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大韓民國) 중흥(中興)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
서기(西紀) 1917년 경상북도(慶尙北道) 구미(龜尾)에서 탄생(誕生)했다. 본관(本貫)은 고령(高靈)이며 부군(父君)은 박성빈(朴成彬), 모부인(母夫人)은 백남의(白南義)이다. 호(號)는 중수(中樹)이나 사용(使用)하지 않았다 한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문경소학교(聞慶小學校)에서 3년간(年間) 교직생활(敎職生活)을 했다. 1940년 만주(滿洲)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第二期)로 입교(入校)해 최우등(最優等)으로 수료(修了)한 뒤 일본(日本)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로 전학(轉學)해 1944년 졸업하고 만주군(滿洲軍) 소위(少尉)로 임관(任官)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配置)되었다. 1945년 해방(解放) 뒤 1946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입교해 졸업하고 대위(大尉)로 임관했다. 육군본부(陸軍本部) 정보국(情報局)에 근무(勤務)하던 1949년 좌익세력(左翼勢力)의 폭동(暴動) 여수(麗水)·순천(順天) 반란사건(叛亂事件)<1948년 10월>에 연루(連累)되어 군법회의(軍法會議)에서 무기징역(無期懲役)이 언도(言渡)되었으나 육군본부 상사(上司)·동료(同僚)들의 구명운동(救命運動)으로 복역(服役)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한때 군적(軍籍)이 박탈(剝奪)되었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北韓) 공산군(共産軍)이 남침(南侵)해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하자 회복(回復)되었다. 1950년 육영수(陸英修)와 혼인(婚姻)했고, 1953년 준장(准將)으로 승진(昇進)했다. 1954년 제2군단(第二軍團) 포병사령관(砲兵司令官), 1955년 제1군(第一軍) 참모장(參謀長), 1960년 군수기지사령관(軍需基地司令官), 제1관구사령관(第一管區司令官),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作戰參謀部長)을 거쳐 제2군(第二軍) 부사령관(副司令官)<소장(少將)>으로 재직(在職)했다.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에 의한 1960년 3.15 부정선거(不正選擧)가 4.19 의거(義擧)를 유발(誘發)하고 이를 계기(契機)로 집권(執權)한 민주당(民主黨)은 구파(舊派)·신파(新派)로 분열(分裂)해 구파 윤보선(尹潽善)이 대통령, 신파 장면(張勉)이 국무총리(國務總理)에 당선(當選)되자 김도연(金度演) 등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創黨)했다. 이러한 파쟁(派爭)으로 인해 4.19 이념(理念) 구현(具現)과 부조리(不條理) 척결(剔抉) 사명(使命)을 다하지 못하고 혼란(混亂)을 거듭하자 연일(連日) 가두시위(街頭示威) 끝에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을 점거(占據)하는 사태(事態)에 이르렀으며, 진보당사건(進步黨事件)으로 잠적(潛跡)했던 혁신세력(革新勢力)의 급진적(急進的) 통일논의(統一論議)에 대응(對應)하지 못했다. 6.25 사변(事變)과 국가안보체제강화(國家安保體制强化)로 군부(軍部)가 성장(成長)하고 4.19 의거 뒤 육사(陸士) 8기(期)를 주축(主軸)으로 전개(展開)된 정군운동(整軍運動)이 군(軍)의 정치적(政治的) 자각(自覺)을 촉진(促進)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中心)으로 한 혁명군(革命軍)이 서울 시내(市內) 중요시설(重要施設)을 점령(占領)하고 계엄령(戒嚴令)을 선포(宣布)해 전권(全權)을 장악(掌握)했다.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부정부패(不正腐敗) 등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 민생고(民生苦)를 해결(解決)해 자립경제(自立經濟)를 이룩한다는 등의 혁명공약(革命公約)을 선포했다. 군사혁명위원회(軍事革命委員會)를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로 개칭(改稱)하고, 정군작업(整軍作業)에 이어 국가재건비상조치법(國家再建非常措置法)을 제정(制定)해 모든 정부권한(政府權限)을 장악한 뒤 혁신정당(革新政黨)들을 반국가단체(反國家團體)로 규정(規定)하고, 폭력일소(暴力一掃)·밀수근절(密輸根絶)·부정축재처단(不正蓄財處斷)·농어촌고리채정리(農漁村高利債整理) 등 정치(政治)·사회개혁(社會改革)을 단행(斷行)해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했다. 혁명 1개월이 못되어 보안관계(保安關係) 범법혐의자(犯法嫌疑者) 35,000여(餘) 명(名)을 검거(檢擧)하고, 1961년 말(末)까지 3,000여 명의 용공분자(容共分子)와 4,000여 명의 폭력배(暴力輩)를 체포(逮捕)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再建國民運動本部)를 설치(設置)해 생활간소화(生活簡素化)·가족계획(家族計劃)·문맹퇴치(文盲退治) 사업(事業)을 벌였으며, 통화개혁(通貨改革)을 단행했다. 1962년~1981년 4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을 실시(實施)해 농업국가(農業國家)에서 산업국가(産業國家)로, 후진국(後進國)에서 중진국(中進國)으로 발전(發展)시켜 빈곤(貧困)을 타파(打破)했다. 수출전략산업(輸出戰略産業)을 선정(選定)해 1·2차 5개년계획 기간(期間)은 경공업분야(輕工業分野), 3·4차 5개년계획 기간은 중화학공업분야(重化學工業分野)를 집중육성(集中育成)했다. 오일 쇼크 등 난관(難關)을 극복(克服)하고 수출실적(輸出實績)은 1960년 3,280만(萬) $에서 1979년 150억(億) $, 1인당 GNP<국민총생산(國民總生産)>는 1960년 80$에서 1979년 1,662$로 상승(上昇)하고 매년(每年) 8~9%의 성장을 지속(持續)했다. 간호(看護) 및 광산(鑛山) 근로자(勤勞者) 독일파견(獨逸派遣)·월남파병(越南派兵)·중동건설(中東建設) 진출(進出) 등도 외자도입(外資導入), 전국민(全國民)의 피땀과 함께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등 사회간접자본(社會間接資本) 및 전국각지(全國各地)의 산업기지(産業基地) 건설(建設), 수출(輸出) 드라이브, 고도성장(高度成長)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議長)은 민정이양(民政移讓) 약속(約束)을 번복(飜覆)하고 1962년 3월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을 제정해 정치인(政治人)들의 활동(活動)을 규제(規制)했다. 1962년 12월 대통령중심제(大統領中心制)·국회(國會) 단원제(單院制)·대통령 직선제(直選制) 헌법(憲法)을 국민투표(國民投票)로 확정(確定)·공포(公布)하고, 1963년 1월 1일 정치규제(政治規制)를 해제(解除)했다. 대장(大將)으로서 전역(轉役)하고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사(就任辭)에서 “정치적 자주(自主)·경제적(經濟的) 자립(自立)·사회적(社會的) 융화(融和)와 안정(安定)을 목표로 대혁신운동(大革新運動)을 추진(推進)함에 있어서 먼저 개인(個人)의 정신혁명(精神革命)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强調)하고, 국력신장(國力伸張)·민족정신(民族精神) 함양(涵養)·민족문화(民族文化) 확립(確立)을 통한 국가발전(國家發展)과 민족중흥(民族中興) 과업(課業)을 추진했다. 세계정세(世界情勢) 대응(對應)과 경제개발자금(經濟開發資金) 조달(調達)을 위한 한일협정(韓日協定) 체결(締結)을 추진하자 반대운동(反對運動)이 격렬(激烈)히 일어났다. 1964년 3월 대일굴욕외교반대(對日屈辱外交反對) 범국민투쟁위원회(凡國民鬪爭委員會)가 결성(結成)되고 반대시위(反對示威)가 정권타도(政權打倒)에 이르자 계엄령을 선포해 언론인(言論人) 등을 체포(逮捕)하고, 반대세력은 1965년 5월 단일야당(單一野黨) 민중당(民衆黨)을 결성했다. 이러한 반대운동을 무릅쓰고 1965년 6월 22일 대일(對日) 청구권(請求權)·재일교포지위(在日僑胞地位)·어업문제(漁業問題)·문화재반환(文化財返還) 등을 내용(內容)으로 협정에 조인(調印)했다. 1964년 10월 한월협정(韓越協定)을 체결해 월남(越南)에 1차로 1965년 2월 비전투부대(非戰鬪部隊) 2,000명을 파병(派兵)하고, 2차로 야당(野黨) 국회의원(國會議員) 전원(全員)이 사퇴서(辭退書)를 낸 상태(狀態)에서 국회동의(國會同意)를 얻어 1966년 3월 전투부대(戰鬪部隊) 20,000명을 파병했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을 제정한데 이어 1970년 장기종합교육계획(長期綜合敎育計劃)을 수립(樹立)하고, 1972년 국적(國籍) 있는 교육(敎育)을 제창(提唱)했으며, 주체성(主體性) 및 안보(安保) 교육을 통해 식민잔재(植民殘滓) 청산(淸算)과 정통성(正統性) 확립을 도모(圖謀)하고 새마을 교육을 통해 근면(勤勉)·자조(自助)·협동(協同)의 전통정신(傳統精神)을 산업사회(産業社會)의 모순(矛盾)을 극복(克復)하는 새로운 이념(理念)으로 확산(擴散)했다. 낙후(落後)된 농촌(農村)의 생활개선(生活改善)과 소득증대(所得增大)를 위해 시작(始作)한 새마을 운동(運動)을 1970년 전국적(全國的)으로 확산해 환경개선(環境改善)과 새마을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意識改革)을 국민운동(國民運動)으로 전개해 전통이념(傳統理念)을 계승(繼承)한 근대화(近代化)의 새 풍토조성(風土造成)에 공헌(貢獻)했다. 북한의 군사적(軍事的) 우위(優位)와 1969년 닉슨 독트린 선언(宣言)에 의한 주한미군(駐韓美軍)의 단계적(段階的) 철군(撤軍)에 대응해 전차(戰車)·전함(戰艦)·헬리콥터·유도탄(誘導彈)을 자체생산(自體生産)하고 장비(裝備) 현대화(現代化)를 추진했다. 1969년 9월 3선(三選) 개헌안(改憲案)이 국회에서 통과(通過)되어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취임(就任)했다. 1970년 8.15 선언으로 북한에 인위적(人爲的) 장벽(障壁)을 제거(除去)해 통일기반(統一基盤)을 조성(造成)할 것을 제의(提議)했다. 1971년 8월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를 통한 남북(南北) 이산가족(離散家族) 찾기 회담(會談) 제의로 1972년 8월 평양(平壤)에서 제1차 회담을 개최(開催)한 이후(以後)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가며 1973년 7월 제7차 회담이 열리고 일부(一部) 이산가족의 상봉(相逢)이 실현(實現)되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南北共同聲明)으로 평화통일3대원칙(平和統一三大原則)을 천명(闡明)하고 통일문제협의기구(統一問題協議機構)로 남북조절위원회(南北調節委員會) 설치에 합의(合議)했으나 1973년 8월 28일 제3차 회의(會議)를 끝으로 북한이 불참(不參)해 결렬(決裂)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非常戒嚴)을 선포한 가운데 국회를 해산(解散)하고 비상국무회의(非常國務會議)에서 유신헌법(維新憲法)을 제정해 국민투표 90% 지지(支持)로 확정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에서 임기(任期)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선출(選出)되었다. 1973년 6.23 선언으로 남북 UN 동시가입(同時加入), 호혜평등원칙(互惠平等原則)에 의한 문호개방(門戶開放)을 요구(要求)했다. 1974년 남북상호불가침협정(南北相互不可侵協定) 체결·남북상호문호개방(南北相互門戶開放)·남북자유총선거(南北自由總選擧)에 의한 통일정부(統一政府) 수립 등 평화통일3원칙(平和統一三原則)을 천명했다. 1978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서거(逝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