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8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자
호 5:1~7
<하나님이 주신 기업>
호세아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아내로 비유하여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데,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풍조에 휩쓸리는 일,
이것에 대하여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다.”라고 묘사합니다.
(7절)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뒷부분,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여기서 ‘새 달’은 심판이 시작되는 때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기업’은 하나님이 주신 분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때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12지파에게 분배했습니다.
이때 제비뽑기로 했습니다.
그때 받은 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깃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나, 반드시 기업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분깃을 받았습니까?
받은 기업을 다시 뺏기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시기를 당부합니다.
7절에서 경고합니다.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뺏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여호와께 정조를 지킵시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자!”입니다.
<호세아의 기업>
호세아서는 문학성이 빼어난 선지서입니다.
호세아서를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설정’부터가 다분히 문학적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라는 한 인물을 선택합니다.
“너는 내가 지명하는 여인과 결혼해라!”
“그녀가 누구인지요?”
“고멜이다!”
“아니, 하나님, 천하의 바람둥이 고멜과 결혼하라고요?”
“그렇다!”
호세아는 음녀 ‘고멜’과 결혼합니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기업이다!” 할렐루야~
우리 믿는 자에게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나의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찬송가 한 장 부르고 갑시다! 435장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1)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2)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3) 어둔 골짝 지나가며 험한 바다 건너서, 천국문에 이르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후렴)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고 생각되는 ‘기업’이 있다면 그 기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전주대학교를 사랑하는 기업을 받았습니다.
전주대학교가 하나님의 학교로 바로 서도록 돕는 일이 저의 새로운 기업입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기업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예수 내 구주”입니다. 열 번 합시다!
예수님이 나의 기업이고,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사명이 나의 기업입니다. 할렐루야~
호세아에게 기업은 음녀 고멜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본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계속 들어봅시다!
<호세아서의 문학성>
(1절)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세 번 똑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의 입을 빌어서 선포하시는데요, 반복법을 씁니다.
반복을 하는데, 단어는 다 다릅니다.
① 제사장들아, ② 이스라엘 족속들아, ③ 왕족들아
모두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분열왕국 시대 북조 이스라엘을 일컫습니다.
① 들으라, ② 깨달으라, ③ 귀를 기울이라
역시 같은 말입니다. 의미는 같은데 표현은 셋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아, 제발 내 말 좀 들으라” 이 말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 성경의 문학구조에서 가장 큰 특징은 ‘반복법’입니다.
①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②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미스바, 다볼, 이스라엘에 있는 산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 산, 다볼 산에 가서 우상제단을 차렸습니다.
이곳 말고도 우상숭배 장소가 많지만, 여기서는 두 곳을 거론합니다.
“거기서 너희가 하나님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배신했다.” 이 말입니다.
<에브라임에 대하여>
(3절)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여기서도 반복법이 계속됩니다.
①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②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같은 의미입니다. 에브라임, 이스라엘, 같은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대명사로서 ‘에브라임’이 쓰였습니다.
에브라임이 누굽니까? ~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입니다.
요셉은 므낫세, 에브라임 형제를 두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식솔을 거느리고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어서 귀빈대접을 받고 갔습니다.
그때 요셉이 두 아들을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야곱 앞으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가서 세웠습니다.
할아버지 야곱 오른손 쪽에 므낫세, 왼손 쪽에 에브라임을 세우고 축복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이때 야곱이 어떻게하지요?
양손을 엇갈리게 합니다.
오른손을 동생 에브라임 머리에, 왼손을 형 므낫세 머리에 올립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아버지, 이쪽이 형이고 이쪽이 아우입니다.” 야곱이 말하지요?
“안다, 나도 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창 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디 12지파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가 하나님 직속으로 선발되면서 11지파가 되었는데,
요셉의 두 아들이 각기 한 지파 몫을 감당하여 레위지파 빼고 다시 12지파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축복대로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지파가 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크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에브라임 지파에서 ‘여로보암’이 나옵니다. 문제적 인물, 여로보암!
그가 나라를 두 쪽으로 쪼갭니다. 여로보암이 북조 이스라엘의 태조가 됩니다.
나라 이름 ‘이스라엘’을 자기가 차지합니다. 남쪽에 남은 나라는 ‘유다’가 됩니다.
에브라임은 분열 왕국 시대 북조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본문 호세아 5장 3절 뒷부분을 봅니다.
①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②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이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 반복법으로 통절하게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유다까지>
북조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정조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남조 유다는 어땠을까요?
(5절)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북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정조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남조 유다, 이스라엘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도 덩달아 실족합니다.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이웃이 타락하면, 우리는 긴장해야 합니다.
타락한 이웃을 보고, 비웃으면서, ‘나는 아니야’ 할 것이 아닙니다.
이웃이 타락하면 나까지 오염되기 십상입니다.
마치 불길이 번지면 우리집에까지 옮겨붙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타락한 이웃을 보면서, 우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북조 이스라엘이 타락하니, 남조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맺음>
요즘, 신앙 지키기에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한국의 개신교 신뢰도가 급전직하했습니다.
“기독교인을 신뢰합니까?”라고 국민에게 물었더니, 18%만 그렇다고 대답했답니다.
다섯 사람 중 한 명도 채 안 됩니다. 심각합니다.
☞ 이 시대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온 힘과 마음을 다 해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선포할 때의 이스라엘, 그 시대보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
어떻습니까? 더 타락했습니까, 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저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온고을교회 수요예배에서 호세아를 본문으로 설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를 지금 우리를 향한 선포로 받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호세아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끝으로 성경의 문학적 특성으로 ‘반복법’이 쓰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의미의 말씀을 문학적 특성 중 반복법을 사용하십니다.
☞ 목사의 설교도 결국은 같은 주제를 가지고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어려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이 주제로 설교합니다.
결론은 변함없이 “예수 내 구주”입니다.
오죽하면 100번씩 반복하도록 했겠습니까?
자칫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하면 ‘잔소리’가 됩니다.
“공부해라” 이 말을 반복하면 공부하려다가도 책을 덮어버립니다.
우리가 잔소리를 하되, 성경처럼 다양한 어휘를 구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반복법, 우리도 본받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