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가 제 4악장 하장조, 양봉자 교양곡. >
Episode 03 : 3. Happy Birthday. 두울
♡ d_dmino_o@hanmail.net
감상메일, 감상꼬릿말은 파워 UP.
- 08
몇 십개, 아니 몇 백개의 형광등이 밝은 빛을 내는 마트안은 상당히 분주했다.
가족 단위로 나와 어울러 쇼핑을 보는가 하면, 아주머니 혼자 꼼꼼히 채소를 고르기도 했고,
장 보는게 서툴러 보이는 아저씨들은 아마도 부인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의 잔소리가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전화기를 붙잡고 건성건성 대답하며 과일을 집기도 했다.
또, 곳곳에 마련된 시식코너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으며 장을 보기는 커녕 시식코너만
돌아다니는 얌체족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제각각 모두 다른 수 많은 사람들 중,
꽤나 불편해보이는 표정으로 카트를 밀고 있는 남자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이곳저곳 누비며 다니는 여자가 보였다.
“아저씨 햄 좋아해요?”
“별로.”
“그럼 소시지는요?”
“별로.”
“오뎅은 좋아해요?”
“별로.”
건성건성 성의없는 은규의 대답에 봉자는 끝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침 해가 밝을때 쯤 집에 들어와 그대로 단 잠에 빠져있는 사람을
온갖 크고 작은 괴롭힘을 통해 마트에 데려온 건 분명 잘못하긴 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장단을 맞춰주면
어디가 분명히 덧나버리는지 은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 무성의였다.
“누가 나 심심해서 마트 데리고 온 줄 알아요. 다 아저씨 잘 먹이자고 하는 짓이잖아요.
정말 내가 아저씨 직업을 생각해서, 조금 무서워서 잘 해주려고 해도 당최 되지가 않잖아요.”
“...........”
“햄 싫다, 소시지 싫다, 오뎅 싫다...... 앞으로 햄 반찬, 소시지 반찬, 오뎅 반찬은 없어요!”
“시끄러워, 좀..”
“그런 표정 지으면 누, 누가 쫄기라도 한데요!”
아무래도 목소리가 큰 봉자가 더욱 힘 주어 소리 치자,
잠을 자지 못해 뻐끈하게 아파오는 은규의 머리가 더한 고통이 늘었다.
그래서 원래부터가 사나운 분위기의 얼굴을 약간, 아주 약간 구기며 말 했을 뿐임에도
봉자는 지레 겁 먹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어디론가 급히 총총 뛰어갔다.
꼭 그 모습이 전에도 말한 적이 있듯이.. 꼭 한 마리의 애완견, 강아지같았다.
금방이라도 뒤돌아 얼른 오라고 멍멍 하고 짖을 듯한...
은규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에 빤히 바라보고 있던
봉자의 뒷 모습에서 눈을 떼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잠에서 덜 깼구나...”
조용히 혼자 중얼거리며 은규는 느릿하게 벌써 저만치 가 있는 봉자에게 걸음을 옮겼다.
냉동음식들이 즐비하게 늘어있는 커다란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뒤적이던
봉자는 금방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나 한 듯이 여전히 들뜬 그 표정으로
은규가 곁으로 오자마자 그 앞으로 무언가 하나를 쓱 내밀어 보였다.
“혹시 만두도 별로하는 건 아니죠?”
그리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규는 별 생각없이 별로라고 말을 내뱉으려다가 잠시 열었던 입을 다물고
아직도 눈도 뜨지 못하고 냉동만두를 손에 꾹 쥐고 대답을 기다리는 봉자는 내려다보았다.
웬지 모를 미안하고도 안쓰런 마음이 문득이나마 스치고 사라졌다.
누군가를 위해 배려하는 성격은 되질 못했다. 오히려 알면서도 더욱 짓밟는 성격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은 아이를 보며 괜히 내어주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된다. 종종..
피가 섞인 남매가 아님에도, 사랑하는 연인이 아님에도 이상하게 내어주고 싶을때가 있다. 종종...
처음에는 그냥 연민, 동정이라 생각했고, 단정했다.
또, 하도 얼굴을 맞대고 지내니 정이 들어 괜한 착각이 드는 거라 단정지었다.
하지만...
“좋아해.”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저 작은 아이에게서 그 여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조금이나마 덮어보려고 하는 건 아닌지...
맑고 밝은 웃음에 두 눈 뜨고도, 감은 척 그렇게 다가서려 하는 건 아닌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규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무슨 만두가 좋아요? 네?”
“그냥 다.”
“후, 어쩐지 대답이 시원스레 나간다 했지.”
봉자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불평불만이 한 가득인 입을 비죽이며
몇가지 다양한 종류의 만두를 골라 카트에 실었고,
은규는 말 없이 봉자를 아주 잠시 잠깐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넌 여자가 아니라, 그냥 불쌍해서 내가 돌보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야.
꼭 내 여동생같은, 집에 가면 날 기쁘게 맞아줄 그런 작은 애완동물같은...
하은규에게 양봉자는 사랑해주기보단 보살펴줘야 하는 그런 존재야.
이성으로서 사랑해주기보단 어디 아프지 않나 보살펴줘야 하는.......
◇◇◇
요 앞 마트에 가면서 무슨 차냐고 잔소리아닌 봉자의 잔소리에 차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은규는 양쪽 손에 묵직한 마트의 마크가 붉게 찍혀져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참 어울리지 않는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걸어가면 시간이 좀 걸리는 집으로 가는 길에 은규는 힘이 드는건지 아무 말이 없었고,
옆에서 가벼운 짐 하나만 달랑 들은 봉자는 이래저래 말이 많았다. 귓전이 먹먹해질 정도로...
그런데 문득 은규는 귓전이 너무 조용하다 싶어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쫑알거리며 쉴새없이 입을 열고 있어야할 봉자가 보이지않았다.
“...집에 안가?”
“저거 너무 예쁘지 않아요?”
은규가 놀란 마음으로 뒤로 돌아보니 봉자는 베이커리 앞,
예쁜 옷을 입은 듯 예쁘게 데코레이션이 되어있는 케익들이 즐비한
유리 진열장에 어린아이처럼 얼굴를 박고 있었다.
“하나 사줘?”
“아뇨.”
“왜?”
“그냥 너무 예쁘게 생겨서 먹기도 아까워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또 저거 먹으면 너무 미안해 질 것 같아서요. 누구한테....”
마지막 말만은 작게 중얼거린 봉자는 조금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진열장에서 얼굴를 떼어,
집으로 향하던 길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안 사?”
“먹으면 너무 미안해 질 것 같다니까요. 그래도 정 사주고 싶으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사주세요. 일주일이 지나고, 또 몇 일이 지난 뒤에...”
봉자는 은규보다 몇 발자국 앞서 걸었고,
그 뒤를 따르는 은규는 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꼭 웃어도 울고 있는 것 마냥 느껴졌다.
분명히 환희 웃고 있음에도 울고 있는 것 마냥 느껴졌다.
왜지....?
.
.
한편, 같은 시각.
잔잔한 최신유행 발라드가 흐르는 카페에 마주 앉은 바다와 희선...
“후우, 어떡하지. 이번에도 또 혼자 울텐데...”
뜨거운 코코아를 호호 불기만 할뿐, 입에는 대지도 않는 희선이 먼저 말을 꺼냈다.
평소와는 다르게 많이 차분하고도 침착한 모습으로...
그리고 맞은편에 바다는 창 밖만을 내려다보고 있던 눈을 돌려 희선에게 맞추더니 답했다.
“딱 하루잖아. 그냥 울게 내버려둬...”
바다의 말에 수긍하는 듯 희선도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 가득 빈틈없이 검게 자리납은 걱정이란 놈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매번 혼자 아픔을 삵히고, 슬픔을 삵히며 울고 있을 그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작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리고 숨 죽이며 울고 있을 그 모습이 떠올랐다.
크게 소리 내어 울음을 토하지 못하고 울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아무일도 아니었다는 듯 다시 밝게 웃는 그 안쓰런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만 울어, 조금만...
바다는 그 누군가에게 작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