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는
요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수행이라고 하면,
염불하고, 좌선하고,
독경하며,
다라니를 외고,
사경하며,
절 하는 것 등 만을
수행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실천하라고
하셨을 뿐이다.
중도가 바탕이 된
수행법이라면
그것이 그대로
중도의 실천이 되지만,
중도의 바탕 없이
맹목적으로
염불하고 절한다면
그 수행은
바른 수행이라고
하기 어렵다.
절을 3,000번 하고,
10시간씩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좌선을 해야
그것만이 수행이 아니라,
세상을 중도적으로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수행이다.
과도하게
어떤 한 가지 가치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특정한 목표에
집착해 있다거나,
한 사람을
유난히 애착하거나
미워한다거나,
특정한 정치적 성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거나,
내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다른 종교는
다 틀린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심지어 수행과
깨달음에도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다면
그 또한 중도에서 어긋난다.
무엇이든
‘이것만이 절대’라거나,
‘이것만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
것은 중도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일지라도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한다면 그것은
중도적 안목이 아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
결과에 집착함 없이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중도다.
『금강경』에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한 것처럼,
불교의
중도적 가르침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인
법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집착해서는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중도는
허망한 비교 분별심으로
대상을 내 식대로
걸러서 보고,
비교해서 보는
방식이 아니다.
분별심으로 보면
대상이 좋거나 나쁘고,
옳거나 그르고,
크거나 작고,
잘났거나 못났지만,
중도로 보면 그
런 분별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분별심(중생심)으로 보면
좋거나 나쁜 분별이 있고,
연이어 좋은 것은
집착하며 취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며 버리려는
취사간택심이 생겨난다.
그러나 중도로 보면
분별심이 없고,
취사간택심이 없다.
중도로 보면,
좋은 것이라도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게 되고,
싫은 것이라도 과도하게
미워하거나
거부하지 않게 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물론 그러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할 일은 똑같이 다 한다.
옳은 것을
선택하기도 하고,
열심히 삶을 살기도 한다.
다만
하되 과도한 집착과
거부 없이
그저 인연 따라
가볍게 살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님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것을
‘하되 함이 없이 한다’고
표현한다.
무위행(無爲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도적인 삶이다.
<법상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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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17:15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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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력하다보면 저도 중도의삶을 살수있겠지요
노력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모든것은 실체가 아님을, 참나를 깨달을 수 밖에,~~
좋은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