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8일
낙양의 꿈과 현실
낙양고묘박물관
오렌지와 방울토마토, 물에 데친 브로콜리, 양배추샐러드와 좁쌀죽으로 아침밥을 그런대로 챙겨 먹었다. 아침나절에 직원들보다 먼저 도착한 곳은 ‘河南古代壁畵館’ 또는 ‘洛陽古墓博物館’이다. 우리 민요 ‘성주풀이’나 상여소리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낙양성의 북망산이다. 망산(邙山) 지역은 역대 제왕과 재상과 장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첫 번째 건물에 ‘太虛’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인간이 하는 일체의 유위가 죽으면 본래 왔던 근원, 태허로 돌아간다. 태허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無極이나 太極과 같은 말이다.
전시관은 지하에 있었다. ㅁ자형의 복도에 고분을 재현하여 놓았다. 입구의 전시물을 보면서 지하복도를 지나니 네모난 공간이 있다. 가운데에 유리관을 만들고 무덤에서 출토된 도용, 토기 등을 전시하고, 사방 벽면에 위, 북위, 수, 당, 무주, 송, 금, 원, 명, 청 시대의 왕후장상들의 지석과 고분 벽화 등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다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가니 좌우에 발굴 당시의 고분 내부를 재현하여 놓았다.
묘지명
"나의 가장 외부에 있으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완결시키는 것이 나의 죽음이다. 죽음 뒤에 나는 모욕도 칭송도 들을 길 없이 그저 흙으로 돌아가고 서서히 나의 존재는 잊히고 말 것이다. 어쩌면 죽음 자체는 내 외부의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죽음에 의해 완결된 내 존재의 의미를 내가 알 수 없을 것이기에 그 점이 두렵다.
옛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올 내 존재의 無化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墓表와 墓誌를 적고 자기를 애도하는 輓詩를 지었다. 본래 후한 때부터 생전에 자신이 들어갈 무덤을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 무덤을 壽藏이라고 하고, 그 무덤에 묻을 묘지명을 살아 있을 때 작성한 것을 生誌라 한다. 송나라 때 정향程珦은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고, 대학자로 칭송받는 주자도 수장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풍습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있었다.
노자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그 둘을 전관함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하였다. 장자는 죽음이란 영원한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이기에 그것이야말로 '참 진'이라고 했다. 옛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올 내 존재의 무화를 극복하려면, 영원히 썩지 않을 세 가지를 이루라고 했다. 德과 功과 言, 그 셋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이루어야 이름이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고 했다.
이것도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태어날 때는 몸이 빛나건만, 인간은 갖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몸의 정기를 잃고, 살아 있으면서 죽어가기 마련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더욱 고통스럽다. 그러나 어쩔 것이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 아닌가."
-심경호, <<내면기행>>, 이가서, 2009.
‘魏帝先朝故于夫人墓誌’에는 탁발씨가 건국한 북위 文成帝의 부인이 서역 于闐國(호탄)의 공주였는데, 망자 황후 우 부인의 증조모가 된다고 한다. 문화와 풍속은 달라도 술 마시고 어울리는 것은 한 가지였다고 한다. 우 부인의 이름은 ‘仙姬’인데 어릴 때부터 ‘女訓’을 익히고 단정하고 순종하는 성품이 있었다. 후비가 되었는데 드물게도 90세 노인이 되었는데 병이 있었다. 의사도 목숨을 구하지 못하고 낙양 金墉宮에서 죽었는데, 북위 선무제 효창 2년(526) 2월 27일이었고, 태뢰로 추모의 제사를 삼공의 예로써 거행하였다. 4월 4일에 망산 서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隋故秘書監左光祿大夫陶丘蕑侯蕭君墓誌銘’의 주인공은 이름은 瑒이고 자는 同文이다. 산동 蘭陵人인데, 유학이 당시에 으뜸이었다. 고조는 梁나무 武제이고 증조는 昭明황제이고, 王父는 宣황제 顯이고 아버지는 孝明황제이다. 9세에 수나라의 식읍 2천호 희안군왕으로 책봉되고, 개황 7년에 아버지 양나라 선황제를 따라 수나라 조정에 들어와서 수도에 왔다. 대업 5년에 비서감이 되고 6년에 도구후가 되고 7년에 황제가 일이 있어서 유연의 요서 갈석산으로 갔는데, 檢校左驍衛將軍이 되었다. 이 해 12월 17일에 병이 나서 탁군 蒯縣 燕夏鄕 貴善里에서 죽었는데, 춘추가 39세였다. 시호가 간례였다. 묘지명 찬자는 서문에서 陵谷이 ‘天長地久’와 함께하고 春蘭秋菊과 더불어 비석이 불후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고조가 달마대사와 만난 그 유명한 호불의 제왕, 보살황제, 양나라 무제이고, 증조가 <<文選>>을 편찬하고,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누고 分名을 부여한 인물이다.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아버지 양나라 효명제가 수나라에 귀부한 모습은 고려에 입조한 신라 경순왕을 생각나게 한다.
전시관 입구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탁본하고 표구하여 팔고 있는 행서체의 ‘大唐故北誼州司兵參軍事孟君墓誌銘’은 글자를 잘 알아볼 수가 없다. 죽은 해가 당 고종 總章 3년(670: 총장 연호는 2년까지 있고 함형 1년이다.)이고 그 때 춘추가 82세였다. <<노자>>의 ‘天長地久’에서 나온 말인 ‘地久天長’, ‘遺芳’이란 말이 명의 끝에 보인다.
지하 전시관에 있는 지석들 중에 ‘唐故朝議郞河南府守安縣令賜緋魚袋渤海高府君墓誌銘’이 보인다. 주인공이 高씨이므로 고구려 왕족의 한 갈래가 아닐까하고 생각하였다.
묘지명에는 姜姓의 太公이 제나라의 제후로 책봉되었는데, 그의 후손의 한 갈래가 고읍을 식읍으로 받았기에 지명을 따서 氏를 高라고 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 사람은 이름이 한瀚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관례 이전에 文章 詞賦 筆札이 모두가 공부하지 않고도 저절로 뛰어났는데, 仲父가 아주 기특하게 여겼다.
20세에 향시에 6번 합격하고 예부 시험에 응했는데, 당시에 진사출신 응시자를 박대하였고 공경의 자제들에게 혜택을 주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무종황제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시험 주재관이 두려워서 예부 시험을 치르지 못하였다. 이 때 계부가 조정에 있으면서, 주인공을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지만, 이런 생각이 집정자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이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예부 시험과 관직을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을 일으키기 위하여 비서성 교서랑이 되었는데, 江州 李 相國이 주인공을 한 번 보고 國士로 깊이 예우하였다.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며 직언을 서슴지 않고 하였고, 하남부수안현령이 되어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선정으로 소문났다. 주인공의 풍신은 미수하고, 식용은 정민하며, 행동거지는 모두 예절이 발랐다. 사군자들이 모두가 주인공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슬프게도 대중 10년(856) 4월 7일에 갑자기 죽게 되었다. 그 때 춘추가 38세였다.
그해 5월 24일에 하남현 평락향 백락촌 사공부군의 무덤 동북쪽 110보 지점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博陵 崔氏였다.
어느 황제폐하의 慈仁황후는 병치료 끝에 78세에 돌아갔다고 한다.
‘周故使持節嶲州都督上柱國東平縣開國男河南陸公夫人崔氏武城郡君墓誌銘’의 주인공 최씨 부인은 무성 淸河人이다. 그 증조 崇基는 梁나라 黃門侍郞이고, 조부 志는 齊나라 悤州長史이고, 아버지 深은 당나라 朝散大夫 潞州 長史이다. 부인은 大周 萬歲通天 2년(697) 4월 29일에 河南 永豊里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춘추가 71세였다. 聖曆 2년(699) 정월 28일에 洛州 洛陽縣 淸風鄕 邙山 언덕에 합장하였다.
이 묘지명 중에는 생전 처음 접하는 글씨체로 쓰인 것도 있다. 동그라니 안에 새가 그려진 것, 한 一자 아래에 날 生자가 붙은 것 등 기상천외한 글자들이 모두 139자의 짧은 묘지명 안에 13자가 나온다. 측천무후 재위 시절에 기존의 글자를 혁파하고 새로 만든 이체자가 12~21개인데, 이른바 ‘則天文字’이다. 이 묘지명을 통해 측천무후 당시에 쓰인 측천문자를 볼 수 있어서 아주 흥미로웠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 2층 사리함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석가탑 중수기(重修記)’가 2007년에 판독되면서 이 불경이 석가탑 중수 때인 태평 4년(1024)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래서 현존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은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서기 770년)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에, 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인쇄 수준이 고려시대 탑에서 나온 것보다 현저히 뒤떨어지고, 고려시대에는 ‘보협인다라니’가 탑에서 나오지만 신라 탑에서 10여 건 나온 ‘무구정광다라니’가 나오지 않는 점, 무엇보다도 측천무후 재위기간(684~705년)에만 사용된 ‘측천무자’가 빈번히 발견되는 점 등이 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신라시대 인쇄설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新羅 白紙墨書 華嚴經에도 ‘측천무자’가 나온다.
당 태종의 아들 고종은 즉위 후 태종의 첩으로 여승이 되어 있던 무씨를 데리고 와 총애하고 비서로 쓰면서 무씨는 권력을 장악하였다. 황후, 귀비들을 차례로 죽이고, 조정대신들과 싸우며 저수량(褚遂良, 596~658), 우지녕(于志寧) 등을 몰아내고, 최후에는 당나라 초기의 최고 귀족인 외척 장손무기(長孫無忌)마저도 추방하고 살해했다.
고종의 사후 무씨는 아들 중종을 곧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周라고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神都라고 부른 낙양으로 옮겼다. 역사에서는 주를 武周라고 하고 중국사 최초의 女帝인 그를 則天武后라고 한다. 그는 반대세력, 당의 황실, 공신 가문 등을 마구 숙청하였다. 주로 국호를 고친지 16년, 그의 나이 82세에 재상 張柬之가 거병하여 무후를 유폐하여 죽게 하고 中宗을 복위시켰다. 무후는 狄仁杰 등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되게 하여, ‘개원의 치’의 기반을 닦았는데, ‘무주의 치’라고 한다.
중종의 황후 韋씨가 무후의 잔존세력과 결탁하여 무후처럼 전권을 장악하고, 방심한 장간지를 죽였다. 위후의 부정한 행실을 알아차린 중종도 독살하였다. 중종의 아우 睿宗이 무후 때 명목적인 황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아들 이융기가 거병하여 위씨와 그 측근들을 모조리 죽이고 예종을 복위시켰다. 예종이 즉위 3년 만에 李隆基에게 712년에 양위하였는데 그가 곧 玄宗이다.
‘唐故寧州錄事參軍隴西李府君墓誌銘’은 ‘大唐故李君墓誌之銘’이라고 새기고, 보상화문, 당초무늬, 서수를 새긴 매우 화려한 장식의 뚜껑이 따로 있다. “서하여 가로되, 바다에 明月이 뜨면 산에 白虹이 많다고 하였다. 무릇 禮樂이 門中에 있으면 衣冠이 地域에 있다고 하였다.(叙曰 海出明月 山多白虹 則夫禮樂有門 衣冠有地云已)” 라고 하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지명이 시작되고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사본嗣本이고 농서지방 成紀 사람이다.
그 조상을 생각하면, 성스럽고 신이하며 무와 문이 있는 顓頊 임금이 있다. 신하로 제후가 되고 제후로 신하가 되어 조정을 견고하게 하였다. 지혜가 만물에 두루 미치게 하고 도가 천하를 건진 백양(伯陽 :노자 이담의 字)이 있다. 극히 밝고 극히 크고, 극히 길고 극히 임금 된 이는 서량(西涼)의 무소왕( 武昭王) 이고(李暠)가 있다. 북제 때 우리 증조 광록소경(光祿少卿) 앙昂이 있고, 수나라 초에 우리 조부 공부시랑工部侍郎 도구道丘가 있고, 수나라 말기에 우리 아버지 은주사마殷州司馬 종묵宗默이 계셨다.
인자하고 은혜롭고 화기애애하시며, 온화하고 양순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시어溫良恭儉, 대대로 그 아름다움이 빛나니 그 이름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지모가 하늘에 실리고, 그 행동이 四海에 펼쳐지니 밝은 덕의 후에 반드시 달인이 있게 마련이니 그가 장차 부군인 것인가?
하늘에서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땅의 기운을 받아 기운이 무성하였다. 나면서 효도와 우애를 알고, 특출하게 품성이 총명하며, 행동거지가 예의범절에 맞고, 말을 하면 전범이 되니, 행실은 집안의 보배가 되고, 이름은 곧 나라의 향기가 되었다.
처음 진사과 과거시험에서 갑과로 합격하고, 금주서역위에 임명되고, 청백리로서 더욱 기이하게 높은 등급의 관직에 올랐는데, 옹주雍州 고릉위高陵尉가 되고, 월주越州 회계승會稽丞으로 옮기었다. 빈왕賓王을 이롭게 하였고, 아래에서 위로 승진하였다.
위는 매복(梅福: 한 평제(漢平帝) 때 왕망(王莽)이 전횡(專橫)하자 남창위(南昌尉)를 그만두고 회계(會稽)에 숨어서 성명을 바꾼 채 문지기 노릇을 한 매복(梅福)을 시에서 보통 은리라고 표현한다.)같고, 승은 설선(薛宣: 한(漢)나라 때 사람이다. 《책부원귀(冊府元龜)》 권695에 “설선이 임회 태수(臨淮太守)로 부임하자 정사와 교화가 매우 잘 시행되었다. 그때 마침 진류군(陳留郡)에 큰 도적 떼가 일어나 난리를 일으키자 그를 진류 태수로 삼았는데, 도적이 평정되어 관리와 백성이 그의 위신을 존경하였다.”라고 하였다.) 같았다.
영주녹사참군寧州錄事參軍으로 옮기고 총록總錄의 직임, 郵驛의 일, 날을 아끼며 사람에게 있고, 추상같음이 자연에게까지 미치니, 진실로 신하된 자의 행동을 다하여 천자의 빛에 가까웠다. 흐르는 강물은 머무는 집이 없고, 자연의 운명은 늘 그러하지 않다. 연세 69세, 당 고종 상원上元 2년(675) 6월 20일에 영주寧州의 관사官舍에서 생을 마쳤으니, 아! 슬프도다.
생각해보면 부군은 깃과 터럭 있는 무리 중에서 난새와 봉황새이고, 비늘이 있거나 등딱지 있는 물속의 무리 중에는 용과 거북이 이었다. 시에서 배움을 일으키고 예에서 원칙을 세웠다(興於詩,立於禮-<<논어>> <태백편(泰伯)>)). 영재로 탁월하였고, 정신과 기운이 화평하였다. 배움에 남겨두는 바가 없고, 글에 어설픈 데가 없었다. 산을 오르고 물가에 갔고, 뜻은 언제나 구름을 찔렀다.
화광동진(和光同塵-<<노자>>)하면서도 행적이 비루하고 속됨이 없었다. 행동은 겸손과 물러남으로 하였고, 정신 수양은 맑고 한가함으로 하였다. 충성(忠誠)과 신의(信義)를 보배로 삼으니 집안에 사사로움이 쌓이지 않았고, 덕과 의를 받들 수 있어서 직위에 막힘이 없었다. 장례를 치른 뒤에 보니, 오직 집안에는 흰 책과 검은 거문고만 있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와 같았다. 아! 진실로 사림士林의 하늘이고, 왕국王國의 보배였도다!
부인은 범양(範陽) 노씨(盧氏) 낙주(洛州) 사공참군(司功參軍) 신(信)의 따님이시니 두 가문이 하나를 이루어 백대에 빛이 있다. 맑고 지혜로움은 시댁과 친정에 흡족하고, 어짊과 덕은 자매 사이에 넘쳐흘렀다. 남편에게 예로써 바르게 하고, 자식을 가르치는데 방법을 알았으니, 어머니의 표준이고 아내의 모범이었다. 50세에 죽었으니 얼마나 빨리 돌아가신 것인가?
지난날 동쪽의 태산(泰山)을 오르며 한 날 한 시에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히자고 기약하였는데, 오늘 남편의 서쪽 섬돌에 장사를 지낸다. 아! 슬프구나! 지난 경룡(景龍) 3년(709) 기유년 2월 경신일에 언사현(偃師縣) 서쪽 무릉(武陵) 언덕의 새로운 무덤에 합장한다.
자식 연조(延祖)가 있는데, 낙주(洛州) 사수현(汜水縣) 현령(縣令)이다. 집안의 명성이 능히 이어지니 세상에서 흠모를 받는다. 사모하는 마음이 죽을 때까지 간절하여 제후의 孝를 행하였다. 슬픔이 깊어서 날을 멀리하여 선왕의 장례를 치렀다. 맹진(盟津)을 지나서도 관을 받들었고, 용문산(龍門山)에서 잠자며 유택을 잡았다.
기운이 슬프고 떨어서 황하가 새벽에 흐르지 않고, 서리가 엄숙히 얽혀서 땅이 추위에 갈라지려고 하였다. 슬픔이 길 가운데에 쟁쟁하고 ,수레 끄는 말울음 거친 들에 들린다. 밤은 어둡고 어둡지만 등불은 푸르고, 샘은 그늘지고 그늘졌지만 달빛 밝다. 빛나는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무덤을 탄식한다. 그 얼굴과 지모는 바람 소리 같아라! 오직 솔과 잣을 본다. 아! 슬프다!
이런 일을 명한다.
帝顓頊之洪胄兮,전욱 황제의 후손이여!
我先君曰伯陽。우리 선조는 노자이다.
飛將軍之赫赫兮,비 장군의 혁혁함이여!
武昭王之光。무소왕의 빛이다.
鍾五福而餘慶兮,오복을 심고 그 경사를 받음이여!
彌百代而能昌。백대에 창성한다.
芝蘭芬其挺生兮,지란의 향이 자손을 태어나게 함이여!
羔雁鬱其成行。양과 기러기 울창하게 그 행을 이룬다.
惟祖考之懿烈兮,조부의 아름다움과 매운 행실이여!
惟府君之令望。부군의 좋은 명망이다.
休然其有德行兮,아름답구나, 그 덕행이 있음이여!
炳焉其有文章。찬란하다 그 문장이 있음.
謂高第而才名籍籍兮,과거에 합격하고 재능과 이름 자자하구나!
謂入官而頌聲洋洋。관직에 들어서는 칭송 소리 양양하다.
見台位之以虛兮,높은 자리를 보고도 욕심 없이 그 자리에 있었구나!
哀人生之不長。인생이 길지 않았음을 슬퍼한다.
猗君子之好仇兮,아름답다. 군자의 좋은 짝이여!
必也娶乎齊姜。 반드시 제나라 강씨 성과 혼인하였다.
亦既宜於家室兮,또한 집안에서 바르게 하였구나!
亦既秀於閨房。규방에서 또한 빼어났다.
悲昊天之罔極兮,슬픔이 하늘에 망극하구나!
卜浮雲之連崗。뜬구름이 산봉우리에 걸렸다.
千齡兮萬古,천년, 만고의 세월이여!
彌久兮彌芳。 오래 오래 그 향기 가득하다.
168 №景龍019
169 【蓋】
170 大唐故李君墓志之銘
171 【志文】
172 唐故寧州錄事參軍隴西李府君墓志銘並序敘曰:海出明月,山多白虹,則夫禮樂有門,衣冠有地云已。府君諱嗣本,隴西成紀人也。粵若稽古,乃聖乃神,乃武乃文,顓頊有焉;臣哉鄰哉,鄰哉臣哉,庭堅有焉。智周萬物,道濟天下,伯陽有焉;克明克頡,克長克君,涼武有焉。在北齊時,則有若我曾祖光祿少卿昂;在隋初時,則有若我王父工部侍郎道丘;在隋季時,則有若我烈考殷州司馬宗默;仁慈惠和,溫良恭儉,世濟其美,不隕其名,標准乾載,羽儀四海,明德之後,必有達人,其將在府君乎?受天之淳,因地而茂,生知孝友,特稟聰明,投跡合規繩,出言成典則,行惟家寶,名乃國香。初舉進士甲科,補金州西城尉,翠清白尤異高第,轉雍州高陵尉,徙越州會稽丞。利用賓王,升高自下,尉如梅福,丞若薛宣。遷寧州錄事參軍。總錄之任,督郵之比,愛日在人,嚴霜被物,固將罄王臣之節,近天子之光。逝川無舍,大命不常,年六十九,以上元二年六月廿日終於寧州官舍,嗚呼哀哉!惟府君羽毛之鸞鳳,鱗介之龜龍,興於詩,立於禮,英才卓越,神氣和平,於學無所遺,於文無所假,登山臨水,志每凌雲,和光同塵,跡弗偶俗,行己以謙退,養神以清閒,忠信為寶而家無私積,德義可尊而位不充量。及其屬纊之後,唯有素書漆琴,其廉潔也如此。夫人範陽盧氏,洛州司功參軍之信之女。兩門作合,百代有光,淑問洽於宗姻,賢德流於娣姒。匡夫以禮,教子知方,惟母之儀,惟媛之範。半死何早?昔年東岱之游;同穴有期,今日西階之葬。嗚呼哀哉!越景龍三年歲次己酉十二月景申合葬於偃師縣西十三里武陵原之新塋。 有子延祖,洛州汜水縣令。家聲克嗣,時望所欽。慕切終天,行諸侯之孝;悲深遠日,執先王之禮。過盟津而奉櫬,枕門山而卜宅。氣慘懍而河曉不流,霜嚴凝而地寒將坼。哀挽鏘乎中道 嘶驂咽乎荒陌。夜杳杳而燈青,泉陰陰而月白。光靈何處兮於嗟墳壟, 容術颯然兮唯看松柏。 嗚呼哀哉!銘之云爾:帝顓頊之洪胄兮,我先君曰伯陽。飛將軍之赫赫兮,武昭王之光。鍾五福而餘慶兮,彌百代而能昌。芝蘭芬其挺生兮,羔雁鬱其成行。惟祖考之懿烈兮,惟府君之令望。休然其有德行兮,炳焉其有文章。謂高第而才名籍籍兮,謂入官而頌聲洋洋。見台位之以虛兮,哀人生之不長。猗君子之好仇兮,必也娶乎齊姜。175 亦既宜於家室兮,亦既秀於閨房。悲昊天之罔極兮,卜浮雲之連崗。 千齡兮萬古,彌久兮彌芳。
176 录自《隋唐五代墓志汇编》洛阳卷第八册
‘宋故承事郞守太子中舍知漢州雒縣騎都尉王君墓誌銘’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고 구법당의 인물이었던 길수현인(吉水縣人) 구양수(歐陽修)가 지었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王汲인데, 박물관의 전시 제목에는 그 아버지 王明藻의 묘지명이라고 잘못 붙여 놓았다.
묘지석은 테두리가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바둑판처럼 칸이 그어져 있으며, 비문의 글씨는 매우 아름답다. 아마도 명필이었던 구양수의 글씨일 것이다. 묘지명 비석의 원문과 당송팔대가합집에 실린 묘지명을 비교하면 많은 글자가 서로 차이가 난다. 묘지명 비석이 물론 원문이다. 원문을 두 눈으로 볼 수가 있다는 것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왕군의 아버지는 衛尉少卿을 증직 받았고 이름은 明藻이다. 어머니는 南充縣 太君 胥씨이다. 조부는 晃이고, 증조부는 蜀의 合州자사 福이다.
군의 이름은 汲이고 자는 師黯이고, 安定縣君의 따님인 胡씨에게 장가들었다. 자식은 아들이 셋이고 딸이 넷이다. 아들은 尙恭, 尙喆, 尙辭이다.
내가 천성(天聖, 1022~1031), 明道(1032~1033) 연간에 하남부 留守로서 추천되어 갔는데, 왕군의 집이 하남부에 있었다. 상공, 상철이 처음에 國子學에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때때로 국자학의 학생들을 따라서 나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그 재능을 비교해보면 언제나 여러 학생들의 앞자리에 섰다.
상공은 더욱이 성품이 근엄하고 온화하며, 儒者로서의 행실과 법도가 있었다. 내가 진실로 군에게 이 자식이 있음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래서 군과 왕래를 하였는데, 군의 성품은 난초처럼 고결하고 바탕은 진중하였다. 배움을 좋아하고 일을 함에 민첩하였다. 그와 사귀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사람됨을 아꼈다.
(송 인종) 景佑 원년(1034)에 그의 두 아들이 과연 모두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나는 또한 관직을 그만두고 하남을 떠나서 군을 만나지 못한 지 7년이 됐다. 그런데, 상공이 와서 청하며 말했다.
“불행하게도 선군(先君)의 상을 당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올해(1040) 11월 임신일에 하남부(河南府) 하남현(河南縣) 낙원향(雒苑鄕) 사도리(司徒里)에 장례를 치르고자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을 얻어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내가 일찍이 상공을 가상히 여기었는데, 또한 그 아버지의 사람됨을 안다. 이에 이러한 일을 적어서 비명을 지어 상공에게 주었다.
비명은 이렇다.
惟
王氏之先 왕씨의 선조
長安萬年 장안에 만년
四代之祖 4대조
刺史壁州 벽주 자사
遭巢猾唐 황소가 당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을 당하여
得果而留 공이 있어서 머물렀다.
卒葬西充 돌아가시자 서윤에 장례
爲鄕壁公 향벽공이 되었다.
王孟有蜀 왕씨가 처음 촉 땅에 있었는데
或家或祿 집안에 있거나 벼슬을 하며
三世不遷 3세대를 옮기지 않았다.
自君東還 군부터 동쪽으로 돌아와
始居河南 처음 하남에 거주하였다.
廣文之生 광문관의 학생으로
擧三不中 과거에 3번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任仕以兄 추천으로 관직에 나아갔는데
主簿之卑 주부의 낮은 관직이었다.
試原武密 원, 무, 밀 현에서 시작하여
晉城是令 진성에서 현령이 되었는데,
政專自出 행정은 오로지 스스로 내었고
令政有聲 훌륭한 행정으로 명성이 있었다.
遷理之丞 승으로 승진하였는데
藍田夏雒 남전, 하, 낙양
三邑皆聞 세 고을에서 모두 소문이 났다.
壽五十九 나이 59세에
終中舍人 마침내 중서사인이 되었다.
在雒逢飢 낙양현에 재임하며 기아를 만나
哺粟不殍 좁쌀을 먹여서 백성들을 죽이지 않았다.
褒能勸吏 유능한 관리로 포상하여 다른 관리들을 모범이 되게 하라는
天子有詔 천자의 조칙이 있었다.
雒人染癘 낙양현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나갈 때에도
躬之不避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구호활동을 하여
以死勤民 죽음으로써 백성들을 농사에 종사하도록 권면하였으니
在法宜祀 법에는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刻詩同藏 행적을 시로 새기고 무덤에 함께 갈무리하여
維世之揚 세세토록 그 아름다운 생애를 드날리도록 한다.
僧 惠明 刻石 승려 혜명이 비석을 새김
後世年遷神宅于 洛陽縣 賢相鄕 上店村 之 西原
以胡夫人合祔 實 熙寧四年(송 신종 1071) 辛亥歲 八月 二十日 謹題(-묘지명)”
【太子中舍王君墓志铭〈康定元年(1040년)〉】
王君之皇考曰赠卫尉少卿讳某(明藻-묘지명)。皇妣曰南充县太君胥氏。皇祖讳某(晃-묘지명)。皇曾祖讳某(福-묘지명)。君讳汲,字师黯。娶胡氏,安定县君。子男三人,女五人。男曰尚恭、尚(喆-묘지명)、尚辞。初,天圣、明道之间,予为西京留守推官。时王君寓家河南,其二子始习业国子学,日从诸生请学于予,较其艺,常为诸生先,而尚恭尤谨饬,(溫溫 有儒者儀法-묘지명) 俨然有儒者法度。予固奇王君之有是子也,以故与君游,而君性简(蕑-묘지명)质,重然诺(喏-묘지명),临事而敏,与之游者必爱其为人。其后,二子者果皆以进士中第,予亦罢去。不复遇王君且(凡-묘지명)七年矣,而尚恭来请曰:“不幸吾先人(君-묘지명)之亡(喪已逾朞-묘지명),将以今年某(十一-묘지명)月甲子(壬申-묘지명),葬于河南(府-묘지명)某(河南-묘지명)縣 雒苑鄕 司徒里(县某乡之某原-없음-묘지명),宜得(文銘石-묘지명)铭于石以志诸后世(以誌後世-묘지명)。” (予嘗嘉尙恭 而又識其父之爲人 迺次其事作銘 以遺之云-묘지명) 乃为次其世而作铭以遗之云:
惟王氏之先,长安万年。四代之祖,刺史壁州。遭巢猾唐,得果而留。卒葬西充,为乡壁公。王、孟有蜀,或家或禄。三世不迁,自君东还。始家河南,广文之生。举三不中,任仕以兄。主簿之卑,试原、武、密。晋城是令,政专自出。令政有称,迁理之丞。蓝田、夏、雒三邑皆闻。寿五十九,终中舍人。在雒逢饥,铺粟不殍。褒功劝吏,天子有诏。雒人染疠,躬之不避。以死勤民,在法宜祀。刻诗同藏,惟(維-묘지명)世之扬。
-<<唐宋八大家合集>> 卷二十七·居士集卷二十七 墓誌六首
‘皇元故奉直大夫監察御使鄭公壙誌’의 주인공은 鄭擇이다.
“공은 휘가 擇이고 자가 從之인데 세상에서는 鈞之라고 한다. 新鄭人 太師 冀國公 휘 元宗이 공에게 6세조가 된다. 이 분이 金紫光祿大夫少府太宰兼門下侍郞 휘 居中을 낳았다.
그는 관직에 나아갔는데 宋나라 宣和 연간에 華元郡王으로 책봉되었는데 시호가 攵正이었다. 천자가 친히 그 비석 머리에 쓰기를 ‘正和寅亮侍宰之碑’라고 하였다.
太宰는 承議郞右文殿 撰을 낳았는데, 그는 <<九城志>> 편찬의 參議官이었다. 휘 修年殿 撰은 공의 증조 휘 諫을 낳았는데, 처음으로 蔡에 살았다. 간이 공의 조부 仲賢을 낳았다. 중현이 공의 아버지 휘 遵道를 낳았는데, 金나라 進士科에 甲科로 합격하였다. 帥府經歷官兼詳議經略使 司事로 졸하여 雒땅에 장례를 하였다.
공은 行中書省 椽滿考에서 承直郞 汀州路 摠管府判官을 제수 받았고 奉訓大夫로 승작하여 甘肅行中書省員外郞이 되었다가 곧 中書戶部員外郞으로 옮겼다. 知霍州로 나갔다가 徐州로 옮겼는데, 모두 청렴한 행정으로 칭송받았다.
兩淮副都轉運使로 조정에 알려져 奉直大夫로 승작하여 監察御使가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관직을 버리고 깊은 곳에 숨어 사니 천하에 그를 높이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泰定 2년(1325) 閏正月 18일 濟州에서 졸하니 연세가 78세였다.
李씨에게 장가들어 자식은 아들 한 사람 衍이 있는데, 여러 관직을 거쳐서 太中大夫에 이르러 河東, 陝西 등지의 都轉運, 鹽使로 2년을 재임하고 수령으로서 廣平路摠管의 일을 맡았다. 至正 10년(1350) 11월 9일 雒陽 邙山 조상 무덤 곁에 장례하였다. 아! 공의 뜻이 비록 높아서 그 은택을 베풂이 사람마다 흘렀지만, 마침내 그 효용을 펴지 못하고 묻히고 마니 애석하도다.
광의대부 광평로총관 겸 본로제군오로총관 관내 권농사 정연 삼가 적음(通議大夫 廣平路摠管 兼 本路諸軍奧路摠管 管內 勸農事 鄭衍 謹誌)
가의대부 하남부로총관 겸 본로제군오로총관 관내 권농사 지하방사 장명원이 글씨 씀(嘉議大夫 河南府路摠管 兼 本路諸軍奧路摠管 管內 勸農事 知河防事 張明遠 書)
봉훈대부 강절유학제거 양강중 찬함(奉訓大夫 江浙儒學提擧 楊剛中 撰)
유덕정 새김(劉德貞 刊)
‘皇明伊方城泰惠王妃蔡氏合葬墓誌銘’의 주인공은 명나라 온희왕의 왕비 채씨인데 가정 정미(1547) 2월 13일에 하남부학생 봉 병마지휘 채신과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나 만력 37년 기유년(1609)에 죽었다.
‘淸誥授奉直大夫山西試用典史秀三呂君墓誌銘’의 주인공은 이름이 芝泉이고 호가 秀三이다. 청나라 함풍 10년(1860) 5월 2일에 태어나서 민국 17년(1928) 10월 7일에 69세로 죽었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어른과 같이 슬퍼하였고, 부친이 병으로 침대에 눕자 한 결 같이 간병하였다.
청나라 광서 25년(1899)에 묘소와 사당을 수리하고 <<忠節公遺著>>, <<明德堂文集>>, <<孝經本義>>, <<孝經大全>>, <<孝經或問>>을 간행하여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게 하였다. 첫 부인 李씨가 먼저 죽어서 둘째부인은 劉씨였다.
무덤 속의 삶
전시관을 보고 복도로 들어서니 좌우에 고분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있다. 첫째로 보는 무덤 의 입구는 도깨비 머리가 커다란 문고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돌문 안의 현실 입구에는 작은 묘지석이 세워져 있다. 진나라 무제 원강 3년(293)에 돌아간 진사농관중후의 무덤이다. 현실은 아치형의 지붕과 벽을 벽돌로 쌓았고 시신 주변에는 항아리 토기들이 놓여져 있다.
그 옆의 무덤은 현실 안에 커다란 지석이 놓여져 있고 시신 옆에는 소가 끄는 뚜껑 달린 수레를 중심으로 앞뒤에 말을 탄 호위 무사들과 시종들이 행렬을 지었고, 맨 앞에는 외뿔이 달린 괴수 2마리가 서 있다. 벽돌 무덤 안에는 사람들이 말과 낙타를 타고 있는 도용들이 놓여져 있다.
전시관에는 晉, 北魏 시대의 도용, 수레가 보이고, 당나라 시대의 삼채 문관상, 무관상, 시녀, 내시, 낙타, 말, 괴수, 말잡이 도용들이 보인다. 당나라 장회태자의 무덤 벽화에는 머리에 새 깃을 꽂은 관을 쓴 신라 사신도 보인다. 나무 숲 속에서 말을 타고 격구를 하고 낙타를 몰고 가는 모습의 벽화도 보인다. 내시, 시녀, 말을 타고 깃발을 앞 세운 집단이 사냥 나가는 장면도 있다. 그 중에는 머리채를 틀어 올린 궁녀 셋이 새가 매미를 쪼는 것을 보고 있는 장면도 있다.
전시관에서 다시 복도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에 여러 시대의 무덤들이 재현되어 있다. 1958년에 낙양 澗河西岸 7里河村에서 발굴된 북송벽돌방무덤은 무덤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다. 팔각형으로 아주 높이 천정을 만들었는데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궁륭천정이다. 기둥 위에는 4층 또는 3층의 공포를 만들었다. 정면에는 공포 아래로는 다섯 개의 창호를 만들었다. 5개의 창호로 이루어진 분합문의 좌우 끝의 두 개는 완자(卍字)살문이고 그 안의 좌우 창호는 빗살문 창호이고 가운데 창호는 꽃살문이다. 다섯 창호의 아래 부분에는 큼직한 연꽃 한 송이를 표현하였다.
첫눈에 우리나라 궁궐이나 사찰의 문이 떠오른다. 오른쪽 벽면에는 식탁 위에 찻사발과 커다란 꽃병을 놓고 두 손을 소매 속에 꽂은 채 마주 앉은 노부부를 표현하였다. 무덤 주인공의 생전의 모습을 무덤에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집에서 부부가 마주 앉은 무덤이라면 죽음이 두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무덤은 입구가 그대로 저택의 대문을 재현해 놓았다. 대문의 처마 아래에는 문패처럼 작은 비석을 붙여 놓았다. 비석에는 ‘禾四郞家外宅’이라 하고 新安의 도시 길거리에 있는 郭午가 거주하는 집이라고 하였다. 무덤의 벽돌을 만든 사람이 賈博士, 劉博士이고, 집을 만들고 벽화를 그린 사람은 楊虎이며, 宣和 8년(1126)에 장례를 하였다고 한다.
북송 말기 사대부들의 화려하고 수준 높은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대문을 들어가 계단을 오르니 유리창 안으로 팔각형의 방이 있다. 3~4단의 화려한 공포 아래의 벽에는 기둥 사이로 벽면이 있다. 중앙 벽면에는 주인 부부가 꽃무늬 붉은색 커튼이 쳐진 거실의 식탁에 손을 소매에 꽂은 채 마주보고 앉았다. 부인은 머리를 틀어 올렸고, 앞이 트인 붉은 색 가운을 입었다. 남편은 버선처럼 생긴 모자를 썼고, 관복처럼 생긴 앞이 터지지 않은 백색 장포(長袍)를 입었다. 크게 그려진 부부 사이에 식사를 시중드는 시녀가 있고, 부인 옆에는 딸, 남편 옆에는 아들로 보이는 인물이 작게 그려져 있다.
식탁 위에는 찻주전자, 2개의 차대접이 놓여 있다. 부부와 아들딸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 놓았다. 900년이라는 시간의 장막 속에서 내 눈 앞에 나타난 송나라 사람들의 부유하고 여유 있는 삶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부부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다른 벽에는 대문간에 얼굴을 내밀고 몸이 반쯤 나온 부인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무덤을 만든 사람의 감각과 재치가 참으로 놀랍다. 먼 길 나선 남편을 밤이 깊도록 기다리다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 대문간에 나와 문밖을 내다보는 것일까. 아니면 군대에 징집되어 전쟁터로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일까.
大金 承安 4년(1199)에 장례를 치른 무덤의 벽에는 선각 그림 석판이 벽에 붙어 있다. 정면에 보이는 석판에는 탁자 위에 받침이 있는 찻잔과 과일이 담긴 그릇이 2개 놓인 탁자가 양쪽에 놓여 있고, 커다란 빈 의자가 각기 놓여 있는 그림이다. 마주보는 탁자와 빈 의자 좌우에 각기 남녀 시동 한 쌍이 새겨져 있다. 과일에는 꼭지까지 그려져 있다. 다른 벽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높이가 허리까지 올라오는 큰 북을 바닥에 설치하고 북채를 양 손에 들고 치는 사람 1명, 작은 북을 허리에 매고 있는 사람, 관악기를 세로로 들고 부는 사람 1명, 박을 치는 사람 1명, 손잡이가 달린 둥근 쇠판을 왼손에 잡고 오른손에 채를 들고 두드리는 사람 2명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 날개가 달린 사모를 쓰고 관악기를 세로로 들고 연주하는 사람 2명, 허리춤에 장고를 닮은 악기를 매달고 채를 잡고 연주하는 사람 2명이 있다. 그 사이에 춤추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2명이 새겨져 있다.
벽돌로 쌓은 원형의 무덤 안에는 높은 천정 아래에 장방형의 큰 토기 관이 놓여 있다. 관의 앞쪽에는 4개의 창호가 붙은 분합문이 표현되어 있다. 문고리가 달린 한 짝의 대문 양쪽에는 꽃살 창호가 있고, 그 위로 높이 솟은 처마에는 한 송이 큰 모란꽃이 들어 있다.
그 옆의 무덤에는 14개의 창호문이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꽃살문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그 문양이 아름답고 섬세하고 친숙하다. 꽃빗살문, 완자문, 아자문, 귀갑문, 귀갑꽃살문의 창살이 창호의 위쪽에 들어 있고, 창호의 아래쪽에는 모란꽃, 연꽃이 한 송이씩 큼지막하게 들어 있다. 우리나라 궁궐, 사찰의 그 아름다운 무늬의 창호문의 원형을 여기 낙양의 북망산 무덤 속에서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옛 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여기로 와서 보아야 할 곳임이 분명하다.
다시 만나는 전시관에는 漢나라 시대의 도용, 守門 武士, 병에 꽂힌 모란무늬 벽돌, 손님을 만나 술을 마시는 연회 장면, 瑞獸, 삼족오가 있는 해, 두꺼비가 있는 달, 신선, 용의 기원과 발전 모습,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의 벽화 등이 보인다.
전시관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간 곳을 찾아가니 그곳에는 북위 世宗 宣武帝(499~515)의 능이었다. 벽돌 널방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는 경사진 널길은 길이가 이십 미터는 되어 보인다. 장막을 걷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음침한 지하로 내려가니 좌우에 슬픈 표정을 한 무사상이 좌우에 지키고 서 있다. 널방에는 회색 석관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1500년 전에 황제로 살았던 한 인간, 탁발각(拓拔恪)의 무덤은 그냥 음산할 뿐이었다. 능 바깥에는 겨울의 햇살이 비추고 있고 잎과 꽃이 새 봄을 준비하는 모란꽃 밭이 있다.
하남고대벽화관(河南古代壁畵館)
널방에서 밖으로 나와 다시 간 곳은 벽화 전시관이었다. 한 대에는 황노사상, 신선사상, 유교사상이 어울려 환상과 현실이 어우러진 다양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졌다. 복희와 삼족오가 들은 해, 여와와 두꺼비가 들은 달, 청룡, 주작, 백호, 羽人, 神獸, 玉璧, 騰蛇, 서왕모 등 천상 세계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먼저 보인다.
고대인들의 의식 세계와 오늘 우리들이 상상하는 의식 세계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칼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이 우리의 무의식에도 유전자처럼 들어 있는 것이다. 벽화를 보고 있노라니 그것은 오늘을 사는 내 의식의 원형질을 그려놓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음주를 하며 연회를 하거나 윷놀이를 하는 현실 세계의 장면도 있다.
하남 당나라 안국상왕 부인 최씨 무덤의 벽화는 낙타를 끌고 출행하는 사람, 내시, 거문고를 들고 있는 악사, 시녀, 환두장도를 쥐고 있는 호위 무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낙타를 끌고 출행하는 사람의 코는 오똑하고 길며 눈은 깊고 턱수염은 덥수룩하여 한 눈에 서역인임을 알 수 있다. 붉은 입술의 이 사나이가 낙타를 끌고 가는 모습은 정말로 생생하여 당장에라도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꽃무늬가 상감되어 있는 커다란 도자기에는 물이 가득하고 매화 꽃송이가 그 속에 떨어져 있다. 그 앞에는 날개를 펴고 곧추선 백조 세 마리가 있고, 하늘에는 두 마리의 새가 날고 있다. 나비, 풍뎅이 같은 곤충도 날아 다닌다. 땅에는 민들레꽃, 질경이 같은 풀이 자라나고 있는 봄날의 귀족 집 정원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풍만한 얼굴과 몸매의 여인들은 머리에 꽃을 장식하고, 꽃무늬 염색의 붉은 옷을 입고 있다.
송대의 무덤벽화에는 중국 효자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童永賣身葬父’, ‘丁蘭刻木事親’, ‘王祥臥氷求鯉’, ‘孟宗哭竹生笋’, ‘郭巨爲親賣兒’, ‘王褒聞雷泣墓’ 그림들이다. 그림들에 효자의 이름이 쓰여 있다. 유교는 효의 종교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진 것도 출가가 부모를 모시지 않고, 대가 끊기고, 제사를 모시지 않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유교는 효의 종교이고, 가족주의 종교이고, 현세를 중시하는 종교이다.
한나라 이래로 유교는 효의 윤리를 확장하여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확립하는 논리로 삼았다. 불교가 융성하였던 위진남북조와 수당 시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러 중국은 다시 효를 중시하는 유교주의 사회로 돌아갔다. 당나라 말기의 한유와 북송의 신유학자들과 남송의 주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효를 중시하는 유교정치철학을 주창하였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스스로를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 불효의 대죄를 지은 죄인으로 여겼다. 부모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러는 것이 마지막 효의 실천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24명의 효자 중에서 대표적인 6명의 효도 고사를 무덤 벽화로 그려 놓은 것이다.
동영은 한나라 때의 사람이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고 홀로된 아버지를 정성껏 모시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 치를 재산이 없어서 자신을 부잣집 일꾼으로 1만전에 팔았다. 3년 상을 마치고 부잣집에 일을 하려 다녔다. 어느 날 일을 하러 가다가 한 여인을 만났는데, 아내가 되기를 원하여 같이 부잣집에 갔다. 부자가 동영을 갸륵하게 여기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영은 1만전의 빚을 갚을 때까지 계속 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부자와 옥신각신 끝에 동영의 아내가 100필의 비단을 짜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그런데 열흘 만에 그 아내가 비단 100필을 짰다. 그리고 두 사람은 부자에게 진 빚을 갚고 그 집을 나왔다. 그 때 아내가 사실은 자신이 견우별과 직녀별의 ‘직녀’인데 그대의 효성이 갸륵하여 그대를 도우러 왔다고 하였다. 직녀는 그길로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
한나라 때의 정란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서 나무에다 어머니의 얼굴을 새겨두고 날마다 어머니처럼 섬겼다. 어느 날 이웃 사람, 장숙(張淑)이 술에 취하여 그 목상을 쳤다. 이에 정란이 장숙을 죽였다. 관청에 정란이 잡혀가자 어머니의 목상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위말진초(魏末晉初) 때의 왕상은 계모가 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여, 웃옷을 벗고 누워 얼음을 녹이자 잉어가 저절로 물 밖으로 나왔다. 오나라 사람인 맹종은 부친을 잃고 병든 홀어머니를 품을 팔아 봉양하였다. 어느 눈 내린 겨울에 어머니가 죽순 요리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맹종이 눈이 쌓인 대숲을 헤매다가 죽순을 발견하고, 어머니께 죽순 음식을 해드렸다. 그 뒤로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곽거는 후한 때 사람이다. 가난하여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밥을 먹어치우자, 곽거는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며 아내와 의논하여 아이를 생매장하려고 땅을 파자 돌솥이 나왔는데 뚜껑에 ‘하늘이 곽거에게 준다’라고 씌어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황금이 가득하였다. <<삼국유사>> ‘손순매아(孫順埋我)’ 이야기의 원조이다. 모량리 사람, 손순의 돌종 소리를 들은 흥덕왕은 손순을 후세의 효자, 곽거를 전세의 효자라고 하며 천지가 그들을 보살핀 것이라고 하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늙은 어머니가 죽고, 어린 아들을 살리는 것이 옳다. 어린 자식을 생매장하여야 할 정도로 국가와 지배세력의 조세 착취는 심하였다. 그리고 어린 자식을 생매장하려는 발상을 하는 것은 당시에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아서 당시 사람들의 사고에는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뭄으로 식량이 떨어지고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할 때 자식을 서로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있다.
1990년대에 식량이 부족하여 무려 300만이 굶어죽은 북녘 땅의 동포들이 중국으로 떠돌다가 맹수에게 잡아먹히기도 하고, 인신매매 당하기도 하고, 외몽골의 추운 사막에서 얼어 죽기도 하고, 중국과 동남아의 국경에서 떠돌다가 굶어죽기도 하고, 국경에서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 잡혀서 처형도 당하고, 감옥에 수용당하기도 하고, 남한 땅에서 심지어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고 있다.
아, 19세기와 20세기와 21세기에 우리 한반도에서 우리겨레가 무슨 고난과 수난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올해는 동학농민항쟁 12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겨레의 백 년이 넘는 이러한 고통의 세월을 장편대하소설로 위대한 작가가 나와 남김없이 써야 한다. 위대한 역사가가 나와 백암 박은식 선생처럼 신한국통사(新韓國痛史), 신한국분단혈사(新韓國分斷血史)를 써야 할 것이다.
왕포는 위나라 사람이다. 그는 담력이 약한 어머니가 천둥소리에 놀라고 무서워하기에 비가 오고 천둥치면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곁을 지키며 어머니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였다. 어머니의 사후에도 비바람치고 천둥치면 어머니의 묘소에 달려가 울면서 죽은 어머니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무덤을 지켰다. 나중에는 아예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
당나라 이전의 벽화들에서는 고구려벽화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시대의 벽화는 국제적이고 귀족적이며 번창하였던 당시의 사회와 문화의 모습, 발해 정효공주묘 벽화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말로만 듣던 북망산에서 지하에 조성된 무덤들은 2,000년 동안 펼쳐진 인간 역사의 타임 캡슐 같았다. 이승에서 이미 사라진 숱한 사람들의 꿈과 애환이 벽화와 지석과 무덤 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이형우 회장님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한 백제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 흑치상지 장군의 무덤에 가보고 싶어 한다. 박문동 단장님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손순매아에 등장하는 효자 곽거의 고사를 그린 벽화가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박물관에서 백마사에 오니 작은 트럭에서 중년의 부부가 연탄을 내리며 배달하고 있다. 오늘밤 지상의 삶에서는 그래도 한 장의 연탄이 있어야 한다. 망산(邙山) 지구 고묘박물관은 낙양성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몽환의 시공을 갈무리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죽음의 예식, 장례를 중후하게 하며 무덤 속으로 삶의 기록을 가져가고, 삶의 공간을 재현하며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의미있는 삶을 확립하였다. 중국문명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인도인들은 시간을 무화시키고 죽음을 해체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삶과 죽음은 서로 얽혀 있으니 불생불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하는 시간이란 본래 공한 것이다. <<금강경>>에 말하지 않는가? '過去心 不可得,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인도문명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심오한 철학과 종교를 탄생시켰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찾아 나선 붓다는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서 외쳤다. "아무르따(Amrta)!, 나에게 더 이상 죽음은 없다!"
박물관 문을 나서는 내 마음 속에 의상대사의 화엄경 법성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無量遠劫卽一念 한량없는 기나긴 시간이 곧 한 생각이고,
生死涅槃常共和 삶과 죽음, 열반이 늘 함께 존재한다.
백마사
버스가 서고 내린 곳은 백마사 앞이다. 중국 최초의 절이다. 포항 내연산 보경사의 창건 연기 설화에 이 백마사가 등장한다.
후한 효명제(58~75 재위)가 영평 7년(64) 어느 날 밤 꿈에 온통 금색 빛의 사람이 나타나 정수리에서 광채가 나고 몸에서 빛이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사연을 물으니,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서방에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을 부처라 하고, 형상이 매우 장대(長大)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들은 황제는 “인도로 가서 경전과 승려를 모셔오라”며 십여명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신들이 경전을 구하러 가는 중, 서역지방(대월지국)에서 백마(白馬)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오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난(竺法蘭)을 만나 그들을 데리고 영평 10년(67)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처음 머물던 곳은 외국 사신들이 묵던 관청인 홍려시(鴻臚寺)였다. 홍려시의 시자가 관청이란 뜻인데, 나중엔 절 사자로도 쓰였다. 중국과 한국의 사원건축이 궁궐건축을 모델로 한 것도 이러한 데서 유래한다. 낙양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사람과 경전을 태우고 왔던 백마가 지쳐 죽자, 황제는 낙양문 밖에다 백마의 공덕을 기리는 백마사를 영평11년(68)년에 창건하였다.
이 절에 스님들을 상주케 한 뒤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는데, 최초로 번역한 경전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다.
중국에서 문화혁명(1967~1976)이 일어났을 때, 백마사도 법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백마사에 모셔져 있던 11세기 요나라 때 조성된 18나한이 훼손되었고, 2000여년 전 인도 고승이 가지고 온 패엽경(貝葉經)이 불타버렸으며, 백마사 보물인 옥마(玉馬)가 산산 조각났다.
이런 일이 발생한지 얼마 뒤, 캄보디아의 해외 망명 군주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중국을 방문해 “참배하고 싶은 사찰이 백마사”라고 하자, 당시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자금성 안에 있던 패엽경과 베이징 벽운사의 18나한을 낙양 백마사로 운송하였다.
여기도 다른 문화유적지처럼 절 입구의 넓은 길거리 좌우에는 관광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절 입구의 패방에는 ‘범성동유(凡聖同遊)’라는 큰 글자가 붙어 있다. 절 입구라서 그런지 불상을 파는 가게도 있다. 표를 받는 입구에도 화강암 석방이 있다. 패방의 가운데 문 위에는 법륜이 구름 위에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聖敎西來’, 우문에는 ‘禪天’, 좌문에는 ‘淨域’이라고 새겼다. 뒷면에는 ‘慈輝薄蔭’, ‘正念’, ‘澄觀’이라고 새겨 놓았다.
흑색바탕에 금색 글씨로 쓴 백마사 편액이 걸린 벽돌문을 통과하니 다시 백마사 대문 앞에 너른 마당이 나온다. 백마사 절 경내에 들어선 것이다. 붉은 담장이 대문 좌우에 뻗어 있는 모습이 두 팔을 벌려서 중생들을 맞이하는 것 같다. 오른쪽 담벽에는 ‘利樂有情’, 왼쪽 담벽에는 ‘莊嚴國土’라고 써 놓았다. 대문 앞의 마당에는 돌난간을 두른 백마상이 있다.
백마사라고 쓴 대자 편액이 걸려 있는 3문이 나 있는 솟을 벽돌 대문을 들어섰다. 천왕전 마당은 석판이 깔려 있고 측백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다. 천왕전 좌우에는 이층의 작은 건물이 있는데, 종루와 고루이다. 고루에 ‘釋源鼓音’이라는 글자를 새긴 편액이 붙어 있다. 향연이 타오르는 굵은 향을 머리 위에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눈을 감은 채 기구(祈求)를 하는 중국인 신자들이 많았다.
천왕전 정면의 좌우에는 포대화상과 위태천이 모셔져 있고, 좌우 벽에는 사천왕상이 있다. 앉아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이하여 주는 분은 포대화상이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불룩한 배를 드러내고 앉아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불교의 산타클로스이다. 중국인들이 얼마나 재물을 좋아하는지 절마다 포대화상을 만날 수 있다.
갑옷을 입구 왼손바닥에 보봉을 올려두고, 오른손에도 약병을 닮은 뭔가를 올려두고 있는 존상은 위태천(韋駄天 , Kārttikeya)이다. 중국에서는 원, 명대 이후에 천왕전에 반드시 모셔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불화에서 신장들의 대장으로 나타난다. 사천왕상은 모두 황금색 관을 쓰고 있다. 천왕이 들고 있는 탑은 백마사의 제운탑 모형이다.
그 다음 전각은 대불전이다. 명대에 중건된 건물은 헐산식(歇山式)이고 골기와가 이어져 있다. 용마루에는 용들이 새겨져 있고 양끝엔 치미로 장엄되어 있다. 용마루의 앞에는 ‘佛光普照’, 뒷면에는 ‘法輪常轉’이라는 글자가 양각된 벽돌이 들어 있다. 전각 앞에서 손에 염주를 쥐고 누런색 장포를 입은 이 절의 스님과 박문동, 이형우, 권영탁, 나는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도 촬영하였다.
법당 안의 수미좌에는 붉은 구리빛이 나는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좌측에 마하가섭, 우측에는 아난의 입상이 있다. 가섭의 좌측에는 문수보살, 아난의 우측에는 보현보살 좌상이 수미좌에 봉안되어 있다.
맨끝의 좌측에는 공양천인 입상이 있다. ‘釋迦三聖’과 석가불 좌우의 1대조사 가섭, 2대 조사 아난은 명대(明代) 소상(塑像)들이다. 불보살 좌상 머리위에는 황금색 비단 일산이 세워져 있고 후불도 대신에 주악천녀상들이 수놓아져 있는 황금색 비단이 쳐져 있다.
전각 내부에 1.25톤 무게의 철종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지장보살 등이 봉안되어 있다. 붉은 색 비단에 불, 보살, 승려 상들이 수놓아져 있는 천이 걸려 있기도 하다. 전각의 후벽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불상 앞에는 탁자가 있고 탁자에는 꽃, 향로, 과일, 촛대가 놓여 있다. 그 아래 바닥에는 신자들이 무릎을 댈 수 있는 방석이 놓여있고, 절을 하고 있다.
원대에 중건한 대웅전에는 가운데에 금시조가 새겨진 섬세한 조각에 금빛이 휘황한 목조 불감(佛龕)이 있다. 금시조는 새 부리에 사람 몸이고, 편 날개 아래에는 한 팔은 굽히고 한 팔은 편 사람이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 모습을 사람이 각기 한 명씩 있다. 금시조의 가슴과 배는 드러내고 목에는 영락을 걸었다. 불감에는 3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불감 안의 연화보좌 위에 결가부좌의 3불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는 석가불,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이다. 여덟 겹의 작은 연꽃잎이 빽빽하게 조각된 연화보좌에 봉안된 붉은 자주빛 세 불상은 모두 가녀린 모습이고 세련되고 균형 잡혀 있다. 3불 좌우 끝에는 칼을 든 호법선신이 각기 1위씩 세워져 있다.
좌변은 韋駄天將, 우변은 偉力天將인데, 둘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하나가 온화한 표정이고 하나는 무서운 표정이다. 좌우측에는 원나라 때 조각된 대단히 원만하고 수려한 18나한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백마사의 최고 보물이다. 건물의 후면 벽에는 붉은 문 안에 갑옷과 투구를 쓰고 왼손에 극자 창을 잡고 서 있는 가람수호신장상을 모셔두었다. 그 앞의 탁자에는 사탕, 과일을 담은 접시들이 공양 올려져 있다.
대웅전 뒤에 있는 건물은 접인전(接引殿)이다. 접인전은 우리나라 사찰의 극락전과 같다. 극락세계로 중생을 영접(迎接)하여 인도(引導)하는 아미타불 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그 앞마당에는 역시 장방형의 향로가 놓여 있다. 향로 앞에는 돌로 조각한 커다란 복숭아가 있다. 사람마다 복숭아를 만져서 윤기가 반지르르 하다. 향로에 향을 올리고 두 손을 소매에 꽂은 채 눈을 감고 기도하는 스님의 모습에 일체중생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는 바람이 묻어난다.
법당 안에는 극락정토의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서서 중생을 맞이하는 모습의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의 머리맡에는 황금색 비단에 수를 놓은 일산이 세워져 있고 뒤에는 연꽃들을 테두리에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 무늬가 새겨진 두광과 신광이 세워져 있다. 세 존상의 표정은 자비롭다. 아미타불의 왼손은 중품 수인이고 오른손은 여원인이다. 왼쪽의 관음보살은 왼손에 정병, 오른손에 나뭇잎을 들고 있다.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두 손을 모아 연꽃을 받쳐 들고 있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니 벽돌 담장이 쳐져 있다. 계단을 올라 ‘청량대(淸凉臺)’라는 석판 편액이 붙은 아치문을 지나자 겹처마 사이에 비로각 편액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문 안은 하나의 뜰을 형성하고 있다. 붉은 격자창살문 위에는 ‘獅窟’이라는 대자 편액이, 그 좌측엔 ‘正法永昌’ , 우측엔 ‘登無上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법당 안의 정면에는 화려한 닫집 안에 비로자나불 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화려한 보관을 쓰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식지를 맞대고 있는 수인을 하고 앉은 비로자나불 좌상이 높은 연화대좌에 봉안되어 있다. 그 좌측 보살은 손에 경권을 든 문수보살, 우측 보살은 연꽃을 든 보현보살 입상이 협시보살로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1불 2보살을 불교에서는 ‘華嚴三聖’이라고 한다.
화엄종 사찰인 포항 내연산 보경사의 적광전에 모셔진 화엄삼성상과 비슷하다. 비로자나불의 뒤에는 화려하고 섬세한 연꽃들이 새겨진 신광이 있다. 그 좌우 벽의 유리 안에는 보관을 쓰고 선정인을 한 작은 불상이 작은 감실에 새겨진 천개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각 마당의 좌우에는 벽돌로 지은 작은 전각이 있고 그 안에 가섭마등과 축법란의 소상을 모시고 있다. 또 ‘담가라역경도(曇迦柯譯經圖)’, ‘섭마등축법란역경도’도 보인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법당을 지키는 스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자, 사진을 촬영한다고 화를 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얼굴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였지만 정말 당황스러웠다. 백마사에서 당한 봉변이었다.
마당에는 비단 잉어가 노니는 작은 네모 연못이 있다. ‘洛京白馬寺祖庭記’ 비석이 세워져 있고, 편백나무 노거수 두 그루가 고풍스럽다. 뜨락에 심어진 랍매가 향기를 뿜으며 피어나고 있어서 반가웠다.
비로각에서 나와 서편으로 가니 이층 지붕의 ‘法寶閣’이 있는데, ‘釋源陣展館’이라고 하였다. 중국 불교의 근원(根源)이 되는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이기에 ‘釋源’이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앞에는 이 절에서 며칠 동안 묵어간 일본 밀교의 시조인 홍법(弘法)대사 구우카이(空海) 스님의 청동입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804년 견당사(遣唐使)를 따라 당으로 건너가서 청룡사의 혜과(惠果)로부터 밀교를 배워 806년에 귀국하였다.
백마사 경내의 동변에는 “漢侶道圓通摩腾大師墓”,서변에는 漢开開教總持竺法大師墓”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는 섭마등과 축법란의 묘가 있다고 하지만 보지 못하였다. 불교와 함께 중앙아시아의 안식국에서 들어온 석류나무가 많다고 경내에 많다고 하지만 역시 보지 못하였다.
동편에 국제 불교 사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미얀마의 쇠다곤 황금불탑 사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옆에는 인도의 산치 대탑을 재현하여 놓았다. 탑 안으로 들어가니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서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초전법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사리탑
중국인 가이드에게 물어서 절에 입장하며 미세먼지 안개 속에서 멀리 보이던 전탑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백마사에서 동편으로 가니 패방이 서 있다. 패방의 중앙문 위에는 ‘慧日恒明’, 좌문 위에는 ‘忘筌’, 우문 위에는 ‘捨筏’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참으로 반가운 문구이다. <<장자>> <外物>편의 ‘得魚忘筌’, <<금강경>> 제6분인 <正信希有分>의 ‘筏喩’는 기본적으로 같은 뜻의 말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연기된 세계를 체득하면, 표현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버리라는 뜻이다.
불교의 공사상을 노장사상의 틀로 이해한 ‘격의(格義)불교’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준다. 불교를 노장사상으로 이해한 중국불교는 선불교를 탄생시킨다. 선사들은 <<능엄경>>에 나오는 ‘달을 보았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잊으라.(見月忘指)’는 말을 자주 한다. 방편(方便)으로서의 언어에 진리, 종교가 있지 않은 것이다. 패방의 뒷면에는 ‘法流東衍’, ‘妙悟’, ‘勝因’이라고 새겼다.
나무가 심어져 있고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 길이 끝나는 곳에 백마상이 좌우에 세워져 있다. 백마 타고 사진 찍는 한 아주머니가 아주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뒤로 높은 문이 있다. 좌우로 난 계단을 오르니 ‘中原第一比丘尼道場(중원제일비구니도량)’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문의 좌벽에는 ‘菩提(보리)’, 우벽에는 ‘道場(도량)’이라고 쓰였다. 반대편에는 ‘慈恩普被’ 편액이 걸렸고, 좌벽에 ‘戒定’, 우벽에 ‘莊嚴’이라고 쓰였다.
문 난간에서 내려다 보니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이 한 글자씩 따로 이중 처마 사이에 붙여놓은 큰 법당이 보이고 그 남쪽에는 돌을 깔아놓은 너른 마당이 있다. 마당의 남쪽에는 마당보다 몇 배 넓이의 기다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가에는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법당 앞을 지나서 붉은 칠을 한 담장의 둥근 문을 지났다. 문 위에는 앞면에 ‘性海’, 뒷면에 ‘覺苑’이라고 새긴 돌이 박혀 있다. 탑 주변에 정원을 조성하여 놓았다.
탑이 보이는 입구에 서니 할머니들과 청춘남녀가 합장을 하고 탑돌이를 하고 있다. 탑은 누런 황토색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벽돌로 쌓은 전탑이다. 이중의 기단부 위에 13층을 쌓았고, 상륜부가 있다. 네 귀퉁이에는 풍경들이 층마다 달아 놓았다. 남쪽에 서니 25미터 높이의 탑이 햇빛이 비추어 드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 있다.
탑신의 앞뒤에 몇 곳에 아치형의 감실이 조성되어 있다. 탑이 층급받침은 8개이고 당나라 양식을 보인다. 공포가 탑의 1층에만 사면에 4개씩 표현되어 있다. 백마사 동쪽 250미터 지점에 있는 이 탑의 이름은 ‘濟雲塔’이다. 본래 목탑이었는데, 금나라의 침공으로 불탔다. 금나라 大定 15년(1175)에 세운 탑이다. 기단부 위에 ‘釋迦舍利塔’이라고 새긴 비석이 박혀 있다.
나는 햇살 비추는 이 탑전에서 합장하고 꿇어 앉아 삼배를 올렸다. 공덕상(功德箱)에 100위안 지폐를 넣으니 관리하는 노보살이 다가와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제운탑에서 돌아나와 대웅전 문 앞에 서니 내부를 수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법회가 있는 날인지, 붉은 칠을 한 창살문 앞에 책상을 두고 여러 가지 책자들을 올려놓았다. 비구니 스님과 노보살들이 둘러 서 있고, 고양이 한 마리도 책상 위에 앉아 있다.
신자들이 보시함에 보시를 하고, <<三世因果文>> <<淨土宗 簡報>, <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 <佛說父母恩重難報經>, <<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 <<地藏菩薩本願經>> <<放生儀規>, <<了凡四訓>> 같은 책자들을 가져간다. 또 기도를 올리는 위패가 인쇄된 노란 종이들도 놓여 있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쓰고 망자를 위한 기도를 접수할 때 쓰는 종이로 보인다.
이들 책 중에서 <<부모은중경>>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반갑다. 어릴 적 어머니가 불국사의 말사였던 오봉산 주사암에서 <<은중경>>을 법보시 받아와 겨울밤에 호롱불 밑에서 읽다가 나에게도 읽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은중경>>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번 여행 중에 이 책을 한 권 기념으로 한 권 챙겨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대웅보전 법당 앞에서 본 이들 책자들은 중국의 유교문화 풍토 속에서 민중이 불교를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 불교가 21세기 중국 민중의 삶속에서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자들이었다.
<<요범사훈>>은 내가 처음 접하는 책이다. 명나라 때의 원황(袁黄, 1533~1606)이 69세에 지은 수신치세에 관한 교육서적이다. 그는 이름을 요범으로 바꾸었다.
자신의 필생의 학문과 수양의 경험을 가지고 자식들을 위하여 유불도의 사상을 융합하여 이 책을 썼다. 제1편 입명지학(立命之學), 제2편 개과지법(改過之法), 제3편 저선지방(積善之方), 제4편 겸덕지효(謙德之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료범은 강소성 오강현 사람인데, 어릴 때 절강성 가선현에 편입되어 그 현의 학생이 되었다. 융경 4년(1570)에 향시에 합격하여 擧人이 되고, 만력 14년(1586)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하북성 寶坻縣長이 된 지 7년이 지나서 兵部 職方司의 主管人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주둔 명군 사령관 宋應昌의 건의로 참모장이 되어 참전하였다. 李如松이 관직과 녹봉을 준다고 가장하여 왜군과 협상을 하여, 왜군이 방어를 허술하게 하는 틈을 타서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원료범은 이 일이 명나라의 國威를 떨어뜨린 일이라며 이여송을 힐책하였다.
또한 이여송 휘하의 군인들이 조선 백성을 죽여, 그 머리 숫자로 공훈을 인정받았다. 이에 다시 그는 이여송을 공박하였다. 화가 난 이여송이 군대를 동쪽으로 빼가버리자 고립무원의 원료범은 왜군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기지로 왜군을 격퇴하였지만 뒤에 명나라 조정의 내분에 휘말려 정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74세에 죽었다. 명나라 희종 천계 연간에 그의 억울함이 밝혀져 왜구 정벌의 공을 인정받아 尚寶司少卿 관직을 추서 받았다.
대웅보전 마당에는 돌에 마음 心자와 부처 佛자 커다란 글자를 새겨 놓았다. 윤현중 선생님을 만나 다시 비구니 도량의 높은 문을 나오니 당 태종의 貞觀之治를 이어 당 현종의 開元之治를 연 武則天 시대의 명재상이었던 적인걸(狄仁杰, 630~700)의 묘가 있었다.
백마사 앞으로 급히 돌아오니 염주, 동자승, 엿, 향 등을 파는 상가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에 재미있는 것은 모란꽃의 씨앗을 팔고 있는 점이다. 과연 모란의 도시 낙양성 답다. 그 씨앗과 모란꽃 그림 족자를 사 와 아내에게 보여주었다면, 아내는 아마도 경탄을 할 것이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知幾三事)> 이야기가 생각난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서 되를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여왕은 “이 꽃은 절대로 향기가 없을 것이다.” 이내 씨를 뜰에 심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때에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내가 얼쩡대는 사이에 벌써 다른 분들은 모두 버스에 타고 점심 먹을 식당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사유 총무님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가식당
버스가 달려 황하를 건너서 낙양성 교외의 농원식당 앞에 섰다. 벽돌로 쌓은 입구 문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쓴 ‘老龍門農家’라는 편액이 걸렸다. 대문에는 중국인에게 財神으로 모셔지는 관운장 그림이 붙었고, 기둥에는 붉은 종이에 복자를 붙이고, 그 아래에 ‘出門見喜萬事如意大吉大利’, ‘和顔連進富貴財’, ‘財源廣遵’이라고 春帖을 붙였다. 담장에는 옥수수를 주렁주렁 걸어두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방들이 연달아 붙어있는 기다란 건물들이 3열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들 사이로 난 길 입구에 노란 옥수수를 가득 걸어 놓았다. 길에는 붉은 종이로 기쁠 喜자를 오려서 주렁주렁 걸어 놓았다. 건물 외벽에는 쟁기, 자루달린 호미, 써레, 파종기가 걸려 있다.
중국의 농가를 콘셉으로 하는 농가 식당이다. 길가의 작은 방에 들어가니 가운데에 곡식가루가 있는 맷돌이 놓여 있고, 구석에 얼기미(어레미)가 걸려 있다. 한 아주머니가 망치로 마오쩌똥과 린뺘오가 연안 시절에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들은 액자를 못 박고 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맷돌 방앗간이다.
그 앞의 방에 들어가니 실을 잣는 물레, 실을 걸고 베를 짜는 베틀,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재봉틀이 놓여 있다. 벽에는 모택동과 임표가 천안문 성루에서 일천일백만문화대혁명대군 7차 검열 모습의 <<인민일보>> 낡은 사진이 걸려 있다. 산업화 이전의 중국의 현대사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실내 장식품이다. 그 옆에는 만두방(烙饃坊), 두부방(豆腐坊)이 있다.
길게 이어진 식당 건물의 벽에는 어린이들의 놀이를 표현한 중국화들이 걸려 있다. 고무줄놀이, 팽이치기, 나무에 올라 새둥지 털기, 숨바꼭질, 굴렁쇠 굴리기, 소쿠리 아래에 먹이 두고 참새 유인하여 멀리서 실을 당겨 새 잡기, 염소 풀 뜯기며 망태에 풀베어 담기, 시냇물 속에서 맨손으로 잉어 잡기, 구슬치기놀이, 새총으로 새 잡기, 그네타기, 마주 앉아 손잡기 하는 놀이, 염소를 데리고 바구니에 풀 뜯어 오는 소녀, 염소 풀 뜯어먹이며 턱을 괴고 풀밭에 엎드린 소년, 홍시를 따러 감나무에 오르는 소년들, 냇가 모래톱에서 고무신을 들고 장난치고 바지를 내리고 오줌 누는 소년들, 장대로 감 따는 소년과 소녀,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미는 엄마,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누나, 국수 그릇을 들고 마당에서 수탁들에게 젓가락으로 국수 토막을 던지는 아들의 모습이 그림의 소재들이다. 내가 어릴 때 하고 놀았던 놀이들이다. 지금은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이러한 놀이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풍경이라서 더욱 반가웠다.
내가 식사를 한 방의 벽에는 4군자 그림이 있는데, 순서가 우리나라의 ‘梅蘭菊竹’과 달리 ‘매란죽국’의 순서로 그림이 걸려 있다. 또 대자로 ‘數風流人物還看今朝’라고 쓰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나머지 시구들이 쓰여 있는 액자가 내 눈에 띄었다. 오래 전에 읽고 섬세한 감정서와 영웅호걸의 마음이 어울린 시풍과 국공내전과 국공합작 시절의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잘 표현한 이 시를 오래 전에 읽고 감동을 받은 기억이 난다.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천하를 얻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 숙소를 찾아온 시인 류아자(柳亞子)의 수첩에 적어준 1936년 2월의 시, 눈(雪)(당나라 중엽에 발생해 송나라 때 틀이 잡힌 詞이다. 사의 곡조, 詩牌는 심원춘沁園春)이다. <<新民晩報>>에 실렸다. 당시 항일 국공합작을 제의하였지만 국민당 장제스는 거부했다. 항일의 주도권을 공산당이 잡겠다는 의지와 천하를 리드하는 자신감을 보이는 스케일이 호방한 시이다.
雪 눈
北國風光, 이 나라 북녘 땅의 풍광,
千里氷封 천리에 얼음 덮이고
萬里雪飄 만리에 눈발 날린다
望長城內外 바라보니 어디나 장성 안팎은
惟餘莽莽 흰 눈에 덮힌 채로 가이 없구나.
大河上下 도도히 흐르는 황하 물결
頓失滔滔 어느 듯 기세 잃고 보이지 않네.
山舞銀蛇 눈 덮인 산맥은 은빛 용이 춤을 추고
原馳蠟象 설원은 흰 코끼리 뛰는 듯 하여
欲與天公試比高 저마다 하늘과 키를 겨루네.
須晴日 날이 활짝 개이면
看紅裝素裏 붉은 햇살 받고 선 소복 차림의
分外妖嬈 그 모습 유난히도 아리따우리.
江山如此多嬌 강산이 이토록 아름다워
引無數英雄競折腰 예부터 영웅호걸 머리 숙였네.
惜秦皇漢武 아쉽다 진시황과 한 무제
略輪文采 두 사람 글재주 너무 짧았고
唐宗宋祖 당태종 송태조는
稍遜風騷 시재(詩才) 무뎠네.
一代天驕 일세를 풍미한
成吉思汗 징기스칸은
只識彎弓射大雕 독수리 떨어뜨리는 활 재주 하나,
俱往矣 모두가 가버렸다.
數風流人物 정녕코 영웅호걸 찾으려거든
還看今朝 그래도 이 시대로 눈을 돌리라.
*原指高原, 卽秦晉高原. 고원은 진진 고원을 가리킨다.
-姜竣植, <<詩와 政治 -毛澤東 詩集>>(다다, 1989).
식당의 마당에는 또 잉어를 키우는 연못이 있고, 여름에 음식을 먹는 평상도 열 지어 있다. 식당을 자랑하는 글귀가 벽에 쓰여 있다.
一眼老井 하나의 옛 우물
兩駕馬車, 두 개의 마차
三家鋪子, 세 집의 점포
四季農具, 사계의 농기구
五穀糧倉, 오곡 양식 창고
六禽合鳴, 여섯 날짐승의 울음
七彩民氣, 일곱 빛깔 민중의 정신
八坊美食 여덟 집의 미식
붉은 천을 두른 가마도 있고, 건물 외벽에는 24절기를 넣은 24구의 민요가 붉은 글씨로 써 여 있다.
二十四節氣民歌 24절기 민요
立春陽氣轉 입춘에 양기가 돌아오고
雨水沿河邊 우수에 강변 따라 오고
驚蟄鳥鴉叫 경칩에 새, 갈가마귀 우짖고
春分地皮干 춘분에 땅을 갈고
淸明忙種豆 청명에 콩을 심고
穀雨種大田 곡우에 큰 밭에 파종하고
立夏鵝毛住 입하에 거위털이 남아있고
小滿雀來全 소만에 참새가 온전히 날아오고
芒種開了鏟 망종에 낫을 들고
夏至不掌棉 하지에 목화를 다루지 않고
小暑不算熱 소서에 더운지를 계산 않고
大暑三伏天 대서에 삼복더위 날씨이고
立秋忙打甸 입추에 보리를 타작하고
處暑動刀鐮 처서에 낫을 갈고
白露烟上架 백로에 연기가 서까래 위로 올라가고
秋分不生田 추분에 밭에 풀이 나지 않고
寒露不算冷 한로에 추운지를 계산하지 않고
霜降變了天 상강에 날이 서늘하고
立冬交十月 입동에 시월이 걸쳐 있고
小雪地封嚴 소설에 땅이 얼고
冬至不行船 동지에 배가 다니지 못하고
小寒近臘月 소한에 납월이 다가오고
大寒整一年 대한에 한 해를 마무리한다.
관림
노용문식당에서 돌아 나와 다시 낙양 시내로 들어갔다. 버스가 선 곳은 關林이다. 중국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관우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가니 광장이 있다. 너른 마당에는 노인들이 기다란 채찍을 휘두르며 팽이를 치고 있다. 팽이치기는 놀이와 운동을 결합한 기막힌 문화이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사람, 제기차기를 하는 여인, 광장에는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많이 보인다.
관림 대문 앞에는 초등학교 2~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가 왼손에 과자를 들고, 오른손에 붓을 잡고 물을 찍어 바닥에다 글씨를 쓴다. 글씨는 ‘一年好景隨春到’라고 쓴다. 춘련으로 ‘四季平安好運来’와 대구를 이룬다. 그런데 글씨가 대단히 달필이다. 내가 부러워할 정도로 잘 쓴 글씨이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이 아이의 글씨 쓰는 모습을 신기해하며 보고 있다. 중국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장면이다. 아기를 안고 나온 젊은 엄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관림 대문 맞은편의 광장 가에는 ‘千秋鑑’이라는 대자 편액이 걸린 2층의 벽돌 건물이 있다.
입구를 들어서자 여기도 춘절 분위기를 내느라 곳곳에 붉은 등을 걸어 놓았다. 곳곳에 편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다른 상록수 아래에 기원을 하는 종이쪽지를 빼곡하게 매달아 놓았다. 중국인들이 財神으로 섬기는 관우 사당과 무덤이 있는 관림다운 풍경이다. 중국인들은 공자를 문성, 관우를 무성으로 여긴다. 공자의 묘소를 공림, 관우의 묘소를 관림이라고 한다. 송대 이후로 민간신앙에서 관우를 關帝라고 부르며 재신 또는 武神으로 섬기고 불교에서도 호법신으로서 가람보살로 받아들여졌다.
계성전 앞의 붉은 대문 기둥에는 ‘先師聖矣文心憑地載, 漢水神哉武德與天齊’라는 대련이 붙어 있다. 啓聖殿 마당의 향로에 향연이 피어난다. 사당의 넓은 처마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關林’, ‘威鎭安南’, ‘帝德巍峨’, ‘國泰民安’, ‘氣壯嵩高’, ‘丹心貫日’, ‘威鎭華廈’, ‘千年浩氣’, ‘帝德齊天’, ‘權振赤符’, ‘剛健中正’, ‘春秋大義’, ‘義參天地’, ‘萬歲景仰’ 등의 글귀가 눈에 띈다. 편액 중에는 건륭제가 쓴 ‘聖靈於鑠’ 편액도 걸려있다. 사당 안에는 금색을 칠한 얼굴의 큰 관우상이 봉안되어 이ㅆ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홀을 쥐고, 곤룡포를 입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다. 그 앞에는 관성제군신위라는 위패가 있다.
계성전 뒤에는 재신전이 있다. 그 앞은 돌난간을 둘렀고, 머리 위에는 붉은 등을 달아서 마치 터널 속을 걷는 것 같다. 뜰에는 많은 크고 작은 비석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문 위에는 ‘光昭日月’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 안에는 긴 수염을 가진 관우가 앉아 있고 그 오른쪽엔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검은 얼굴의 무장이, 왼쪽에는 노란 주머니를 들고 있는 부드러운 얼굴의 문신이 서 있다. 그 바깥에는 좌우에 각각 동자가 서 있다. 우측 동자는 주판을, 좌측 동자는 저울추와 저울을 들고 있다. 붉은 창살문을 하고 있는 건물은 명대인 1592년에 건축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관왕묘가 서울, 수원, 안동, 남원에 세워졌다.
관왕묘[ 關王廟 ]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廟堂). 관성묘(關聖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진·정유의 왜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선조 31) 처음으로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선조실록≫ 31년 4월 기묘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접반관(接伴官) 이흘(李?)의 서계(書啓)에 남관왕묘의 건립에 따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진유격은 그가 거처하는 뒤뜰에 있는 낡은 집을 이용하여 관왕묘를 건립하고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시설이 완비되지는 못하였는데, 그 때 이흘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양노야(楊老爺:명나라의 장수 楊鎬)를 찾아서 관왕묘의 건립에 관한 것을 물어보니 찬성하면서 더 넓은 곳에 크게 건립할 뜻을 비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흘에게 조선의 도움을 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반드시 우리 군사를 쓰겠지만 목수·미장이 등은 조선의 공인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일만은 아니고 조선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니 국왕에게도 알려야 할 것이다.”
이렇듯 관왕묘의 건립은 명나라의 장수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왕실에서도 그 건축비용을 보조하였으며, 따로이 관왕묘의 건립을 맡아보는 도감관(都監官)을 정하여 돕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61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의 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신병(神兵)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 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였다고 보인다.
관왕묘가 건립되자 양호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의 생일이 5월 13일이므로 이날 제례를 올리자고 하였으며, 선조의 참례를 강요하였다. 결국은 선조가 직접 묘에 나가 분향하고 잇달아 삼작(三爵)을 올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의 대신들은 관왕묘의 제례를 비판하게 되었다. 중국의 일개 장수인 관우에게 조선의 국왕이 배례함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논쟁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남관왕묘가 건립된 이듬해인 1599년에 또 하나의 관왕묘인 동관왕묘를 세울 계획이 수립되었다. 건립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헌부의 장계에 의하면 “동관왕묘의 건립은 중국의 건의에 의한 부득이한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동관왕묘의 건립도 사실상 명나라의 종용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관왕묘 건립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뒤따랐다. ≪선조실록≫ 32년 4월 무인조에 관왕묘의 위치 선정에 관한 기사가 있다. 선조는 정원(政院)에 보낸 비밀전교에서 새로운 관왕묘의 위치에 대해서 “전일에는 흥인문 밖에 건립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남대문에 설치한다고 하니 무슨 까닭이냐, 전일의 계획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남대문에는 이미 관왕묘가 있으니 동대문에 설치하도록 명나라의 섭정국(葉政國)에게 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서울의 동쪽이 지리적으로 허(虛)하다는 도참사상에 의한 것이었다. 선조는 끝내 동대문 밖이 안 된다면, 차라리 훈련원에 건립하여 무사들이 관왕의 정신을 이어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 끝에 관왕묘는 동대문 밖에 건립하도록 하였다.
동관왕묘의 건립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서 백성과 군사를 부역시켜야 하는 문제였다. 동관왕묘는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마침내 1602년 봄에 준공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 이래로 관왕묘에 특히 관심을 보인 왕은 숙종이다. 숙종은 무안왕(武安王)의 충의는 진실로 가탄할 만하며 관왕묘를 지나면 감회가 일어난다고 하여, 관왕묘에 역림(歷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우의정과 좌의정에게 관왕묘 참례에 관한 절목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그때 배례와 수읍(手揖)의 의견이 나왔는데, 숙종은 수읍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 같은 관왕묘 참례에 관한 문제는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709년(숙종 35)에 왕은 사관에게 명하여 선조조에 관왕묘에서 행하던 행례의절(行禮儀節)을 실록에서 찾아내라고 하였다.
사관이 “선조 때에는 관왕묘에서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자, 숙종은 자신도 이에 따르겠노라고 하였다 한다. ≪숙종실록≫ 36년 3월 정묘조에 의하면, 숙종은 당시의 좌의정 서종태(徐宗泰)와 판부사(判府事) 이순명(李順命)에게 “선조는 배례하였는데 나도 배례를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서종태는 선조 당시에는 명나라의 장수들의 압력에 못이겨서 한 것인 만큼 이제는 읍례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 또한 관우는 일개 장수였으므로 국왕이 배례를 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관우의 호가 무안왕이며 축문에도 ‘감소고우무안왕(敢昭告于武安王)’이라고 하였으니 배례가 좋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 관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서울에 있는 남·동관왕묘 외에 지방에서는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을 전후하여 지방에서는 강진·안동·성주·남원 등 네 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지방의 관왕묘 건립시기에 관해서는 ≪연려실기술≫ 별집 권4와 ≪해동성적지 海東聖蹟志≫의 묘사조(廟祠條), ≪증보문헌비고≫,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다만, 건립연도는 문헌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건립자에 대해서는 일정하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라도의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명나라의 장수 진린(陳璘)이 건립하였으며, 1684년에 개수하면서 이순신(李舜臣)과 진인을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안동의 관왕묘는 명나라의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하였다. 묘 안에는 석상(石像)을 봉안하였으며, 처음에는 안동 성내에 있었으나 1606년 서악(西岳)의 동대(東臺)로 이안(移安)하였다.
성주의 관왕묘 또한 명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하였다.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성주성 동문 밖에 있다가 1727년(영조 3)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겼다.
남원의 관왕묘는 서문 밖에 있었다. 명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건립하였다. 1698년에 신상(神像)을 개건하였는데 모두 중국의 관왕묘를 모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장수인 총부중군(摠府中軍) 이신방(李新芳)·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 등을 배향하였다.
1701년에 숙종은 모든 지방의 관왕묘의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으며, 매년 경칩과 상강일에 향축하도록 하였다. 제수는 변두(?豆)이고 헌관(獻官)은 고을의 영장(營將) 또는 당상무수령(堂上武守令) 등이 하도록 하였다.
정조도 관왕묘에 관심을 기울여, 1786년에 친히 <관묘악장 關廟樂章>을 지어 처음으로 관왕묘의 행례(行禮)에 쓰게 하였다. 1832년에는 순조가 남관왕묘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고종 때에 와서 다시 서울에 북묘·서묘, 지방에는 전주·하동 등에 관왕묘를 건립하였
다. 이러한 사실은 고종 당시의 위태로운 정세에서 관왕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신을 일깨운 것으로 보인다.
1901년 조서에서 “관왕묘를 숭상한 것이 지금까지 3백여 년이다. 관왕의 충의는 천추에 길이 빛난다.”고 하고, 관왕의 호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고 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과 용산구 후암동에 동묘와 남묘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선조실록』, 『숙종실록』, 『증보문헌비고』,『연려실기술』,『해동성적지(海東聖蹟志)』,『서애문집(西崖文集)』,『조야회통(朝野會通)』
재신전 뒤에는 1592년에 중수한 娘娘전이 있다. 관우 부인 胡씨를 모시는 사당이다. 낭낭전 뒤에는 삼문의 석방이 있다. 석방의 중문에는 ‘漢壽亭候墓’라고 새겼고, 그 뒤의 석방에는 ‘中央宛在’, ‘英雄千古’라고 새겼다. 그 아래의 석단에는 금박지로 포장한 술병이 제물로 올려져 있다. 중국인들의 관우 신앙을 잘 보여준다. 그 뒤에 비석이 세워진 정자가 있고, 정자 뒤에 붙어서 관우의 묘가 있다. 봉분이 왕릉처럼 크고 호석을 둘렀다. 봉분 위에는 자라난 편백나무가 숲을 이룬다.
관림에서 돌아 나와 주차장으로 오니 세 아주머니와 한 노인, 4인이 짝이 되어 테이블에 둘러 앉아 마작놀이를 즐기고 있다. 마작이라는 말은 들어보아도 마작놀이를 하는 장면은 난생 처음 본다. 버스 창밖으로 군고구마 장수도 보인다.
낙양박물관
관림에서 낙양시내를 지나서 간 곳은 낙양박물관이다. 새로 지은 박물관이 매우 크다. 박물관 앞의 너른 마당에는 연을 날리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보인다. 박물관 현관에는 ‘洛陽與絲綢之路(뤄양과 비단길)’라고 하는 기획 전시 홍보물이 붙어 있다.
일층 첫 전시실에 들어가니 벽에는 河洛盆地의 유적지들을 지도로 전시하고 있다. 伊, 洛, 瀍, 澗이라는 황하의 지류가 하락분지에 흐른다.
언사에서 간하 양안까지 30킬로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 商都 西亳, 夏都 斟鄩, 漢魏洛陽城, 隋唐洛陽城, 東周王城 이라는 5대 도성 유적지가 분포하는데, ‘五都薈洛’이라고 한다. 邙山의 위, 伊河의 가에 역대 황제의 능원이 분포한다. 동주 왕릉, 동한, 조위, 서진, 북위의 황릉, 당의 恭陵이 있다.
하락문명이라고 하는 이 지역의 문명은 ‘하도낙서’에서부터 주공의 예악과 종법, 유학, 성리학, 도교, 불교, 祆敎(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의 종교문화, 장형이 발명한 혼천의, 지동의, 채륜이 발명한 제지술, 비단길의 출발지 이 모두가 하락문명의 성과들이다. 偃師縣 商왕조의 都城 유적 서남쪽의 하나라의 궁궐터인 얼리터우(二里頭) 궁성 유적, 수당대 낙양성 유적 서쪽의 周왕조의 도성 유적, 얼리터우 서북쪽 한위의 낙양성 유적이 누런 황토분지 사이로 흐르는 황하의 지류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지도가 벽에 걸려 있다.
전시실 입구에 코끼리뼈 화석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놓았다. 30여만 년 이전의 구석기 시대에 중국에 코끼리가 살았음을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커다란 상아, 잔석기들과 나무, 거북이, 공룡알 화석이 보인다.
신석기 문화 시대 유물로 갈돌, 돌도끼 등의 간석기가 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붉은 색 채도가 있다. 서기전 3,000년경의 신석기 시대 초기의 하남성 양사오(仰韶)문화의 홍도(紅陶) 문화 유물들이다. 붉은 색 토기에 흰색, 검은색으로 큼지막한 그림들이나 여러 가지 무늬들을 그려 놓았다.
이 중에 鸛魚石斧圖伊川缸이라는 이름의 홍도에 그려진 그림은 정말 놀랍다. 황새가 물고기를 물고 서 있고, 그 옆에는 자루가 달린 돌도끼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홍도 표면에 그려져 있다. 황새와 물고기는 당시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다고 하며, 돌도끼는 무기나 공구였다. 황새의 부드럽고 가벼운 흰 깃털은 백색으로 큼지막하고 간명하게 그려냈고, 물고기와 돌도끼는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색을 채워 넣었다. 후세 중국의 ‘전색(塡色)’ 기법의 원조를 보여준다. 이 홍도문화 시대는 삼황오제 시대로 표현된다.
그 다음에는 검은색 토기들이 있다. 두형기(豆形器), 회도화(灰陶盉), 도곡동관(陶曲胴罐), 도언(陶甗), 黑陶鏤空高柄豆 같은 토기들 사이에는 돌도끼, 陶拍, 陶器 그물추, 도기 가락바퀴, 石璧이 전시되어 있다. 기원전 3,000~2,500년의 신석기시대 후기의 흑도(黑陶) 문화이다.
1928년에 산동성 濟南市 龍山鎭에서 흑도가 처음 출토되어 룽산(龍山)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정착하였고 농업이 발달하고, 여러 가지 도구들이 제작되었다. 토기 제작에 물레가 보급되었다. 청동기문화를 잉태하고 중국 최초 왕조인 하왕조 탄생의 기초가 닦인 시기이다.
서기전 2205년에 제우(帝禹) 하후(夏后)씨가 황하의 물줄기를 다스리고 하(夏)나라를 건국하였다. 하대 유물로는 세발 달린 도역(陶鬲), 도정(陶鼎), 도언(陶甗), 도호(陶壺), 도대구준(陶大口墫), 옥월(玉鉞), 도작(陶爵), 도삼족반(陶三足盤), 도두(陶豆), 도반(陶盤), 시루, 백도작(白陶爵), 백도규(白陶鬹), 회도규(灰陶鬹), 양감녹송석패식(鑲嵌綠松石牌飾)이 있다.
이 중에서 녹송석패식은 청동틀 안에 녹송석을 붙이고 눈이 드러나는 짐승의 얼굴인데, 4천 년 전 하나라 시대의 공예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화려하고 진기한 유물이다. 이들 얼리터우(二里頭) 陶器에는 한자의 祖形이 되는 부호(원시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상대의 청동기들에는 정교한 문양들이 들어 있다. 하준(何尊), 천망궤(天亡簋), 리궤(利簋) 정에는 또한 명문들이 새겨져 있어서 중국문명의 원형을 웅변하고 있다. 청동솥에는 ‘子申父己’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궤는 오늘날 경기에서 주는 커다란 우승컵을 닮았다.
서주(西周) 시대의 청동기는 더욱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수면문동대구준(獸面紋銅大口尊)은 술병이고, 수면문동제량유(獸面紋銅提梁卣), “내백(內白)”제량동유(提梁銅卣)에는 주전자처럼 손잡이가 달려 있다. 짐승의 얼굴은 턱이 없는 도철(饕餮)이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구조인류학자 레비스토로스의 논문집에서 보았던 문양이다. 남태평양 마오리족이나 알래스카 인디언의 곰 얼굴 조각에서도 비슷한 모양의 분할 도상이 나타난다. 문화의 전파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정신 구조의 표현이다.
서주의 유물 중에는 옥종(玉琮)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옥으로 조각한 번데기가 보인다. 9개의 길쭉한 유두가 유곽 속에 4면에 있고 종뉴가 길게 나와 있는 타원형의 종도 있다. 서주시대 전차(戰車) 바퀴의 축, 차곡(車轂)이나 인형 장식들도 녹색 녹이 쓸어 있지만 옛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다. 그 옆에는 전투 중에 사용했을 동과(銅戈), 동모(銅矛), 도끼 같은 무기들이 보인다.
춘추시대의 어린환문동정(魚鱗環紋銅鼎), 제후동우(齊候銅盂), 갈색 유약이 묻은 항아리, 벽옥의 璧이 보인다. 그 중에는 ‘오왕부차(吳王夫差)’라고 하는 글자가 칼날에 새겨진 손잡이 달린 양날의 칼이 보인다. 녹색의 청동 녹이 짙게 쓸어 있지만 오왕 부차의 월에 대한 복수 의지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진·초의 쟁패가 끝나 갈 무렵, 장강 하류에서 오(吳)와 월(越)이 일어났다. 오는 주족(周族)의 일파로서 당지의 주민과 융합하였다. 오는 진이 초를 공격할 때 연합하여 여러 차례 초를 공격하였다. 오왕 합려(闔閭)는 초에서 망명해 온 오자서(伍子胥)와 손무(孫武)를 장군으로 삼아 초의 수도 영(郢, 호북 강릉)을 점령하였다. 초 소왕은 창황히 도망하였다가 진(秦)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다시 복국하였다.
그런데 초를 정벌한 오에 내분이 일어났다. 여기에 월이 오를 공격하여 오의 후방을 괴롭혔다. 월은 월족의 일파로서 진과 오가 연합하여 초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초와 연합하여 진과 오에 대응하였다. 따라서, 월은 초의 지원 아래 국력이 크게 진작되었다. 한편, 오왕 합려는 이러한 월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전사하고, 아들 부차(夫差)가 원수를 갚고자 와신(臥薪) 끝에 월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월을 속국으로 만든 뒤 계속 북상하여 패자 노릇을 하였다.
이 때, 월왕 구천(句踐)은 부인과 함께 오로 붙들려 가 부차의 수레를 끌고, 말을 기르며, 청소를 하는 등 각종 굴욕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복수와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일념에서 이러한 치욕을 참아 냈다. 3년 후 본국으로 돌아온 구천은 상담(嘗膽) 끝에 마침내 오를 멸망시키고 말았다(臥薪嘗膽). 그리고 부차와 마찬가지로 서주(徐州, 산동 등현)에서 각국 제후를 불러 모아 한때 패자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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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 시대 유물에는 뚜껑 있는 항아리 중에는 백색, 적색의 그림이 그려진 것도 있고, 토용은 경주의 귀족 무덤에서 나온 것과 닮은 것도 보인다.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와 곡식의 껍질이나 지푸라기를 골라내는 풍차의 모형을 빚은 도기도 있다. 蟠龍玉佩, 龍首玉帶鉤, 雕龍玉帶扣, 雙龍玉劍首 등, 귀족들이 사용한 백옥 장신구들도 있다. 도기 개, 말, 우차 등도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서진 시대의 유물에는 도루(陶樓), 도정(陶井), 도무용(陶武俑), 회갑사용(灰武甲士俑), 흰색 계란, 탄화미, 기룡마노벽(夔龍瑪瑙璧)이 보이고, 도기 벼루는 백제의 것과 닮았다. 금뉴(金鈕)는 드물게도 순금 제품이다.
인장도 보인다. “武猛校尉”는 낙양에서 발견된 것으로 서진시대의 중급 장교의 인장인데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다. 손잡이가 낙타 모양인 것은 비단길 입구의 양주(凉州) 지역에 정착한 흉노족 세력가에게 내려진 것인데, “진귀의호왕(晉歸義胡王)”이라고 새겼다. 고조선 멸망 이후 설치된 한의 군현에서 함흥 지역의 예맥족 군장에게 내린 “부조예군(夫租薉君)”이라고 새긴 인장과 손잡이까지 닮았다.
수막새 기와에는 귀문, 연화문이 보인다. 연화문 수막새 기와는 온화하고 고졸하여 백제의 것과 닮았다. 청동 등잔은 원숭이가 꿇어앉아 등잔을 들고 있는 것도 있고, 닭의 외발 위에 등잔이 올려져 있는 것도 있다. 또한 여러 가지의 짐승들이 붙어 있는 받침 위에 한 층에 4-5개의 등잔들이 나뭇가지들처럼 달린 3층의 등잔은 마치 샹들리에 갔다. 궁궐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전 주조하는 거푸집, 자(尺度)가 보인다.
북위시대의 채회의장도용군(彩繪儀仗陶俑群)은 맨 앞에 사람 얼굴에 사자와 닮은 몸통의 괴수가 서 있고 그 뒤로 마차의 앞뒤로 무사들, 말을 탄 호위병들이 열 지어 가는 모습이다. 무덤 귀족의 생전 행렬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도용들 중에는 쟁(箏) 연주자도 눈에 띈다.
당나라의 유물로는 당삼채 도자기가 단연 많다. 청유기마용(靑釉騎馬俑)은 쪽진 머리의 여인의 모습이다. 인면수신용, 회도벼루, 다연(茶碾)도 눈에 띈다. 다연은 백거이가 살던 집터에서 발굴된 것이다.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나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코가 솟은 서역상인이 비단을 실은 낙타를 모는 모습은 당나라가 얼마나 서역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성하였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쌍봉의 낙타 등에는 악귀를 물리치는 귀면이 있는 안장이 짐꾸러미 위에 덮여 있고, 물병도 달려 있다.
말을 훈련시키는 사람과 오른쪽 앞발을 든 말이 호흡을 맞추는 장면을 표현한 채회도훈마용여무마(彩繪陶訓馬俑與舞馬)는 관람자의 이목을 끌었다.
양귀비의 사촌오빠였던 楊國忠이 세금으로 진상한 은병(銀餠)과 은홀(銀笏)도 있다. 금제 머리장식과 팔찌, 은제 머리 꽂이 장식, 금도금 문고리와 자물쇠, 아직도 오색이 살아있고 두 마리 오리 새끼와 화병이 섬세하게 돋을 새김된 빗도 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부부가 두 아들에게 양국충의 유물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초등학교 1~2학년으로 되어 보이는 아들 아이 둘을 데리고 나온 중년의 부부 모습이 보기 좋아서 카메라에 담으니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아빠와 두 아들이 웃는 얼굴로 포즈를 취해준다. 사진을 찍는 짧은 시간 동안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아이들은 돌아서며 “아저씨 다시 만나요!”라고 하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중국 서민층 가정의 순박한 인정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치형의 단면에 감실을 파고 감실 속에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삼존상을 조각하고 감실의 윗부분 테두리에는 연꽃 위에 앉은 칠불을 조각하였다. 아치의 테두리에는 청신제자(淸信弟子) 골이랑(骨二娘)이 황제와 왕실과 육친(六親: 부, 모, 형, 제, 처, 자) 권속의 평안을 기원하며 신룡(神龍) 원년(705) 12월 23일에 <<반야심경>> 1권과 함께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 달린 청동 향로(柄香爐)도 보인다. 손잡이 끝에는 사자상이 붙어 있다. 이런 향로는 우리나라의 군위 인각사지(麟角寺址) 발굴 유물로도 나온 바 있고, 일본 나라 호류사(法隆寺) 박물관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인각사지 발굴 향로와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송대의 도자기실에는 흑자 발우, 백자 향로, 백자 정병, 백자 오리연꽃새김 베개, 백자 모란문 베개, 백유흑화압희문매병(白釉黑花鴨戱紋梅甁)이 있다. 삼채영희연화장방형침(三彩嬰戱蓮花長方形枕)은 녹색, 황색, 백색의 물감으로 연꽃을 갓난아이가 만지는 장면을 그려놓은 연두색 톤의 베게이다.
송나라 사대부는 다사다난한 현실에서 살면서 꿈속에서라도 근심 걱정 없는 아기가 되어 연꽃을 만지며 장난을 하며놀았던 것일까. 장기판도 보인다. 장군은 초, 한이 아니고 그냥 장군(將)이며, 포는 포(砲)라고 쓰여 있고 장기알은 흑백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두는 장기판과 기본적으로 같다. 청동 수저는 놋수저와 비슷하지만 숟가락의 혀가 길쭉한 것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것과 닮았다.
薔薇水賤 仙裳信體 장미 꽃 향수는 천하고, 선녀의 치마에 신실한 몸이네.
自生香淸 郞酒所雪 절로 맑은 향기 일고, 밝은 술을 마시는데 눈이 내리네.
兒鬢畔樣 風光色香 여린 꽃술 밭둑에 피어난 자태, 바람과 햇빛과 색과 향기.
合出冰肌 下韻高處 가지마다 얼음같은 피부이고, 높은 곳에 살며 나즈막이 시를 읊조린다.
却冠群芳 蕊房富有 향기는 꽃 중에 으뜸이고, 꽃술 씨방에 부가 있다.
辟寒金在 豈伯冰雪 추위를 물리치고 금이 있으니, 어찌 얼음 눈에 짝할까?
雪嵓老人 蟠梅 極相界 설암노인 반매 상계에 닿는다.
-박물관에 전시된 백자 베게에 들어있는 시이다.
더운 여름에 추운 날씨 속의 매화를 읊은 시인데, 해석이 제대로 되질 않음.
서화실에는 주로 명청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소나무, 매화, 귤, 국화, 말을 그린 족자들이 걸려 있다. 이백의 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가 쓰인 족자에는 봄밤에 친척들이 복사꽃 동산에서 촛불을 켜고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西風蟋蟀豆華籬”, “松陰滿院鶴相對 柳絮蓋溪魚正肥”, “乾坤所挺國之良榦, 風雨時節歲獲豊年”라는 글자를 쓴 서예 족자들도 보인다.
모란의 도시답게 바깥에서는 모란을 한 송이도 볼 수 없는 한겨울인데도 모란꽃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작가는 왕수(王綉)라고 하는 여류화가이다.
<양력 늦봄 4월에 모란꽃의 도시에서 모란꽃 향기에 취한다(暮春三月醉花城)>라는 제목으로 전시장 입구에 작가의 말이 쓰여 있다.
“아마도 나는 본래부터 낙양(河洛)의 여자 아이였다. 집에 갔다 오면 늘 북국의 풍토를 보고 돌아온다. 낙양은 문화가 두텁고 두텁게 쌓여 있으며, 또한 모란 재배에 가장 알맞고, 가장 아름다운 모란꽃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곳이다.
80년대 초반, 하늘이 내린 좋은 인연과 행운으로 왕성공원(王城公園)에 우리 집이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모란을 짝하여 놀았고, 모란은 내 마음의 친구가 되었다. 꽃봉우리가 피어나고부터 땅바닥에 모란꽃잎이 조락할 때까지 날이 맑으나, 비가 오나, 어둑하거나 간에 나는 모란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마다 나는 전적으로 모란과 함께, 바쁘게 지나가는 모란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생을 모시고 사는 것처럼 한다. 이렇게 모란과 모란꽃의 모습을 되풀이하여 감상하며 생명의 가치와 생존의 의미를 깨닫고 느낀다.
내가 모란꽃밭을 거닐며 모란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내 마음 속에 세상살이를 멀리 여읜 고요하고 평안함, 흡족함을 느낀다. 만개한 모란꽃을 얼굴을 마주하고 보노라면 내 마음에는 느낌과 깨달음, 부대낌이 없어지고 눈에도, 마음에도, 손에도, 모란이 녹아 들어와서 모란을 아끼는 마음으로 나는 가득 차게 된다. 비바람이 치고 나면 모란은 더욱 찬란하여 세계에 빛을 더한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푸르른 하늘처럼 가없이 넓어져서, 빛나는 심성(心性)으로 인생을 마주하기를 바란다.”
홍모란, 백모란, 황모란, 자모란, 녹모란, 수선화, 괴석 그림 외에도 청화백자모란병 도자기도 출품되어 있다. 작가는 제12회전국인민대표자대회대표, 하남성미술가협회고문, 낙양시문련부주석, 낙양박물관명예관장, 국가일급미술사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작품은 중국 국내는 물론이고 인도, 싱가폴, 프랑스, 일본 외에도 우리나라의 박물관에도 수집되어 있다.
전시실에서 다시 그 옆의 전시실로 들어갔다. 내 눈에 두 가지 유물이 들어온다. 대진경교경당(大秦景敎經幢)의 팔각형 돌기둥의 머리에 십자가가, 그 아래에는 경문과 경당기가 새겨져 있다. 고대 시리아에서 발생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당나라 때 장안, 낙양에 전파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금화 2개가 전시되어 있다.
첫 번째 금화는 당나라 때 유물인데 동로마제국의 것이다. 앞면에는 관을 쓰고 턱수염이 난 황제의 얼굴 좌우에 십자가가 있고, 왼쪽 테두리에는 “FOCAS"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날개를 가진 승리의 여신 니케가 새겨져 있다. 오른손에는 긴 자루의 무기를 들고 있고, 왼손에는 십자가 구체를 들고 있으며 왼쪽 테두리에는 “CTOPI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잔틴제국의 팍스(Fox) 황제 때(602~610) 주조한 것이다.
두 번째 금화는 비잔티움제국의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2세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북위 시대(386~534)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땀이 나도록 바쁜 걸음으로 1, 2층의 유물들을 주마간산식으로 보고 촬영하고서 1층으로 내려왔다. 박물관 입구에서 집에 있는 가족의 선물로 열두 띠 중에서 범, 개, 원숭이, 소가 들어 있는 타일을 선물로 샀다. 낙양박물관을 나오니 해는 서녘하늘에 저물고 있었다.
차가 멈춘 곳은 길가의 식당이었다. 낙양에서 두 번째 저녁밥을 먹었다. 식탁 옆의 벽에는 모란꽃 그림, “誠信贏天下(성실과 신의는 천하를 얻게한다.)”라고 쓴 서예 액자가 붙어 있다. 오늘이 안중기, 이필기 두 분 선생님의 결혼기념일이라고 하여 모두가 축하의 박수를 쳤다.
화산 가는 고속열차에서
저녁을 먹고 간 곳은 낙양용문역(洛陽龍門驛)이다. 짐을 검색 받고 기차를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은 이층대합실이다. 역이 넓고 새로 지었다.
기차를 타기 전에 하남성에서 우리를 안내해준 홍용철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저녁 7시 47분에 출발하여 정주(鄭州) 화산북역(華山北驛)으로 가는 기차(G663次)의 12호차 3디(D) 2등 좌석에 탔다. 새로 생긴 고속열차라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고속열차와 다를 바 없이 매우 깨끗하고 안락하다. 시속 293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내었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답사자료집을 훑어보며 잠시 동안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버스로 3~4시간 갈 거리를 약 1시간 만에 닿았다. 모처럼 안락한 시간이 허락되었다. 자료집에 실린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읽어보았다. 읽는 맛이 좋다.
화산북역에서 기차를 내려 역 광장을 지나서 버스가 서 있는 곳에 오니 밤 날씨가 제법 추웠다. 우리를 태워갈 버스에는 “공산당원시범차”, “과속, 정원초과, 음주, 피로 운전을 하지 않는다.”라는 팻말이 운전석 앞 유리와 차량의 앞면에 붙어 있다.
스님께 올린 편지
우리가 투숙한 호텔은 현대적 감각으로 디자인된 “華山富潤酒店”이다. “富潤屋, 德潤身”이라는 <<대학>>의 말에서 호텔 이름을 붙였다. 로비에서 쉬다가 열쇠를 들고 8310호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니 컴퓨터가 놓여 있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니 자목스님의 편지가 와 있다. 여행 오기 전에 있었던 전국교사불자연합회 경주 동국대 수련회에서 치유명상을 지도해주신 스님이 수련회를 되돌아보며 여유가 나서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1월 13일자 편지이다.
답신을 기다리는 스님께 답신을 보냈다. 치유명상법을 지도해 주신 스님께 모든 교사들이 고마워한다. 어제는 소림사, 백마사를 방문하였다. 백마사의 비구니 스님 도량 곁에 있는 석가불사리탑인 제운탑에 참배하였다. 모레는 신라의 많은 스님들이 공부한 종남산에 갈 것이며,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현수법장스님이 의상 스님에게 보낸 편지글, <<화엄경문답(추동기)>>을 생각하였다는 등의 내용으로 답장을 부쳤다. 한글 자판이 없어서 영문 편지를 억지로 작성하여 보냈다.
그런데,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내내 무릎이 몹시 차가웠다. 온풍기가 돌아가지만 방 전체가 냉방이다. 권 선생님이 커튼을 걷어보니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오늘도 침대에 누우니 기침이 났다. 겨우 기침을 가라앉히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