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칭호
이번 메시지부터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칭호를 살펴볼 것이다.
1. 하나님의 영
1) 창조의 사역과 관련된 성령
하나님의 영이 첫 번째로 언급된 곳은 창세기 1장 2절이다. 이것은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창조를 위해 죽음의 수면 위를 덮고 있었다. 창조의 사역과 관련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2)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적용된 하나님
또한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삼일의 신격 안에서 마지막이 성령이다(마 28:19).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하나님 아들은 과정이시고, 하나님 엉은 우리의 분깃으로서의 도달하심과 적용하심이다(고후 13:13).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는 두 가지 중점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적용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의 왕국 능력
마태복음 3장 16절과 12s장 28절은 하나님의 영을 언급한다. 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임했다. 이미 그분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었지만 그분의 사역을 위해 그분께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왕국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이 능력 안에 있는 곳에 하나님의 왕국에 있으며, 귀신은 설 자리가 없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이 대적하는 상황에 대해 권위를 행사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왕국이다.
4) 하나님 자신
로마서 8장 9절에서 바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말하며,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칭호를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무엇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약에서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말들은 사랑과 생명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원칙으로 하나님의영이라는 용어는 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말한다.
2. 여호와의 영
1) 사람과 관계된 성령
창조에 있어서 그분의 칭호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분의 칭호는 여호와이다. 창조를 말하는 창세기 1장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를 끝내신 후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분은 여호와로 나타나셨다. 창세기기 2장부터 여호와라는 칭호가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약은 여호와의 영이 사람들 위해 임했다는 것을 여러 번 기록한다. 이것은 창조할 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역사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삿 3:10, 겔 11:5). 구약에서 성령에 대해 쓰여진 주된 칭호는 하나님의 영과 여호와의 영이다.
3. 성령
1) 성육신과 관계됨
[성령]이라는 신성한 칭호는 신약의 새로운 계시이다. 이 칭호는 구약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시편 51편 11절과 이사야 62장 10-11절에 있는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신성한 칭호는 주 예수님의 선주자와(눅 1:15),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의 몸을 준비하기 위해(눅 1:35) 하나님이 들어오셨을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령이 하나님의 성육신과 관계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2) 분별과 관계됨
영은 하나님의 본성, 즉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을 가리키며,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의 속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성은 거룩하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성을 사람 안으로 이끌어오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택된 백성들이 거룩한 본성 안에서 거룩하게 됨으로 그들이 그분과 같이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신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평범한 것들로부터 분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육신 안에 있는 성령은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한 본성 안에서 분별된 것처럼 사람을 평범한 것들로부터 분별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출생한 것은 [거룩한 것](눅 1:35)이었으며, 이 거룩한 것은 예수 우리의 구원자로 그분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안에서 분별되신 것처럼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분별되신 분이다. 마태복음 1장 18절과 20절에 언급한 것처럼 거룩한 예수를 잉태하고 출생한 성령은 거룩한 예수의 믿는 이들을 그분이 거룩한 본성 안에서 거룩하신 것처럼 본질적으로 거룩하게 할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믿는 이들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될 것이다(계 21:2).
3) 구원자의 오심과 잉태에 관계됨
누가복음 1장 15절은 침례자 요한이 그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영을 언급하는데 처음으로 사용된 신성한 호칭이다.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이 신성한 칭호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시작을 위한 때에, 즉 구원자의 오심을 위한 길을 예비하고, 그분을 위한 사람의 몸을 예비하기 위한 때였다. 구원자의 오심을 위한 길을 예비하는 데는 백성들을 하나님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하고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거룩케 할 수 있도록 그분의 선주자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구원자를 위한 사람의 몸을 예비하는 데는 성령이신성한 본성을 인성 안으로 분배하여 하나님의구속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사람을 거룩케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신성한 본질이 있는 성령으로 한 사람 처녀 안에서 잉태되었으며,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다(마 1;18). 그녀가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었다(20절). 비록 그리스도가 마리아로부터 났지만(마 1:16), 그분은 성령으로부터 난 아이였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직접 성령으로부터 난 것이었다. 그분의 근원은 성령이었으며 그분의 요소는 신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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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성령을 말한다. 누가복음 3장 22절은 우리에게 성령이 물질적인 형태로 비둘기처럼 그리스도 위에 임하여 그분의 사역을 위해 그분께 기름을 부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서 우리는 성령을 거역하는 것에 관한 말을 보는데, 이 말은 만일 죄인인 성령을 모욕한다면 회개케 하여 주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그 사람 위에서 역사할 근거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날 주 예수님은 제자들 안으로 호흡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본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성령을 생명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후에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하셨다. 사도행전 1장 2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명하셨다는 것을 본다. 후에 로마서 15장 16절에서 바울은 그의 사역 안에서 이방인의 제물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으로 그들의 요소가 되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로 적셔지고 그분의 신성한 본질로 침투된 제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처음 사용된 칭호인 성령은 구원자의 오심과 성육신을 예비하기 위한 역사와 관련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구원자의 오심과 잉태와 관련될 때 성령이라 불리워진다.
4. 아버지의 영
1) 친밀한 누림과 핍박의 때에 우리를 돌보심과 관계됨
아버지의영은(마 10:20) 그분에 대한 친밀한 누림을 위해 아버지의 자녀들 안으로 근원이신 아버지와 함께 흐르는 아버지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은 아버지와 그분의 자녀들 간의 교통이다.
핍박의 때를 언급하면서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말하는 자는 너희가 아니요 너희 안에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반대자들의 핍박을 처리하는 아버지의 영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이 반대자들과 핍박자들을 처리하실 것임을 믿음으로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핍박자들을 대하기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이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어드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5. 실제의 영
1) 모든 신성한 것들의 실제
요한의 글들은 그 영이 실제의 영임을 계시한다.(요 14:17, 15:26, 16:13, 요일 4:6). 그 영은 실제의 영이라 불리운다. 이는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모든 어떠하심과 아들의 모든 어떠하심이 성령 안에서 실제화되기 때문이다. 그 영은 하나님 아버지의 어떠하심과 하나님 아들의 어떠하심의 실제화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빛이며, 하나님 아들을 생명이다. 빛과 생명의 실제는 그 영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빛을 갖지 못한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들을 생명으로 가질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의 모든 신성한 속성들의 실제는 그 영이다. 요한복음 14장 17절과 15장 26절과 16장 13절에서 주님은 실제의 영을 말씀한다. 요한복음 4장 6절 역시 영에 대해 이 칭호를 사용한다. 더 나아가 요한일서 5장 6절은 그 영이 진리요 실제라고 말한다. 실제의 영이신 그 영은 하나님과 아들의 실제이다. 그 영은 모든 신성한 것들의 실제이기 때문에 그분은 영원한 생명의 실제이시다. 결국 그 영은 실제이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이며,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실제의 영을 떠나서 영원한 생명은 공허한 것이며 헛된 것이며,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과, 아들과 영원한 생명과 은혜와 모든 신성한 것들의 실제이다. 그 영은 신성하고 영적이 모든 실체들과 항목들의 실제이기 때문에 그분은 실제의 영이라고 불리워진다.
6. 보혜사
1)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심과 관계됨
요한복음 14장 16절은 그 영이 보혜사(the paraclete)임을 계시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paracletos)이다. 영어 파라클레이트(paraclete:변호사)는 이 헬라어 단어가 영어화된 표기이다. 헬라어 파라크레토스는 우리의 문제와 사건들을 돌보는 곁에 있는 누군가를 말한다. 이것은 두 단어로 구성되어있다. 함께를 의미하는 저치사와 부르다라는 단어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에 변호자는 돕는 자, 지지자, 상담자, 중재자였다. 변호자는 그의 필요를 돌봄으로 특별한 사람을 섬기는 어떤 사람이었다. 항상 함께 하는 자로서의 변호자는 웨이터, 돕는 자 심지어는 변호사로 간주할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16에 있는 각주에서 다비는, [변호자는 어떤 사람의 소송을 돌보며 그를 돕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같은 헬라어 단어가 사용된 요한일서 2장 1절의번역에서 그는,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변호인이 있다.]고 말한다. 도한 각주에서 그는 로마의 변호인을 뜻하는 것으로 변호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로마 변호인은 각종 방법으로 소송 의뢰인들의 권익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그 여이 우리의 변호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상황을 돌보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변호인, 즉 보혜사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한편으로 부르심 받은 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상담자이며 위로자이시다. 삼일 하나님의 완성인 위로자인 그 영, 즉 변호인은 우리를 돕는 자이며, 후원자이며, 상담자이며, 일상 생활에서우리의 필요를 돌보시는 보혜사이시다.
7. 능력의 영
1) 사역과 관계됨
성령은 또한 능력의 영이다. 내적으로 우리에게는 본질적인 생명의 영이 있으며, 외적으로 우리에게는 경륜적으로 능력의 영이 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여기의 약속은 요엘서 2장 28절과 29절에 있는 약속으로 오순절 날에 성취된(행 1:1-4, 8, 2:1-4, 16-18)것으로서 경륜적인 믿는 이들의 사역을 위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부어짐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그들에게 본질적인 생명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내주하심을 위해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으로 내쉰 생명의 호흡과는 다른 것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할 때 능력을 받게 되리라고 말했다. 결국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서의 성령이 사역을 위해 제자들 위에 임했다(행 2:2). 생명의 영 안에서 호흡을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제복으로서의 능력의 영을 입을 필요가 있다.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오늘 능력을 입히울 것이라고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능력의 실제임
생명의 영과 능력의 영은 우리의 체험을 위한 한 영의 두 방면이다. 고린도 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는 두 방면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한 영을 마신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외적인 것이며, 물을 마시는 것은 내적인 것이다. 더 나아가 내적으로 영을 마시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외적으로 성령 안에 침례를 받는 것은 경륜적인 것이다. 그 여의내적인 방면은 본질적인 생명을 위한 것이며, 그 영의 외적인 방면은 경륜적인 사역과일을 위한 것이다. 외적인 방면은 능력의 영인 능력의 영인 그 영과 관계된다. 생명의영이 생명의 실제인 것처럼 능력의영은 능력의 실제이다. 이 두 방면에 대하여는 다음에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8. 예수의 영
1) 그분의 인간적인 요소와 그분의 인생과
죽음의 고통과 요소와 관계됨
사도행전 16장 7절은 이렇게 말한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바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 지라]. 16장 16절에 있는 성령이 예수의 영으로 바뀌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예수의 영이 성령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성령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한 보편적인 칭호이다. 예수의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독특한 표현으로 그분의 인성 안에서 인생을 통과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이신 성육신 된 구원자의 영을 언급한다. 이것은 예수의 영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인간의 요소와 그분의 인생과 죽음의 고통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만유를 포함한 영이 복음 전파를 위한 사역, 즉 사람들 가운에 있는 고난의 사역 안에 있는 바울에게 필요했으며, 인생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실제인 것처럼 예수의 영은 예수의 실제이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의 영이 없다면 예수는 우리에게 실제적일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의 실제이며 실현인 예수의 영이 있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에게 실제적이다.
9. 생명의 영
1) 생명의 실제임
[생명의 영]이라는 용어는 신약 로마서 8장 2절에서 꼭 한번 사용된 말이다. 성령은 예수의영일 뿐 아니라 또한 생명의 영이다. 생명의 영은 생명의 실제이다. 이는 이 영이 신성한 생명의 실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그 영 자신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영과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갖는다.
생명을 얻는 길은 그 영이다. 생명은 그 영에 속하며, 그 영은 생명에 속한다. 이 두 가지는 실제적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생명을 그 영에서 분리시킬 수 없으며, 그 영을 생명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주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여기에서 주님은 영과 생명을 연결 짓는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하고, 영원하며 변치 않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은 생명의영이다.
신약은 그리스도가 생명, 심지어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요 11:25, 골 3:4).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영의 실제 안에서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생명이 되시는 분은 실제적으로 생명의 영이시다. 생명의 영이신 삼일 하나님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산 지체들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든다.
10. 그리스도의 영
1)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부활이 있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총체
그리스도의 영(롬 8:9하)은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사람이시다. 그분은 예수이시며, 구속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성화(聖化)이시며, 의로움이시며, 거룩함이시며, 생명과 빛과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칭호는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의 만유 포함성을 전달해 준다. 이 칭호는 창조자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거룩한 요소와 인간의 요소와 그분이 성취하신 모든 항목들과 도달하시고 얻으신 모든 항목들을 갖고 있는 구속자와 그리스도를 포함한다. 이 모든 항목들이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복합되어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이러한 복합된 영을 보지 못했다. 이 영은 신성과인성과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복합되어 있다. 비록 나는 조직화된 기독교에서 수년 동안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영에 관한 메시지를 결코 듣지 못했다. 젊었을 때 나는 로마서전체를 반복하여 읽었지만 그리스도의 영에 대해 인상 받지 못했다. 내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이 신성한 칭호로 나를 감동시키셨다. 나는 이 책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긴다. 오십 여 년 전에 니 형제님은 나에게 누군가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의 책을 중국어로 번역한다면 출판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수년 뒤에 그분은 반복하여 나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나에게 이 책에 대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결국 나는 자신이 이 책을 읽고 몇몇 젊은 사람들에게 번역하는 데 나를 돕도록 안배했다. 우리가 이 책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었을 때, 나는 [영광 받으신 예수의 영]을 다룬 5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장(章 )은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인간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때로부터 나는 그 영의 만유 포함성(all-inclusiveness)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영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의 영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 안으로 들어가신 분의 영이다. 주님의 죽음은 만유를 포함한 끝냄이며, 그분의 부활은 만유를 포함한 발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부활이 있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총체이며 집합이다. 우리 안에 이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끝냄과 발아를 갖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실제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실제이며, 실제 안에 있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 영이 그리스도의 실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을 영이신 그리스도라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그분의 뛰어나심과 그분의 다스리는 권위 안에서 그리스도께 참여한다.
베드로 전서 1장 11절은 우리에게 구약의선지자들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말한다. 신약의 계시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의 영을 의미한다(롬 8:9-1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영인 그 영은 [아직]없었다(요 7:39). 그리스도의 영은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적용하고 분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고 조성된 하나님의 영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영의조성이 시대적이며,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여 조성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기능은 영원하다. 이는 그분이 영원한 영이기 때문이다(히 9:14).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도 비할 수 있다. 십자가의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시야에서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었다(계 13:8). 구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살피고 찾는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인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때와 시기를 분명히 해주었다.
11. 그분의 영
1) 부활과 관련된 삼일 하나님의 영
지금까지 우리는 생명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의 영(the Spirit lf Him)에 이르렀다(롬 8:11). 헬라어에서 이것은 사실의 [그분의 영(the Spirit of the One)]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언급한 뒤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을 가리킨다. 예수를 일으키신 이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인 삼일하나님이시다. 이삼일 하나님은 부활케 하는 분이시다. 사도개인들이 마태복음 22장에서 주님과 부활에 관하여 질문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출애굽기 3장 6절과 16절에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삼일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을 지적하셨다. 이 거룩한 칭호는 부활을 지적하고 있다. 그분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 22:23). 삼일 하나님-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케 하는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 우리는 부활케 하는 하나님, 삼일 하나님을 본다. 로마서 8정 11절에서 우리는 부활케 하는 삼일 하나님의 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의 영이 창조자 하나님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영이 구원자의 영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이의 영]이라는 칭호를 이해하려면 더 많은 깨달음이 요구된다. 우리는 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자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들은 넷이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영, 그리스도 자신이신 이 분이 예수를 죽은 자가 운데서 살리신 그분이다. 이같이 말하는 것은 이분이 만유를 포함함을 가리킨다.
2) 우리의 영과 혼과 몸에 생명을 분배함
이제이 분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려고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은, 우리의 영을 생명이 되게 하고(8:10하), 우리의 생각이 생명이 되게 하며(8:6하),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을 주기위해(9:11하)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분이 하시는 첫째 일은 우리의 영을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의 영은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우리의 영은 죽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의 영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이다. 생명의 영이며,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며, 부활케 하는 분, 즉 삼일 하나님의 영이신 만유를 포함한 이 놀라운 분은 먼저 우리의 죽은 영을 생명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런 다음 이 내주하는 영은 우리의 생각을 생명으로 만든다. 영에 둔 생각은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새로워짐, 즉 변화이다. 우리의 영을 생명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여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이 놀라운 분은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외적인 치료가 아니라 내적인 생명의 분배이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몸이 구속받고(8:23) 변형될(빌 3:24) 그날까지 날마다 우리의 몸 안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분이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으로 자신을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사람은 세 부분-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있다. 믿는 이들인 우리의 영은 거듭났으며, 주도적인 부분인 생각을 갖고 있는 혼은 지금 변화 즉 새롭게 되어 가고 있다. 그날이 올 때 우리의 몸은 변형되어 그분의 영광의 몸을 본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몸의 구속이 될 것이다. 우리의 거듭남은 이미 성취되었으며, 우리의 변화는 진행 중이며, 우리의 변형인 우리 몸의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성취될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완성인 이 만유를 포함한 분은 삼일 하나님을 우리의 세 부분 안으로-영 안으로, 혼 안으로, 몸 안으로-역사하신다. 이것이 바로 삼일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분배에 의해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으로 그분 자신을 역사하시는 것이다.
12. 생명주는 영
우리는 생명의 영이 유일함을 보았다. 이 칭호는 신약에서 오직 한 번 로마서 8장 12절에서 사용된다. 생명주는 영 또한 유일하다. 물론 이와 같은 유형의 표현이 신약에서 몇 번 사용된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생명을 주는 것은 그 영이니]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은, [그 영은 생명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은 신약에서 특별히 [생명주는 영]이라고 말한 유일한 곳이다. 로마서에서 생명의영이신 그분은 고린도전서에서 생명주는 영이시다. 생명의 영이라는 칭호는 그분이 움직이며 역사하신다는 사상을 전혀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생명주는 영이라는 칭호는 생명의영이 움직이고 역사하며 생명을 분배함을 가리킨다.
1) 분배를 강조함
요한복음 6장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두 가지 표현-그분은 생명의 떡이며(35절) 산 떡(51절)이시다-이 있다. 젊었을 때 이 두 가지 표현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자문했었다. 생명의 떡은 떡의 본성, 즉 생명을 가리키며, 산 떡은 떡의 상태, 즉 살아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떡 그릇에 있는 물질적인 떡은 살아 있는 떡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떡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떡을 얼마큼 먹어 우리의 배속으로 들어올 때 즉시로 그 떡은 우리의 배속에서 살아 우리에게 영양을 주고 우리 안으로 생명의 요소를 분배하고, 우리의 혈관을 통해 우리 존재 안으로 각종 양양소를 배분하기 시작한다. 먹은 후에 생명의 떡은 우리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역사하는 산 떡이 된다.
생명의 영은 그 영의 요소가 생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한 편 생명주는 영은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기위해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역사하고 사는 동일한 영이다. 이것은 로마서에 있는 생명의 영이 역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에서는 그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에 있는 강조점은 생명의 영이 지금 그리스도의 각 지체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영이 믿는 이들의 존재 안에서 역사하고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생명 분배의 영이요, 그 역사는 당신의 존재 안으로 생명을 주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파헤침
생명주는 영은 하나님의 깊이들(depths)이신 그리스도를 파헤친다(고전 2:10, 12, 14). 어떤 것이 파헤쳐질 때 그것은 뒤엎어져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된다. 생명주는 영이 없어도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모든 것이 되시지만 당신은 조용한 상황 안에 있게 된다. 당신에게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가 있지만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이 너무도 [조용하기] 때문에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거의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파헤치고 분발케 하기 위해 오시는 아주 활동적이고 생생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 누군가가 바로생명주는 영이시다.
고린도 전서는 우리에게, 모든 믿는 이들의 몫이신 그리스도는 만유를 포함하시며, 우리 모두는 그러한 분의 교통 안으로 부르심 받았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분은 첫째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교통이다(고전 1:2, 9).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우리에게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고전 1:24, 30). 그분은 우리의 영화롭게 하심을 위한 우리의 영광이시므로(고전 2:7, 롬 8:30) 영광의 주(主)이시다(고전 2:8). 그분은 하나님의 깊이들(깊은 것들)이시다(고전 2:10). 하나님은 퍽이나 비밀한 분이시지만 이 하나님에게 깊이들이 있다. 그리스도는 가장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깊이 들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건축의 유일한 기초이시다(고전 3:11). 그분은 우리의 유월절이며(고전 5:7), 누룩 없는 떡이며(고전 5:81), 영적인 음식이며, 영적인 음료이시며, 영적인 반석이시다(고전 10:3-4). 그리스도는 움직이는 반석, 즉 이스라엘 백성을 따랐던 따르는 반석이시다. 그분은 머리이시며(고전 11:3), 몸이시다(고전 12:12).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첫 열매이며(20-30절), 둘째 사람이며(48절), 마지막 아담(45절)이심을 본다. 그리스도가 첫째요 둘째요 마지막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시다. 이와 같은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앞의 모든 항목들의 집합이신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최소한 열아홉 가지 항목을 갖고 있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영으로 집계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분을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몫으로 주셨다.
생명주는 영의 주된 역사는 우리 안에 계신 이 열아홉 가지 항목에 관해 그리스도를 파헤치고 분발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우리의 놀라운 몫이다. 생명을 주는 그 영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추구와 체험에서 이 그리스도를 분발시키기 위해그리스도를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파헤침은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지혜이며, 우리의 능력이며 우리의 의이며, 우리의 거룩함이며, 우리의 구속함이신 그리스도를 깨닫도록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를 이끌기 위해 여전히 계속된다. 그 영은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이시며, 누룩 없는 떡이며, 영적인 음식이며, 쪼개어진 반석에서 흘러나는 생명이신 영적인 음료이며, 우리를 항상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 무언가 더 파헤치실 지도 모른다. 이러한 파헤침은 그리스도가 머리이며, 몸이시며, 첫 열매이시며, 둘째 사람이시며,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더 보여 주기 위해 여전히 계속된다. 그리스도가 첫째와 둘째와 마지막임은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임을 가리킨다. 이것이 그분의 어떤 하심에 대한 매 항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분발시키기 위한 생명주는 영에 파헤침이다.
말씀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게 파헤치고 탐색하는 것이다. 성경을 다만 읽고 연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깊이들인 그리스도를 파헤치라 오늘날 이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영에 달려 있다. 생명주는 영은 돌쩌귀이며 그리스도는 완전히 이 영으로 싸여져 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며 파헤치는 생명주는 영이시다. 이 파헤침에 의해 그분은 그리스도의 풍성들을 우리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
3) 하나님의 성전인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심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17). 이것은 완전히 하늘에 속한 언어이다. 이 땅에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종교가 없다. 심지어 구약에 따라 기초가 놓여진 유대 종교조차도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 안에 거한다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신약, 하나님의 신약 경륜만이 우리에게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인, 만유를 포함한 생명주는 영이신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 우주에 오직 한 분만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으며 생명주는 영, 삼일 하나님의 완성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비할 것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부요한 자라는 것을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이 온 우주 안에 그분처럼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곳도 없다. 삼일 하나님의 완성인 생명주는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성전으로 삼으신다.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주하는 보배이시다(고후 4:7).
4) 믿는 이들을 씻어 거룩케 하심
생명주는 영은 또한 믿는 이들을 씻어 거룩케 하신다(고전 6:11). 모든 집과 건물에는 어느 정도 닦고 깨끗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들의 집을 깨끗케 한다. 심지어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도 씻음이 필요하다. 생명주는 영은 이렇게 씻으신다.
우리의 교회 생활의 체험의 시작은 신혼의 밀월(蜜月)이다. 신혼여행 후에 점차로 얼마큼씩 [먼지]가 쌓이기 시작하여 약간 청소를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우리가 처음 교회 생활에 들어 왔을 때에는 밀월 기간으로서 모든 것이 너무도 달콤했었다. 교회생활은 우리에게 놀라왔다. 그러나 얼마 후에 밀월의 교회생활이 지나갔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교회생활 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장로들을 최고의 천사들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하!] 이와 같은 생각은 이제 당신에게 깨끗케 함이 필요하고 씻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 영으로 돌이킬 때 그 영은 우리의 [아하]를 깨끗케 하고 씻어 준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으로 일 주일동안 돌이키지 않는다면 많은 [아하]가 당신 안에 쌓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집회에 가지 않으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당신은 집회에서 당신이 언짢게 여기는 어떤 형제를 만날 것이기 때문에 집회에 가기를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먼지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씻을 필요가 있고 청소할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으로 돌이켜 삼십 분간 기도한다면 당신은 교회 집회로 달려갈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을 씻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주는 영은 이렇게 씻으신다.
5) 믿는 이들을 한 영으로 주님께 연결시킴
또한 생명주는 영은 믿는 이들을 한 영으로 주님께 연결시킨다(고전6:17).이 연결하는 문제에있어서생명주는 영은 우리 개개인을 한 영으로 주님께 연결한다. 이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씻음 뒤에는 연결이 온다. 그 영에 의해 씻겨질 때마다 우리는 즉시로 우리가주님과 하나라는 느낌을 갖는다. 만일 내가 어떤 지방에 단 이주(二週)동안만 머문다면 그 교회에 있는 인도자들이매우 좋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내가그곳에서 반년을 머문다면 아마 [아하]가 시작될 것이다. 이 [아하]는 나를 주님과 분리시킨다. 내가 그 영을 돌이키고 그 영 안에 머물 때 생명주는 영은 나를 씻는다. 그 씻김 후에 나는 즉시로 내가 주님과 하나라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연결됨은 씻음에 뒤따른다. 우리에게 항상 씻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도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관찰을 감당할 만큼 오나벽한 장로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인도하는 자들은 엄격하고도 철저하며 날카로운 눈초리와 관찰 아래 있다. 사람들은 인도하는 자들이 어떤 종류의 타이와 옷과 구두를 착용하는지를 보려고 설필지도 모른다. 로든 성도들은 장로들을 샅샅이 살핀다. 누가 이러한 눈초리와 관찰을 피할 수 있겠는가? 오직 인류 가운데 한 사람만이 사람들의 눈초리와 관찰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중에는 이렇게 완벽하고 엄격한 검사를 통과할 자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눈초리를 감당할 수 없어도 씻음을 누릴 수는 있다. 그 깃음은 우리를 깨끗케 한다. 생명주는 영에 의하여 씻음은 항상 우리를 다시 이끌어 주님과 한 영으로 연결되게 한다.
6) 믿는 이들의 몸을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심을 위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점유함
생명주는 영은 믿는 이들의 몸을 점유하신다. 이 몸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심을 위한 하나님의성전이다(고전 6:19-20). 이것은 생명주는 영이 비단 우리의 영 안에 머무를 뿐 아니라 우리의 몸까지도 점유하고 우리의 몸에 거주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그들의 몸으로 주님께 부끄러운 일들을 행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도박을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몸을 도박에 쓰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도박장에 간다면 당신은 그곳에 가는 데 당신의 두 다리를 쓴다. 주님께 부끄럽게 되어진 대부분의 일들은 몸을 통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몸은 내주하는 생명주는 영에 의해 점유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발과 다리가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해야 하며 항상 우리를 이끌어 교회 집회에 오게 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발은 항상 생명주는 영에 이해 점유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심지어 우리가 농담을 할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몸의 일부인 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영이 우리의 입을 점유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이것이 생명주는 영의 역사이다.
7) 믿는 이들의 의견을 적심
또한 생명주는 영은 믿는 이들의 의견을 적실 수 있다(고전 7:40). 내가 믿는 바로는, 주님들 추구하는 형제자매들로서 우리 모두는 의견을 미워한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당신은 의견이 충만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마음이 상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에게는 의견이 있다고 말했다. 7장 25절에서 바울은 그에게 주님의 계명이 없지만 그의 의견을 고한다고 말했다. 7장 40절에서 그는 우리에게 의견을 말한 뒤에,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바울의 의견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기도와 찬송과 하나님을 위해 하는 말에만 하나님의 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우리의 의견에도 생명주는 영의 적셔짐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너무도 생명주는 영에 의해 적셔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 안에 까지도 하나님의 영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의견에 침투하고 스며들었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될 수 있다.
8) 믿는 이들은 이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음
믿는 이들은 이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고전 12:13). 그 영이 우리 영적 침례의 영역과 요소이다. 이와 같은 영 안에서 우리 모두는 유기적인 한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종족과 국적과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몸의 생명과 구성성분이며 그 영은 그리스도와 실제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살아 있는 이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은 것은 이 한 영 안에서이다.
9) 믿는 이들이 이 한 영을 받아 마심
믿는 이들은 또한 이 한 영을 받아 마신다(12:13하). 침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한 영을 마실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이 영 안에 잠겨지자. 우리는 이 영안에 적셔지고 스며지고 배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항상 이 실제-우리의 밖에 있는 것도 다 그 영이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다 그 영이다-안에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 영로 싸여져야 한다. 이것이 생명주는 영의 역사이다.
10) 이 영의 나타남이 은사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은사들, 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이 영의 나타남을 본다(4, 7-11).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 합당한 생명과 성장과 생명의 성장의 충만한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그 영의 나타남으로 아홉 가지 은사들을 열거한다.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들, 능력의 역사,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이 그것이다. 그 영의 나타남의 마지막이 방언과 방언 통역이 그것이다. 그 영의 나타남의 마지막이 방언과 방언 통역이다. 그 영의 나타남의 최우선 순위에 있는 것은 지혜의 말씀이며, 그 다음이 지식의 말씀이다. 그 영의 나타남의 아홉 가지 은사 가운데 다섯 가지가 말하는 것과 관계된다.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방언, 방언 통역이다. 다른 네 가지 항목들은 기적적인 항목들로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 병 고치는 은사들, 능력의 역사(기적들), 영들 분별함이다(고린도 전서 회복역 12장 4절부터 11절 까지의 각주를 보라).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은사들 중 방언과 방언 통역은 마지막 두 가지로 열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른 항목들만큼 교회의 건축에 유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4:2-6, 18, 19). 우리를 몸 안에서 합당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들로 만들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생명주는 영이다.
13.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제
고린도 후서 3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제이신 그 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다. 우리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분의 실제 안에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사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편지를 썼다고 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영은 단지 영일 뿐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살아계신 하나님의영은 하나님이다. 여기의 살아계신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 즉 성육신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하여 지금은 생명주는, 생명을 나누어 주는, 생명을 분배하는 영으로 완성 되는 분이시다. 사도들은 이 영으로 성도들 위에 새김으로 사도들에 의해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게 하는 것이다.
14. 주의 영
1) 주님의 실제
주의 영은(눅 4:18, 행 5:9, 8:39, 고후 3:17)여호와의영을 언급한다(삿 14:6). 신약에서의 예수의 이름은 구약에서의 여호와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은 신약에서 주의 영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의 영을 말한다. 실제적으로 주님의 영은 주님 자신이다.
신약에 계시된 것처럼 그 영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의 실제이다. 이것은 영이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영이 없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실제를 갖지 못하며, 주님의 영이 없이는 주님의 실제를 갖지 못한다. 우리에게 영이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주님의 실제가 있다
2) 그리스도의 승천과 관계됨
주의 영은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이 그 영에 더해진 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 있는 [주]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높여지심 가운데서 그분은 주가 되셨다(행 2:36).
3) 믿는 이들을 자유케 함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은 우리에게, 주님이 그 영이시며,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한 주의 영이심을 보여준다. 주님은 그 영이시며 그 영이신 주님은 우리를 규정이나 의식이나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전통적인 교리들로부터 자유케 하신다. 바울 당시에 구약의 율법은 하나의 커다란 소박이었다. 그 영이신 주님은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신다. 유대인들은 할례의 속박 아래, 또는 어떤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하고 이방인들과는 함께 먹지 말아야 하는 등의 음식의 규정의속박아래, 안식일과 기타 다른 구약의 규정의 속박 아래 있었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이 아프거나 굶주려도 안식일에는 그들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그들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속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세의시대나 의문(儀文)에 있는 율법의시대가 아니라 주 예수님이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신 시대이다. 오늘 주님은 뉴마(pneuma), 그 영이시다. 의문의 율법을 갖고 있던 모세는 모든 사람들을 속박 아래-안식일을 지키는 속박, 할례의 속박, 음식의 규정의 속박, 이방인들을 접촉하지 못하는 속박, 기타 많은 속박들 아래-가두었다. 사람은 많은 속박으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때 예수께서 오셨다. 그분은 놀라운 분이시며, 그분은 주(主)이시다. 그분은 또한 뉴마, 그 영이시다. 그분은 의문의 율법이 아니시다. 그분에게는 더 이상 묶임도, 안식도, 할례도, 음식의 규정도 없다. 오직 완전한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그 영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가 되신다. 우리는 해방되었다. 이전에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속박 아래 있었으며, 그 하나하나의 속박들은 수건이었다. 모든 속박들은 겹겹의 수건들이었다. 그것은 속박과 눈멀고 어두움과 사망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할렐루야! 예수께서 오셨다! 그분은 그 영이시다. 그분은 자유이시다. 마음을 주께로 돌이킬 때 수건은 벗겨진다(고후 3:16). 더 나아가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그 영이시다. 주님이 그 영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그분께 돌이킬 대 수건은 제거되고 마음은 의문의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된다. 우리는 해방되었다!
15. 주 영
1) 주님이 영이심을 말함
신약에서 그 영은 또한 주영이라 불리운다(고후 3:18). [주 영]이라는 칭호는 아버지 하나님이나, 주 그리스도와 같이 복합적인 칭호로 간주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주 그리스도가 그 영이시며, 그 영이 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강하게 입증한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 그분의 부활 안에서 주님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과 동일시된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이 [주는 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부활 안에서 바로 그리스도, 즉 우리의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과 동일하다. 주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이시며, 만유를 포함한, 생명주는, 복합적인, 과정을 거친, 완성된 그 영은 실제로 주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과 나누거나 주님을 영으로부터 분리시킬 도리가 없다. 이는 주님과 그 영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영은 주영이라고까지 불리운다.
16. 하나님의아들의 영
1) 아들의 명분의 실제
갈라디아서 4장6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한 생명의 체현이다(요일 5: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은 생명의 영이다(롬 8:2).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주셨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에게는 넘치는 생명의 공급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 안에 참여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와 더불어 몫이 있다.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많은 아들들을 산출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고 우리를 율법에서 구속하시려고 아들 하나님을 보내셨다. 그분은 또한 우리로 실제 안에서 그분의 아들들이 될 수 있게 하려고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넣어 주시려고 하나님 영을 보내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누리려면 우리에게는 그 영이 필요하다. 영을 떠나서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갖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날 수 없다. 일단 우리가 그 영으로 거듭 났다면 생명의 성장을 위해 우리에게는 그 영이 필요하다. 그 영이 없다면 우리는 아들의 명분의 지위와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없다. 아들의 명분에 관한 모든 중점들은 그 영에 달려 있다. 그 영이 없다면 아들의 명분은 공허하고 빈 용어가 된다. 그러나 그 영이 올 때 아들의 명분은 참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은 아들의 명분의 실제이다. 아들의 영은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신성한 아들의 명분을 참되게 만든다.
2) 아들의 다른 형태
우리는 아들의 영을 아들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적으로 아들의 영은 아들의 다른 형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그리스도이지만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신 분은 그 영이시다. 먼저 그분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위한 자격을 얻게 하고 아들의 명분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얻게 하기 위해 율법 아래서 아들로 오셨다. 그러나 그분은 이 역사를 끝내신 후에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사 아들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은 아들의 명분을 강화시키며 체험 안에서 아들의 명분을 참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의 아들의 명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에 달려 있다.
17. 예수 그리스도의 영
1) 넘치는 공급과 관련됨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요한복음 7장 39절에 언급된 영이다. 이것은 단지 주님의 성육신 이전의 하나님의 영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하신 후에 주님의 성육신(인성)과 십자가 아래서의 인생과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이 복합된 하나님의 영, 즉 인성이 있는 성령이다. 출애굽기 30장 23절부터 25절에 있는 네 가지 향품들이 더해진 감람기름의 복합된 이 하나님의 영에 대한 완전한 예표로, 이 하나님의 영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여기의 영은 사도행전 16장 7절에 있는 예수의 영도 아니며, 로마서 8장 9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예수의 영은 주로 주님의 인성과 인생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은 주로 주님의 부활을 위한 것이다. 주님의 인성을 체험하려면 우리에게는 예수의 영이 필요하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필요하다. 고난 가운데서 바울은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부활을 다 체험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그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복합적인, 만유를 포함한, 생명주는, 삼일 하나님의 영이다. 이러한 영에는 그분의 인생과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는 바울과 가은 사람에게 하는 넘치는 공급이 있으며,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시다. 결국 복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은 땅에서 그분의 교회와 더불어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그분의 행정을 수행하는 그분의 보좌 앞에 일곱 등이신 하나님의 일곱 영이 되는데, 이분은 그분의모든 어떠함을 교회 안으로 주입하기 위한 주님의 일곱 눈이다(계 1:4, 4;5, 5:6).
2) 예수의 실제이며 그리스도의 실제임
예수의 영이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언급하고 그리스도의 영은 그분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고난과 부활과 모두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이 땅에서 고난의 인생을 사신 예수의 영이며, 이제는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땅에서 인성 안에서 사셨던 분의 실제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지금은 하늘에와 믿는 이들 안에 동시에 거하시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되실 분의 실제이다. 이러한 예수와 이러한 그리스도의 실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18. 영원한 영
1) 그리스도의 역사를 무한하고 영원하게 함
히브리서 9장 14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한다. 십자가위에서그리스도는 시간의 문제인 사람의 몸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한다. 십자가위에서그리스도는시간의문제인사람의몸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나 그분은 이것을시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에 속한 영원한 성령을 통해 행하셨다. 영원한 영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다.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은 제한이 없고 영원하다.
영원한 영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원히 효능이 있게 했다. 그분의 죽으심의 성취는 모든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망라한다. 비록 그리스도는 약 이천년 전에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갈보리에서 죽으셨지만, 그 죽음이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 죽음은 우리에게 적용 가능하며, 효능이 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우리에게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 성령을 통해 자신을 드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한다. 이 드림은 영원하며 참되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원한 영을 통해 되어졌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영을 접촉할 때 우리는 이 드림을 접촉한다. 우리가 성령에 참예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이 유일한 드림에 참여한 자들인 것이다. 우리가 그 영에 참예하는 순간에 우리는 그 영과 관계된 모든 것들에 참예한다.
그분이 땅에 계셨을 때 주 예수는 영원한 영을 통해 살고 수고하셨다. 그분의 삶과 수고 가운데서 그분이 체험하고 성취한 모든 것들은 영원한 성령에 의해 영원하게 되었다. 이 영원한 영은 과정을 통과한 삼일 하나님의 완성으로, 만유를 포함한다. 이제 믿는 이들인 우리는 이 영에 참예하며, 이 영은 우리 안에 있다.
19. 은혜의 영
1) 아들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누림과 관계됨
성령은 또한 은혜의 영이다(히 10:29). 성령에 대한 이 방면은 삼일 하나님의 누림과 관계있다. 이는 삼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이는 삼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은혜의 영이 된다는 것은 그 영이신 아들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누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달하심 이다. 아들이 그 영이 되기 전에는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 가운데 있을 수는 있었지만 그들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할 필요가 있었다(요 14:16-20). 그때 그분은 자신을 그 영으로 제자들 안으로 내어 쉴 수 있었다(요 20:22).
2) 은혜의 실제임
은혜의 영으로 그 영은 은혜의 실제이다. 신약에서 생명의 영이나 은혜의 영이라는 표현은 성령이 생명이며 은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의 영에 참예하는 것은 은혜이신 그 영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없다면 우리는 은혜를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받는 신성한 은혜의 실제는 은혜의 영이다.
[은혜의 영]이라는 칭호는 또한 그 영이 은혜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받은 그 영은 은혜로운 영이며 의무적인 영이 아니다. 그 영이 은혜롭다는 것은 스가랴 12장 10절이 입증한다. 이 구절은 은혜와 공급의 영의 부어짐을 말한다.
20. 영광의 영과 하나님의 영
1) 부활하고 높여지신 그리스도의 영화로움을 위해
핍박받는 믿는 이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
베드로 전서 4장 14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저희 위에 계심이라].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영광의 영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분이다.(롬 1:4). 바로 이 영광의 영이, 하나님 자신의 영이신 이분이 핍박받는 믿는 이들의 고난 위에 머물러 있다. 이는 지금은 영광 가운데계신 부활하고 높여지신 그리스도의 영화로움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영은 믿는 이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영이며, 고난당하는 믿는 이들이 누린 체험된 하나님의 영이다. 영광의 영은 분명히 순교 당하고 있었던 스데반 위에 있었다(행 6:15, 7:55). 베드로 서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있으며(1:11), 영광의 영은 우리 위에 있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누림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이 되심을 계시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다. 영광의 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우리 위에 있다. 이 놀라운 영의 한 방면은 그 영이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동일한 영의 다른 방면은 그분이 또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영광의 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더 고통을 받을수록, 주님을 위해 더 고난을 당할수록 우리 위에는 더 많은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능욕을 받을 때마다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광의 영과 하나남의 영이 우리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광의 영은 내주하는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은혜의 영이며, 핍박받는 믿는 이들 위에서 빛나는 영광이 될 것이다.
21. 일곱 영
1) 하나님의 영의 강화된 기능
계시록에서 영은 일곱 영으로 불리운다(1:4, 4:5, 5:6).칠 배로 강화된 이 영은 교회의 타락을 막기 위한 것이다. 계시록 1장 4절에 있는 일곱 영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영이다. 이는 그것이 삼일 하나님 가운데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칠이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완성을 위한 숫자이듯 일곱 영은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본질과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이다. 하나님의 활동의 기능과 역사 안에서 그분의 영은 칠 배가 된다. 이것은 스가랴 4장 2절에 있는 등대와 같다. 그러나 기능에 있어서 그것은 일곱 등들이다. 계시록이 쓰여 졌던 시대에 교회는 타락되었고 시대는 어두웠다. 그러므로 칠 배로 강화된 하나님의 영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을 위해 필요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삼일 하나님의 순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다. 그러나 계시록 1장 4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순서는 바뀌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세 번째 있지 않고 두 번째에 열거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칠 배의 영의 강화된 기능의 중요성을 계시한다. 이것은 영의 말씀하심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2장 7절, 11절, 17절, 29절, 3장 6절, 13절, 22절, 14장 ·13절, 22장 17절에 의해 확증된다.
[일곱 영]이라는 칭호는 그 영이 일곱 배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영은 그 영의 모든 요소들을 강화시킨다. 즉 신성과 성육신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실제와 생명과 은혜를 강화시킨다.
2)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온 땅에
두루 행하는 하나님의 영
계시록 4장 5절은 이렇게 말한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여기의 일곱 등불은 출애굽기 25장 37절에 있는 등대의 일곱 등들과 스가랴 4장 2절에 있는 등대의 일곱 등들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일곱 영인 일곱 등불은 칠 배로 강화된 하나님의 영의 비추심이요 조사하심이다. 출애굽기 25장과 스가랴 4장에 있는 하나님의 움직이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비추심을 상징하는 일곱 등은 하나님의 건축, 즉 장막이나 성전의 재건을 위한다. 여기의 일곱 등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는데, 이 결과는 역시 하나님의 건축, 즉 새 예루살렘이다.
계시록 5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눈은 살피고 찾기 위한 것이다. 구속하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주 위에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고 살피고 찾으시는 눈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종결은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 그러므로 스가랴 3장 9절에서 그분은 돌로 예언되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일곱 눈을 가진 관석이다(슥 4:7).
어린양의 일곱 눈이신 일곱 영은 또한 주입을 위한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영이신 그분의 일곱 눈으로 우리를 보실 때 이 눈은 그리스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주입한다. 불타는 일곱 등불이신 일곱 영이 비추고 태우는 반면 어린양의 일곱 눈이신 일곱 영은 살피고 찾고 주입한다. 주님이 우리를 비추고 심판하는 동안에 그분은 우리를 바라보시며, 그분의 일곱 눈이신 일곱 영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자신을 우리 안으로 주입하신다.
22. 그 영(The Spirit)
1) 하나님의 영에 대한 칭호의 총체이자 집합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은 그 영이다. 그 영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칭호의모든 요소들의 총체이자 집합이다. 그러므로 그 영은 만유를 포함한 영이다.
영의 모든 방면들과 요소들을 종합해 볼 때, 특별히 신약 성경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결론은 그 영이라는 것이다(막 1:10, 마 4:1, 12:31, 요 3:5, 34, 7:39, 행 6:3, 8:18, 롬 8:16, 23, 26, 27, 갈 3:12, 14, 5:16-18, 22, 25, 벧전 1:2, 계 2:7, 14:13, 22:17). 성경이 그 책(The Book)이듯 오늘날 하나님의 영은 그 영(The Spirit)이다. 그 영은 만유를 포함한, 복합적인, 과정을 거친 영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영이며, 여호와의 영이며, 성령이며, 아버지의 영이며, 실제의 영이며, 보혜사이며, 능력의 영이며, 예수의 영이며, 생명의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분의 영이며, 생명주는 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며, 주의 영이며, 주영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영이며, 영원한 영이며, 은혜의 영이며, 영광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며, 일곱 영이다.
2) 궁극적인 만유를 포함한 생명주는 삼일 하나님의 영
요한복음 7장 39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 하신 것이라 그러나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그 영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구절은 그 영을 말하면서 우리게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그 영이 아직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태초부터 있었다(창 1:2). 그러나 만유를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그 영은 요한복음 7장 39절 때까지도 아직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 즉 그분이 영광을 받으신 후 하나님의 영은 성육신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이라도 하나님의 영은 여호와의 영이며 성령이었다. 그러나 그 영은 아직 없었다. 이 용어-그 영-는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종종 사용했으며, 요한이 계시록에서 사용했다. 그 영을 말한 바울과 요한은 만유를 포함한 생명주는 삼일 하나님의 영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은 그 영이다.
3)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축복
전에 아브라함에게 전파된 복음에 관해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영의 약속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 영을 약속하셨다. 반복하거니와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나 주님의 영이나 성령이 아닌 그 영을 갖는다(개역 성경은 성령이나 원문은 그 영임 : 역자 주).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영을 갖는다. 이는 그 영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신약 경륜의 유일한 축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영이 삼일 하나님의 완성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이 통과하신 과정이 없는 삼일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영은 그분의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과하신 후의 삼일 하나님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신 삼일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신약의 축복인 완성된 영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축복이다.
계시록에는 오직 영에 대해 두 가지 칭호가 사용된다. 그것은 일곱 영과 그 영이다. 1장 4절과 3장 1절, 4장 5절에서 우리는 일곱 영을 보며,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계속하여 [그 영]이 사용되는 것을 본다. 또한 14장 13절과 마지막으로 22장 17절에서 우리는 [그 영]이라는 용어를 본다. 22장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이것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총체인 그 영과 지금은 완전히 성숙하여 신부가 된 교회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 영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표현이며, 신부는 변화된 세 부분으로 지어진 사람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계시록 22장 17절 시대에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변화된 사람은 하나 될 것이며, 하나로 말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메시지의 결론으로 성령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 그 영은 선택되고, 구속되고, 거듭나고, 거룩케 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된 세 부분으로 된 그분의 백성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이 되심으로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되기 위해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완성으로, 과정을 거친, 복합적인, 만유를 포한, 생명주는, 내주하는 칠 배로 강화된, 완성된 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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