이어지는 평범한 작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의 예를 볼까요.
☬ 서리꽃 / 000
늦가을 밤바람이 하늘을 울리더니
새아침 온누리에 무서리 내려앉아
동짓달 이불솜 주실 목화밭이 되었네
위 작품을 한줄 작문으로 펴봅니다.
늦가을 밤바람이 하늘을 울리더니 / 새아침 온누리에 무서리 내려앉아 / 동짓달 이
불솜 주실 목화밭이 되었네
이렇게 펴 놓으면 본래 시조였다는 느낌이 별반 들지 않지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
여 각 장의 끝(파란 글씨)부분이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바톤 역할을 해서 그렇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각 장이 어느정도 독립적 표현이어야 한다는 얘기이지요. 위 작품
에 어느 정도 독립성을 부여해 볼까요?
늦가을 밤바람이 하늘을 울리더니
보챘구나
새아침 온누리에 무서리 내려앉아
피워낸 무서리 꽃
동짓달 이불솜 주실 목화밭이 되었네
위의 파란색으로 예를 든 것처럼만 고쳐보아도 한줄 작문이 되지는 않지요. 아직 한
줄 작문처럼 써지는 작품이 있는 분들은 각 장의 끝 구 처리에 각별히 유념하시기 바
랍니다.
2장(章) 이상의 어미를 명사구(名詞句)로 끝내지 말자. 작품이 딱딱하게 된다.
< 세태 > - 전문 / 김00
하늘엔 하얀 구름 산에는 푸른기상(명사구) ➟ 뚝 끊어진 느낌
차마다 경쟁하듯 내닫는 고속도로(명사구) ➟ 역시 뚝 끊어진 느낌
왜 이리 옆도 안 보고 앞만 보고 가는가.(동사구)
☬ 어머니 12 - 2연 중 둘째 연 / 민0
봄날의 새싹들은 사뿐사뿐 아기걸음
젖병물고 아장걸음 온 세상 나들이
하늘은 뿌려주는 지아비 대지의 품 어머니
☬ 봉선화 - 3연 중 1~2째 연 / 임00
돌담 옆 우물가에 햇볕 안고 서있는 꽃
은은한 달빛 아래 이슬 먹고 자라난 꽃
티 없이 맑은 미소로 붉게 물든 봉선화.
생각하면 뭉클한 어린 시절 닮은 꽃
재 너머로 시집간 누이동생 닮은 꽃
가는 비 한줄기에도 휘청대며 놀라는 꽃.
* '어머니 12'와 '봉선화'는 아예 3장이 모두 명사구로 끝맺어 작품이 너무 부러지는 맛을 주고
있다. 시조가 시절가조인 노래였다는 점을 상기하자. 딱딱 끊어지는 노래를 누가 듣기 좋아하
겠는가. 노래로는 못 부르더라도 낭송할 때를 생각하면서 쓰자.
☬ 보이고 들리고 감지되는 현 상황 뒤의 이미지 캐기에 신경쓰자.
☬ 풍경소리 / 박00
한적한 암자 뜨락 섬돌 위 흰 고무신
마루 옆 양지 녘에 삽살이 선잠자다
추녀끝 풍경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네.
☞ 위 시조도 진솔하고 담백한 한 수의 좋은 작품이긴 하지요. 그래도 배우는 입장에
서 한번 세밀하게 들여다 볼까요?
우선 보이는 정황인 ‘한적한 암자 뜨락’, ‘섬돌’, ‘흰 고무신’, ‘마루’, ‘양지녘’, ‘삽
살이’, ‘선잠자다’, ‘추녀끝’, ‘풍경소리’,‘귀’, ‘쫑긋 세움’ 과 같은 시각적 청각적으로
감지되는 것의 제시로 일관되어 세상에 내어 놓으려는 의도가 무언지 얼른 잡히지
가 않지요.
이는 열거한 사물간에 서로 관련성이 약해서이기도 하고 이미지 도출과 메시지 담
기가 미흡해서이기도 하지요. 즉, 초장의 ‘흰 고무신’과 ‘삽살이의 단잠’ 사이의 관련
성이 희박하고, 풍경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는 삽살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지요. 이를 조금 바꿔봅니다.
한적한 암자 뜨락 삽살이 선잠 깨어
풍경의 법문 소리 귀 쫑긋 세웁니다
그 옆의 흰 고무신도 코를 벌렁거리고.
☞ 위 작품의 정황이 거의 비슷한데도 아래 작품이 위 작품과 다른 점은 보이고 들리
는 정황을 나열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의인화시키고, 작가만이 느낀 시어나
표현을 넣음으로써 정황 뒤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풍경의 법문’이나 ‘흰 고무신이 코를 벌렁거린다’는 표현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작가의 느낌에서 살아나는 정황들이지요. 즉, 너무도 조요로운 상황을 깨
는 풍경도 법문을 하는 것 같고, 강아지가 그걸 들으며 고무신도 반응하는 것처럼 보
게 된 것이지요.
시가 어떤 대단하고 엄청난 일을 내포하여야만 하는 것이 아닌 이런 작은 느낌의
울림 또한 시가 되고 그것이 곧 시심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물론 한 예를 들
어본 것이지요. 시에 정답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