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수용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 온지 40 - 80년 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들어온 듯 하며 그 경로가 공식적이지 못한 터라 은밀하게 포교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향의 전래를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하였던 것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런 말을 끝으로 처형되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피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 이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 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용 과정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 되는게 아니라 고구려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되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불교 수용 공인을 둘러 싸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 관계를 달리 하여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대체로 민주적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졌다는데 있다.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신라의 불교-전래와 공인
1. 불교의 전래
신라불교 전래에 관한 원 사료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이다. 눌지왕(417∼58년) 때 고구려로부터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 모례(毛禮)의 집에 와 있었는데, 양(梁)나라(502∼57년) 사신이 가져온 향(香)의 용도를 왕실에서 모르자 이를 일러주었으며 왕녀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4세기 말 이래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긴밀히 유지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눌지왕대에 처음 불교가 전해졌다는 기사는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위 기사는 고구려와의 접경을 통하여 민간에 전해진 것이 잘 남아 있는 경우일 뿐이며, 유물·유적을 통해 보면 고구려와 통하는 또 다른 경로인 영주(榮州)·안동(安東) 쪽으로도 불교는 전해졌다.
그리고 신라왕실이 불교를 접한 시기가 고구려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았음은 5세기 초엽의 신라왕릉 유물에서 연꽃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왕족이 직접 가져왔거나 신라왕실에 보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묵호자를 통하여 신라왕실이 처음 불교에 접했다는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제동맹(羅濟同盟)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외교나 군사면에서 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밀접하였다. 신라가 선진(先進) 불교문화를 어느 한 경로로만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 사실(史實)과 부합되지 않는 발상이다. 지방에 숨어 있던 묵호자가 왕실에까지 불교를 포교하였다거나, 이때 시대상으로도 맞지 않는 양나라 사신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계통의 불교가 전래된 사실이 하나로 중첩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라는 521년(법흥왕 8)에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서 양나라에 처음 조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볼 때, 신라는 백제를 통해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며, 그것은 외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북조불교의 성격으로 추정되는 초전불교(初傳佛敎)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사적에 대한 아도비(阿道碑 혹은 我道碑)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263년(미추왕 2)에 아도가 고구려에서 왔는데, 그는 조위인(曺魏人) 아굴마(我掘摩)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연은 아도를 묵호자와 동일인으로 보고,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이 주장은 고구려에 온 아도가 위(魏)나라에서 왔다는 가정 위에서 성립되는 것인데, 일연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해동고승전』의 저자 각훈(覺訓)의 설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각훈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아도비로서, 각훈은 고구려·신라의 두 아도를 동일인으로 본 것이다. 아도비는 시대 착오가 심하며 설화의 인위적 구성이 짙은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아도는 진(晋)나라에서 왔다는 고려본기(高麗本記)의 기사가 있으므로,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두 나라의 전도승 아도를 동일시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생존연대로 보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말년 무렵 신라에 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신라 초전승이 아도라고 하는 사료는 아도비 밖에 없는데, 고기(古記)에 의하면 아도는 정방(正方)과 멸구비(滅垢批) 다음에 세 번 째로 왔으며, 「고득상시사」(高得相詩史)에는 아도가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하고 다시 온 승려였다고 하였다. 아도는 신라 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이 쓰였으므로, 아도를 반드시 초전승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소지왕대(479∼500년)에 모례의 집에는 몇 명의 승려가 신도들을 상대로 경전을 강의하였는데, 이러한 교세(敎勢)는 왕경(王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에는 내불당(內佛堂)이 있고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이 『삼국유사』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보인다. 이 사건은 불교를 비방하는 세력의 모함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들이 처형을 받은 사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왕실에서 불교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는 종래의 주장과 위배된다. 이것은 국가적인 불교수용에 대해 정치적인 선입견이 일률적으로 통용될 수 없음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법흥왕 이전의 불교실태는 불교전래 사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백에 가까운 듯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순흥(順興) 어숙묘(於宿墓) 고분벽화에는 불교적 소재가 많은데, 피장자(被葬者)의 활동연대는 불교공인의 해(527년) 전후가 된다. 이것은 법흥왕 자신이 불교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신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에도 불교가 공공연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볼 때 막연히 사용되는 ‘공인’(公認)의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2. 불교공인의 실상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527년(법흥왕 14, 丁未年)이라 하지만, 이해에 이차돈은 처형당하고 흥륜사(興輪寺) 창건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법흥왕 정미년은 공인의 해가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받은 해이며, 실질적 불교공인은 법흥왕 22년(乙卯年) 즉 흥륜사 공사가 재개되던 해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차돈에 얽힌 이야기는 그것이 비록 종교사화(宗敎史話)라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모순점이 발견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흥륜사는 을묘년에 공사를 재개하여 544년(진흥왕 5)에 초창(初創)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둘째, 이차돈 설화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정신을 강조한 나머지 법흥왕의 신행(信行), 즉 잠시 정사(政事)를 멈추고 삼보(佛·法·僧)의 노예가 되어 입사수도(入寺修道)한 사신(捨身)의 행적이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왕사신(帝王捨身)의 예는 진흥왕 말년의 행적에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셋째, 법흥왕이 사신한 장소는 을묘전 이전부터 있었던 흥륜사이며 이 때문에 흥륜사는 대왕사(大王寺)라고도 불렸다.
법흥왕의 사신은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고, 이에 귀족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법흥왕이 주재(主宰)하였지만 그도 귀족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이차돈의 순교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차돈의 죄목은 흥륜사 창건 명령을 전한 것이므로, 법흥왕의 사신에 대한 비난은 왕의 신변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왕의 사신을 도왔던 이차돈이 처형되고 왕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즈음은 아직 왕호(王號)를 매금(寐錦)이라 칭하던 시절로서, 왕이 명실공히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현재의 사료상으로는 대왕(大王)을 칭하기 시작했던 갑인년(甲寅年, 534년) 이후가 된다.
왕 자신의 사신은 국가의 불교정책과 직결된다. 순교사건으로 말미암아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던 법흥왕의 의욕은 일단 꺾였지만, 왕권의 신장에 따라 그것은 부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간과할 때 을묘년의 흥륜사 중창(重創)을 실질적 공인의 연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미년은 왕이 불교에 대한 태도를 천명한 해이며, 이해에 조정에서 불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정미년은 신라불교사에서 하나의 기원이 되는 해이며, 『삼국사기』에서 이해에 “처음 불법을 행했다”(肇行佛法)고 한 기사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3. 진흥왕대의 불교
진흥왕(540∼76년)의 불교정책은 정치와 불교 양면을 관장하여 집권적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남조, 특히 양무제(梁武帝)의 정책을 본받은 바가 많다. 그는 재위중 몇 번의 사신을 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진흥왕은 영토확장을 감행하여 새로 정복한 지역을 순수(巡狩)할 때 승려를 대동하였는데, ‘사문도인 법장 혜인’(沙門道人法藏慧忍)이 진흥왕순수비문에 보인다. 수행(隨行)한 신하들 가운데 이들 승려의 이름이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할 때에는 새로 정복한 곳의 지역민으로부터 충성을 약속 받고 왕과 신하는 이들을 보살필 것을 맹세하는데, 여기에 승려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회맹(會盟)의 정신이 불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제 불교는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 사회의 새로운 지도이념이 되어 가는 것이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인 황룡사를 창건하여 전국의 불교계를 통제하였고, 국가적인 불교의식이 이곳에서 베풀어짐으로써 황룡사는 신라사회의 정신적 중추가 되었다.
진흥왕은 전몰사졸(戰沒士卒)을 위하여 팔관회를 베풀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팔관회가 호국적 성격을 띠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가신도(在家信徒)가 경전에 입각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교수행의 하나로서 남조에서 유행·발전한 것이었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유학갔던 승려가 속속 돌아왔다. 이들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져오게 됨으로써 진신(眞身)을 모시게 되어 신앙면에서 차원을 한 단계 높이게 되었고, 함께 가지고 온 경전은 교학연구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진(陳)나라에서 명관(明觀)을 시켜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오게 됨으로써(565년) 신라는 한역경전(漢譯經典)의 대다수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수용의 단계를 지나 독자적 발전을 이루어나갔고 또한 자국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이 시기의 승려 중에는 학덕면에서 중국의 고승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그들 중 『고승전』에 실린 이가 몇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