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9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예레 17,5-10
복 음 : 루카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 앨리스 카하나는
15살에 독일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이때 앨리스 카하나는 뼈아픈 기억을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용소로 끌려갈 때, 앨리스 카하나는 여덟 살인 남동생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신발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신발이 벗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주의한 동생이라는 생각에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며 닥친 혼란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동생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면
과연 미움과 저주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끝에 서면 후회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주었던 아픔과 상처가
오히려 내게 되돌아와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후회를 더는 만들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 때에는 우리가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랑의 실천에 얼마나 온 힘을 기울였나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바로 그 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머물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보살피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개가 다가와 라자로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그 무관심이 그를 저승의 고통으로 이끈 것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전혀 알 수 없고, 가난한 이인 라자로의 이름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풍요와 안정을 누린 사람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을 산 사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랑 실천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더는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 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 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관한 결과이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5-26절) 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을 파고 만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 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천국 본향에 대한 믿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 본향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 본향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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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 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이렇습니다.
“1347년, 칼레는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 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후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됩니다.
그러나 점령자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라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매 처형받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레시민들은 혼란에 처했고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를 논의했습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초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본당에 교무금 제도도 없고, 헌금도 그리 많이 내지 않지만,
본당을 위해서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그 자녀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서
가난 때문에 의료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정부에서의, 식, 주에 대해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듣곤 합니다.
“미국에서 살려면 아주 잘 살거나, 아주 못살아야 한다.”
중산층은 세금에 대한 의무는 많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혜택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도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4달 동안 급여를 받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직원들도 몇 년 동안 임금 인상 없이 근무해 주었습니다.
신문사를 떠나면서 후원금을 내고 왔습니다.
제가 5년 동안 뉴욕에서 잘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자리를 마련해 준 신문사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에서 벗어난 부유한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믿고 종업원들에게 막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의 의무인 입대를 피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런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의 결과로
우리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수사권과 공소권을 남용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일부 검사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사회적인 약자와 억울한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권력과 정치인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면 살아서도 행복했고,
죽어서도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부유할지라도, 가난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은행이라는 곳간에 재물을 쌓듯이, 천국이라는 곳간에도 재물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리스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에 가면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부조 조각화 한 점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그 모습이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작품입니다.
그냥 지나치는 관광객들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작품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큰 감명과 깨달음을 주곤 한답니다.
주인공의 형상은 대충 이렇습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완전 대머리입니다.
발뒤꿈치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이요,
길게 늘어뜨린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나의 이름은 바로 ‘기회’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외적으로는 행복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모를 잘 만났든지, 아니면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던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몇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산을 축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좋은 기회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해 어려운 이웃도 돕고 또 자신을 위해서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실을 보십시오.
라자로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가
자신의 식탁 바로 아래 기어 다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소중한 기회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우리 역시 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기회는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다시금 새 출발 할 수 있는 기회, 사랑을 실천 할 수 있는 기회,
하느님께서 내뻗으시는 손을 잡을 기회,
구원받을 수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회가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준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 열정과 지혜를 가진 사람, 사랑과 자비를 지닌 사람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마음과 눈과 귀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 마르코와 함께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루카 복음에는
다른 두 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루카 고유의 특수 사료들이 많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우선 예수의 前史가 그렇고,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여자들,
죄인들에 대한 자비와 관심을 소재로 삼은 대목들도 그렇다.
예수께서 자주 기도하는 모습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루카복음의 고유성에 속한다.
루카는 세상의 재물을 놓고 부자와 빈자,
소유와 포기에 관한 문제를 큰 관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죄인들의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에 관한 다양한 비유들도
빼놓을 수 없는 루카의 특수사료들이다.
특히 루카복음 15-16장에는 다른 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유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잃었던 은전의 비유’(15,8-10), ‘잃었던 아들의 비유’(15,11-32),
‘약은 청지기의 비유’(16,1-15) 그리고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가 그것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우선 부자와 빈자에 관한 비유이다.
오늘의 비유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부자와 빈자가 처해 있는 이승의 모습을,
2부는 저승에서의 역전된 상태를, 그리고 3부는 이승과 저승의 관계를 보여준다.
1부에서 부자와 빈자의 대조가 매우 날카롭고 격한 색조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모습으로,
빈자는 빈털터리 거지에다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고,
게다가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을 만큼
비참한 삶을 인내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19-21절)
그런데 2부는 죽음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후에
부자와 빈자의 상태가 완전히 역전된 것으로 전개한다.
빈자는 죽자 바로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아브라함 품에 안기었다는 것과
부자는 죽어, 그냥 땅에 묻혔다는 對比가 역전의 전초전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똑같은 저승에서 빈자의 상태와 부자의 상태가
큰 구렁텅이(카스마)를 사이에 두고 전혀 교류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이는 3부의 이승과 저승의 관계로 다시금 강조된다.
저승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는 부자가
이승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
이승에서의 삶은 이승의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가 부자이건 빈자이건 간에 어떤 모양으로든 교류가 가능하다.
오늘 비유에서 致富나 부유함 자체가 문제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관건은 사람 자체에 있다.
바로 자신이 가진 富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 말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즉 자기 집 문간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개들에 의해 종기까지 핥음을 당하는 한 거지를 보고도 보지 못하고,
그 신음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부자 말이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하느님 나라에 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모세도 예언자도, 누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부자는 철갑을 뚫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비록 이승에서 부자였지만, 저승에서는 참으로 가난한 빈털터리였던 셈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타인을 위한 눈도, 귀도, 마음도 없는 자는 이와 마찬가지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의 처지가 천국에 빗대어 표현되었으나
부자의 처지가 곧이 지옥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비유가 빈부의 극심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비유는 다만 저승에서 반전된 처지를 통하여 이승의 부자들을 경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결국 오늘 복음의 비유는 사실
‘예수의 말씀을 비웃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16,14)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앞서간 대목들을 함께 살펴보면 재산의 소유가
제자로서의 예수님 추종을 줄곧 위협하고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하게 함을 똑똑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도 모르는 저승에서의 고통과 불행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승에서의 빈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빈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의지요, 선택이며 사랑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너와 나 사이 큰 구렁은 사랑으로 채워야
김 마리 에프렘 수녀
너와 나의 거리
현시대는 소통의 부재이다
끼리끼리 아니면 나 홀로..
공통점은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뉴스 보기가 겁난다.
마음 무거운 일들로 넘쳐난다.
묻지 마 폭행과 살인...
몇 달이나 지나 발견된 독거노인의 외로운 죽음
부모의 학대와 방치로 굶어 죽는 아이...
관계의 단절이다.
“너와 나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
여기서 가지도 이리로 오지도 못한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구렁이를 우리 사회는 계속 만들어 가고 있다.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
그 집 대문 앞에 있는 라자로를 외면했다.
나 역시
보고도 외면하고 알면서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무시하고
이렇게 너와 나 사이 어마어마한 구렁을
사는 동안 계속 만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길을 내어야 한다. 구렁을 메꾸어야 한다.
눈길 가는 곳에 마음을 담는다면
팔을 뻗어 손을 내밀어 손길에 따스함을 담는다면
이 세상살이에서 너와 나 사이 사랑의 길을 만든다면
마지막 날 우리도
예수님의 손길 이끄심 따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