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날이 풀렸군! 하면서, 뭘 하지? 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림 작업을 하면 될 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작업 중인 '파타고니아 풍광'은 물감이 말라야 그 다음 과정에 들어갈 것 같아 새벽에도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은 지난 다음에 해야 할 텐데...... 하다가, 어쩐지 어딘가를 좀 가보고 싶은 충동에,
어딘가 바람 좀 쐬고 돌아올까? 하게 되었고,
여행을 가려는 건 아니었기에,
장이나 봐 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여기 제가 사는 공릉동에서 가까운 경기도 '시골 5일장'이 몇 곳 있어서,
지난번에도 두어 차례 다녀왔던 기억이 있던 터라(경춘선을 타면, '천마산' 부근의 '마석 장'과 조금 더 가면 '청평장'이 있어서) 날짜를 보니, 오늘 25일은 그 쪽 장날이 아니어서,
5일 10일 장은 '용문'이던데...... 하다가,
거기로 가 볼까? 하면서 일은 시작됐습니다.
거기는 조금 멀기는 해도,
비가 많이 내리기도 했던 올 여름 내내 물 구경도 한 번 못했던 저는,
그 순간 '팔당호'가 떠오르면서,
그래! 그 쪽으로 나가면 차 안에서나마 물구경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야. 하면서 보니, 8시가 넘어가고 있기에,
기껏해 봐야 한 시간 반이면 닿을 테니, 장날하고도 딱 맞네! 하면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여기서는 '경춘선' 쪽이 훨씬 가깝긴 하지만, '용문장'도 전철을 세 번을 갈아 타야 하지만,
총 정거장 수는 20개 정도면 되는 곳이니까.(서울의 동북 끄트머리에 자리한 이 동네에서는 강원도 쪽으로 나가기가 용이합니다.)
'화랑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 '태릉입구'역에 내려 7호선을 갈아타고 세 정거장 가면 '상봉'역이라,
거기서 중앙선 전철을 타면('용문' '지평'역) 되는 행로였지요.
물론 저는 공짜구요.(65세 이상)
가는 중간에 '운길산'(수종사)역도 있고 '양수'리역도 있는 등, 그 주변 산세가 아주 빼어나 북한강 남한강이 만나는 팔당댐도 있는 등 산과 물이 어울리는 경치가 좋은 곳이기도 하거든요.
물론 오늘 나들이는 그런 곳을 다 돌아다닐 건 아니었지만, 기차 안에서 그런 바깥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람은 충분히 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금요일 아침,
멍하니 앉아 있다 갑자기 '장보러' 바깥 나들이를 하게 됐던 겁니다.
쉽게 갈 수 있는 행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여행을 가는 듯한 여정 역시 아니니까요.
그런데 지하철을 두 번 갈아 탄 뒤 마지막 전철(중앙선)을 탔고, 그 전철이 '팔당역'에 닿았는데,
다급한 안내방송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두세 정거장 뒤에 있는 '국수'역에서 신호등이 고장나 운행을 계속할 수 없다면서, 그 전동차 앞에 갔던 다른 차량들도 그 중간에 다 서서 운행 중단된 상태니, 바쁜 승객들은 거기서 내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것이었고,
최대한 빨리 복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긴 하지만, 그 당시로썬 언제 출발한다는 안내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출발한다는 약속을 드리지 못하니, 각자 알아서 자신의 여정을 조절해보라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런 일은 흔한 게 아닌데(그 많은 전철의 다른 노선에선 이 순간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터라), 여름 내내 아파트에 처박혀 있다가 더위도 한 풀 꺾이고 해서 모처럼 콧바람이라도 쐬겠답시고 나온 날, 하필이면 바로 그 날 그 행로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재수도 지지리 없는 내 인생! 하는 짜증과 함께,
뭐 하나 제대로 풀려주는 게 없구나! 하는 한탄과 함께 저는 '자조'의 분위기에 빠지고 말았답니다.
그러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일부(몇몇) 내리는 승객도 있었는데,
저는 그러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하게 앉아만 있었는데,
배가 슬슬 아파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미리 계획을 세워 아침 일찍 준비해서 나온 게 아닌, 즉흥적으로 나온 바람에 샤워를 하기 전에 용변을 보지 못하고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차가 언제 떠날지도 모른다는데, 화장실에나 다녀올까? 하면서, 역을 나오게 되었답니다.
어차피 '수도권 전철'이라 무료니, 설사 그 객차가 떠난다 해도 다음 차를 타면 될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중간 역에 내려(밖으로 나와야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용변도 보았는데,
기왕에 나온 김에 아예 역사 밖으로 나와도 보았는데,
뭔가 아마득하드라구요.
거기 역앞에서 버스를 타면 '양평'이나 '서울'에 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돈을 들여가며 갈 생각은 아예 없었고(그렇다고 마냥 전철이 출발하기를 기다릴 수만도 없을 것 같았는데),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간다고 해도, 서울행 버스를 타도 어딘가 터미널에 내려 또 전철로 갈아타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그 시간과 경제적인 손실은?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습니다.
에이, 무슨 이런 일이 벌어져가지고! 하는, 뜻밖의 상황에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습니다.
'시골 5일 장'에 가는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러니, 하는 수 없었습니다.
다시 돌아가, 죽으나 사나 전철이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어서,
결국 다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제가 플랫홈에 다시 닿으니,
웬걸?
아까 제가 타고 왔던 객차는 이미 떠난 뒤 아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운행이 재개되었다는 얘기였기에,
다음 차를 타면 되잖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아마 근 30분 정도를 기다린 다음, 다음 차를 타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터널 몇 개를 지나 '운길산' 역을 거쳐 '양수리' 다리를 지나는데, (아래)
너른 팔당호의 물이 시원하기만 했습니다.
(겨우 사진을 찍고...)
그런데요, 거기서 몇 정거장을 지나 '용문'역에 도착하는데,
서울에서 '용문 5일장'을 가는 사람들이 제법 되드라구요.
대부분이 저 같은 노인이던데, 장 수레를 끌고 가는 여자들이 적지 않았고, 남자들 역시 의외로 많드라구요.
물론, 그 분들도 저 같이 공짜 전철을 이용해서 장을 보러 오는 모양이었지요.
아무튼 현지에 도착하니 거의 11시 반이 되었드라구요.
'용문'역에서 보니 바로 그 앞에 장이 서던데(아래),
거기 간판에 '천년 시장'이라듯, '용문 5일 장'은 시골장 치고는 상당히 크드라구요.
저도 기왕에 거까지 간 김에,
서울의 마트거나 제가 다니는 채소가게에서는 보기 힘든,
커다란 토마토(위 사진 오른쪽, 5천 원) 한 바구니를 샀고(저걸로 '토마토 샐러드'를 해 먹으면 아주 맛있지요.),
어차피 과일도 다 떨어진 상태여서,
참외도 한 바구니(역시 5천 원) 샀고,
'상추'(3천 원),
그리고 직접 농사를 지은 옥수수를 길에서 까서 팔기에(12개 골라서 만 원),
그 씨알이 실하기에 사게 되었는데,
파리를 날리고 있던 곳에서 제가 옥수를 다 고른 뒤,
자, 세어 보세요! 하면서 만 원짜리 지폐와 옥수수 봉투를 건네는 사이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냥, 가져 가세요. 확인 하나 마나... 하고 옥수수를 쪄서 팔던 아주머니가 활짝 웃더니,
근데, 아저씨가 오시니... 손님들이 막 몰려오네. 아저씨는 손님들을 몰고 오시는 분이신가 봐요. 아이, 고마우셔라! 하고, 아주 반갑게 얘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저도 기분이 나쁠 리는 없었구요.
그렇게 등 가방이 빵빵하게, 경기도까지 가서 장을 보았답니다.
('2부 얘기'도 있답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제가 힘들어),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장 구경 잘 했습니다.
토마토, 옥수수, 상추도 먹고 싶네요.
올해 고창 옥수수는 생각보다 산출이 좋지 못했답니다.
삶아서 냉동실에 몇 개 두었는데, 선생님이 언제 와서 맛볼 수 잇는 날이 있을까요?
아, 상당히 너른 밭에 심었던 옥수수였는데......
이렇게(글처럼) 생물 옥수수를 사다 맛을 봤으니, 굳이 그 옥수수 맛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