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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에콰도르 제2의 도시 과야킬에서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해 최소 12명이 사망
2021년 북한과 말레이시아 단교
지난 2017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김정남 암살 사건후 시신인도와 북한내 말레이시아인 억류문제로 이어지면서 서로 상대국 대사의 추방 초치를 취하였지만 시신과 말레이시아인 교환을 하고 단교로까지는 진행하지 않았다. 다만 그 때 이후로 양측 대사자리는 계속 공석 상태였디.
그런데 대북제재 위반혐의로 미국의 인도요청을 받은 북한인 사업가 문철명의 인도여부를 두고 2019년 이후 법정 공방을 벌이다, 북한은 대법원 최종패소 인도 적법으로 결론이 떨어지고 17일 인도되자 말레이시아와의 단교를 선언했다
2018년 김도연 선수(K-water 25세) 동아국제마라톤대회에서 21년 만에 한국 여성 최고기록(2시간 25분 41초) 세움
2016년 일본 ‘독도는 일본 땅’을 주장하는 2017학년도 교과서 대거 검정 통과
2015년 튀니지 수도 튀니스의 국립박물관에서 2인조 무장괴한 무차별 총기난사 23명 목숨 잃음
2014년 러시아-크림공화국 합병조약 체결
2011년 ‘스텔스’ 워런 크리스토퍼 전(前) 국무장관 별세
크리스토퍼는 1977~1981년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고, 1993~1997년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국무장관을 맡았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는 외교·안보 담당으로 정권인수위원회에 참여했다.
1979년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이 터지자 52명의 인질 석방 협상에 참여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탄생시킨 오슬로 평화협정(1993년),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1994년), 보스니아 평화협정(1995년) 중재 등 역사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훈장(Medal of freedom)을 받기도 했다.
2009년예멘, 참사 대응팀에 자폭테러
한국인 관광객 4명이 숨진 예멘 테러사건 수습을 위해 현지에 파견된 정부 한국 신속대응팀과 유가족이 탄 차량들이 2009년 3월 18일 또 다시 자살테러로 보이는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15일 한국인 관광객 4명이 테러로 숨진 데 이어 정부 대응팀 차량마저 공격한 것이어서 한국인을 노린 테러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예멘 주재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이날 사건은 오전 8시 40분(한국시간 오후 2시 40분) 사나공항에서 10여km 떨어진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예멘 경찰차를 선두로, 유족과 정부대응팀 관계자들이 탄 차량 2대 등 모두 3대의 차량이 샤흐란 호텔을 떠나 공항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이들 차량 3대는 나란히 줄을 지어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는데 차량이 많아 다소 속도를 줄이던 도중 경찰차와 두번째 차 사이에서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이날 테러로 두번째 차량의 유리창이 박살나고 범퍼가 찌그러졌으나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총 4명으로 구성된 대응팀은 관광객 테러사건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당분간 현지에 머무를 예정이다.
앞서 지난 15일 예멘 ‘세이윤’ 지역에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테러로 현지에서 관광 중이던 한국인 관광객 4명이 사망했고 정부는 사고수습을 위해 16일 대응팀을 현지에 파견했다.
2003년 이창호, 국제대회 ‘전관(全冠)제패’ 대기록
이창호(28) 九단이 마침내 대망의 국제 기전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3월18일 한국기원에서 막을 내린 제4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결승 3번기 2국에서 이 九단은 하네 나오키(羽根直樹·27) 九단을 221수만에 흑 불계로 제압, 16일 1국서의 백 불계승에 이어 2연승으로 타이틀의 주인이 됐다.
이날 바둑은 흑의 실리와 백의 두터움으로 중반까지 팽팽하게 맞섰으나, 종반 초입 흑이 중앙 백진 돌파에 성공하면서 7집 반의 큰 덤 부담을 딛고 낙승했다.
우승 상금은 15만달러(약 1억8000만원). 이 九단과 일본 기전 서열 5위 천원 타이틀 보유자인 하네 九단과의 통산 스코어는 3대0으로 벌어졌다.
이번 우승으로 이 九단은 메이저 국제 기전서 15회 째 정상에 오르면서 모든 기전을 1회 이상 제패하는 전관(全冠) 석권의 대 기록도 함께 수립했다.
마이너 기전까지 포함하면 국제 우승 기록은 총 19회에 이른다.
이 九단은 99년 제1회 춘란배 결승서만 조훈현 九단에게 패배, 준우승에 머물러 ‘전관 제패’ 축배를 미뤄 왔었다.
국제 기전 전관 제패는 조훈현, 유창혁에 이은 세번째이며, 현 시점 기준으론 이창호가 처음이다.
이 九단의 춘란배 제패로 한국의 국제 무대 우승 행진은 22회로 늘어났다.
한편 중국 주최의 유일한 국제 대회인 춘란배는 4년간 조훈현, 왕리청(王立誠·일본), 유창혁, 이창호가 차례로 우승, 주최국 기사가 한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징크스를 계속했다.
2002년 타이거 우즈, 미국 PGA 사상 첫 ‘3개 대회 3연패’ 달성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27)가 미국 PGA투어 베이힐인비테이셔널(총상금 400만달러)에서 또 하나의 골프 역사를 만들었다. 베이힐 대회 37년 역사의 첫 3연속 우승, 1968년 PGA투어 출범 이후 첫 3개 대회 ‘해트트릭’이 그것이다. 우즈는 지난해 월드골프챔피언십 NEC인비테이셔널과 메모리얼토너먼트에서 3년 연속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최연소 통산 30승도 그의 몫이다.
우즈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베이힐클럽(파72)에서 끝난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3언더파 69타를 추가, 합계 13언더파 275타로 2위 마이클 캠블(33·뉴질랜드)을 4타차로 꺾고 2002 시즌 첫 정상에 올랐다. 우승 상금 72만달러를 보탠 우즈는 시즌 상금이 157만5500달러로 불어나면서 상금레이스에서도 10위에서 일약 1위로 도약하는 기쁨까지 맛봤다.
2000년 대만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陳水扁) 당선
민진당의 천수이볜(진수편·49) 후보가 2000년 3월 18일 중국의 위협 속에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39.30%의 지지로 승리,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해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간 국민당의 통치를 종결시켰다.
1951년 남부 타이난현에서 출생한 천수이볜은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중학교 수석 졸업, 대만대 법과 수석 입학, 대학재학중 사법시험 수석합격 등을 통해 ‘가난한 수재’ 에서 변호사가 됐다.
1994년 타이베이시 첫 직선시장이 됐으나 1998년 연임에 실패했다. 대만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이 시장 재임시 추진한 강력한 개혁을 기억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그를 지지했고 공직사회를 정화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1997년 삼미그룹 계열사 법정관리 신청
삼미그룹이 `법정관리에서 제3자 인수`의 수순을 밟게 됐다. 삼미그룹은 주요 채권은행인 상업은행 및 제일은행과의 협의를 거쳐 1997년 3월 18일 밤 서울지방법원에 주력 기업인 삼미특수강을 비롯, (주)삼미, 삼미금속, 삼미기술산업, 삼미화인세라믹 등 그룹의 5개 계열사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삼미그룹은 지난 1959년 해운과 목재업을 모태로 출범한 이래 줄곧 많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온 기업이다. 지난 1980년 김두식 창업주가 작고하자 30세의 나이로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은 김현철 전 회장이 정부지원을 받아 소재산업에 집중 투자했지만 철강시장이 침체에 빠지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고, 지난 1992년의 대주주 주식매각과 관련한 국세청 세무조사, 김 전 회장의 동생 현기씨가 거액의 외화를 빼돌리려다 구속된 사건 등이 겹쳐 자금난이 계속 악화됐다.
결국 삼미그룹은 부채 7천억원을 떠넘기는 조건으로 삼미특수강의 봉강 및 강관 생산설비를 포철에 매각했지만 자금난과 과중한 금융비용 부담을 견디지 못해 일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1997년 황장엽 전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여광무역총사장, 필리핀에 도착
1996년 무궁화위성 방송서비스 개시
1995년 북한과 미국 첫 곡물 거래
1994년 상록수부대, 소말리아에서 귀국
1993년 방일영 조선일보사 이사고문 이사직 은퇴
1992년 경국대전 최고본 발견
조선왕조 5백년의 기본헌법이었던 경국대전 초간본이 1992년 3월 18일 발견됐다. 이는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의 성문법전이다.
1470년 10월 간행된 이 경국대전은 조선왕조실록 등에 신묘대전 이란 명칭으로 기록돼 있으며, 지금까지 존재가 알려져 온 경국대전(1484년 간행 을미대전)보다 간행연도가 14년 앞서는 국보급이다.
이날 발견된 신묘대전은 가로 17.4㎝,세로 25.3㎝ 크기에 초주갑인자로 제작됐으며 1책 2권의 1백76쪽 분량에 서문과 목차, 편찬자 명단, 이전, 호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경국대전의 발행은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통치의 기초인 규범체계가 확립 된 점, 조선왕조의 고유법을 성문화함으로써 중국법의 무제한적 침투에 방파제가 됐다는 점 등의 의의를 가진 것으로, 조선 법제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됐다
1987년 한국-바레인, 문화협정 체결
1983년 부산컨테이너 전용부두 준공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발생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 고신대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측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 문화원 1층에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다. 때를 같이해서 주변에는 유인물 700여 장이 뿌려졌다. 이 사건은 대담하고 격렬한 투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고, 미 문화원이 1980년대 반미투쟁의 표적이 되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방화를 실행한 고신대생 이미옥 등이 3월 30일 잡히면서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주범으로 공개수배된 고신대생 문부식과 김은숙은 4월 1일에 자수했다. 이튿날인 2일에는 문부식의 배후로 지목된 광주민주화운동의 수배자 김현장이 검거됐다. 3일 뒤에는 김현장을 은닉한 혐의로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가 연행되면서 천주교까지 연루되는 사건으로 번졌다.
8월 11일, 사건 관련자 16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징역 등 사건 관련 피의자 전원에게 3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됐으나 1983년 감형됐다.
이 사건 이후 1982년 11월 광주 미 문화원에는 화염병이 투척됐고, 19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에서는 폭발물이 터져 수 명이 사상당했다. 1985년 5월 서울의 미 문화원은 73명의 대학생들에게 점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테러리스트적 투쟁방식으로 인해 운동권일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사건의 주모자로 사형선고을 받은 문부식은 6년 9개월만에 풀려나 운동권으로부터 반미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았지만 2002년 경찰관 7명이 순직한 부산동의대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지정한 것을 잘못됐다는 입장표명으로 진보세력으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81년 선인학원 백인엽 이사장 비리관련 구속
1980년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 사망
1900년 유대인 태생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프롬은 어린 시절 유대교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후 사춘기 때 경험한 ‘전쟁’이라는 사건은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또한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들조차 맹목적인 증오와 광적인 폭력에 열중하는 모습에 인간과 그 인간이 모인 집단인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하이텔베르크 등지에서 사회심리학을 연구한 뒤, 베를린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탐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34년부터 콜롬비아와 예일대에서 강의하는 한편, 계속해서 저술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그리스도의 도그마’ ‘소유냐 삶이냐’ 등이 있다.
한때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과 사회학자, 특히 마르크스 이론을 연구하며 이 이론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프롬의 대부분의 이론적 근거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두고 있다.
프롬은 인간과 사회 문화 및 종교의 넓은 영역을 종횡무진 섭렵했지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인간’에 있었다. 프롬은 비단 사회조직뿐 아니라 정치권력과 종교도 다 인간중심의 것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했다.
1979년 박찬희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박찬희 선수가 1979년 3월 18일 프로데뷔 10년 만에 세계타이틀에 도전, ‘링의 교수’로 불리던 멕시코의 미구엘 칸토를 꺽고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박선수의 별명은 링에서 도망가는 일 없이 사납게 밀어붙이는 복싱을 한다고 해서 ‘작은 표범’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일본의 오쿠마 쇼지에게 타이틀을 잃을 때까지 5차 방어에 성공했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초였다. 1980년 10월 18일 일본에서 그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아 간 오쿠마 쇼지와 재대결을 벌였지만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 판정이 문제가 돼 이듬해 2월 다시 재대결을 벌였지만 그는 또 패하고 링을 떠났다.
1973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발행인 벤턴 사망
1970년 캄보디아 무혈쿠데타로 시아누크 실각-론 놀 실권 장악
캄보디아 의회가 소련을 방문중이던 국가원수 시아누크를 1970년 3월 18일 해임하고 우익의 친미파인 수상 론 놀이 실권을 장악했다. 캄보디아는 이제까지 시아누크에 의해 중립정책을 취해왔는데 시아누크가 베트남 해방세력의 캄보디아 주둔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 우파를 자극해 쿠데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3월 19일 예정대로 모스크바에서 북경에 도착한 시아누크는 중국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3월 23일 이제까지 적대관계였던 공산세력 쿠메르 루즈와 함께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고 5월 5일에는 캄보디아국왕민족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69년 캐나다,이색 빙상 스포츠 `배럴 점프` 선보임
1969년 서울 숭인동 판자촌 화재로 150채 소실
1969년 제 3사관학교 개교
1969년 3월18일, 초급장교를 단기간 내에 배출하기 위한 제3사관학교가 경북 영천에서 문을 열어 925명의 사관생도가 입교식을 가졌다.
1968년 벽두부터 1ㆍ21 무장공비 남파사건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등 북한의 무력도발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자 정부는 그 해 10월15일, 육군 제2사관학교와 제3사관학교를 창설,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한다.
광주 보병학교에서 개교해 6기생까지 2724명을 배출한 제2사관학교는 1972년4월에 제3사관학교로 통합됐고, 제3사관학교는 교육기간을 62주에서 2년으로 늘려 명실상부한 단기 사관학교로서의 체제와 면모를 갖추고 비약적인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다.
1983년부터는 입학자격을 초급대졸 이상으로 격상시키고 교육기간을 2년에서 9개월로 단축했다가 1995년부터는 교육과정을 다시 2년으로 늘려 학위도 함께 수여해오고 있다.
1965년 소련 우주비행사 레오노프 인류최초로 우주유영에 성공
소련이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2호를 발사했다.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우주복을 입고 궤도비행중이던 우주선을 떠나 우주공간에서 20분간 유영함으로써 세계최초의 우주유영 인물이 되었다.
레오노프는 2인승 보스호드 2호가 지구를 1바퀴 돌고 2번째로 소련 상공을 통과할 때 우주선의 해치를 열고 나가 우주공간에서 10분간 머물렀다.
4.6m 길이의 밧줄로 자신을 우주선에 연결했으며 강력한 태양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특별장비를 갖춘 우주복을 입고 있었다.
소련과 유럽의 TV시청자들은 레오노프가 우주선 밖으로 나와 우주공간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1965년 한.미 외무장관 회담
1964년 한국-라이베리아 국교 수립
1963년 상급자 살해 최영오 일병 사형집행
1963년 국민투표법 개정 공포
1962년 프랑스, 알제리 휴전협정 조인
1962년 3월 7일 시작된 프랑스-알제리간의 에비앙 평화회담에서 3월 18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이로써 7년 동안에 걸친 프랑스-알제리 전쟁은 종식됐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자마자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하는 비밀군사조직(OSA)을 이끌고 있는 라울 살랑 장군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알제리 독립에 대항해 계속 싸울 것을 촉구했다.
살랑의 호소가 있은 지 수일 만에 알제리의 수도 알제시와 오란에서 발생한 시가전에서 수십명이 사망했다.
휴전협정 규정에 따라 알제리인들은 수개월 내에 투표를 통해, 프랑스의 일부로 남을 것인지 더많은 자치권을 얻을 것이지 혹은 완전한 독립을 획득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알제리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99.72%의 찬성으로 독립을 결의, 7월 3일 드골 대통령이 특별메세지를 통해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환희에 들뜬 수천명의 알제리인들이 수도 알제 거리를 메우고 공항에 도착하는 드골의 새 내각을 환영했다.
드골의 독립선포로 132년 간에 걸친 프랑스 식민통치의 막이 내려졌다.
1962년 중국의 극작가 치루산 사망
1961년 한-독 기술원조협정 체결
1957년 런던서 유엔군축소위 개최
1956년 대한민국, 세계기상기구(WMO) 가입
1956년 로스 국제신문협회장, 한국에는 언론자유 없다고 판명
1937년 일제, 집무중에 일어를 사용토록 관공서에 지시
1935년 함북 나진 우편국에 최초의 자동전화교환기 설치(지멘스 할스케 식)
1927년 이화여전 제1회 졸업식 (문과 8명, 음악과 3명)
1912년 조선민사령-조선형사령 공포
1912년 재판소 조직을 지방. 복심. 고등법원의 3급3심제로 제정
1891년 파리~런던 간 전화개통
1890년 비스마르크 독일 수상 실각
“시대의 큰 문제들은 연설과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로써만 해결되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총리취임 첫 연설은 철혈(鐵血)재상의 등장을 예고했다. ‘연설과 다수결’은 의회주의였고 ‘철과 피’는 산업과 군대였다.
1862년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총리에 취임했을 때 독일은 4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돼 있었다. 자유주의 사상에 반대하고 국가와 군주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비스마르크는 취임 즉시 여론과 의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병력 50만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법을 통과시킨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프로이센의 힘을 확대하고 독일에서 주도권을 잡는 일이었다. 군비확장 덕에 그는 6년 동안 치른 3개 전쟁에서 모두 승리, 덴마크(1864년)ㆍ오스트리아(1866년)ㆍ프랑스(1870년)를 통일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1871년 1월 18일, 독일제국이 점령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포돼 빌헬름1세가 황제로 추대되고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평소 등한시했던 노동자에게도 관심을 쏟았다. 사회민주당 견제가 1차 목적이었지만 그가 제정한 사회법은 질병보험ㆍ노후보험 등으로 결실을 보아 세계최초의 모범적인 사회보장제도를 탄생시켰다.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책도 군주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그를 신뢰한 빌헬름1세의 지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888년 3월 그와 26년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빌헬름1세 사망 이후, 후임 황제 빌헬름2세와의 마찰은 결국 비스마르크를 1890년 3월 18일에 총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8년 뒤 그의 묘비명에는 “황제 빌헬름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公僕)”이라고 씌어있었다.
1884년 조선 고종21년, 청국상인에게 내지 통상을 허용
1858년 디젤엔진 발명가 루돌프 디젤 출생
1747(조선 영조 23) 사육신 묘비 노량진에 세움
1634년 프랑스 작가 라파이예트부인 출생
1454년 이탈리아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 출생
37년 제3대 로마황제 칼리굴라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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