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建國) 대통령(大統領) 이승만(李承晩)】
조선(朝鮮) 고종(高宗) 12년 서기(西紀) 1875년 황해도(黃海道) 평산군(平山郡)에서 탄생(誕生)했다.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後孫)이다. 부군(父君)은 이경선(李敬善), 모부인(母夫人)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호(號)는 우남(雩南)이다. 1877년 한성(漢城)으로 이사(移徙)해 서당(書堂)에서 한학(漢學)을 공부(工夫)하다 1894년 과거제도(科擧制度)가 폐지(廢止)되자 1895년 4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入學)했다. 그해 말(末) 미국(美國)에서 귀국(歸國)한 서재필(徐載弼)이 배재학당 안에 조직(組織)한 협성회(協成會)에 가담(加擔)했다. 그 뒤 협성회보(協成會報)와 매일신문(每日新聞)을 창간(創刊)해 주필(主筆)과 사장(社長)으로 활약(活躍)했다. 독립협회(獨立協會) 산하(傘下)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통해 무능(無能)하고 부패(腐敗)한 정부(政府)를 비판(批判)하고 독립과 민권(民權) 사상(思想)을 고취(鼓吹)하는 등 민중계몽(民衆啓蒙)에 앞장섰다. 1898년 11월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任命)되었다. 일본(日本)에 망명(亡命) 중(中)인 박영효(朴泳孝)를 영입(迎入)해 강력(强力)한 내각중심정부(內閣中心政府)를 조직(組織)하고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양위(讓位)시키려는 음모(陰謀)에 가담(加擔)해 1899년 1월 경무청(警務廳)에 구금(拘禁)되었다. 20일 만에 탈옥(脫獄)을 시도(試圖)하다 실패(失敗)해 평리원(平理院) 재판(裁判)에서 종신형(終身刑)을 언도(言渡)받고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영어생활(囹圄生活)을 했다. 옥중(獄中)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編譯)하고,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저술(著述)하고, 신영한사전(新英韓辭典)을 편찬(編纂)하고, 제국신문(帝國新聞)에 논설(論說)을 투고(投稿)했다. 1904년 2월 발발(勃發)한 노일전쟁(露日戰爭)을 계기(契機)로 그해 8월 5년 6개월(個月) 여(餘) 만에 석방(釋放)되었다. 그해 11월 민영환(閔泳煥)·한규설(韓圭卨) 주선(周旋)으로 도미(渡美)해 1905년 8월 루스벨트 대통령을 회견(會見)하고, 노일전쟁 종결(終結) 뒤 미국이 한국(韓國)의 독립을 보존(保存)하는 데 힘써 줄 것을 요청(要請)했다. 1910년까지 5년간(年間) 체미(滯美)하며 조지 워싱턴 대학(大學)에서 학사학위(學士學位),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碩士學位),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哲學博士學位)를 취득(取得)했다. 1910년 8월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로 전락(轉落)한 조국(祖國)으로 귀환(歸還)해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YMCA) 학감(學監)으로서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주력(注力)하고, 전국적(全國的) 청년회조직망(靑年會組織網)을 구축(構築)하던 중 1911년 일제가 조작(造作)한 105인(人) 사건(事件)<총독암살미수사건(總督暗殺未遂事件)>에 연루(連累)되었으나 그해 3월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감리회(國際基督敎監理會) 총회(總會)에 한국대표(韓國代表)로 참가(參加)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출국(出國)해 위기(危機)를 모면(謀免)했다. 미국에 도착(到着)해 은사(恩師)인 뉴저지 주(州) 지사(知事) 윌슨을 찾아가 105인 사건에 연루된 한국인(韓國人)들의 구명(救命)을 요청(要請)했다. 1913년 2월 하와이 주(州) 호놀룰루로 건너가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1918년 한인기독학원(漢人基督學院)으로 개칭(改稱)>을 운영(運營)하고, 태평양잡지(太平洋雜誌)<1930년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로 개칭>를 창간(創刊)하고, 1918년 한인기독교회(韓人基督敎會)를 설립(設立)했다. 외교(外交)를 통한 독립을 주장(主張)해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회장(會長) 안창호(安昌浩)>로 부터 정한경(鄭翰景)·민찬호(閔燦鎬)와 함께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 한국대표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미국정부(美國政府)로부터 파리 여행권(旅行券)을 얻는데 실패(失敗)했다. 1919년 3월 3일 정한경과 공동명의(共同名義)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參席)한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將次) 완전독립(完全獨立) 보장(保障)을 전제조건(前提條件)으로 한국을 신설(新設)될 국제연맹(國際聯盟)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아래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請願書)를 제출(提出)했다.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14일∼16일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韓人代表者大會)를 소집(召集)해 독립방략(獨立方略)을 논의(論議)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獨立意志)를 세계여론(世界輿論)에 호소(呼訴)했다. 1919년 3월 21일 선포(宣布)한 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국무(國務) 및 외무총장(外務總長), 4월 11일 구성(構成)한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국무총리(國務總理), 4월 23일 선포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 대한공화국(大韓共和國) 대통령 명의(名義)로 각국(各國) 수반(首班)과 파리 강화회의 의장(議長)에게 한국의 독립을 통고(通告)하고, 8월 25일 워싱턴에 한국구미위원부(韓國歐美委員部)를 설치(設置)하고 외교활동(外交活動)과 독립자금모금운동(獨立資金募金運動)에 전념(專念)했다. 9월 6일 통합(統合) 대한민국임시정부<13도(道) 대표(代表)가 모여 구성한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正統性)을 계승(繼承)>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부터 초대(初代) 임시대통령(臨時大統領)으로 추대(推戴)되었다. 1921년 10월 워싱턴 군축회의(軍縮會議)<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참석해 한국의 독립 문제(問題)를 의제(議題)로 상정(上程)시키려는 외교활동(外交活動)을 폈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가 다시 언론(言論)·교육(敎育) 등의 사업(事業)에 종사(從事)했다. 1924년 11월 호놀룰루에서 조직(組織)된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의 종신총재(終身總裁)로 추대되었다. 임시정부는 사상적(思想的) 대립(對立)·독립운동방법(獨立運動方法)의 차이(差異) 등으로 분열(分裂)되고 인적(人的)·물적(物的) 기반(基盤)도 취약(脆弱)해 여러 차례 위기(危機) 속에 활동(活動)했으며, 이승만 박사가 1919년 3월 3일 정한경과 공동명의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완전독립 보장을 전제조건으로 한국을 신설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불씨가 되어 이동휘(李東輝)·안창호가 임시정부를 떠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도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으로부터 탄핵(彈劾)되는 시련(試鍊)을 겪었다. 그러나 통합 임시정부가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음을 내세우며 한국구미위원부를 활용(活用)해 독립운동을 지속(持續)했다. 1933년 초(初) 제네바에서 개최(開催)된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해 열강(列强) 대표(代表)들에게 한국의 독립 문제를 환기(喚起)시켰다. 회의종결(會議終結) 뒤 미국으로 귀환해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孃)과 혼인(婚姻)했다. 1939년 11월 워싱턴으로 이사(移徙)해 1941년 영문저서(英文著書) Japan Inside Out을 출판(出版)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眞珠灣) 공습(空襲)을 계기(契機)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勃發)하자 중경(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장(委員長) 자격(資格)으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국무성(國務省)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承認)을 요구(要求)하는 외교활동(外交活動)을 펴고, 미국 육군전략사무처(陸軍戰略事務處)의 항일(抗日) 게릴라 전(戰) 계획(計劃)에 적극(積極) 협조(協助)했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國際聯合) 창립총회(創立總會) 한국대표단장(韓國代表團長)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의 참석권(參席權)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폈다. 해방직후(解放直後) 1945년 10월 귀국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總裁)·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의장·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총재 등을 역임(歷任)하면서 미국·소련(蘇聯) 등의 신탁통치(信託統治) 안(案) 반대(反對), 좌우합작(左右合作) 반대, 미(美)·소(蘇)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 참가거부(參加拒否),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南北協商) 거부 등 반탁(反託)·반공(反共) 노선(路線)을 견지(堅持)했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산(霧散)되자 1946년 6월부터 남한(南韓) 단독정부(單獨政府) 수립(樹立) 불가피론(不可避論)을 주창(主唱)하고, 그 실현(實現)을 위해 1946년 12월~1947년 4월 워싱턴을 방문(訪問)해 로비 활동을 폈다. 1947년 3월 발표(發表)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소련 봉쇄(封鎖) 및 반공주의적(反共主義的)인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단독정부 노선의 입지(立地)를 강화(强化)시켰다. 1947년 11월 UN 총회의 총선거(總選擧)를 통한 한국 독립 결의(決議)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UN 한국임시위원단(韓國臨時委員團) 감시(監視) 아래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實施)되어 제헌국회(制憲國會)가 구성(構成)되자 초대 국회의장(國會議長)에 선출(選出)되었다. 그해 7월 20일 간선(間選)으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취임(就任)했다. 농지개혁(農地改革)을 단행(斷行)해 농민불만(農民不滿)을 해소(解消)했으며, 의무교육제도(義務敎育制度)를 도입(導入)하고 각급(各級) 학교(學校)를 증설(增設)해 전국민(全國民)의 교육수준(敎育水準)을 높였으며, 국내(國內) 공산주의운동(共産主義運動)을 분쇄(粉碎)하고 일본에 대한 강경외교(强硬外交)를 견지(堅持)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北韓) 공산군(共産軍)이 남침(南侵)해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하자 대미외교(對美外交)를 통해 미군(美軍)과 UN군(軍)의 도움을 얻어 격퇴(擊退)했다. 북진통일(北進統一)을 하고자 국토분단(國土分斷) 상태(狀態)의 휴전협상(休戰協商)에 강력(强力)히 반대(反對)하다 1953년 6월 남한각지(南韓各地)에 수용(收容)되어있던 반공포로(反共捕虜) 27,000여(餘) 명(名)을 석방(釋放)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조인(調印)되자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체결(締結)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그해 10월 조약을 실현(實現)했다. 정부(政府) 부산피란당시(釜山避亂當時)인 1951년 12월 자유당(自由黨)을 창당(創黨)했다. 1952년 대통령직선제(大統領直選制) 개헌안(改憲案)을 통과(通過)시켜 재선(再選)되었다. 1954년 국회가 초대 대통령에 한(限)해 중임제한(重任制限)을 철폐(撤廢)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56년 정(正)·부통령(副統領) 선거(選擧)에서 민주당(民主黨) 신익희(申翼熙) 대통령후보(大統領候補)가 투표일(投票日) 며칠을 앞두고 서거(逝去)함에 따라 유권자(有權者) 56%의 지지(支持)를 얻어 3선(三選)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조병옥(趙炳玉) 대통령후보가 선거를 앞두고 서거함에 따라 4선(四選)이 확실(確實)했음에도 자유당은 부통령후보(副統領候補) 이기붕(李起鵬)을 당선(當選)시키기 위해 대대적(大大的) 선거부정(選擧不正)을 자행(恣行)했으며, 이를 계기(契機)로 4.19 의거(義擧)가 일어나자 사태(事態)에 책임(責任)을 지고 4월 27일 대통령직(大統領職)을 사임(辭任)했다. 그해 5월 하와이로 떠난 뒤 후속정권(後續政權)에 의해 귀국을 허락(許諾)받지 못하고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에서 서거했으며, 가족장(家族葬)으로 국립묘지(國立墓地)에 안장(安葬)되었다. 저서(著書)로 독립정신(獨立精神)·청일전기(淸日戰紀)·미국의 영향(影響) 아래 발달(發達)된 국제법상(國際法上) 중립(中立)·Japan Inside Out·한시집(漢詩集) 체역집(替役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