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건만 혹시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허탈한 마음을 주체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40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그렇다고 당시는 쓰지않던 택용이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상하고...
어느덧 40년이 흘렀소 .
6.25 참화로 가족과 생이별한 이가 어찌어찌 나 뿐이오만
해마다 6월이 오면 뭉클 가슴깊은 곳에서 치미는 이산의
설움을 감당못하고 기도로 눈물을 삭이곤 합니다.
택용,신용,성용,인용,진용,북에 두고 온 다섯애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얘기는 어찌 흘러 전해진 소식으로 들었소.
1950년 12월 3일,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떠날 때
둘째 가용이만 데리고 월남한 것이 지금 내 가슴속의 못이
되었다오.그것이 벌써 40년전. 당신과 내가 나이 여든이 되도록
북과 남에 헤어져 애틋한 그리움만 간직한 채 살게되는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소 .의사란 직분 때문에 국군야전병원
엠브런스를 얻어타고 평양을 빠져나올 때 거리의 아수라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날 아침,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이용 못해 임시 부교를 건너서나마 좀 더 남쪽에 가 있겠다고
당신과 다섯 아이가 신양리 집을 나선 뒤 나는 교회에 가 맹렬히
기도를 했더랬소. 오후 4시 경 ,국군야전병원 일을 해 준 관계로
친해진 安소령이 앰브런스를 대고, 타라 했을때 나는 한 두어달
후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이란 생각으로 차에 올랐답니다.
그때 신양리 집에서 부모님들도 계셨지만 중공군이 내려오면
젊은이들은 모두 죽인다니 너만 타고 떠나거라 .
우리는 집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셔 부모님도 남겨둔 채 였지요.
그 일도 한(恨)으로 남았습니다.
피난민들로 북적이는 평양종로거리를 앰브런스가 달릴 때 가용이가
하염없이 창밖을 보다 문득 "아버지 저기 신용이"하고 외친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환자 차에 얻어타기도 했으려니와 차를 세운다면 피난민들이 몰려 와
너도 나도 태워달라고 간청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며칠간 당신과 아이들은 걸어서 남하하다가 중공군이 앞질러
가는 바람에 울며 평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나중에 목격자들 한테
들었습니다. 다 내 불찰입니다.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지 않았다면...또 종로 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
당신도 기억하지요.
전쟁의 책임을 ,또 역사의 심판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까?
1945년 소련군이 진주하고도 5년간을 당신과 나 우리가족은 평양에 살았지요.
공산주의자들이 나의 신앙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유물사관을 심어주겠다고
별렀지만 실패한 것을 당신은 똑똑히 기억하겠지요
당시 내가 김일성대학 의대교수로 있었고 또 김일성의 맹장수술도 해
주었다는 허황된 소문도 나돌았지만 나는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소 김일성대학 부총장 박일, 부속병원장 최응석등이
1년 후면 장선생을 꼭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드리리다고 장담했지만
그 결과는 무었이었습니까
여보, 평화통일에의 꿈은 40년 전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지금이나
북과 남의 우리민족 모두의 염원일 것이요, 특히 북녘에 부모,처자를
두고 와 불효자, 불민한 남편, 그리고 제 도리를 못한 아버지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에게는 민족사랑에 의한 평화통일을 보는 것만이
여생의 마지막 소망이기도 하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들이 속속 통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무력에 의한 통일은 반대합니다.
당신과 가족이 보고싶다고 다시 수천수만의 피를 흘리는 댓가로
우리가 재회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택용 어머니
나는 요즘도 이따금 당신과 아이들의 꿈을 꿉니다.
1950년 월남 후 부산에 내려와 세운 무료병원,복음병원 앞에 당신과
내가 서 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 당신을 삼켜가는 꿈도 꾸었습니다.
놀라 일어나보면 텅 빈 방에 혼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
당신에 대한 나의 깊은 사랑을 다시 느낍니다.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준 노래를 나직이 불러봅니다.
단풍잎은 떨어져서 뜰 앞을 쓸고 나간다.
누런 국화향내는 바람을 떠나 살더니
처량한 가을이여,......
붉은 물 풀어놓은 것 같이
찬란하다 낙조
내가 지금 인생의 낙조에 들어섰으니 이제와서 부르라고 당신이
가르쳐준 것이었을까요.
40년을 남한에 살며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나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 아니다.
이 사랑은 육(肉)으로 있을 때 뿐 아니라 떠나있을 때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 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이편지를 쓴 장기려 박사는 1950년 한국전쟁때 고향 평양에 부모와 아내,
그리고 다섯 아들을 남겨둔 채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둘째아들
가용이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는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부산에 두 개의 병원을 지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80세때 북녁에 있는 아내가 아직 살아있을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아내와
헤어진지 40년만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로 한다
끝내 상봉은 못 했지만 같이 월남한 차남 장가용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북의 아내에게 보냈는데 아내는 사진을 보더니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게 가용이구나, 아버지와 꼭 닮았어."라고 했는데 사진을 가져온 사람이
"그 분이 장기려 박사님이고 옆의 젊은이가 가용입니다."고 말해주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내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며 아내를 그리워했다.
춘원 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나고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는데 장기려 본인은 부정했다.
그는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하였고 오늘날 의료보험의 계기가 되었고
청빈과 봉사하는 삶을 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별명으로는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작은 예수등이 있다.
장기려박사는 이편지를 쓴지 5년후인 95.12.25 부산에서 85세의 나이로 귀천했다
요즘 의사들의 진료거부를 보며 그분의 편지와 삶을 되새겨 본다
첫댓글 춘원 원작 영화 사랑의 주제곡 올려드립니다
https://youtu.be/ossueKy10TI?si=AwIs-MLx98KZskOx
PLAY
장기려 박사님
박사님 업적은 환자들 가족들은 알아요
이복 남동생의 투병기 몇번의 수술
부친의 말씀 처럼
조금만 더 살아주면 의술이 발전 해서 나을건데
투병생활 하다 열두살에 ~~
선천적 신장병 이었습니다
큰언니님 반갑습니다
장기려박사의 얘기는 잘알려져있지만
그분이 80세에 북녁에 남은 아내에게 쓴 편지는
참사랑이 어떤건지 잘설명하기에 인용해 봤습니다
열두살의 어린나이에 떠난 동생분 요즘같으면
충분히 살수 있었을텐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 이야기에서는 눈물이 납니다.
저도 지병이 악화돼 이젠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온다는 예감에 눈물이 많아지네요.
병약하게 태어나 만 68세(낼모레가 음력 5월 19일 생일이네요)로 2년 뒤면 70세인데
70년 가까이 이 아름다운 세상을 가난으로 주눅들고, 상처로 얼룩진 세월이었지만
비록 단칸 월세방에서 시작한 신혼집에서 아들이 잉태되어 탄생하고
사랑의 끈이 되어준 아들을 키우며 행복을 느꼈고
가진 재주란 오직 남보다 글을 조금 잘 쓴다는 것, 그것 하나로 상을 받을 때마다 위안을 받고
살아온 내 인생길입니다.
1956년 음력 5월 19일, 이전에 저는 이 세상에 없던 존재였는데
어머니 아버지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와 소풍을 마치고 떠나는 것에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단지 흙(없음)에서 와서 흙(없음)으로 돌아갑니다.
남은 날(여생)은 하늘이 정해주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웃과 정을 나누고 덕을 쌓으며 행복을 안고 살다 가고 싶습니다.
박시인님 반갑습니다
음력 5월 19일이면 월요일이 생일이시네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위에 댓글 쓰신 큰언니님과 석촌형님도 이방에 계신데 아직 칠십도 안되셔서
너무 비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처럼 이웃과 정을 나누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좋은글 많이 쓰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
힘내세요.
장기려 박사 님의 인생 이야기에서
내 인생을 뒤돌아보며 두서없이 지껄여서 죄송합니다.
네 백세시대에 아직 팔팔한 나이고 의술이 발달해
왠만한 병은 다 고칠수 있으니 힘내시고
즐거운 주말되시기 바랍니다 !
장기려 박사님 기념관은 부산 망향의 길 걸으러
가면 산복도로 부근에 마치 그분의 검소한 일생처럼 아주 작고 소박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청십자병원은 우리가 고딩때 범냇골 로타리 부근에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존경 안할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 아픈 가족사는 처음 듣습니다
몸님 반갑습니다. 장기려박사기념관을 가보셨군요
그분의 일화는 많지만 돈이없는 환자에게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집으로 가세요"라고 했고
몸이 허한 환자에겐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라는 처방전을 내렸고 북에 있는 아내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의도 특권을 누리기 싫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장기려박사님 같은
분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을겁니다
부인에대한 간절한사랑과 북에
두고온 자녀들 감동의글. 울컥하는
맘으로 읽고 갑니다
지인님 반갑습니다
그분은 평생 자기집도 없이 병원옥상에
지은 숙소에서 사셨다 합니다
아마 이런분은 다시 보기 힘들거라 생각됩니다
지고지순한 부부의 사랑 그리고 평생 한길로 향한 박애정신 존경합니다 가정과 사회를 위해 바친 신념 뭐라 말할 수없이 감동입니다 그산님 감사합니다
운선작가님 감사합니다
이산가족 특별상봉 제의도 거절하고
젊은 시절 아내가 알려준 노래를 부르며
천상에서 재회하길 기다리셨다 합니다
우리 생애에 이런분을 다시 만나기 힘들거라
봅니다
남동생 수술 몇번 에 집한채 날아갔어요
동생분께서 의료보험 시행되기 전에
돌아가셔서 큰돈이 들어갔나 봅니다
참 대단한 분이시지요
요즘 휴진하는 의사들은 의사도 아닙니다
특히 의협회장 하는 놈
의사면허 박탈해야 합니다
네 저도 의협회장 발언하는 모습을 보니
의사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요즘 의사들이 장기려박사의 생애를 발뒤꿈치 만이라도
따라가면 이런일이 없을거라 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럽습니다. 존경합니다.
자연이다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
장기려박사님이 훌륭하신 분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오늘 그산님 글을 읽으니 또 감동입니다.
남북 이산 가족이 부부일 경우,
십중팔구 남자는 재혼하고 여자는 수절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장박사님의 평생을 바친 순정이 참으로 아프도록 아름답습니다.
이런 훌륭하신 분들이 계셔서 이 사회가 정화되는 것 같습니다.
달항아리님 반갑습니다
이산가족상봉때 보니 남자들은 대부분 재혼했고
여자들은 평생 남편을 기다리며 어린자녀 키우고 사셨더군요
장기려박사같은 분은 아마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고
훌륭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장기려박사님은 치료비없는 환자는 몰래 나가라고 하고
본인은 자신 명의의 집한채 없이 병원옥상에서 사셨다 합니다
오늘 세계가 칭송하는 한국의 의료보험 기원도 장기려박사님이 만드신
청십자운동이라 합니다. 저도 그런분이 계셔서 세상이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정이 넘치는 부부의 사랑
평생 그리워하는 마음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신념
그저 감동 또 감동입니다
멋찐글 감사합니다 ^^
넵 장기려박사님은 정말 하늘이 이땅에 보내주신것 처럼
희생적이고 고귀한 삶을 사신 분이라 봅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비오는 일요일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