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uniftp.unitel.co.kr%3A9130%2Fcurie04%2Fimage01%2F09%2Fkeblc_060328_181106_U0.JPG)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돌담길 모퉁이로 어머님이 곧 뛰어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이렇게 정지용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고운 우리말로 적고 있는 것이다. 고향의 모습이 금방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운동회 날 상(賞)이라는 도장이 찍힌 노트를 받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생고무를 휘발유에 녹여 만든 고무풀(요즘의 본드 같은 것)로 터진 고무공을 때워 쓰기도 했다.
경제학자인 류동길 교수(전 외환은행 선배님)는 논평만 잘 하시는 줄 알았는데 훌륭한 문필가인 줄은 미쳐몰랐습니다. 『고향연가(고향 雪川을 그리며)』, 2006년 2월 발행된 책에 실린 글입니다. 가슴이 찡하는 글을 쓰셨네요.
옛일 떠올리며 고향을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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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길(숭실대 명예교수)
1. 고향에는 포근함과 여유가 있다
고향을 생각하면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고 온갖 상념이 뇌리를 스친다. 더욱이 어릴 적 뛰놀던 그 때를 떠올리면 마음은 상상의 세계로 나른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돌담길 모퉁이로 어머님이 곧 뛰어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고향은 기쁨이고 설렘이다. 고향에는 포근함과 여유(餘裕)가 있다. 포근함과 여유는 바꾸어 말하면 넉넉함이다.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지혜는 넉넉함 속에서 나온다.
여름밤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 위에서 별 헤던 시절은 그림 속의 풍경이다. 살이 드러난 부채로 더위도 씻어내고 모기도 쫓던 시골의 여름밤, 지금은 아련한 추억 속의 일들이지만 그 향기는 조용히 내게 남아있다. 그렇게 고향 하늘은 먼 길을 되돌아 추억을 안고 다가온다. 그 때는 그렇게 무심히 별을 헤었지만 그건 멋진 전원생활이었다. 온갖 공상을 하며 자연 속에서 살았던 세월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행운이자 지금도 값진 자산으로 남아있다.
1950년대의 농촌은 앞이 보이지 않는,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었어도 우리 고향 사람들은 특유의 기질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건 끈기와 슬기였다. 그래서 고향을 떠올리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헤쳐 나갈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태어나서 자란 곳” 또는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이 고향이다. 사전의 풀이가 그렇다. 하지만 산업화시대를 지나 지식정보화시대로 들어선 지금 이렇게 고향을 풀이하면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부모의 고향은 시골인데 자식은 도시에서 나서 자라고 이곳저곳을 이사 다녔다면 그 자녀의 고향은 어디일까?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 특히 도시에서 나서 자란 시골출신의 자녀들은 고향이 없는 것과 같다. 피난 온 사람들만 실향민(失鄕民)이 아닌 것이다.
"사나이 이르는 곳, 그곳이 다 고향"이라고 하지만 어디 그런가. 어릴 적 살던 고향에는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추억이 있지 않은가.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의 가슴에는 언제나 맑은 시냇물 같은 정서가 흐른다. 고향은 눈물의 원천이기도 하고 사랑의 원류(源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명절 때나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들은 대단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많은 외국인들은 긴 귀성행렬에서 한국인의 역동성을 느낀다고 한다. 왜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부모친척 얼굴보고 성묘하기 위해 가는 것인가. 고향을 찾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고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있고 향기가 있고 또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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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마음 뿐이다. 얽히고설킨 세상살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고향마을 어귀에서 맴돈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걸 노래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도 많았다.
중국 동진(東晋) 송(宋)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보라. 도연명은 항상 전원생활을 그리워 하다가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읊은 시가 귀거래사였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니 어떻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삼았으니 어찌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윽고 내 집이 눈에 들어와 기쁜 마음으로 뛰어갔다. 심부름하는 아이는 반갑게 맞이하고 어린것들은 문 앞에서 손들어 나를 맞는다. …돌아가리라! 이제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달래련다.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일러주니 이제부터 서쪽 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구나.…"
노천명은 망향(望鄕)에서 이렇게 읊었다. "언제든 가리라/마지막엔 돌아가리라/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언제든 가리 나중엔/고향 가 살다 죽으리/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촌/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고을/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우거진 덤불에서/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정지용의 향수(鄕愁)를 보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이렇게 정지용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고운 우리말로 적고 있는 것이다. 고향의 모습이 금방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경제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온 강토가 변하기 시작했다.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하듯이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모두 변했다. 당연히 우리 고향도 달라졌다. 마을길도, 사는 집도, 인심도 달라지고 풍습도 변했다. 변하지 않는 건 없는 것이다. 순박함도 여유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내 가슴에 남아있는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다.
여전히 고향을 지키는 분들의 얼굴에는 검고 깊게 패인 주름살이 선명하다. 그 주름살에는 삶의 자취와 역사가 각인돼있고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다. 또 손발은 어떤가. 거칠다 못해 상처투성이다. 굵은 손톱은 갈라져 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흙을 파며 닳아진 손발로 자식들을 키웠다. 위대한 얼굴이며 손발이다. 그래서 고향에는 아픔이 기쁨과 함께 있고 가벼운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엄숙함이 있다.
3. 공차고 놀던 운동장
내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하지만)에 입학한 건 해방직전인 1945년 4월이었다. 6 25를 겪던 1951년 6월에 졸업, 국민학교를 6년하고 좀 더 다녔다. 중학교는 1951년 9월에 입학, 1954년 3월에 졸업했으니 2년 반 다녔다. 학제개편에 따른 과도기(주-보내는이 유노상이 조사한 자료 아래 첨부합니다)여서 그랬다. 그 당시 설천국민학교의 학생은 600여명이었다. 그런 규모의 학교였는데 이제 학생이 얼마 안 된다니 세월이 변해도 크게 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마을에는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멎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어릴 적 뛰놀던 학교 운동장은 넓고 컸다. 어린 눈에 비친 운동장이 크게 보였던 건 당연했다. 농번기에는 가정실습이라고 휴교를 했다. 평소에는 해가 질 때까지 학교에서 공차고 놀다가 어둑해서 집에 가면 되는데 가정실습기간에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어린 마음에 가정실습이 그렇게도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만국기가 펄럭이던 운동회 날은 학생들 뿐 아니라 온 고을의 잔칫날이었다.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사생결단이라도 하듯 싸우면서 생존경쟁의 질서를 배웠다. 운동회 날 상(賞)이라는 도장이 찍힌 노트를 받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운동장은 학생들의 유일한 놀이터였기에 점심시간은 늘 만원이었고 공부 끝난 후에도 축구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운동장에서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여러 팀이 한꺼번에 공을 차는 경우 골문에는 당연히 골키퍼가 여러 명이다. 골대도 골 그물도 없었기에 골문을 표시하는 돌멩이를 놓고 시합을 했다. 그래서 골 시비가 자주 일어났고 공중으로 날아간 골 비슷한 건 반 골로 쳐주기도 했다. 슛한 볼을 다른 팀의 키퍼가 막았을 때에도 골이냐 아니냐로 시비가 벌어졌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공을 차는 친구들은 주머니가 불룩할 정도로 신발을 동여맬 끈을 많이 가지고 다녔다. 고무신을 신고 공을 찼기에 공보다 고무신이 더 멀리 날아가기도 했다. 맨발로 공을 차는 경우도 흔했다. 축구공은 테니스 공 만한 고무공이었다. 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어 그 쪽으로 공이 가면 공은 가시에 찔려 터져 버린다. 생고무를 휘발유에 녹여 만든 고무풀(요즘의 본드 같은 것)로 터진 고무공을 때워 쓰기도 했다.
학교공부가 끝나면 학급친구들끼리 마을대항 시합을 많이 했다. 나는 문항마을 선수로도 남양마을 선수로도 뛰어 항상 소속마을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 집은 모천이었지만 아버님이 면사무소를 다니셔서 남양에서도 얼마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가서도 축구선수를 했고 고등학교 때에도 잠시 선수생활을 했다. 대학에서도 개교기념일을 전후해서 단과대학별 축구시합을 할 때 공을 찼다. 우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내가 재학하는 동안 상과대학은 3년 연속 우승을 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에는 사단축구부에서 공만 차다가 제대했다. 축구를 제법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뛰놀던 설천학교 운동장 덕이었다.
그 운동장에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면 마을대항 축구시합이 열렸다. 대단한 열기로 가득 찬 운동장은 설천면민의 단합대회장이기도 했다. 마을마다 많은 사람들이 선수로 뛰거나 응원단으로 동원돼 열기를 뿜었다. 사회통합이란 그런 모임과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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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철없던 시절의 초상화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는 듣지 않고 자랐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이지 집에서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서 책을 펴본 기억이 없다. 책상도 공부방이라는 것도 있을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모두 그랬을 것이다. 학부형들은 선생님에게 "숙제를 내주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판이었다. 아이가 집에 오면 숙제한다고 일을 안 한다는 것이다. 일하기 싫어 숙제한다는 핑계를 댔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뛰놀던 시절, 시험을 걱정한 적이 있으며 과외공부라는 소릴 들어보기라도 했는가.
4학년 때였을 것이다. 급장을 선출할 때였다. 급장은 담임선생님이 사실상 지명했던 것 같은데 어찌된 영문인지 선생님은 선거를 하라고 하셨다. 다른 학급에서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몇 년 동안 계속 급장을 해서였는지 나는 급장하기가 싫었다(이건 사실이다). 그래서 선생님을 골탕 먹이자는 심리도 발동하여 공부에 관심이 상당히 덜했던 어떤 친구에게 표를 던지자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학급친구들이 내 말에 많이 동조해서 그 친구가 표를 많이 얻었다.
선생님은 어떤 이유를 내세웠는지 투표결과를 무효화시켰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다시 급장이 됐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글을 쓰다 보니 기억의 저편에 사라진 반세기전의 옛일이 되살아 나온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친구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다.
5학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석(磁石)에 대해 공부할 때였다. 선생님은 자석에는 막대자석과 말굽자석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때 교실 한 쪽에서 "빌어먹을 자석도 있습니다"는 소리가 났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의 목소리였다. 그때 세계지도를 말아 올리는 막대기로 맞은 기억이 난다. 학생들의 모범이 돼야할 급장이 그런 장난을 쳤다고 선생님은 더욱 화가 나셨던 것 같다. 나는 얌전히 공부하는 그런 모범학생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교실에서 연필이나 지우개 같은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그러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모두 눈감게 해놓고 훔친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라고 했다. 누가 손을 들었는지, 손 든 사람이 과연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선생님은 그 일을 수습하는 지혜를 발휘하셨다.
학생들의 손발에는 늘 시커멓게 때가 끼어있었고 겨울에는 손발이 텄다. 손발 검사한다고 하면 그 전날 쇠죽 끓이는 가마솥에 손발을 담가 때를 베꼈다. 이른봄이면 학교 앞 냇가에 가서 손발을 물에 담갔다가 돌멩이로 문질렀다. 손에 낀 때가 찬 물에 베껴질 리 없건만 선생님은 그래도 아이들을 냇가로 몰았다. 아마 손발의 때보다 마음의 때를 베껴내려고 한 것인지 모른다.
1년에 한 번씩 학예회가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의 그 어설픈 재롱잔치를 보면서 학부모들은 박수를 쳤다. 자기 자식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류역사에 없다고 하지 않던가. 학예회 때 칠판에다 분필로 말 그림을 기막히게 잘 그려 모두를 놀라게 한 친구가 있었다. 미술천재였던 그 친구는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대단한 화가를 잃었다는 안타까움이 지금도 남아있다.
습자(붓글씨 쓰기)시간에는 학생들의 손은 먹물범벅이 됐고, 작문시간에는 글짓기하느라고 머리를 짜냈다. 언젠가 한 친구는 "하늘은 구름보고 말 못 하고, 구름은 하늘보고 말 못한다"는 글을 썼다. 아마 대단한 시상(詩想)이 떠올라 그렇게 썼을 것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글이 아닌가. 그러나 그 글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지 선생님은 칭찬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때 잘 썼다고 격려했다면 아마 위대한 시인이 나왔을지 모른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일처럼 중요한 게 있을까?
무엇을 읽고 싶어도 교과서 이외에는 읽을 책이 없었다. 언젠가 친구와 셋이서 읍내로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남양에서 읍내까지 물론 걸었다. 책 한 권 살 정도의 돈을 쥐고서. ‘톰 쏘여의 모험’이란 책을 산 것 같은데 걸어오면서 다 읽어버렸다. 읽을 책이 또 없어져 아쉽고 안타까웠던 기억이 새롭다. 읽을 것을 어디서 구하면 읽는 재미도 있었지만 다 읽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생겨 천천히 읽기도 했고 읽은 것을 몇 번이나 다시 읽기도 했다. 아마 무언가를 많이 알고 싶고 읽고 싶어 목말랐던 것 같다.
5학년 때였다. 남해군의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글짓기 공모가 있었다. 공자(孔子)와 관련된 행사였던 것 같은데 설천학교에서 내가 입상하여 얼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상금을 현금으로 받기도 했다. 상품을 주지 않고 왜 현금을 주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국민학교 졸업식은 1951년 6월 하순이었다. 재학생 대표는 졸업생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담은 송사를 했고 졸업생 대표로 아동장(지금의 학생회장)이었던 내가 답사를 했다. 어떤 내용의 답사를 읽었는지 까맣게 잊었지만 약간 슬픈 목소리로 읽어야 한다는 지시를 선생님에게 받았던 것 같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 졸업의 노래를 합창할 때에는 졸업생 대부분이 울먹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마지막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110여명의 졸업생 중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은 18 명이었던 것 같다. 가난했던 시절이었으니 아까운 인재들에게 배움의 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가난은 죄였고 가난은 분명 시절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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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난했던 시절의 향수
학교로 오가는 길에는 사탕 같을 걸 파는 가게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침을 삼켰는지 모른다. “우리 집도 가게를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을 가져보지 않은 아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눈깔사탕이 생기면 그걸 깨물지 못하고 녹을 때까지 입에 물고 있었다. 그 짜릿한 단맛을 오래 맛보고 싶어서다.
옛날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가난이다.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가난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서 뛰고 놀다가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오후 수업하고 집에 가서 늦게나마 점심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운동장 한쪽에 있던 그 펌프우물은 늘 물이 말라 있었다. 물을 한 바가지를 부어 펌프질을 해야 물이 올라오는 그런 펌프였다.
가을 운동회 연습할 때에는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기에 점심을 싸 가지고 와야 했다. 가을 추수 전이라서 점심도시락은 보리밥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늘 먹는 보리밥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점심 싸 가지고 올 그릇이 없어 밥그릇을 가져오는 친구도 있었다. 그 때 깡통을 펴서 만든 도시락이 있었는데 그 도시락에 담은 밥에는 녹물이 묻어 나왔다.
언제였던가, 어떤 친구가 학교에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 조금 먹어보니 달콤하면서 입안이 환해져 친구들이 너도나도 조금씩 얻어먹으려고 그 친구 주위에 모였다. 그게 미제 치약이었는데 치약인줄은 모두 몰랐고 그저 먹는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비 오는 날의 교실풍경은 실로 가관이었다. 헐렁한 고무신 때문에 흙탕물이 옷은 말할 것 없고 머리에까지 튀어 올랐다. 그런 몰골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장면을 상상이라도 한번 해 보라. 요즘 어린이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몽당연필도 생각난다. 몽당연필을 붓 뚜껑에 끼어 마지막 토막까지 쓰는 일은 흔했고 그건 또한 당연했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마당에다 덕석을 펴고 나락을 말린다. 마당에 나락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손으로 한 알씩 주어 담아야했다.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밥 한 숟가락 안 먹을 테니 나락 줍는 일 안 하면 안 되느냐고 말씀드렸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쌀 한 톨이라도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한다는 걸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이다. 아무리 물질이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검소하고 절약하는 정신은 누구나 가져야할 덕목이라고 생각된다.
추운 겨울밤에는 참새 잡느라 초가지붕 처마 끝 참새 집을 들쑤시고 다니기도 했다. 날씨가 따뜻한 날이면 참새들이 참새 집에서 자지 않고 나뭇가지나 대나무 숲에서 자기 때문에 추운 밤이라야 참새잡기에 나서는 것이다. 화롯불에 구워먹는 참새고기는 어디다 견줄 수 없을 만큼 꿀맛이었다.
참외나 수박 서리, 닭서리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분명 도둑질이었는데도 그 시절 그런 도둑은 청소년들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농촌이어서 그랬는지 조금은 풍성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농가에서 기르는 소는 농사일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본이었다. 소 당번은 그 집에서 노동력이 제일 낮은 아이가 맡는다. 나 역시 소 당번이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동네 아이들은 조직적으로 목동생활을 했다. 아침 일찍 당번 두 사람은 고삐를 푼 소를 산으로 올려 보내는 일을 맡는다. 동네 아이들은 점심 먹은 후 소를 찾으러 산으로 오른다. 목동들은 순번을 정하여 매일 보리를 볶아 한 자루 메고 온다. 그걸 "총부"라고 불렀는데 그 단어가 사전에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다. 집안 형편이 좀 좋은 아이는 밀을 볶아오기도 했다. 거기다가 콩 볶은 게 들어있기라도 하면 그 날은 그야말로 잔칫날이 된다. 산에 올라 그걸 나누어 먹는 재미를 어디다 견줄 수 있겠는가.
해가 서쪽으로 얼마만큼 기울 때면 장난치고 놀던 걸 멈추고 서둘러 풀을 베기 시작한다. 꼴 망태를 가뜩 채우고 어둑해질 무렵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일과였다. 어쩔 수 없이 했던 목동생활이었지만, 지금도 그 시절 그 장면들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고생했던 일도 지나고 보면 상쾌해지는 게 추억이다. 낙타가 먼 사막을 갈 때 몸속에 물을 저장하듯이 많은 추억들을 저장했다가 삭막한 현실에 광택을 내고 색칠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추억이야말로 가뭄에 내리는 단비가 아니겠는가.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값진 것이라고 했다. 추억은 자기만의 가슴속에 간직한 보물이요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보릿고개를 넘던 배고픈 시절, 누렇게 익어 가는 보리밭을 보며 보리밥 한 그릇 실컷 먹어보는 꿈은 처절하고 소박했다.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법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잘 안다. 봄에 씨앗 뿌려야 가을에 거둔다는 이치나, 아궁이에 불을 때도 한참을 기다려야 방안이 따뜻해진다는 걸 생활에서 터득한다. 오늘날은 속도의 시대다. 빠른 판단과 대응이라야 경쟁에서 이긴다. 하지만 빨리 판단하고 빨리 대응해야 한다는 것과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속도의 시대에 느림의 미학(美學)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무리 속도의 시대라고 해도 기다려야할 때는 기다려야한다는 걸 말하고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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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학 못한 쓰라림을 견디며
중학교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 읍내까지 30리 길을 걸어 다녔다. 하루 4시간이 걸렸다. 그 때에는 버스가 통학시간에 맞게 운행되지 않았다. 버스가 있었더라도 차비 때문에 비 오는 날 아니면 아마 걸었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 새벽 밥 먹고 걷는 건 그렇다 치고 비가 올 때에는 아예 처음부터 비를 맞았다. 먼 길을 가는 데 달리 비를 막을 아무런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를 흠뻑 맞은 옷은 한두 시간 수업이 끝날 때쯤엔 체온으로 말랐다. 걸어 다니는 게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할 수 없었다. 중학교 다닌다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선택받은 일인데 어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중학을 마칠 때쯤 나는 부산의 경남고에 지원할 마음을 굳혔다. 집안 형편으로 미루어보아 부산으로 유학할 형편은 아니었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그런데도 세상 물정 모르고 그런 결정을 하고 부모님 모르게 원서를 냈다. 중학친구들 상당수가 그 학교에 지원을 해서 그랬는지 그 분위기에 말려들었거나 그들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다. 하지만 등록금을 마련 못해 진학할 수 없었다.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 길이 막혔다. 그 때의 좌절감과 절망감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앞이 캄캄하게 막혔고 헤어나올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자식의 등록금을 마련 못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는 없었다. 부모님의 마음이 더 아팠을 터인데.
고교진학의 길이 막힌 후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중학교 3학년 때 잠시 자취하던 집에 들렀다. 남해국민학교 류경두 선생님이셨는데 나의 사정을 듣고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내놓으면서 빨리 등록하라고 하셨지만 이미 등록기간이 지난 뒤였다.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가슴에 꽉 찬다.
그 때의 1년은 나에게는 시련의 기간이었다. 모자 쓴 학생들을 볼 때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경우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묘한 쓰라림이었다. 고등학교는 내 힘으로 간다며 토끼를 기르고 닭을 키우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다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옛날을 회상하며 기억의 조각을 맞추다보니 다분히 감상적인 글이 된 것 같다. 더욱이 별 것 아닌 일들을 거창하게 쓴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자랑 비슷하게 쓰여지지 않았나 걱정도 된다. 하지만 추억이라는 게 그런 요인을 안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7. 행복은 무엇이고 성공은 또 무엇인가
산다는 게 무언지, 더욱이 잘 산다는 게 무언지 설명할 길은 없다. 아마 이런 질문에는 정답이 없을 것이다. 우선 행복에 대한 법정(法頂)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공통된 병이다. 그래서 늘 목이 마른 상태이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을 잃어 버렸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톨스토이의 민화집(民話集)에는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이 있다. "파흠"이라는 이름의 가난한 소작인이 있었다. 그의 소원은 자기 땅을 가지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땅을 갖게 됐지만 옛날 생각을 다 잊고 더 많은 땅을 갖기를 바랐다.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가서 더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됐지만 그래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더 넓은 땅을 찾아 또 다른 지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내면 하루 종일 걸어 다닌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해가 뜬 후 출발해서 해지기 전에 돌아오는 조건이었다. "파흠"은 하루만 지내면 넓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흥분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뜨자 그 마을사람들과 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을 떠나 말뚝을 박으며 종일 걸었다.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이 너무 멀리 걸어 다녔기에 해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고 출발 지점 직전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파흠"의 하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땅을 파서 그를 묻었다. 이게 그 소설의 내용이다.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 좁은 땅에 묻힐 인생인데 그걸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삶을 꾸중한 그런 내용의 작품이다.
설탕이 더 단가, 소금이 더 짠가를 비교할 수 없다. 설탕과 소금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걸 비교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 위대한 삶을 산다. 시골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주민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 시골 학교 선생님과 교육부장관, 면사무소 공무원과 행자부장관을 비교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기업인, 공무원, 군인, 정치인 또는 농사짓는 분들은 모두 자기 일이 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게 떳떳한 삶이고 성공하는 삶이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를 묻는다면 답은 나올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가를 묻고 나서, 시간을 초월하면 "지금"이고 공간을 초월하면 "여기"라고 했다. 이 말에는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시간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이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그릇 속에 무엇을 담느냐는 것이다. 노력, 도전, 성취, 보람 같은 것들이 담겨 있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무엇이 성공인가를 따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성공을 성취(成就)라는 말로 바꾸어보면 답이 나올 수 있다. 축구선수가 되기를 희망했던 사람이 축구선수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꿈을 성취한 것이다. 운전기사가 되었거나, 교사가 되었거나, 농사 잘 짓는 농부가 되었거나, 공무원이 되었다면 그것 또한 성취고 성공이다.
인생은 종착점을 알 수 없는 마라톤과 같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서 달려야하는 것이다. 단기전에 이겼다고 이긴 게 아니다. 단기전에 졌다고 실패는 더욱 아니다. 기업은 보통 1년에 한 번씩 손익결산을 한다. 사람의 경우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평가하는 결산을 일생에 한번 한다.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호화스럽게 사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 돈을 많이 버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성공의 잣대일 수는 없다. 돈 많이 벌고 고시에 합격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좋은 일이고 축하할 일이다. 누가 그걸 마다하는가. 하지만 그걸 성공이라고 못 박으면 인생은 삭막해지고, 많은 사람들을 패배자로 만들기 십상이다. 성공을 그런 잣대로 평가하면 세계를 깜짝 놀랠만한 업적을 내겠다고 연구에 몰두하는 위대한 과학자나 철학자가 나올 수 없다. 코흘리개 아이들을 인재로 키우는 선생님들에게도, 주민들의 온갖 일을 보살피는 지방공무원들이나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원들에게도 감사해야하고 그들의 삶의 가치를 평가해야한다. 출세라든가 돈 버는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사회는 메마르고 깊이가 얕아진다. 선진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자기를 닮은 사람은 없다. 자기의 삶은 자기의 지문처럼 유일한 것이고 독특한 것이다. 남이 빨간 옷 입는다고, 남이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인다고 따라한다면 그건 이미 방향을 잃은 삶이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리면 1등은 하나밖에 없지만 360도 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리면 모두가 1등을 할 수 있다. 그런 경주를 하는 것이 인생 마라톤이다. 누가 누구와 비교해서 성공과 실패를 가를 수 있단 말인가.
꽃은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룬다. 봄에 일찍 피는 개나리 진달래는 아름답지만, 서리맞고 피는 국화도, 눈 속에 피는 동백도 아름답다. 장미의 화려함도 좋지만 들녘에 핀 야생화는 또 어떠며 들국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릇에 그 몫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지금 자기답게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 인생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는 것, 그게 인생이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무슨 뜻인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다. 우선 열심히 살아야한다.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 그 자체는 많은 것을 남긴다.
8. 고향의 미래는
대학동창 30여명이 2003년 가을에 남해를 찾았다. 창선에서 시작해서 바닷가 길을 따라 노량까지 남해를 한 바퀴 돌았다. 금산에도 올랐다. 매년 봄과 가을에 국내외 여행을 하는데 그동안 어떤 여행보다도 남해가 좋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싱싱한 해산물, 밤바다 파도소리, 이른 아침의 바닷가 산책, 맑은 공기, 상쾌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이것만으로도 친구들은 남해에 반하고 취했다. 과연 남해는 환상적인 보물섬이었다. 남해를 돌면서 하와이 섬을 자동차로 한 바퀴 돌 때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와이가 별건가.
아무도 미래를 점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고향은 천혜(天惠)의 풍광(風光)이 있다. 이것을 살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한다. 남해 특산물을 많이 생산해서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아오도록 깨끗한 환경과 경치를 팔고 인심을 팔고 향기를 팔아야한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걸 잊고 다른 곳을 따라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제와 사회가 발전하면 잘 산다는 의미도 달라진다. 맑은 공기, 산바람, 갯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갯바람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닐 것이다. 거기에다 독특하고 투박한 말투에다 넘쳐흐르는 인심이 곁들이면 남해는 보물섬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남해만세! 설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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