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여러 해 후 다시 만난 모교 스승님(2)
1967년 여름이 되면서 진해비료공장 건설이 끝나 턴-키(turn-key)
방식의 계약에 따라 성능보장 시험운전에 돌입하자 각 단위공장별로
설계상 문제점이 많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하면 설계된
대로 공장 성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공장
기계들을 멈추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내가 소속되었던 복합비료 공장의 설계와 성능에 너무나 많은
문제점이 들어나 하루에도 몇 번씩 가동을 멈추고 잘못된 부분을
뜯어 고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말썽 난 부분을 바로잡다 보면
작업복은 어느 새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곤 하였다.
8시간 근무를 마치고 나면 그야말로 녹초가 다 된 채 숙소로 돌아
오곤 했었다. 거기다 밤낮이 뒤바뀌는 교대근무 생활로 본래부터
약한 몸이 날이 갈수록 살이 빠지면서 더욱 쇠약해지던 때,
설상가상으로 첫사랑 그녀와의 인연이 어이없이 깨어졌던 것이다.
신체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현장 교대근무로 인한 스트레스도 이기기
어려울 때, 갑자기 닥쳐온 첫사랑의 파탄으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까지 받은 때문인지‘갑상선 기능항진증’과 ‘당뇨병’이 동시에 내
몸을 강타하였다.
건강상태가 현장 근무를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회사
간부들의 배려로 낮 근무만 하는 기술부 공정관리과로 자리를 옮겼다.
공장 의무실 의사의 특별 추천을 받아 통제부사령부 내 해군병원에서
1주일 동안 종합검진을 받은 후, 서울 본사의 주선으로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방사선 동위원소에 의한 갑상선 치료를 받는 것과 병행해서
인슐린 주사와 함께 식이요법으로 당뇨병 치료를 받았다.
입원기간을 포함해서 한 달 정도 요양과 치료를 위해 서울에 머물렀는데,
그 때 내가 머문 곳이 경동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던 친구 S의 집이었다.
당시 그는 군에서 제대한 후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체중도 5킬로 이상 늘어나자 공장으로 복귀하였다.
직장상사들과 동료들 모두가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놀란 얼굴로 나를 환영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뚜렷하게
떠오른다.
처음 입사해서 공장건설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해당 부서 소속의 기능직
사원들의 현장 기계에 대한 해설과 전체 공장의 가동원리를 교육시켰고,
그 후 기술부에 근무한 2년 동안 대졸 신입사원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담당하면서 나한테 교육을 받은 신입사원들과 그들로부터 내 이야기를
들은 공장 간부들로부터 사석에서 자주 들은 이야기가
“임일웅씨는 대학교수를 하면 학생들을 잘 가르칠 텐데, 공장에 잘 못
온 것 같아요.” 이었다.
그러한 평가가 지난 날의 꿈을 다시 일깨우는 촉매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계획으로 많은 공장이 신설되면서 엔지니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공과대학 졸업생들은 곧바로
취업하는 게 대세였던 시절이었다.
특히 대학원을 마친 서울공대 화공과 출신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미국유학 길에 올라 화학공장이나 대학에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었었다.
진해화학 회사 전체를 통 털어 이공학계 대학원 출신으로서는 내가
유일한 존재여서 회사 내에서 흥미로운 관심대상이 되었고, 처음 얼마
동안은 공대 출신 선배나 동료사원들, 심지어 미국 합작회사에서 파견된
엔지니어한테서 실력검정도 여러 차례 받았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수를 꿈꾸어 왔는데다가 건강문제까지 겹치게
되자 비료공장 근무 3년을 마친 1970년 4월, 드디어 공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대학에 발을 들여놓기로 결단을 내렸다.
진해에서 보낸 3년이란 기간은 내가 진해로 내려오기 직전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와 완전히 헤어지는 것이 싫어 그녀에게
자신 있게 약속했던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미 나를 완전히
떠나버렸지만, 그 약속은 나 자신에게도 다짐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내려가지만, 3년 동안 엔지니어로서
현장경력도 쌓고 돈도 좀 모은 후에는 서울로 돌아와서 반드시 내
꿈을 이룰 거에요."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아니면 공장의 현장근무에
시달리면서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진 내가 안쓰러웠는지, 서울본사
근무를 원하면 본인 희망대로 해주겠다는 기술이사와 공장장의 언질도
물리칠 만큼 대학교수를 향한 내 꿈과 열정은 확고했었다. 비록 과학과
기술 선진국인 미국유학의 꿈은 진작 접고 말았었지만...
대학원 지도교수님에게 사전에 의논을 드렸을 때, 서울의 명지대학에
마땅한 강사를 못 구해 강좌를 열지 못한 과목이 하나 있다는 말씀에 그
강의라도 맡을 수 있도록 부탁드리고 나서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피 끓는 젊음을 불태우던 진해를 떠나 서울로 거처를 완전히 옮긴 다음,
지도교수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을 때, 놀랍게도 고교 시절 화학을
가르치신 김진길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교수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명지대학에는 학과장인 김진길교수한테 이야기해 놓았으니까,
그 양반을 찾아 가면 임군한테 강의를 맡길 걸세. 그 양반이 자네한테는
서울대 화공과 대 선배시네.”
"네? 그 분은 제가 잘 아는 분인데요? 제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이십니다."
이렇게 그 선생님과의 인연이 경동을 졸업하고 11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시작 되었다. 사실은 몇 년 전 선생님께서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사무실로 한 차례 찾아가 인사를 드렸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나와의 인연이 이렇게 대학에서 새롭게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1학기가 한 달 이상 지나도록 강의를 개설하지 못했던 2학점짜리 과목인
‘반응공학’을 주야 합해서 1주일에 4시간씩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보따리 장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고달픈 대학 시간강사 생활이
내 앞에 펼쳐졌다.
진해화학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청량리 변두리에 싼 전세방을 얻어
거처는 마련했지만, 진해를 떠날 때 예측했던 대로 푼돈 밖에 안 되는
강사료가 수입의 전부인 아주 가난한 생활로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버티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강사 선임권을 갖고 있던 학과장이 고등학교 때 은사라는 사실 하나만
믿고 다음 학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1학기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좋다는 말씀에 이어 2학기부터는 3학점짜리 두 과목을
주야 합해서 1주일에 12시간씩 맡도록 해주셨다.
그 때는 은사님의 따뜻한 배려에 너무나 감격해서 눈시울을 붉혔었다.
그 해 12월 먼 친척의 중매로 현재의 아내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는데,
가족을 거느릴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 했던 그 당시의 나로서는 생활
자체가 발등의 불로 다가왔다. 그런데도 맞선을 본 첫날부터 시작해서
결혼한 얼마 후까지 내가 아내에게 가장 강조한 말이 늘 이런 식이었다.
“부모한테 받을 유산도 기대할 수 없고 현재는 빈털터리지만, 앞으로
가족을 절대로 배고프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나를 한 번
믿어 봐요.”
‘불원간 대학교수가 되겠지만, 만약 뜻대로 안 되더라도 내가 희망만
하면 화학공장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라면서 큰 소리를 쳤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황당한 자신감에 찬 헛소리였었다.
1971년 신학기를 한 달 쯤 앞둔 어느 날 김선생님께서 상의할 것이
있다고 나를 따로 부르셨다.
선생님께서 신학기부터 숭실대학 화공과로 자리를 옮겨 학과장 보직도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지대학에도 비밀리에 당분간 교수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근무할 테니까 혼자서만 그렇게 알고 숭실대학에서도
전공 강의를 몇 강좌 맡아줘야 되겠다는 말씀이셨다.
결혼까지 했는데 전임교수가 될 때까지는 강사료 수입이라도 늘려야
하겠기에 고맙다는 인사로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서소문 명지대학과 상도동 숭실대학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달픈 시간강사 생활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 보람을 갖고
고생도 달갑게 생각하면서 강의실 안팎에서 젊은 대학생들과의 접촉을
즐겼다.
기초실력이 부족한 두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온 정력을 쏟아 지도하면서
큰 보람을 느끼는 생활을 하던 1학기가 중반 쯤, 명지대학 화공과에서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 때 김진길 선생님께서는 명지대학을 완전히 정리하고 떠나신
후였는데, 학생들이 전 과목 수업을 거부하면서 명지대학 설립자인
학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농성사태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요구조건은 특정 강사의 퇴출과 새로운 교수의 영입이었다.
그 당시 화공과에는 순수 화학을 전공한 세 분의 전임교수가 기초 화학
과목들만 담당하고, 화공과 전공과목들은 전부 시내 각 대학 화공과의
원로급 교수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담당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당시 명지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 전이라 학장이 대학의 최고
책임자였었는데, 학장이 학생대표들과 면담하면서 학과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모두를 한 사람씩 점검하게 되었고, 학생들로부터 내 강의가
제일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설립자 겸 학장이신 Y박사님께서는
나를 별도로 부르셨다.
학장실에서 내 학력과 경력을 자세히 들으신 그분께서는 학생들이
거부하는 강사가 담당했던 과목의 강의도 내가 맡고, 당장 전임강사
발령을 낼 테니 수락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면서
두 가지 제안을 모두 완곡히 거절하였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란 옛 말처럼 자칫하면 내가 하루 속히 교수가
되고 싶은 욕심에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오해를 받기 쉬운 상황이니
시간이 충분히 흐른 후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전임강사 제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아무리 원해도 퇴출되는 강사가
맡았던 과목을 절대로 맡을 수 없다' 고 말씀드렸다.
뜻밖의 당돌한 거절에 학장과 배석했던 교무처장까지 모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셨다. 시간강사에게는 꿈속에서도 갈망하는 너무나 달콤한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니까 놀라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 때의 사건을 계기로 학장님께서는 나를 다른 대학에 뺏기기 전에
꼭 붙잡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노라고 훗날 이야기 하셨고, 결국
다음 해 신학기를 한 달 정도 앞두고 명지대학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음으로서 정식으로 ‘대학교수’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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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모님도 교수님도 안녕하시죠? 교수님이 걸어오신 발자취와 결단력이 돋보이는 자서전 잘읽었습니다 . 안 그래도 전공하신 과목이 궁금하였던 차에 잘알게 되었고 제차 교수의 꿈을 이루시는데 그렇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던 은사님의 은혜를 생각하게하고 이 아침에 인연이란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것은 다시 한번 떠올립니다 .
소설같은 교수님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젊을때부터 당뇨로 지금까지 고생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희 이웃에 있는 학생은 소아당뇨였는데 타인으로부터 장기를 기증받아 수술을해서 지금은 당뇨로 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하던데,
교수님도 지금이라도 수술이 된다면 앞으로 남은 삶을 찌르는 고통없이 사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제 부터인가 긴글은 좀체 잘 읽지 않는 저가 님의 자서전 끝까지 읽었습니다. 건강 문제를 제외하면 여렵고 고달픈 일들일랑 아예 거리가 먼듯한 교수님께도 그러한 시간들이 있으셨군요... 사모님과의 결혼을 성사 시키기위해 허풍(? 죄송)도 치실 줄 아셨다니...ㅎㅎㅎ
이해인 수녀님은 시에서 '내 지나온 날들을 빨래처럼 꼭 짜서 햇살에 널어두고 봅니다' 라고 읊었듯이 조용히 되돌아 본 내 지난 날의 한토막 이야기지요.그 때는 원망도, 미움도 그리고 괴로움도 많았었는데, 지금 회상해 보면 모든 것들이 부질 없었다고 조용히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좀 생겼나 봅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참 많지만 너무 조바심하거나 걱정하진 않기로 합니다' 라는 시 구절처럼 나도 한 번 그래 볼까요? 노후를 보다 여유롭고 즐겁게 보낼 수 있게...
와!! 멋져요, 당당하게 그리고 타당성있게 거절하는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